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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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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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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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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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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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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허성운 칼럼] 상해와 연변
    ● 허성운 영어사전에는 중국항구도시 상해(上海) 지명을 어원으로 유래한 단어가 새겨있다. 영어에서 shanghai는 선원으로 만들기 위해 마약 또는 술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배에 끌어들이다 유괴하다 어떤 일을 속여서 하게 하다 강제로 시키다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19세기 후반기에 외국인들이 행한 납치의 일종이다. 당시 중국 많은 연해 항구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개방하게 된다. 이런 개항항구에서는 화물선의 선원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남자들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배에 태워 출항시켜 버렸던 것이다. 배가 출항하고 나면 배에서 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인 선원들은 망망한 바다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차츰 동남아지역과 조선 일본 등지로 탈출하여 정착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차이나타운을 이루게 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 근대화의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산동반도 수많은 이재민들이 바다를 건너 만주와 해외에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 연해주에 까지 진출하여 울라지보스또크 등지에서 장사를 벌인다. 그러다가 볼쉐비키혁명 전후로 러시아 백계 귀족들과 부르죠아들이 밀려나게 되자 훈춘 등지로 들어와 가격이 폭락한 루불로 바깥세상에 눈이 어두운 토호들에게 넘겨 금을 사들이고 토지를 매각한다. 당시 훈춘 국자개 등 시가지 많은 상품 점포 명칭들에는 이들 산동전통문화 냄새가 짙게 풍겨났다. 지난세기 80년대와 90년대에 개혁개방 붐을 타고 연변사람들은 샤하이(下海)하게 된다. 드넓게 열린 세계와 만나기 위해 원양화물선에 오른 젊은이들은 목숨 걸고 바다에 나가 달러를 벌어왔고 문화대혁명의 암흑기를 거쳐 나온 사람들은 빈곤 탈출을 꿈꾸며 로무송출 해외친척방문 국제결혼 등 험난한 암초와 거센 풍랑이 이는 인생항로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외국나들이 비자 문이 열리게 되자 기업부진과 구조조정으로 샤깡(下崗)하게 된 도시 중년 세대주들 거기에 농촌 농민들도 가세하여 분분히 밭을 양도하고 집을 팔아버리고 외국으로 떠나는 질풍노도에 휘말러 들어가 험한 가시밭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개혁개방 30년이라는 세월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자그마한 연길 공항은 끊임없이 확장되어가고 중국 남방항공 대한한공 아세아나 항공이 쉼 없이 오가며 하늘 길을 열고 화려하게 단장한 연길 도시모습과 정통의 맛을 쏟아내는 음식가게들은 연변민속풍경을 구경하러 고속철을 타고 오는 유람객들을 반긴다. 하지만 이러한 밝은 빛 뒤 면에는 취업사기 덫에 걸려 재산을 날리거나 빚더미에 앉아 가정파탄 감옥행 등 참혹한 비극을 낳은 어두운 그림자가 감추어져 있다. 실로 엄청난 숫자의 중국조선족들이 국내외사기군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끔직한 재앙을 겪어야만 했었다. 지금의 연변은 한세대의 뼈아픈 교훈과 슬픈 사연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20년 30년 넘도록 타향생활을 하고 있는 50대 60대의 수많은 조선족 중년세대들이 건설현장 인부, 음식점 도우미, 가사 도우미로 온갖 설움을 견뎌내며 악착같이 일해 차곡차곡 돈을 모아 이국땅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다.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온 옛 선인들에게 재산이라고는 괴나리봇짐뿐이었던 과거, 해방이 되어도 땅과 소 그리고 곡물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집체화시기 단순노동에 매달려 보수를 받아 왔던 사람들은 올바른 자본투자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사회 아픈 문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80년대90년대 한국 젊은이들의 거리는 오늘날에 와서 조선족 밀접지역으로 바뀌고 연길 냉면 화룡 온면 훈춘 꼬치 간판들이 즐비하게 서고 조선족 특유의 억양이 물씬 풍겨 나오지만 자아동질성을 잃어가며 경제문화공동체 의식은 희미해진다. 서로 다른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얽히고설키며 때로 원치 않는 인생길에 들어선다. 오늘날 상해는 중국 개혁개방의 아이콘으로 중국 경제중심지로 부상했다. 그 옛날 수천수만 쿠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딛고 일어선 동방명주를 비롯한 초고층 빌딩은 치욕스런 과거사를 떨쳐내고 있다. 중국 조선 러시아 황금삼각 지대에 자리 잡은 연변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담겨있는 곳이다. 20세기 초 중국전통 점포가 즐비하게 늘어선 속을 비집고 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이 들어섰다. 홀몸으로 연변을 들어왔던 한족들과 달리 온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선 조선인들은 보따리 장사로부터 시작하여 엿방 두부집 국수집을 차려가면서 차츰 연길서시장같은 건물을 일떠세웠다. 80년대 90년대에 불어 닥친 거센 회오리바람에 연변조선족공동체 흔들림으로 보이스피싱 토막살인 연변거지와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중국조선족 이미지에 따라 붙었다. 오늘날 시대는 이미 변화의 바람을 타고오고 있으며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미래 연변 조선족 이미지에 어떤 수식어가 붙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핵심변수는 우리세대의 몫에 달려있으며 우리세대가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할 무거운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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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9
  • [허성운 칼럼] 호천개와 국자개
    돌문을 열고 들어가면 살구꽃 잎이 보슬비처럼 흩날리는 살구평 마을이 보인다. 그 건너편에 그 옛날 화전 불길처럼 천지꽃이 붉게 피어나는 산 언저리에 아스라하게 떠오르는 추억같이 옛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동네가 자리하여 있었다. 멀리 상소 늪데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 끼고 마을이 앉았다고 하여 늪 호자 냇물 천자를 붙여 호천개(湖川街)라고 불리어 졌다고 전해 내려온다. 19세기 80년대부터 조선과 접경지에 위치한 이곳에 청은 선후하여 초간국 무간국을 설치하면서 이주한 조선인 수가 배로 늘어난다. 관에서 발급되는 땅문서는 호천개에만 구할 수가 있었던 금계랍(金鷄蠟) 명약만큼 귀하였다. 커다란 봇짐을 지고 장터를 오가며 펼쳤던 베천지락은 꼬리를 길게 무는 행렬에 묻히고 쾌관(식당)의 시라지 장국 그릇엔 고단한 삶의 거친 숨소리가 땀과 눈물로 얼룩지고 섞여 시끌벅적한 역사를 만들어 갔다. 허나 사람이 사는 집이 세월이 지나면 무너지고 자취를 감추듯 오랜 시간의 퇴적은 땅과 하늘을 바꾸어 놓았다. 광서 25년(1899년) 훈춘부도통아문에서는 공문을 보내 호천개에 있는 장터를 국자개(局子街)로 이전하여 옮긴다. 그 후 20세기 20년대에 철길이 부설되고 거살이역(간이역)이 생기면서 회경개(怀庆街)란 이름을 바꾸면서 호천개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국자개는 광서년간에 남강초간국을 설치하면서 이름이 붙여진다. 여기에서 국자개는 관청 사무를 보는 곳을 말하는데 최초에는 토지문서를 취급했던 관가가 자리한 장소를 뜻하였다. 오늘날에 와서 국자개를 국자가 혹은 국자거리라고 부르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거리에 초점을 두지만 사실 국자개는 옛 관가가 있었던 곳과 그 둘레를 뜻한다. 한자 街의 표준음은 jie로 발음되나 중국 허다한 방언에서는gai 로 읽는다. 특히 중국 동북지방에서 上街는 shang gai로 말하는데 여기에서 길에 나선다는 뜻보다 장터 백화점이나 상점을 구경하고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는 의미가 담겨있다. 함경도 방언에는 구렁깨(구렁물 자리한 곳) 사무깨 (샘물 나는 곳)절당깨 (절이 있는 곳) 땅낭껄(당나무가 있는 곳 ) 이라는 사투리가 있는데 여기에서 깨 혹은 껄은 거리라는 의미보다 한 지점의 둘레를 아우르는 장소의 의미에 그 초점이 맞추어 지고 있다. 국자개는 최초에 부르하퉁하와 연집강 합수목에 자리한 작은 고장이었지만 호천개 장터가 옮겨오면서 갖가지 상품과 농산품이 집중되고 장 보러 오는 사람들로 차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천개와 국자개 지명은 호적 토지문서 장터로 써진 땅이름만이 아니다. 1880-90년대 폭력이 난무하는 혹독한 세월 속에 힘없이 사는 백성들은 토지문서를 가진 땅임자의 지울군(노비)으로 지팡살이군으로 살다가 빚으로 처자를 팔아가며 혈혈단신 떠돌다 황야에 주검으로 내몰리는 한 많은 삶이 호천개 국자개 땅 곳곳에 묻혀있다. 재난과 가난이 먹장구름처럼 드리워 캄캄했던 밤길에 가진 것 하나 없이 빈주먹으로 꿈 하나를 보따리에 넣고 별빛처럼 깜빡이는 삶의 섬광(閃光)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연변 땅으로 퍼져 들어와 피와 땀과 눈물로 투박한 함경도 사람들의 그 특유의 끈질긴 노력으로 메마른 땅을 기름진 옥토로 가꾸어왔다. 오늘날 다시 되돌아보면 그때 선인들이 진창 같은 과거를 딛고 최악의 실패를 박차고 다시 일어섰던 기점이 바로 호천개와 국자개 땅이름이 불리어졌던 그 암흑기다. 호천개와 국자개 땅 이름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더는 이방인이 만든 낮선 외래어가 아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미래로 안고 가야 할 하나의 귀중한 지명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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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4
  • [허성운 칼럼] 역섬과 간도
    연변의 오랜 마을들에는 역섬집이란 택호가 이례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역섬집 택호의 자취를 따라 추적해 보면 지금의 개산툰 지역으로 좁혀진다. 함경도 방언에는 역새리라는 사투리가 있는데 강기슭이나 우물옆자리와 같이 가장자리 변두리의 의미를 지닌 말로서 역섬 땅이름은 역새리 방언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최초에는 조선 종성 두만강 대안 고섬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쓰이다가 차츰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중에 개산툰 일대를 아우르는 땅이름으로 씌었다. 오늘날에 와서 일본인들의 손때가 묻은 간도 사잇섬 명칭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히 알려져 있지만 정작 우리 역사가 깊숙이 배어있는 역섬이라는 옛 땅이름은 잊혀지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에 종성을 기점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쌍둥이처럼 양안의 허다한 지명은 서로 닮아 있었다. 종성의 금산(禁山)과 덕신향 큰산(金山 )지명 ,종성 늪데기(함지산)와 회경 막치기 늪데기 지명, 종성 국시고개와 덕신향 상국시 석정향 중국시 월청향 하국시 지명, 종성 상상봉 형제바위와 덕신향 형제봉 지명은 모두 두만강을 끼고 쌍둥이처럼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옛날 두만강은 구불구불 흘렸다. 지배굽이로부터 노째굽이 이르기까지 복새섬이 길게 드러누워 있고 크고 작은 늪이 그 옆에 번갈아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매도래라는 깊은 소 남쪽에 고섬 마을이 자리하여 있었다. 오랜 옛적부터 토굴을 파고 고섬을 일궈낸 선인들은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버텨 살아왔고 지난세기 40년대까지만 해도 호총이 50여 호가 냇물을 끼고 옹기종기 들어 앉아 있었다. 종성과 개산툰을 잇는 길목에 놓인 이곳 수많은 사연을 품어왔던 마을이 지난세기 5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천평벌과 선구촌으로 이주하면서 그 흔적이 차츰 사라지고 어느덧 옛 지명도 망각한지 오래다. 본디 역섬과 고섬 이름은 그 땅 생김새나 성격을 바탕으로 생겨나 오래 동안 우리 선인들이 써왔던 땅이름들이다. 그런데 불과 70년도 안 되는 사이에 한자어에 잠식되어 허다한 고유지명은 어두운 그늘에 가려져 있다. 재비탄은 선구로 지배굽이는 개산툰으로 애끼골은 제동으로 사무구팡이는 천평으로 역섬은 간도로 바뀌어졌고 소재데기 오사익트리 국시장거리 붉은재굽이 쌀고방 노째굽이와 같은 고유지명들은 이제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역섬 일대 마을들도 하나 둘 사라진지 오래다. 선구산성 북쪽 명당미 마을 남장골 북장골 돌볏마을 대산 가둑섬 등 수많은 마을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 옛날 이 세상을 살다간 역섬 사람들이 죽어 묻힌 뼛가루는 저 먼지 이는 두만강 허허벌판 모래톱으로 쌓아있다. 물길 따라 비스듬히 고개 숙인 갈대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길을 무심히 걷노라면 모래톱 모래 알갱이들은 선인들의 해골에서 나온 유골 뼛가루처럼 느껴지어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굽이굽이 세상 풍파 속에서도 오랜 세월을 버텨온 땅이름이 고향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타향에서 사는 후손들의 안타까운 삶에서 이어지는 현실이 애처롭다. 하지만 이제 목숨 걸고 국경을 박차고 나온 선인들의 탈출 이야기는 끝났다. 토지라는 칸막이로 경계선 안에 갇혀 살아왔던 농경 정착시대는 기술이라는 칸막이를 차지하고 사는 기술정착시대 자본이라는 칸막이를 차지하고 사는 자본 정착시대로 이어진다. 정착의 고정된 칸막이는 무너지고 바람 속을 고향으로 삼는 세계화시대로 접어든다. 진정한 고향은 거대 자본과 곁 모양을 화려하게 치장한 건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선인들의 역사가 차분히 쌓여지어 있는 마음속 깊이에 살아 있는 고향 본연의 모습이다. 먼 훗날 세월이 흐르고 우리 육체가 하나하나 쓰러지어 버려져도 운명에 굴하지 않고 국경을 박차고 나와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던 땅 이름 역섬은 숨 쉬며 일어나 드넓은 세상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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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31
  • [허성운 칼럼] 비양데기와 비암산
    용정시 비암산 지명을 두고 푸른 정기가 도는 바위가 많아 한자 푸른 벽(碧)자와 바위 암(岩)자를 붙이어 비암산(碧岩山)이라고 한다는 설 산형태가 피파琵琶처럼 생겼다고 하여 비암산琵岩山으로 불렸다는 설 콧등처럼 산세가 볼록 튀어나와 코(鼻)자를 넣어 비암산(鼻岩山)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등 여러 가지 지명설이 있다. 함경도 방언에는 험하고 가파른 언덕 벼랑을 뜻하여 비양이라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 해란강에 다리를 놓고 해망동과 엄씨마을 (화룡 비암촌)을 거쳐 비암산 굽이를 휘돌아 소철이 부설되어 있었다. 해망동과 엄씨네 동네는 비암산 벼랑 쪽에 바짝 붙어 형성된 취락구조를 가진 마을들로서 예로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비암산을 비양데기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비비양데기 지명은 오랫동안 한자어 표기에 밀려서 세월의 비바람에 이끼가 끼고 마모되어 오늘날에 와서는 판독하기조차 어려워지게 되었다 용정시비암산문화관광풍경구는 용정과 연변의 문화를 보여주는 창구이다. 비암산 지명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바위 돌들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유람구 곳곳에 세워져 있다. 오늘도 이런 바위 앞에서 여러 지명풀이 버전이 난무하여 떠도는 것을 보면 우리 문화의 부끄러운 민낯을 들여다보게 된다. 관광개발의 핵심가치는 경제와 문화가 나란히 부흥하는 것이다. 넓은 산판에 화려한 꽃밭이 펼쳐져 있고 올려다보는 협곡에 걸린 유리 다리의 풍경도 근사하다. 이런 물질적 풍요와 현대감각을 자랑하는 시설과 달리 우리가 차려 올린 문화의 잔칫상은 초라하다. 아직도 연변의 적지 않은 풍경구에서 시설들은 단순한 경제적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을 보면 조선족 민속 문화를 발전시킨다고 내세운 강령이 무색해진다. 날이 갈수록 자의 반 타의 반 연변을 떠나 타향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탈고향 과정은 삶의 공간으로서 고향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유대관계 공동체 의식 자아 동질성을 잃어가고 있다. 화려하든 초라하든 평강벌과 세전벌에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비양데기는 세속적으로 가난하지만, 자연과 정서적으로는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곳이다. 비양데기 옛길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흐르던 고갯길이다. 높이 솟은 비암산으로 구불구불 뻗은 장대길, 산 중턱을 감도는 아침 안개, 평강벌에 도란거리며 흐르는 논 도랑물, 소낙비 그친 뒤 저녁 노을 붉게 타는 들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 그리고 감자밭 옆 아버지 곁에 묻힌 어머니 묘 우리에게 비양데기에 오른다는 것은 단순한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영원한 세계에로 들어서는 것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고 시작되는 노래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비암산은 그 구석구석을 파헤쳐보면 함경도 사투리 비양데기라는 땅 이름이 스며들어 있고 선인들의 그 투박하고 웅글진 억양이 짙게 배 메아리처럼 다시 귓전에 울려 나오는 곳이다. 오늘날에 와서 비양데기에 가득 쌓아놓은 선인들이 이야기들이 우리 후손들 기억 속엔 과연 얼마나 저장되어 있을까…. 잘못된 지명풀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혼란을 초래하여 우리 문화는 영원히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을 두고 평강벌과 세전벌을 묵묵히 일궈왔던 선인들의 진실 된 역사와 마주 앉아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흩어진 이들 삶을 하나하나 반추하여 비암산 땅이름에 또박또박 적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명 하나를 올바르게 쓴다는 의미를 넘어 선인들의 따스한 감성을 영원히 마음속 깊이에 새겨 넣어 우리 몸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고 우리 삶에서 생명력과 치유력을 지니게 하는 일이다. 혹독한 세상과 맞서 싸워온 선인들의 삶을 정직하게 담고 있을 때 비로소 비암산 지명은 전설이 될 수 있고 또 세월 강을 건너 오래오래 전승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정신없이 변하는 통에 우리는 갑자기 많은 것을 얻었고 또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비양데기라는 땅 이름은 연길시 해란강 골프장 옛 계림촌 마을과 용신 대신촌에도 있었다. 이런 지명은 조선족 마을 취락이 자리하고 있었던 표징인데 이런 지명이 사라지면 문화가 사라지고 문화가 사라지면 역사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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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0
  • [허성운 칼럼] 샘치물과 구렁물
    《중국고금지명사전》(中国古今地名辞典) 기록에 의하면 두만강 명칭은 만주어 tumen sekiyen 한자로 图们色禽에서 유래 되었다고 적고 있다. 만주어 tumen sekiyen는 만 갈래 물줄기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를 우리말로 즈믄 (천 혹은 많다의 고어) 삼치(함경도 방언 샘물)라고 풀이 하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수많은 샘물이 두만강 량안에 널려 있는 까닭으로 그 이름이 붙여 진 것이다. 두만강 량안에는 말 그대로 샘물들이 하늘의 별처럼 모여 있어 한 겨울에도 많은 구간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는다. 샘물 따라 물안개 보얗게 피는 곳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줄지어 들어 앉아 마을 지명들도 약수동 옥천동과 같은 땅이름들이 다양하게 붙이여 졌다. 그 가운데 두만강 가에 자리 잡은 개산툰 광소촌과 광종촌에는 야트막한 산들이 마치 이불처럼 포근하게 마을 둘레를 덮으며 동네를 감도는 산자락에 샘 줄기가 군데군데 자리해 있어 사시장철 마르지도 않고 흘러나왔다. 최초에는 사무구팡이 사무깨 샘물둥지로 불리어지다가 차츰 상천평 중천평 하천평이라는 지명으로 굳어진다. 천평벌은 말 그대로 샘물이 주물러 자연 그대로 만들어 놓은 동네다. 1945년 쏘련군이 개산툰공장 기계부품을 뜯어 간 후 백성들은 하나둘 물대(펌프대)를 얻어 집집마다 수동식 물펌프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룡정시 지신진 이천마을은 본래 샘치물골 샘물둥지로 알려진 동네이다. 아이들 주먹만큼 큰 샘치물이 대여섯 곳에서 퐁퐁 솟구쳐 올라와 불리어진 이름이다. 샘물은 마을 복판으로 흐르는데 돌로 샘물 주위를 쌓고 첫 어귀는 음료수를 퍼가는 곳으로 지정하고 그 아래는 집집마다 짠지 그릇과 김치를 담은 단지들이 두 줄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맨 아래 쪽은 세수도 하고 목욕도 하는 구간으로 나뉘어 활용하였다. 이천(伊泉)은 이즈미(일본어 샘물)를 음역하여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오늘날 룡두레 우물에서 기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룡정 이름도 사실은 유구한 세월과 더불어 다양한 언어적 변천을 동반하여 붙어진 지명이다. 룡정 지명은 최초에 함경도 방언 구렁물에서 기원된 땅이름이다. 19세기 60년대 한 날농군이 부싯돌을 찾으려다가 우연히 발견한 우물로 전해지고 그 후 20세기 문턱에 들어서서 부근에 교회당이 선후 비로소 우물에 룡두레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의 룡정 시가지는 일찍 많은 고성 고분 유적들이 산재하여 있었다. 그 가운데 수남고분은 륙도하 남안에 널려있었는데 지난세기 20년대 소철을 놓고 강둑을 쌓으면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수남고분 분묘구조는 석루로 한 석실이 있고 외부는 수많은 거석으로 덮고 다시 흙을 쌓아 올려서 커다란 산 모양을 이루어졌는데 이주초기 백성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북쪽 지금의 룡정 기차역 부근과 서쪽 동흥촌 남쪽 토성포에는 흙과 돌로 기초를 다지고 그 위를 점토로 덮은 허물어진 고성들이 산재하여 있었는데 최초에 이주민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이런 고성 안에는 깊이 파인 구렁물들이 여러 개 널려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런 곳을 구렁물깨라고 불러 왔다. 구렁물깨는 룡정 도시성곽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함경도 방언 구렁물과 동음어 낱말인 구렁이라는 말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추론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옛 선인들은 구렁물에는 물고기가 살고 그 물고기는 천년이 지나면 구렁이가 되고 또 천년이 지나 뢰성벽력 치는 날 밤에 룡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고 전해 왔다. 과거에 연변의 집집마다의 물독에는 거개가 물고기가 두세 마리씩 그려지어 있었는데 이런 전설에서 유래 된 것으로 보아야 정확하다. 그 옛날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한 토성포에서 나서 자란 한락연은 키질불교미술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상해 미술학원에 입학하여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날마다 보아왔던 물독에 그린 수많은 물고기 선들이 그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어른이 된 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함경도 물동이 춤에서 물동이를 이고 돌고 도는 동작은 그 옛날 춘하추동 매일같이 물을 길던 어머니들이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마치 선녀가 룡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그들의 황홀한 꿈을 펼치어 보인 것이다. 룡정 주위 지명들 이를 테면 룡지 룡원 구룡 등은 모두 구렁물과 관련되어 있다. 구렁이의 전설과 더불어 구렁물은 오랜 세월동안 언어 변천을 거쳐 오늘날 와서는 차츰 한자 룡(龍)자 지명 안에 숨어 쓰이게 되었다. 어찌 보면 오늘날 룡정 지명은 구렁물 속에서 건져 올려낸 샘물과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구렁물 안에서 영롱한 뭇별 빛깔로 반짝이던 샘물이 두레박에 의하여 세상 밖으로 건져 올리면 출렁이던 물결무늬가 사라지고 오늘날처럼 하나의 메마른 력사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축축한 냄새가 나는 밧줄도 두레박도 없는 기념비만 남은 우물에는 우리 선인들이 써왔던 구렁물이 아닌 룡두레란 우물 이름 안에 모든 력사가 꽁꽁 숨어 갇혀 있다. 인간이 종내 무덤 속의 흰 뼈로 남듯. 룡정 구렁물에 진실한 무늬를 입혀야 할 몫은 이제 미래세대와 긴 시간의 흐름일 뿐일 것이다. 사람들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말을 모어라 한다. 옛날에는 전쟁과 식민화로 많이 사라졌지만 요즘은 인구의 이동 때문에 스스로 모어가 사라지고 있다. 일제식민지 시절 우리말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쳤듯이 이제는 자기 모어를 지키는 것도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이다. 우리의 모어로 된 지명도 사라진 룡정 고성과 고분처럼 죽은 언어의 공동묘지가 되지 않도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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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6
  • [허성운 칼럼] 지배와 자동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윤동주 집안이 1886년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에서 북간도의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으로 이주하였다는 설법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자동紫洞과 자동子洞을 동일한 지명으로 착각한 그릇된 주장이다. 사실 자동紫洞은 지배굽이 현재 개산툰을 말하고 자동子洞은 자동골을 말하는 것으로서 서로 다른 지리적 공간을 뜻한다. 오랜 옛적부터 개산툰 기차역으로부터 종이공장일대에 이르는 산굽이를 따라 바위너덜이 수직절벽을 이루며 병풍처럼 둘러서있었다. 초라한 땅막집과 농막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앉았고 북으로 앞 물학성(지금은 폐촌)과 뒤 물학성 사이에 국시당 언덕이 자리하고 봄이 오면 과일 꽃들이 구름처럼 만발하였다. 옛 선인들은 일찍 이 일대를 지배 혹은 지배굽이라고 불러왔다. 오늘날에 와서 지배굽이라는 땅이름은 역사 뒤안길에 사라진 죽은 지명으로 되어 있지만 먼지가 두텁게 쌓인 문헌자료에서 확실한 증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계림유사』에는 紫曰質背이라는 글이 적혀있는데 자색을 뜻하는 옛 사람들의 말은 지배質背였다는 것이다. 지배 소리와 근접한 제비는 중국 고서에서 紫燕으로 적혀있고 제비꽃은 그 빛깔이 자주색과 보라색으로 피어난다. 지배굽이 바위들을 유심히 관찰하여 보면 특유의 붉은 자색 빛깔이 눈에 띤다. 먼 옛날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깎이고를 반복한 자색바위마다에는 파란만장한 선인들의 골곡 진 삶이 묻어나 그 부스러기마저 신비의 징표로 느껴진다. 두만강 유역에는 안주인을 부르는 호칭으로 호세미라는 낱말이 오래 동안 사용되어 왔다. 호세미는 여자 집주인을 높이 이르는 말로 알려지고 있으나 원래는 점쟁이 무당 비구니를 말한다. 골짜기마다 삼밭과 뽕나무가 자라고 집집마다 베틀로 베와 명주를 짜는 소리가 들려왔던 두만강 유역에서 호세미들의 발놀림, 손놀림에 쿵터덕 쿵, 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베틀에서 나오는 명주천은 흔히 보라색 물감으로 염색한다. 이들이 오래전부터 자색 옷을 선호하게 된 것은 두만강 유역 재가승들이 승려를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자색 옷을 입으면서 유래된다. 민간에서도 여자들의 저고리 자색 옷고름과 동정. 자색 댕기, 이불깃과 베개의 붉은 자색 헝겊, 손발톱에 물들이는 봉선화 보라색 빛깔 등은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축귀와 벽사의 의미가 담겨있다. 화학염료가 등장하기 이전에 오랜 역사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선인들은 풀뿌리로 재가승들은 진주조개로 염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인근 사찰과 놀랄 정도로 한데 뒤얽혀 있는 지배굽이 지명은 불교적 색채가 짙게 깔려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은 사람아“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찔레꽃’노래는 오늘날에 와서 2절까지만 불리지만 원래는 3절까지 있었다.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연변과 함경도에서는 노루를 놀가지라고 부르듯이 찔레꽃을 찔구배꽃이라 말한다. 노래 작사가가 황해도 신천군 태생임을 감안하고 우에 가사에서 꾀꼬리는 예조리(노질이)로 바꾸어 음미하여 보면 “찔레꽃”노래는 그 옛날 알구배꽃 천지꽃 백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연분홍 봄 물결이 흘려들던 지배바위와 비슷한 두만강연안의 풍경을 펼쳐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세월의 무게가 두텁게 쌓이고 쌓인 지배바위굽이에서 우리 선인들의 이민사가 힘겹게 걸어 나왔다. 아무리 위대한 역사도 그 역사를 지킬 능력과 의지가 있는 후손이 있어야 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릇된 역사에 끌려가다 보면 우리 역사는 결국 빈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오늘도 훼손 방치되어 빛을 보지 못하는 이주역사의 일번지 지배바위굽이는 잡초만 무성한 채 내버려져 있어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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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5
  • [허성운 칼럼] 피밭골과 비파골
    연변지명에는 연변역사의 굴곡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다. 돈화시 흑석향 경독耕讀촌 지명은 최초에는 함경도 포수들이 이곳에 들어와 무더기로 피낟이 자라는 것을 보고 피밭굽이라 불러 온데서 기원된다. 그 후 일본인과 경상도 상주, 강원도 여러 지역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이름이 비파琵琶목으로 붙여졌다가 교토京都라는 지명으로 굳어진다. 일본 옛 도시 교토京都와 일본의 오랜 불교사찰들이 밀집하여 있는 비와호琵琶湖 이름으로 명명하여 의도적으로 땅이름을 왜곡하였다. 그 시기 흑석향 지역의 지명을 살펴보면 나라촌奈良 하가산촌和歌山 시가촌志賀 미에촌三重 등 일본 긴키지방 지명들을 판박이로 옮겨와 이식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함경도 포수들은 그때로부터 일본군과 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으며 1945년 가을 목단령 고개길 다리목에서 일본군 소분대를 전멸시킨다. 죽은 시체를 쌓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마치 작은 산처럼 솟아 있었다. 80년대 초에 들어와 감쪽같이 무덤이 사라지고 다시 평지로 바꿔졌다. 항일전쟁 끝난 후 이들 포수들은 마적과 손잡고 토비소굴에 들어가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곡파가 쓴 “임해설원”의 토비무리에는 함경도 포수형상이 파편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맥락은 이런 흐름에서 엿볼 수가 있다. 해방 후 교토京都촌은 경독촌耕讀으로 땅이름을 바꾸어 표기한다. 항일무장투쟁사에 한 획을 그은 봉오동전투에는 비파골琵琶溝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원래 이름은 피밭골로서 일본군이 의도적으로 혹은 착각하여 군용지도에 비파골로 표기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국내 학자는 물론 국외 학자들도 비파골이란 그릇된 지명을 그대로 옮겨 쓰고 있다. 1945년 가을 일본군은 투항하였지만 피밭골 사람들은 그해 겨울에 가서야 광복소식을 소금장사한테서 듣고 알게 된다. 50년대 말 숱한 농촌 인력이 쇠물을 녹이는 일에 동원되어 농사가 흉작이 들었을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이 피밭골로 몰려들어와 피낟을 뜯어 간적 있었다. 연길해란강골프장 자리는 원래 관청메 (일명 계림촌)라 불리던 마을 옛터이다. 겹겹이 산으로 에워싼 마을은 무릉도원처럼 남으로 해란강이 북파하여 흘러들어 오고 마을 앞으로 작은 냇물이 동네를 감돌며 해란강과 합류되어 비켜나가는 형국이다. 마을 뒤로는 야트막한 동산이 솟아있어 전형적인 금계포란형 풍수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에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전개되어 온 마을 취락들. 그 위에 겹겹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인문지리경관은 우리가 보존했어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었으나 2000년 문턱에 들어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복원하기 힘든 곬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다. 관청메에는 절당께 진사래밭 술기고래 닷돈고래 세가달물 사물깨 삼밭구석 부싯돌밭 매방재데기와 같이 선인들이 삶의 흔적이 깊숙이 슴배인 땅이름들이 널려있다. 그 가운데 큰 피밭골과 작은 피밭골은 이미 해란호에 그 입구가 잠겨버리면서 력사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피밭골 지명을 쫓아 선인들의 발자취를 조심스럽게 더듬어가노라면 피낟농사로부터 벼농사로 이어지는 이들의 운명적인 삶을 돌이켜 보게 되며 긴 세월동안 입을 다물어 버린 진실과 깊숙이 묻혀있는 역사와 우리가 넘어 가야할 장벽과 마주 서게 된다. 지난시기 우리는 눈앞의 경제리익에 매달리어 외래문화를 번역복제하기에 급급하다보니 정작 자기 전통문화유산을 깊이 있게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피밭골이 피파골로 왜곡되고 고유의 마을문화자원을 반듯하게 본존하지 못하고 그 설자리조차 잃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산천초목의 경관은 선인들의 발자취가 새기여 풍경의 한계를 뛰어넘고 대대손손 이어진 풍토는 천년세월을 버텨나간다. 선인들이 손발이 닳도록 황량한 황무지를 뚜지고 뚜지어 기름진 옥토로 바꾸어놓은 력사를 밝히는 일을 미루고 미루다 보면 우리는 영영 변화된 세상을 보지 못하고 피밭골과 같은 땅이름들을 서서히 잊힐 수가 있는 것이다. 늦게라도 과거를 위해 미래를 위해 그리고 지금을 위해 우리는 하루속히 고유한 전통문화 가치를 바로세우며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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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5
  • [허성운 칼럼] 오양간과 오랑캐 그리고 오랑캐령
    “옛말 잰말 닭똥 세말 오양간 문 삐꺽 소 음매” 어린 시절 말버릇처럼 입에 달고 다니며 외우던 말이 나이 들어서도 이따금 저도 몰래 입 밖으로 툭 튀여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한겨울 외양간에서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큰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던 둥굴소의 착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곤 한다. 사전을 펼쳐보면 외양간은 표준어로 새기고 오양간은 방언으로 표기하고 있다. 외양간은 소에만 한정되지 않고 말이나 양을 기르는 거처를 뜻한다. 연변과 함경도 지방에서는 겨울철의 혹독한 추위로 정지간과 벽을 사이를 두고 집채 건물 안에 두었기에 외자가 아닌 오양간으로 부르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지방에서는 거개가 집과 거리를 둔 헛간이나 창고에 설치하여 밖을 뜻하는 외자를 달아 외양간으로 부르고 있다. 여진어에서 집짐승 가축을 뜻하는 의미로 ulha이란 단어가 있는데 그 음이 연변과 함경도 방언 오양간의 오양이란 소리와 대응된다. 비록 조선반도 전역에서 외양간방언분포양상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나지만 소 말 양 닭 등 가축을 기르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뜻과 소리가 유사한 언어 그물망에 얽혀있음을 알 수가 있다. 15세기로부터 17세기 두만강 유역의 역사를 훑어보면 오랑캐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오랑캐라는 단어는 기존의 가축이란 의미 안으로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이란 의미가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결국 오랑캐란 말은 이음을 한자로 옮겨 적은 단어로서 최초에는 한 부족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쓰이다가 차차 두만강 유역에 거처하면서 사실상 외적의 침략을 대신 막아주는 스펀지 역할을 해오던 부족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들 오랑캐 무리는 사람의 얼굴은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고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이와 같이 오랑캐를 짐승과 동급으로 취급하고 심지어 짐승보다 못한 야만인 미개인으로 낙인찍어 오다보니 민간설화에서는 오랑캐를 五囊犬라고 풀어가면서 사람 축에 못 드는 짐승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체면을 세우려고 주변강대국에서 묶은 사책에는 모두가 야만인으로 취급하고 파편적인 기록으로만 남겨지어 오늘날에 와서도 이들의 역사는 올바른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랑캐를 비웃고 철저히 외면하여 왔던 역사에는 우리와 그들이 섞임과 공존으로 인해 력사가 강물 되어 굽이굽이 흘러왔던 것이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곁에 서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함께 화평의 시대를 열어왔던 기나긴 세월동안 우리는 땅을 맞대고 있는 이들과 서로 말을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오랜 섞임과 공존 과정에 나름대로 독특한 방언권을 형성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두만강 유역에는 오랑캐령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오량캐령은 강대 세력들의 다툼으로 난리가 났을 때 우리선인들이 험난한 삶에 쫓기어 연변에로 진출하는 길목에 놓인 피눈물로 얼룩진 고갯길이다. 재난과 가난이 먹장구름처럼 드리워 캄캄했던 그 옛날에 소와 함께 오랑캐령을 넘어 연변 땅으로 퍼져 들어와 새와 조이 짚으로 이영을 하고 타래벽을 틀어가며 정주간 옆에 오양간을 짓고 입양아처럼 식구가 되어 들어온 소는 고단한 삶을 짊어지고 선인들과 함께 걸어온 동반자이다. 두만강 그 갈림길에서 말에 올라 칼과 보물을 걸머쥐었던 타민족들과는 달리 소고삐를 잡고 농기구와 씨앗을 움켜쥐었던 선인들의 그 뛰어난 통찰력은 그들이 조상으로부터 세세대대로 물려받은 농작물 재배기술을 지녔기에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산간지대에 위치한 연변에서 소를 이용하여 가대기로 찌갈이 하고 후치로 홰지를 하는 정교한 밭농사 재배기술을 개량하여 연변 땅에 소중한 농경문화의 유산을 남겨놓았다. 오양간이란 방언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긴 역사의 흐름을 되돌아보게 된다. 가축과 유목민을 뜻하던 오양간 단어가 짐승과 야만인을 뜻하는 오랑캐라는 단어로 마치 올챙이가 개구리로 되는 과정에 점차 다리가 생기고 꼬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굴곡적인 언어변화를 거쳐 왔다. 외양간과 오랑캐란 두 단어는 얼핏 보면 의미적 거리가 먼 어휘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양간이란 방언에서 귀한 실마리를 찾아 가까운 이웃관계에 얽혀있는 단어임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방언은 죽은 송장이 되어 세월의 이끼가 끼고 마모되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미이라가 되어 선인들의 영혼의 아우라가 되어 오랜 과거와 아득한 미래를 이어주는 긴 시간 축 속에 그 신비한 빛을 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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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7
  • [허성운 칼럼] 재비탄과 복새섬
    널리 사용되였는데 어느 결엔가 사람들이 쓰지 않게 되면서 사라지는 말들이 있다. 지난세기 5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배를 뜻하는 재비라는 말이 두만강 연안에서 허다히 사용되어 왔었고 모래톱을 의미하는 복새섬이라는 말도 넘치도록 흔하게 썼던 낱말인데 오늘날에 와서 이런 어휘들은 마치 근대 이전 아득하게 먼 옛날에 썼던 고어처럼 느껴진다. 역사적인 사실은 때로 당황스럽다. 이름을 가진 것이 이름 없는 것이 되어 우리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사라지고 이름이 없어야 할 것이 이름을 가진 것으로 되어 우리 역사의 길목에 나와 앉아있다. 두만강 유역의 지명 이름들을 살펴보면 원래 재비탄과 복새섬으로 불리어졌던 땅 이름들도 오늘날에 와서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지명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개산툰 선구 지명은 원래 나루터 의미를 지닌 재비탄을 한자로 옮긴 이름이고 사이섬이라고 불리는 간도도 복새섬이라는 이름에서 기원된 땅이름이다. 그리고 두만강 연안에 자리잡은 화룡시 남평 길지마을 지명도 복새섬에서 기원되는데 최초에는 복사평伏沙坪 표기되였다기 질땅을 뜻하는 길지마을과 통합하면서 풍수색채가 짙은 길지吉地라는 지명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화룡시 숭선 지명도 이주 최기에 복사평腹沙坪으로 새기였으나 나중에 숭선으로 지명이 굳어진다. 훈춘 두만강 연안 구사평九沙坪마을과 도문시 복새골 지명도 같은 사례이다. 연변 지명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만든 지명이 그대로 이전된 것이 많다. 과거에 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라 불리어진 지명이라고 복새섬을 엉뚱하게 풀이한 글들을 우리는 요즘에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복새섬 복새밭 복새땅이라고 부르는 복새覆沙라는 말은 섬이나 강 연안에 위치해 있다가 강물이 범람하여 모래가 뒤덮인 땅를 가리키는데 과거에는 밭 세금이 면제되어 왔었다. 유유히 흐르는 세월 속에서 두만강 푸른 물은 수많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오랜 세월 두고 개산툰 평야를 무법으로 훑고 지난 간 옛터들은 폐허로 만들고 아픈 과거를 흔적 없이 지워놓았다. 과거에 두만강은 지배굽이로부터 노째굽이에 이르기까지 두 갈래 물줄기로 갈라지어 흘렸고 그 사이에 커다란 복새섬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구 지명을 두고 사람들은 이 마을이 “처음 배를 들이댄 곳”이라고 해서 배 선(船) 자에 입 구(口)자를 달아서 “선구(船口)”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지만 사실상 재비탄이란 말을 먼저 있었고 그후 줄촨이 놓여지고 한자로 선구라고 작명한 것으로서 나중에 마을의 지명으로 고착되였던 것이다. 재난과 가난이 먹장구름처럼 드리워 캄캄했던 그 옛날 강대 세력들의 다툼으로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은 험난한 삶에 쫓기어 두만강 강가에까지 밀려났다. 그때 백성들에게 등대처럼 한줄기 빛이 되어준 것이 바로 두만강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복새섬과 재비탄들이였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두만강연안에서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어 가며 새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민초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두만강 강가에 자리 잡은 복새섬 곳곳에 고스란히 묻혀있다. 그리고 그 모래땅에서 수확한 감자 동배 (콩의 일종) 메싹 그리고 백사장에서 알을 쓸던 얘리(두망강 물고기 일종)로 차려진 밥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으며 복새섬은 세상에 둘도 없는 무릉도원이 되여 왔다. 해와 달을 거듭하면서 민초들은 두만강 복새섬을 기점으로 하나 둘씩 연변 땅에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두만강의 크고 작은 수많은 복새섬에서 시작한 연변 땅에로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뻗어나간 오솔길들은 온갖 가시덤불속을 헤쳐 나아가 마침내 수백만 백성들의 이주경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빈손으로 고향을 버렸지만 그들에게는 세세대대로 물려받은 작물 재배 기술이 있었고 오랜 세월동안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한 태고의 언어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 와서 연변역사 전체를 바꾸어 놓게 된 것은 그들의 막강한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세력을 지녔기 때문에가 아니라 방대한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포용적인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연변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힘은 우리 선인들이 놀랄 만큼 타자의 문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사회공간을 확장하는 뛰어난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변 역사는 거대한 유물 속에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사소한 삶의 조각들 그들이 써왔던 대뜨베(파종도구 일종) .가대기. 밀찌 (유읍방언 사읍방언에서 후걸이). 물독에 그려진 다양한 물고기 문양 . 지팡살이 땅문서와 계약서들. 마적에게 붙잡혀간 아들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허리춤에 감싸고 감싼 동전잎 등과같이 생생한 증언들이 도도히 흐르는 력사의 흐름 속에 복새섬처럼 쌓이고 쌓여 연변의 력사가 이루어 진 것이다. “복새섬이 맛이 마이 갔수꾸마” 그 옛날 복새섬에서 새둥지도 들추고 늪에서 조개도 줍던 소년은 벌써 80고개를 바라보면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무산광철에서 버린 철분 찌꺼기와 한때 건설 붐으로 포크레인이 모래를 파헤치어 버림받은 복새섬은 잡초가 무성하고 봄이면 하늘높이 솟아올라 우짖던 노질(유읍방언 종다리 일종 사읍방언에서 예조리)이 울음소리도 뜸하다. 한때 물자를 유통시키고 수천만 백성들의 이주의 길목에 발판을 깔아주었던 재비탄과 복새섬은 쇠락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지만 오늘날 강가에 부는 바람만은 여전하다. 다만 그 시기 바람은 연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던 바람이었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두만강 강가에 서서 사라진 재비탄과 잡초 무성한 복새섬을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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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5
  • [칼럼] 불타버린 통신분야 국가기반체계와 도미노 현상
    ● 송창영 지난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보통신의 중요성과 국가기반체계 보호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화재 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향후 다시 비슷한 화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통신 분야 재난으로 인하여 더 심각한 재난이 발생할 수 있었던 상황을 되돌아 보고 향후 대응책에 대해 고민하고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대사회는 거미줄보다 훨씬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서 발생하는 재난은 단순히 하나의 유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사회재난이나 자연재난 등과 연계되어 복합재난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시설. 전화, 무선, 방송 시설 등의 통신 시설, 도로, 철도, 항만 등의 교통시설, 상하수도, 전력, 가스 등의 공급 처리 시설 등을 일컬어 라이프라인이라고 한다. 라이프 라인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 재난으로 인한 ‘국가기반시설의 서비스 중단’이 ‘국가기반시설의 마비’라는 사회적 재난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전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증가하고, 이러한 위험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정부는 국가기반시설을 국가위기관리의 중요한 한 영역으로 설정하여 적극적인 보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국가기반시설은 각 기반시설 간의 연계성을 고려한 관리가 필요하다. 유럽에서는 2005년 1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주요 기반시설을 평가하였으며, 독일 연방국민보호재난지원청의 결과를 보면 주요 국가기반시설 사고 사례 2,103회 중 1,482회가 외부적인 요인으로 나머지 621회는 기반시설 간 연계성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전체 중단 사례 중 도미노 현상으로 발생한 피해 사례는 약 30%가량을 차지하였으며, 처음 운영중단으로 인한 피해보다 이차적으로 더 큰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위스 국가기반시설 프로젝트에서는 정전 시 통신 시설 마비와 다른 기반시설 사이의 의존도를 조사한 사례가 있다. 결과를 보면 통신 시설에 대해 의존도가 가장 큰 기반시설은 은행과 보험이었으며, 그 뒤로 철도, 항공, 선박 등의 교통수송 시설과 경찰, 소방서, 구조대, 정부시설, 행정시설 등에서 의존도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국가기반시설로 지정된 대부분의 기관은 기존의 자연재난과 사회재난 위주의 물리적 피해범주 분석에 국한되어 재난관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기반시설물이나 중요 건축물, 주요 산업시설물 등에 대한 국가기반체계 보호 필요성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분야의 국가기반체계 기능 마비는 연속적으로 다른 기반시설 분야에 영향을 미치므로 특정 기관만의 대처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각 기반시설 간의 연계성을 고려한 관리방안을 수립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런 관리방안을 수립하기 위하여 몇 가지 방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현재 국가기반시설은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시설 중심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국가 차원의 기능 유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물리적 기반시설뿐만 아니라 마비 시 최소한도의 국가기능 유지에 영향을 주는 무형의 시스템, 네트워크망, 구역(Zone)까지 국가기반시설에 포함한 관리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다른 기반시설이나 체계 등에 미치는 연쇄효과’ 등 해당 시설의 중요도 및 마비시 타시설에 미치는 영향도를 측정하는 검증 절차를 개발하여 정성적 기준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한 분야의 국가기반체계 기능 마비가 연속적으로 다른 기반시설 분야에 미치는 파급력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여, 국가기반시설 간의 연계성을 고려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국가기반체계 한 분야의 마비가 타 분야에 미치는 업무중단 등 기능적 파급범위를 분석하고, 타 분야 연쇄효과 차단을 위한 기능 연속성 확보방안을 작성해야 한다. 각각의 국가기반시설은 그 하나만으로도 기능 유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각각의 서비스 중단이 초래하는 위험성으로 인해 상호 간 연계성 기반의 관리도 매우 중요하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서는 다른 기반시설이나 체계 등에 미치는 연쇄효과나 공동대응 필요성을 고려하게 되어 있지만, 아직 국가기반시설 보호 계획이나 평가는 시설 단위에 머무르고 있다. 향후 국가기반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할 때 시설 중심이 아닌, 기능 중심으로 다른 기반시설 분야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관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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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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