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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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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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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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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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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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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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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5)
    ■김철균 긴것 같으면서도 짧은 것이 인생인가부다. 특히 할일이 많고 뭔가를 추구하면서 시간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일수록 늘 자신의 인생이 짧다고 생각한다. 2004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 들어 순자네 가정엔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행이 들이 닥쳤다. 남편 용환 영감이 뇌혈전으로 쓰러졌던것이다. 뇌혈전이란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뇌혈관에 피덩어리가 생기면서 혈액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타나는 현상이다. 용환 영감한테 이러한 증상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있었다. 두통, 현기증과 손발저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지만 영감은 대수로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상 마누라가 몸이 허약하다며 신경을 기울여왔던 영감이었다. “나한테도 그렇고 자식들한테도 마찬가지로 마누라가 건강히 오래 살아야 그 가정이 잘 운영되는 법이라오.” 영감은 평소에도 이런 말을 많이 해왔다. 그러면서 마누라가 좀 아프다고 하면 손발을 주물러주고 약방에 가서 약을 사온다,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하며 자상하게 굴었고 자식들한테까지 “너희들이 어머니한테 절대 등한히 굴어서는 안된다”며 자주 당부를 하던 영감이었으나 자기 자신한테만은 항상 그 정반대었다. 간혹 순자가 영감의 몸에 대해 걱정이라도 하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서 보양할테니 당신은 걱정마오”라고 하며 안심시키군 하던 용환 영감이었다. 헌데 그러던 용환 영감이 쓰러졌다. 평소에 별로 잔병들이 없고 건강하기만 하던 사람이 앓는다고 하니 아주 치명적이었다. 의사가 자기의 몸에 더 등한하다더니 그 말이 틀림이 없었다. 영환 영감이 뇌혈전으로 쓰러지자 가족은 물론 연변위생연수학교의 지도부에서도 용환 영감의 병치료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치명적인지라 그 치료가 몹시 힘들었으며 완치란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한동안의 입원치료와 순자의 정성어린 간호로 용환 영감의 병세는 어느 정도 호전되었지만 바깥출입은 근본 할 수 없었고 이전처럼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순자의 손이 따라 가야 했다. 죽을 끓여 입에 떠넣어 주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2일에 한번씩 요자리를 갈아 주어야 하는 등으로 마치 갓난 아기를 돌보듯이 돌봐야 하는 것이 뇌혈전으로 반신불수가 된 환자를 돌보는 일이었다. 순자는 영감의 병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감한테 가장 값진 걸 대접하고 싶었다. 값진 것이란 다만 비싼 물건이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면 곧 바로 값진 것이었다. 용환 영감이 투병생활을 시작해서부터 순자는 매일 영감한테 죽을 쑤어 대접했다. 순자가 영감한테 끓여 대접하는 쌀죽은 결혼 때 갖고 왔던 것으로 거의 60년간 보관하고 있던 “예장함의 쌀”로 지은 것이었다. “예장함의 쌀”이란 딸이 결혼할 때 부모가 딸의 함속에 넣어서 보내주는 쌀이다. 이는 옛날부터 내려온 조선민족의 풍속으로서 딸이 시집간 뒤 농사를 잘 지으라고 원래는 “종자벼”를 넣어서 보내었으나 후에는 그것이 변화되면서 아예 매일 이밥을 먹으며 살라고 함속에 쌀을 넣어서 보냈던 것이다. 순자는 수십년동안 아무리 식량고생을 하면서 살면서도 이 쌀만은 터뜨리지 않았다. 보다 관건적인 시각에 이 쌀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타산이었다. 헌데 이젠 그 “대장함속이 쌀”을 터뜨릴 때가 된 것이었다. 쌀이 없어서가 절대 아니었다. 그 쌀을 터뜨려야 할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순자는 용환 영감이 다시 일어나는 “기적”을 바라면서도 영감의 병상황으로 보아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는 망설일 것이 없이 그 “예장함의 쌀”을 터뜨려 영감한테 쌀죽이라도 끓여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예장함의 쌀”을 터뜨려 쌀죽을 끓일 때마다 흘린 눈물이 죽속에 떨어져 말그대로 쌀죽보다는 “눈물죽”으로 될 때가 많았다고 한다. 한편 용환 영감이 투병생할을 하고 있는 동안 연변위생연수학교에서는 전문간호원을 배치해 주려 했으나 용환 영감이 거절했고 순자 역시 영감을 남한테 맡기고 싶지를 아니했다. 아무리 유능한 간호원이라고 해도 마누라인 자기보다 나을 수가 없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고 용환 영감도 이에 아주 동감인듯 했다. 영감을 간호하는 동안 순자는 늘 영감의 머리맡에서 신문을 읽어주고 방송에서 들은 얘기를 들려주군 했다. “당신한테 참… 미안하구려.…당신은 그 옛날부터 …나한테 모든 것을 희생했고 오늘까지도 …” 룡환령감은 병석에 있으면서 자주 이러한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불편한 입을 실룩거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생각밖으로 그 노래는 한국에서 한시기 많이 유행됐던 비교적 신식노래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여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 알고보니 영감은 언젠가 한번 어느 한 모임에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듣고는 그 노래를 부른 사람한테 졸라서 그 노래의 가사를 베끼였으며 그뒤 일부러 몇번 혼자 친구의 딸이 운영하는 노래방을 다니면서 배웠다고 했다. 그랬다. 세상에 하많은 사연들중 김용환/김순자 노부부의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순자의 헌신정신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일찍 용정에서의 꿈많던 처녀시절 교원으로 될수 있는 절호의 기회마저 포기하고 용환청년과 백년가약을 맺었던 순자ㅡ 그 후 이들 부부는 수십년간의 풍운조화를 겪으면서 살아왔다. 국내해방전쟁, 공화국창건, 자치주창립, 반우파운동 및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렇게 희로애락속에서 어느덧 이들 노 부부의 사랑은 세기를 뛰어 넘어 2000연대에까지 이끌어 왔다. 그래서일까? 용환영감의 병문안을 왔던 노인들 거개가 순자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된 나머지 자기들의 만년도 용환 영감과 같은 팔자로 되였으며 좋겠다고 했다. 또한 모두들 사람의 팔자에서 마누라보다 먼저 저승으로 가는 것이 상팔자고 마누라를 앞세우고 자식들의 손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불행중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남정들한테 있어서 마누라는 엄마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영감들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노인들에 따르면 아무리 박식하고 유능한 남정이라고 해도 어리석으면서도 철부지같은 단순한 심리가 있기에 어려서는 낳아준 어머니의 손길을 닿아야 하고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에 투신하면서도 함께 사는 아내앞에서는 어리궂게 놀기 마련이며 특히 늙고 병들고 외로울 때면 더욱 아내앞에서 아기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3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의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어느날 순자는 잠자는 영감의 모습을 내려다 보다 문득 그 옛날 둘이서 손잡고 마을 뒤산의 숲속을 거닐던 때가 기억에 떠올라 그때 함께 부르던 노래 “낙화유수”를 조용히 부르다가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잠자는줄로만 알았던 영감이 번쩍 눈을 뜨며 그 노래를 계속 불러 달라고 했다. 기실 영감은 자지 않았으며 눈만 감고 있을뿐이었다. 자기가 눈을 뜨면 마누라가 부르던 노래를 멈출가봐서였다. 순자는 옛기억을 더듬으며 계속 노래를 이어갔다.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마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봄으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봄이라/ 오늘도 가는 곳이 꿈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 노래를 듣고있던 용환 영감의 눈빛은 생기가 돌았다. 영감은 순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떠듬거리며 노래 한곡조를 뗐다. “고향산기슭에…올라서니 사철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그러자 순자도 따라불렀다. 고향산기슭에 올라서니/ 사철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장원들 노래소리 들려오누나/ 아 사랑스런 산천아/ 아 내 정든 고향이여/ 조국의 변강이여……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광명한 새아침 닥쳐왔다네// 에라 좋구나 에라 좋구좋다/ 새로운 우리 살림 꾸려보세 … ……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순자의 추억은 어느덧 그 옛날 고향마을의 그 뒤동산으로 나래쳐갔다. …… 그날 교원초빙통지서를 갖고 화룡 서성구로 가다가 용환 총각한테로 다시 발길을 돌린 순자는 끝내 교원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용환 총각과 백년가약을 맺으리라 맘속으로 다졌다. 그날 둘은 고향의 뒤산에 올랐다. “순자, 난 모든것이 꿈만 같구려. 순자가 글쎄 있는 밑천이라고는 이 한몸뚱아리뿐인 나한테 마음의 쪽문을 열어주다니 말이요. 정말 고맙소. 나 영원히 오늘을 잊지 않으리다.” “그런 말 마세요. 전 그냥 저의 마음이 내키는대로 했을 뿐이예요.” 용환이는 순자를 꼭 끌어안고는 앞날에 대한 무한한 동경에 취해 갖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낙화유수”였다. 순자 역시 행복감에 푹 젖어들었다. 그 순간 하늘의 해빛은 찬연하였고 바람도 잔잔하였다. 다람쥐 한마리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저 멀리 달아났다. 둘은 온세상을 차지한듯 오래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김소월이 시에서 쓴 것처럼 그대로 굳어져 바위로 된다고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미구하여 침묵을 깬건 그래도 용환이었다. 잠시나마 취해있던 꿈에서 깨여나 이지를 회복한 모양이었다. “순자, 앞으로는 어떻게 할 타산이요?” “전, 그냥 당신의 뜻에 따르겠어요. 당신은 당신의 뜻대로 그냥 공부를 하세요. 제가 뒤받침을 해줄게요. 전 아무래도 좋으니 당신만은 꼭 성공할거예요.” “그래? 고맙소. 난 순자만 있으면 더없이 행복하며 온 천하를 얻은거나 마찬가지요.” 그 날 두사람은 서로 껴안고 무한한 행복의 무드속에 푹 잠겼다. 둘은 자기들의 젊음이 영원한 것을 바랐고 또 그럴 것이라 믿기도 했다. 둘은 해가 서산에서 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서야 산에서 내려왔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 윤씨가 씨암탉을 잡아 솥에 앉히고 있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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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02
  • 오묘한 세계대백과(38)조석이 형성된 비밀
    고대에 사람들은 낮에 물이 불어나는 것을 “조”라고 했고 저녁에 물이 불어나는것을 “석”이라고 했다. 조수는 마치 놀기를 좋아하는 아기마냥 쉼없이 뛰논다. 그럼 바다물은 왜 “조”와 “석”이 있을까? 지구와 태양 그리고 달 사이에는 모두 일종 흡인력이 있다. 평시에 태양이 지구와 비교적 멀리에 있기에 흡인력도 작아져 별로 큰 작용을 하지 못하지만 달, 지구와 태양이 직선으로 위치해있을 때는 태양과 달이 모두 지구상의 바다물에 대한 흡인력이 산생, 둘의 흡인력이 중첩되면서 바다물이 불어나는 현상이 생긴다. 그리고 달과 태양이 지구와 직각을 형성할 때는 둘의 흡인력 작용의 방향이 다르기에 흡인력이 서로 아주 약하므로 이럴 때는 작은 조류가 생긴다. 큰 조류는 일반적으로 음력의 초하루와 15일, 작은 조류는 일반적으로 음력 초이레, 초여드레 혹은 22일과 23일 이렇게 매달 두번씩 나타난다. 조석은 일종 자연현상으로서 인류의 항해, 물고기잡이와 소금말리기에 편리를 제공한다. 조석은 또 전기에너지로 변하여 사람한테 광명과 동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조석의 발전은 일종 잠재력이 큰 사업으로서 다년간의 실천을 경과하여 이미 대규모 개발이용 단계에 진입했으며 발전전경이 아주 유망하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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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02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7)
    에펠탑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시 함의: 파리의 상징임 1887년 곧 파리에서 시작될 세계엑스포를 맞기 위하여 당시 프랑스의 저명한 건축사인 구스타프 쿠르베 에펠은 한 철탑을 설계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철탑건축의 “아버지”인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 철탑의 이름을 “에펠탑”이라고 명명하였다. 에펠탑은 부지면적이 1만평방미터로서 파리 시구역의 쎄느강변의 전신광장에 높이 우뚝 서있다. 이 건축사상의 걸작은 견고한 철근, 철골과 청천하늘을 찌르는 호매로움으로 하여 프랑스의 일관적인 우아하고 낭만적인 민족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운중목녀” 에펠탑은 높이가 320미터로 파리 시중심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며 전부가 철강골자로 세워졌는바 총중량이 9757톤에 달한다. 멀리서 보면 에펠탑은 마치 꺼꾸로 쓴 자모 “Y”와 같아 외관이 아름답고 선이 자연스럽다. 철탑은 도합 3층으로 돼있는데 제일 첫층은 높이가 57미터, 두번째 층은 높이가 115미터이며 세번째층은 높이가 276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철탑의 제일 꼭대기에 서서 바라보면 전반 파리시내가 한눈에 안겨온다. 때문에 낭만적인 파리사람들은 이 철탑한테 아름다운 이름 ㅡ “운중목녀(云中牧女)”라고 지어주었다. 굴곡적인 역사 에펠탑의 수건초기, 이 철탑을 두고 사람들은 프랑스의 력사와 예술을 파괴한다고 인정했다. 일찍 20세기 20연대에도 프랑스정부는 이 철탑을 넘어 뜨린 뒤 근 1만톤에 달하는 철로 공장을 지으려고 타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철탑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도 점차 소실되게 되었다. 1964년, 에펠탑은 드디어 법률적 보호를 받게 되었고 영원히 철거할 수 없는 역사기념비로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50연대에 들어 에펠탑은 프랑스의 라디오TV발사 중심으로도 되였는데 이 탑은 세계에 제일 높은 안테나탑 중의 하나로 된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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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30
  • 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역” – 석패보위전 (2)
    남림파 진지는 일본군이 점령하려는 주요 공격목표였다. 중국군 제11사 31퇀 3영은 영용하게 저격하여 이 날 황혼무렵까지 일본군의 연속되는 5차의 공격을 물리쳤다. 한편 우측의 9련 진지는 적한테 점령당하고 좌측의 8련 진지 역시 일본군한테 내주면서 연장이 전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제7련은 완강하게 진지를 고수, 맹열한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진공을 물리쳤으며 진지의 앞에는 일본군 시체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7련 관병들의 상망과 기타의 손실도 컸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은 삼면으로 협공하면서 7련 고지를 진공해 왔으나 여전히 영용한 7련의 관병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일본군은 육군으로서는 중국군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오전 9시경, 비행기 5대를 출동시켜 중국군 7련 고지를 무차별하게 폭격, 주위의 삼림이 불타고 구축해 놓은 여러개의 토치카도 폭격에 의해 날려갔으며 2패의 패장과 박격포 포수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또한 중기관총패는 전사자가 과반수를 초과했고 기술병종의 관병들은 생존자가 몇명 되지 않았다. 3일째 되던 날, 일본군은 비행기의 지원하에 계속 중국군 제7련이 지키는 고지를 공격, 중국군의 엄페물과 기타 공사는 파괴되어 페허로 되었으나 7련의 장병들은 완강하게 전투를 견지하였으며 4일째 되던 날 즉 5월 31일, 제7련이 남림파에서 철거할 때 전 련은 고작 70여명밖에 살아남지 않았으며 전체 관병의 상망자가 4분의 3에 달하였다. 5월 29일, 다른 한 갈래의 일본군 39사단의 주력은 여가파를 경과해 점심무렵, 조가댐에 진입,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 중국군 11사가 지키는 우장파와 주가평을 향해 진공하였다. 우장파는 산세가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으며 주가평은 협곡이 깊고 봉우리들이 첩첩하였다. 제11사의 관병들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저항했다. 중국군은 수량상 배가 되는 일본군의 진공에 대적, 진지가 있는 곳의 주봉인 대송령에서는 수차에 거치는 육박전까지 벌어졌으며 일본군은 대포와 비행기로 중국군 진지를 초토화로 만들었으나 번번마다 고지점령에는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제3사단의 일부는 도자하를 가로 질러 중국군 18군 임시 34사가 지키는 교변남과 천대관 일대의 고지를 향해 맹렬히 공격, 천대관은 이 일대에서 중국군이 지키는 가장 높은 고지였다. 이날 일본군은 점심하를 따라 천대관의 뒤면으로부터 중국군을 향해 공격, 천대관을 탈환하려고 하였으나 점심하에 들어서자마자 중국군의 저격을 받으면서 일격에 300여명의 시체를 남기고는 다시 공격목표를 왕가댐으로 돌렸다. 하지만 일본군은 왕가댐에서도 중국군의 강한 저격벽에 부딪치면서 아무런 진전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 뒤 일본군 제3사단에 증원부대가 도착하면서 중국군 천대관의 부대는 대부대와의 연락이 끊기었다. 천대관을 사수하는 34사 1패의 전사들은 굴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면서 일본군과 박투, 일본군은 수차의 공격에도 산봉우리를 점령하지 못하자 비행기까지 동원되어 고지를 페허로 만들었으며 중국군 용사들은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이던 끝에 모두가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천대관을 점령한 일본군은 깊고 좁은 협곡에 들어섰으나 용가암 진지를 지키는 중국군의 포격을 받아 많은 상망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뒤이어 일본군은 비행기의 지원하에 협곡을 강행돌파한 뒤 다시 중국군 11사의 2선 진지를 향해 맹공격을 해왔다. 석패요새전역은 매우 간고했다. 일방은 반드시 공략해야만 하는 일본군 입장이었고 일방은 반드시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중국군 입장이었다. 일본군이 석패요새의 외곽진지들에 진입한 후 이 일대의 험산준령들은 매일 평균 9대 이상의 일본군 비행기들이 덮쳐들어 폭격했고 중국군과 일본군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비명과 아우성으로 골짜기를 진감했다. 5월 30일, 일본군은 재차 중국군의 석패요새를 향해 공격을 강행, 비행기의 엄호하에 어느 작으마한 공간만 있어도 일본군은 그 공간을 이용해 공격의 발판으로 만들군 하였다. 당시 조가댐 부근의 크고 작은 산에서는 3시간 가량 총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헌데 그것은 쌍방이 정전한것이 아니라 적아쌍방간 육박전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각암과 사방만을 공격하는 일본군은 1000여명에 달하였는데 그들은 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최루가스탄을 사용하면서 올라왔고 중국군은 이런 최루탄을 막아내는 설비가 없었기에 그저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으며 희생이 막대하였다. 이 두 고지에서의 전투는 당시 가장 치렬한 전투었다. 일본군은 매 1미터를 전진할 때마다 막대한 대가를 치렀는바 당시의 정경을 보면 해나 달마저 초연에 가리어 원 색갈을 잃을 지경이었으며 중국군 진지앞에 쌓인 일본군 시체는 쌓이고 쌓이어 금자탑 모양을 하기도 했었다. 육군과 배합작전하고 석패를 보위하기 위하여 중국군 공군과 미공군의 전투기들도 빈번히 출동하여 전장 혹은 전장 부근의 일본군을 향해 공격하였는가 하면 일본군의 증원부대를 소멸하고 보급선을 차단하기도 했다. 5월 29일, 중국군 공군은 이창현성을 폭격하여 일본군 30여명을 살상, 30일에는 이창현 동쪽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하여 일본군 전투기 1대를 파괴하기도 했다. 5월 31일, 석패전역의 마지막 시각, 중국 공군은 지면부대와의 연합작전으로 일본군 전투기 6대를 격추하였으며 일본군의 함대가 육군과 협동작전하려던 계획을 철저히 파탄시키었다. 당시 적아간이 모두 일체의 대가를 가리지 않고 석패의 전연진지에서 치렬한 전투를 할 때 전구 총사령 진성 상장은 호련 사단장한테 전화로 “석패보위전이 파악이 있는가”라고 묻자 호련은 “성공파악은 없으나 사수의 결심은 있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웅기개를 보여주었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석패보위전의 가장 관건적인 전투에서는 승리의 천평이 몇번 일본군쪽으로 기울어질번 하기도 했지만 적아쌍방이 서로 어울려 육박전을 벌일 때에는 일본군의 현대화장비가 전혀 우세가 없었으며 쌍방이 바친 대가는 거의 1 : 1로 대등하였다. 특히 어느 한 전투에서는 적아간 거의 총을 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자 수천명씩 서로 엉켜 육박전을 벌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병전(白刃战)이 바로 석패보위전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최근 어느 한 매체는 당시 백병전에서 전사한 소년병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중국 농민가정의 자식들은 보편적으로 영양이 좋지 않아 16~17세가 되어도 키가 총창만큼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 소년병들은 자기의 키보다 더 큰 총창을 들고 결사전을 벌이었다. 만약 당시의 소년병들이 살아있다면 지금은 모두 80여세가 되는 노인으로 되어 자기 집 정원에서 차물을 마시거나 손자손녀를 안고 안온한 생활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중국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향수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치였었다.…” 이 날 3시간에 달하는 백병전이 있은 날의 오후, 수많은 용사들이 흘린 선혈이 장강 남안의 토지를 붉게 물들이었다. 이 날 1500여명에 달하는 용사들은 중국의 강토에 쓰러진채 조용히 잠들었고 총성이 없는 3시간의 백병전끝에 중국군은 끝내 고지를 지켜냈고 패하여 퇴각한 건 일본군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거듭되는 공격에도 석패를 공략하지 못했고 입은 손실도 막중함과 동시에 “무적황군”의 기세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5월 31일의 밤이 되자 전쟁터의 총포성이 돌연히 멈추었고 일본군을 분분히 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퇴각하였다. 석패보위전은 중국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전역에서 중국군은 도합 7000여명의 일본군을 살상, 많은 무기를 포함한 대량의 군수품을 노획하기도 했다. 석패보위전은 1939년 3월 장강방어전의 총성과 함께 시작되었고 1943년 6월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거쳐 진행되어 왔으며 최종 중국군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 5년간 중국군은 도합 15만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일본군도 10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전쟁에서 일본군은 2만 5718명이 살상되고 비행기 45대, 자동차 75대, 선박 122척을 손실보았으며 중국군은 사상자 1만여명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전역과 마찬가지로 중국판 “스탈린그라드전역”의 승리는 당시 중일 양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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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4
  • 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역” – 석패보위전 (1)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제2차 세계대전시기 스탈린그라드전역은 구 소련홍군이 수도 모스크바를 보위하기 위해 진행한 가장 치열한 전역으로서 이 전역은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장에서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되었다. 하다면 아주 멀고 먼 극동전장에서 역시 스탈린그라드 전역과 비슷하게 치열한 방어전이 있었는바 이 전쟁은 어떤 각도로 보면 중국과 일본의 생사를 가르는 전역이기도 했다. 중경과 전반 중국의 운명과 관계되는 전역 석패는 인가 100호도 되지 않는 작은 옛진이었다. 석패진은 이창현(지금의 이창시 이릉구) 경내에 위치, 장강삼협의 오른쪽에 있으며 장강이 가까이에서 흐르고 산에 둘러싸이어 있다. 석패는 이창현성과 30여리 떨어져 있고 장강천험의 요충지로서 역래로 모든 군사들이 서로 쟁탈하던 곳이었다. 고진 석패는 사방 70리가 되며 위에는 삼두평으로 항일전쟁시기의 군사요충지로서 국민당군의 제6전구 전진지휘부와 강방군 총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아래에는 평선파가 있었는데 석패의 초소로서 이창현성과는 30여리 상거해 있었다. 1938년 일본군은 이창을 점령한 후 석패는 중경을 지키는 첫 방어벽으로 전략적 지위가 매우 중요했다. 일단 석패가 함락되기만 하면 일본군은 수륙공(水陆空)의 배합으로 중경과 전반 중국을 위협할 수 있었다. 제2수도인 중경을 지키기 위하여 1938년 겨울 중국해군은 석패에 제1포대를 구축, 좌우로 제1, 제2포대에 도합 10문의 대포를 설치하여 장강삼협 요새포대군의 최전선으로 되게 하였다. 당시 석패를 지키는 중국 해군장병은 100여명으로 석패로부터 이창에 이르는 구간에 주둔해 있었으며 포대의 요새는 남진관 상류의 장강 강면을 봉쇄할 수 있었다. 이 구간을 지켜내기 위하여 당시 중국군은 정예 포병부대를 석패에 주둔시켰다. 당시 일본군 역시 중경을 점령하려면 반드시 이 요새를 넘어야 하기에 천방백계로 이 요새를 노렸다. 1941년 3월 상순, 일본군은 많은 병력을 집중하여 이창 대안으로부터 석패 정면의 평선파와 측면의 조가판을 진공하였지만 모두 중국수비군한테 큰 타격을 받고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일본군은 감히 석패에 대해 소홀한 무력행동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코 이 요새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석패요새에 대한 보위전은 중경 혹은 전반 중국을 지켜내는가 지켜내지 못하는가 하는 관건으며 중국군은 전선에 부채형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이는 항전초기 서주전역의 대아장과 비슷하였다. 이 부채형 진지를 고수하면서 일본군의 정면진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장개석 위원장은 제6전구의 진성과 장강수비군의 오기위한테 수없이 많은 전보를 보내어 석패요새의 견고성을 확보할 것을 강조하였다. 5월 27일, 장강수비군에 대한 작전포치가 떨어졌다. 장강수비군은 장양, 이창 2개현 사이에 있는 도초평, 고가댐, 여가파, 조가판, 석패 등을 결전의 요새로 구축하였다. 결전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진성은 제10 집단군과 제94군 주력을 장양과 자악으로 전이시켜 장강수비군의 우측을 엄호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공군전투기가 동원되어 육군과 협동작전을 하게 하였다. 5월 말, 중경의 장개석 위원장으로부터 재차 지령이 떨어졌다. 장개석 위원장은 석패전역을 중국의 “스탈린그라드”라고 하면서 장강수비군의 호련 등 장병들에게 영용하게 적을 무찌르며 석패요새를 사수할 것을 요구, 석패요새의 제11사 사장 호련 또한 석패요새와 생사를 함께 할 것을 전 사에 명령하면서 자기의 지휘부를 화선과 가까운 충객마포에 설치하였다. “승패여하를 불문하고 결심은 있어야” 당시 적아 쌍방의 병력대비를 보면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 2개 사단, 1개 여단으로 도합 10만명. 중국군은 호련이 인솔하는 18군 제11사가 핵심진지를 고수하고 제10집단군 제94군 병력이 엄호가고 공군전투기가 협동작전을 하게 되였다. 호련은 산악작전에 유명한 장군이었다. 그는 석패주위의 우중충한 산세, 깎아지르듯한 절벽, 계곡과 산골짜기, 무성한 수림 등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아울러 요도의 층층마다 장애물을 설치하여 석패진지로 하여금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5월 28일, 일본군 제3사단과 제39사단이 석패를 향해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이 날 일본군 제3사단은 장양의 고가댐으로부터 이창현 경내로 진입, 중국군 제11사의 첫 방선인 남림파진지에 향해 공격을 발동하였다. 동시에 우측의 18사 진지 또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를 서막으로 석패요새를 둘러싼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의 혈전이 전면 개시되었다. 전투는 매우 격렬했는바 중국의 8년 항전중 이 전역은 특히 관건성을 띤 전역으로 되었다. 중화민족의 존엄을 위하여 중국군 제18군 용사들은 일본군의 한차례, 또 한차례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육탄으로 강철의 장성을 만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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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4
  • 오묘한 세계대백과(37)
    현대의 선박은 모두 강철로 건조하며 크고도 무게가 대단하다. 그런데 왜 수면에서 뜰수 있을까? 그럼 우선 우리 함께 실험을 해보자. 만약 친구가 얇은 철판을 물위에 놓는다면 그것은 인차 가라 앉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철판을 갖고 상자를 만든 뒤 다시 물위에 놓으면 그것은 얼마든지 수면위에 뜰 수가 있다. 그럼 철판 자체는 그 중량의 변화가 없지만 왜 이 실험의 전후가 크게 다를까? 이는 힘의 작용은 상호원리와 같다. 우리가 철판으로 만든 상자를 물위에 놓았을 때 상자 자체는 아래로 쏠리는 중력이 있고 그것의 밑부분 또한 밀어올리는 물의 부력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부력이 철상자의 중력보다 클 때는 물은 철판으로 하여금 물우에 뜨게 한다. 부력이란 물체가 액체와 접촉하는 면적이 큼에 따라 부력도 커진다. 즉 철상자가 접촉하는 물량이 철상자보다 크기에 철상자가 물위에 뜰 수 있는 것이다. 선박이 물위에 뜰 수 있는 원리가 바로 이런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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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18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6)
    말타 거석묘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말타, 지점: 말타 내륙과 연해의 작은 섬 함의: 선사(史前)건축의 노천박물관 말타 거석묘는 “말타거석문화시대의 신전”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약 이 거석묘는 기원전 3600년과 2500년 사이에 수건, 아주 오랜 석기시대로부터 남아 내려온 가장 복잡하고도 매력이 있는 유적이다. 말타군도의 작은 섬에는 지금도 거석건물이 30여곳에 있으며 어떤 것은 단독으로 존재하고 어떤 것은 신묘군을 조성하고 있다. 그 중 간티야 신전(杰刚梯亚神亩)과 하가르 킴 신전(哈格尔基神亩) 및 몽나아드라(蒙娜亚德拉) 신묘가 가장 유명하다. 주목을 끄는 거석덩이 말타섬의 하가르 킴 신전(哈格尔基神亩)는 선사(史前)건축예술의 진품이다. 무덤 중에는 길이가 660미터에 달하는 큰 석판이 있는데 말타군도에서 가장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거석덩이다. 하가르 킴 신전 (哈格尔基神亩)의 허다한 문과 창문은 모두 하나의 완정한 거석구멍으로 제작, 석문상에는 무늬조각이 있고 벽에는 조각된 고대 서사부호가 있다. 그리고 신전당으로 통하는 굴속 양측에는 커다란 돌덩이로 만든 “돌걸상”이 있다. 이런 “돌걸상”은 도대체 제사대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지 지금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밀하고 정확한 태양시계 거석건축 중 가장 사람들한테 신기하게 보인는 것은 몽나아드라(蒙娜亚德拉) 신묘로 이를 또한 “태양신묘”라고도 부른다. 사람들이 자세하게 측량하고 발견한데 의하면 이 신묘는 실제상 상당히 정밀하고도 정확한 태양시계였다. 태양광선이 신묘내의 제단과 돌기둥의 위치를 비출 때면 정확하게 여름과 겨울의 주요한 절기를 알려준다. 아주 멀고 먼 옛날, 신묘의 수건자들은 이렇듯 정확하게 태양광선의 위치를 계산해 냈는바 이로 보아 그들이 장악한 천문과 역법 방면의 수준은 매우 선진적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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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18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4)
    ■ 김철균 순자네가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 때는 물론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에 이사간 뒤에도 동네사람들은 흔히 순자네 집을 “집체식당”이라고 불러왔다. 왜냐하면 매일 점심 때만 되면 적어서 10명 이상씩 순자네 집에서 식사를 한다. 오족하면 1년에 김장감으로 배추 3000근씩 산다는 순자네 집이었다. 또한 사람들은 순자네 집을 “집체여인숙”이라고도 한다. 사촌, 육촌과 사돈에 이르기까지 순자네 집에서 숙박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순자네 또한 집식구들만이 단촐하게 집에서 잠을 자본 적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손님은 모두 사연이 있기 마련이었다. 가족이 연변병원에 입원했거나 다른 어떤 사유로 연길로 왔다가는 찾아들군 하는 것이었다. 친구거나 다른 친척이 딱 없어서가 아니었다. 특히 며느리 친정 편의 사돈이거나 사위 쪽의 사돈들도 자주 찾아오군 했는데 그들도 진정 연길에 친지가 없어 순자네 집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 아니었다. 친지들이 있어도 모두 출근족이 아니면 다른 그 어떤 불편한 점들이 많아서였다. 아니 그것보다 순자네 집으로 찾아오면 그만큼 눈치가 보이지 않아 좋아서였다. 순자와 남편 용환 영감 모두가 손님을 열정적으로 대했고 뭔가를 더 주지 못해 안달아하는 사람들이라 손님들 모두가 절로 순자네 집으로 발길이 돌려지기가 일쑤었다고 한다. 한편 신흥소학교 근처에 있을 때면 찾아오는 손님들 거개가 연변병원과 제1백화상점 그리고 공원 등이 가깝기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건 사실이었다. 찾아오는 손님들 거의 모두가 연변병원에 오거나 연길서시장 혹은 제1백화상점으로 왔다가는 돌아가지 못할 때면 순자네 집으로 찾아 들었던 것이다. 순자네가 신흥소학교 근처에서 살 때만 해도 연변의 교통상황은 비교적 덜 발달한 상황이었다. 당시 비교적 거리가 먼 훈춘, 왕청 등 곳에서는 연길로 한번 오려면 크게 별러야 하는 상황으로 당날 치기로 연길로 다녀올 때가 아주 적었다. 대부분 연길로 와서 일을 보고는 친척집에 들려 하루밤 정도 자고는 이튿날까지 일을 볼 때가 많았다. 그러한 견지에서 볼 때 신흥소학교 부근에 있는 순자네 집은 외지 손님들이 손님들이 오가며 들리기가 가장 안성맞춤한 위치라고 할 수도 있었다. 순자네 집으로 오는 손님중에는 자식들이 끌어들이는 손님들도 많았다. 자식들의 동창생, 집체호 때의 친구 및 사업동료와 사회친구들로 끝이 없었으며 그들이 올 때마다 순자는 하루 저녁 사이에도 밥상 2-3차씩 갖추기가 일쑤었으며 해놓았던 밥이 모자라 다시 밥을 지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손님이 집으로 줄쳐서 들어올 때 짜증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 올시다.” 순자의 말마따나 손님접대에 짜증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짜증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은 순자였다. 그리고 그 손님들 중에는 필경 반가운 손님, 그닥 반갑지 않은 손님 등이 있기 마련이며 고기 한점이라도 더 주고 싶은 손님도 따로 있는 법이지만 순자는 천편일률로 손님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하고 똑같이 대접했으며 또 바래주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농촌사람은 인심이 후하고 도시사람은 인색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같은 도시이면서도 지방도시인 훈춘시내나 왕청시내의 사람들은 연길사람을 더욱 인색하다고 했다. 마치 그 옛날 조선에서 모든 조선인들이 한결같이 서울사람들을 “서울깍쟁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연길도 연변의 “서울”이라고 연길사람들이 훈춘 등 지방도시의 사람들보다 더 깍쟁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실제적으로도 도시 사람들이 농촌사람에 비해 더욱 깍쟁이로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도시사람들이 농촌사람들에 비해 인색하고 큰 도시의 사람일수록 지방도시의 사람에 비해 더욱 “깍쟁이”로 보이는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내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딱 한가지만은 허다한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인즉 농촌사람들이 물건구입 혹은 병원 진찰 등을 명목으로 도시로 올 때가 많고 그것도 큰 도시로 올라올 때가 많으며 반대로 큰 도시 사람들이 지방 도시 혹은 도시 사람들이 농촌으로 가는 경우가 아주 적다는 점이다. 그것의 가장 돌출한 실례로는 농촌행 버스를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90연대까지만도 농촌으로 통하는 버스는 흔히 아침과 저녁으로 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흔히 아침에 버스가 농촌으로 갈 때는 승객이 적거나 아주 적은 반면 버스가 도시로 올라올 때는 승객이 미여지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오후 다시 농촌으로 내려갈 때는 승객이 붐비어 발 옮길 자리마저 없을 지경이지만 그 버스가 다시 도시로 올라올 때는 역시 승객이 적기가 가물에 콩나듯 할 때가 허다하다. 이는 농촌사람들이 도시로 다니는 차수가 더 빈번하고 그 인수도 더 많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다음 농촌에서 온 손님들이 도시에서 점심을 먹거나 하루밤 정도를 묵을 경우 여기에 또한 묘한 부분이 있다. 즉 농촌에서 올라온 그 많은 승객들은 도시에 들어온 후 시내에서 점심을 먹기 마련으로 식당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척집이나 친구네 집을 찾는 경우가 허다하며 혹시 잠을 잔다면 여관 혹은 친척이나 친구의 집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농촌에서 도시의 친척을 찾는 손님은 “내가 어쩌가 찾아 갔는데 푸대접을 하더라”고 섭섭해하지만 반대로 도시의 사람들은 “친척들이 우리네 집으로 올 때가 많지 우리가 농촌으로 갈 때가 아주 적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자기네가 어쩌다 찾아온다고 하지만 이렇게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을 우리는 거의 매일 접대해야 할 상황이다”라고 억울해한다. 그렇다면 연변병원과 제1백화점 그리고 서시장과 공원 등이 가까운 순자네 집은 도시 중에서도 손님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제는 다시 본 줄거리로 돌아와 집에 이틀이 멀다하게 손님이 찾아들고 낮마다 자식들이 들어와 점심밥을 축낼 때마다 순자는 그 손님들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군 했다. 즉 아무리 손님이 끊기지 않는 집이지만 그 손님한테는 어쩌다 찾아오는 집이고 믿고 찾아오는 집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순자는 그런 손님들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는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서는 끼니마다 식탁에 올렸고 병원에 가족이 입원한 친척한테는 병원위문과 더불어 병치료에 보태라고 돈을 쥐어주기도 했으며 물건구입을 온 친척한테는 그들과 동행하며 물건구입을 도와주군 하였다. 기실 찾아온 손님이 많을 때면 짜증이 나는건 사실이었지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들 모두가 반가운 손님들인 것만은 분명했다. 자기를 믿고 찾아오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헌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인즉 지난날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 때 병원과 연길제1백화점, 서시장 등이 가까와 손님이 많았다면 후에 북대시장 부근인 민부사회구역으로 이사간 후에도 순자의 집에는 여전히 손님이 매일이다 싶이 찾아왔다.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를 두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지금은 연길시내에 택시가 흔한지라 집이 어디에 있든 상관이 없다고들 했지만 진정한 뜻은 달랐다. 새들도 날아가다가 앉고싶은 나무가 있다고 하물며 사람도 가고 싶은 집이 따로 있기 마련인 것이 아니겠는가! 제16회 인생그라프 인생만년에 들어서면서 순자는 비교적 편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아니 순자는 자신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자부했다. 우선 장장 40여년간 해오던 가두적십자회 주임직을 내놓았는가 하면 자기가 낳은 자식 6명과 한족자식 6명까지 모두 가정을 이루고 안착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집도 민부사회구역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 더는 그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되는 방에서의 비좁고도 지긋지긋한 생활과 작별하게 되었다. 생활상에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지식분자들에 대한 나라의 정책이 점차 완벽해짐에 따라 남편 용환 영감은 국가고급지식인 대우를 받게 되었고 두 내외간으로는 다 쓸수 없을 정도로 노임도 많이 올랐다. 지난 세기 80연대 중반까지 이어져 오던 그 힘든 식량고생을 더는 하지 않게 되었으며 “식량난”이란 이 세글자는 이젠 옛말로 순자네 가정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식들도 다 잘 되었다. 큰 아들 영남이는 연길방직책임유한회사의 의사로 활약하다가 그도 이제는 퇴직했고 둘째 아들은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가 하면 셋째 아들은 개체약방을 경영하고 있으며 딸들 중 큰딸 영순이는 이미 사업터에서 퇴직하고 연길시 “뢰봉반”의 성원 및 연길시 통신보도협회의 회원으로 활약, 둘째 딸과 셋째 딸은 개체호로 상업에 뛰어들었는데 특히 셋째딸 영애는 북경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 도와주었던 화전의 정수금, 장춘의 중경림, 훈춘의 장려와 돈화의 이문영 등은 모두 의료위생 부문에서 근무, 특히 그 중 장춘의 중경림은 모 의학연구소의 중견일군으로 상급 해당부문에서 매우 중시하는 일군으로 되었다. 행복이 찾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자식들은 물론 지난 세기 80연대에 도와 주었던 한족자녀들도 효도가 극진했다. 그제날 “남의 자식을 도와 주어봐야 그 때뿐”이라는 말을 귀에 못박히도록 들으면서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한족자녀들이 친자식들에 별로 못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한족자녀들은 음력설같은 큰 명절은 물론 매년의 “노인절” 때마다 찾아왔다. “너희들이 시부모 혹은 처가집에 가서 ‘노인절’을 쇠어야 할텐데?” 간혹 순자가 이렇게 나무람하면 그들은 연변외 타지방들에는 “노인절”이란 것이 없다고 하거나 한족들은 조선족에 비해 “노인절”을 쇠는 바람이 크게 일지 않는다고 둘러대군 했다. 그렇다면 순자는 그러는 그들이 더 반가왔다. “노인절”을 쇠지 않는 지방에서 살면서 연변에 “로인절”이 있다는것을 알고 찾아오고 비록 연변에서 살지 않지만 조선족들이 “노인절”을 아주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찾아오는 그들의 효성이 더욱 중요했다. 한편 이런 한족자식들이 올 때마다 순자네 집은 “일장 소란”이 벌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들이 명절에 “어머니”를 보러 왔다가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그냥 공짜로 먹을 수가 없어 돈이라도 내놓으면 순자는 한바탕 성을 내군 한다. “지금 애들이 한창 자라고 공부하고 있는 때어서 너희들이야말로 가장 힘들 때란다. 이는 내가 겪어봐서 잘 안다.” “그래도 그렇죠. 저희들이 매달 드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명절에 왔다가 어머니한테 용돈을 하라고 드리는건데 이것마저 거절하면 어떡해요.” “지금 영감의 퇴직금도 올라 난 용돈이 아주 넉넉하다. 그러니 돈을 내놓을 생각을 아예 말어라. 난 그저 너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반갑다.” 이렇게 돈 때문에 싱갱이질을 하다가도 결국은 흔히 한족자식들이 두손을 들고 “투항”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돌아갈 때면 돈 500-1000원씩 질러준다. 이에 한족자식들이 거절이라도 하면 “너희들한테 주는 것이 아니라 손주가 고와서 손주들한테 주는 것”이라며 막무가내이다. 정말 못 말리는 조선족 어머니었다. 2 새천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경제는 날개를 돚친듯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국민들의 생활도 날따라 향상되었다. 즉 사람들은 더 이상 배부르게 먹는데 만족하지 않고 삶의 질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른바 “웰빙시대”를 추구하면서 일종 관광붐을 일으켰다. 순자네 노부부도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명목으로 된 관광단체에 자주 가입했다. 건국 전에 사업에 참가한 노간부들에 대한 연변위생연수학교와 연변 노간부국을 비롯한 해당부문의 따뜻한 배려도 있었지만 김용환 령감 자신이 관광을 즐기면서 해당 부문에서 조직하는 관광이라면 한번도 빼놓지 않고 등록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김용환 영감이 관광을 즐겼다기보다는 마누라와 함께 관광지를 유람하면서 노년을 유쾌히 보내고 싶었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기실 순자는 수십년을 살아오면서 어릴 적에 근로봉사단 아동공으로 봉천에 한번 가본 뒤로 수십년동안 연변밖을 벗어나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순자가 만년에 영감의 덕분으로 북경의 만리장성, 북대하의 바다가 등 명승지들을 두루두루 유람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제일 처음으로 그들 부부가 북경관광을 다녀올 때 순자는 일부러 영감한테 심양에서 내려 하루밤만 체류하자고 졸라댔다. 마누라의 그 목적에 대해 용환 영감은 잘 알고 있었다. 심양 아니, 일제시대 때 심양의 이름은 봉천이었다. 그곳은 수십년간 순자한테 아픈 상처만을 남겨 놓았던 도시이기도 했다. 그날 순자네 노 부부는 심양역에서 내려 곧바로 동릉구로 찾아갔다. 그러나 순자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노 부부는 나많은 노인들한테 물어가며 겨우 그제날 일본인이 경영하던 “도요다이야 고죠” 회사가 있던 옛터를 찾았다. 하지만 그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리 만무했다. 순자의 얼굴에는 몹시 서운해하는 모습이 역연했다. 그러자 영감 김용환은 순자를 위안하면서 그 곳에서 멀지 않은 동릉공원에 가서 휴식하면서 사진이라도 찍자고 했다. 그런데 택시에 앉아 동릉공원에 도착하기 무섭게 순자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영감, 이젠 알리우다. 바로 저 공원이우다. 옛날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저 공원에 찾아와 실컷 울던 일이 기억나우다.” 그도 그럴 것이 심양의 모든 것이 변했지만 동릉공원만은 그래도 적지 않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자는 그 곳의 옛 건물과 아름드리 고목들을 어루쓸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뿌렸다. 그런 건물과 고목들이 기억에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길/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 이는 그제날 순자가 바로 이 동릉공원에서 울면서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 “반달”이었는데 수십년후 동릉공원을 다시 찾은 순자는 조용히 흐느끼며 그 노래를 다시 불렀다. 그러자 용환 영감도 걸걸한 목소리로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그 날 이들 노 부부는 심양 동릉공원어귀에 있는 “9.18”기념비앞에서 사진 한장을 찍었다. 그 날밤 조선족이 운영하는 어느 작으마한 모텔에 투숙한 순자는 그 때 그 봉천시절에 남몰래 부르던 “반달” 등 노래를 부르면서 온밤 눈물로 지새웠고 이를 달래는 영감 용환의 얼굴에도 두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기는 마찬가지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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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18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②광지바위부터 광려산까지
    광주리바위 지명은 연변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 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변에서는 광지바위라 부르고 북한에서는 광주리바위 또는 광지바위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며느리바위 부처바위 감투바위와 같이 지명이 변종 되여 나타나고 있으나 전해 내려오는 설화는 유사하다. 중국 강서성의 불교 명산 려산(옛 지명은 匡廬山) 지명과 동일한 경상남도 창원 광려산(匡廬山) 지명, 충청남도 예산군 후사리에 자리 잡은 광주리봉 지명도 불교지명으로 추정된다. 절이 있어 뒷절 또는 후사라 하여 후사리 지명이 생겨났다는 기록을 보면 광주리봉도 역시 불교문화와 연관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허나 지명풀이에서 유사한 설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밖에 서울 구로구 광주리물 혹은 광지廣池 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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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18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①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
    [동포투데이] 지명 속에는 그 땅에 정착하여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연모습들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고 우리문화 속에 스며든 외래문화의 영향이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최초의 地名을 적을 시기에 음운체계가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비슷한 음을 취해 적기도 했고 어떤 것은 뜻을 취해 적기도 했다. 그 가운데 허다한 지명은 철저하게 소리를 취한 음차(音借))를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원래의 뜻과는 더욱 더 거리가 먼 지명들이 생겨났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소영향에는 와룡동이 라는 마을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소학교 도덕교양자료집으로 편찬한《내 고향연변》의 해설에 따르면 1907년 국자가 서쪽 교외의 와룡동 마을에 창동강습소가 세워졌고 1935년 학교 졸업생들이 와룡동 산비탈에 사은기념비(师恩纪念碑)를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1986년 연길시 지명위원회에서 편찬한 연길시 지명지에는 마을 서쪽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용의 자세를 방불케 하여 와룡동(卧龙洞)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허나 예로부터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왔다.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와룡동은 사실상 왜랑동으로서 돌이 많다는 만주어 음역이다. 토박이 노인들은 어릴 때 상발원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산기슭에 돌들이 널려있어 숨바꼭질 하던 옛 이야기를 종종 꺼내 군 한다. 와룡동 서쪽에 위치한 소백석구(小白石)와 동쪽에 위치한 석마동(石磨洞) 모두가 돌이 들어있는 지명으로서 와룡동의 지명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풀이 된다. 사실 연변지명가운데 와룡동이라고 명명한 곳이 여러 곳이 보인다. 용정시 개산툰 부근의 와룡동도 밭에 돌들이 많아 발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이 지역 노인들도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 왔다. 와룡동에서 서쪽으로 5리쯤 올라가면 돌볏이 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예전에 돌볏마을은 웃 돌볏와 아래 돌볏로 나누어 지여 있었는데 60년대 초에 웃 돌볏가 폐촌으로 사라졌다. 웃돌볏 마을은 두만강 연안에서도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옛 사람들은 갔어도 그 역사의 발자취는 그대로 살아남는다. 오래 전에 이미 폐촌으로 된 웃돌볏 마을 뒤 산에는 아직도 커다란 너럭바위로 쌓여진 거대한 산봉이 돌탑처럼 우뚝 솟아있다. 마치 수없이 많이 부서지고 깨어지면서도 자신의 꿈을 찾아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주민들의 너럭바위처럼 무거운 삶들이 그대로 녹아내려 굳어진 듯이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잃어버린 마을의 영원한 이정표로 남아 그 자리를 외로이 지켜 서있다. 연변의 화룡시 서성진 와룡촌은 산에 둘러싸여있는 꽤나 골이 깊은 산간마을이다. 지금은 마을들을 통합하여 와룡촌으로 불리우지만 예전에는 와룡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어랑촌 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와룡(whe)과 어랑(olhe)이란 지명은 모두 바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 지역 지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주어에서 바위의 의미를 가지는 wehe는 여진어에서 olhe로 나타나고 있다. 돌과 바위로 유명한 함경북도 명천군의 아감면과 경성군의 어랑면 지명은 모두 여진어의 olhe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새겨진 것들이다. 한국지명에는 언뜻 보면 만주어 wehe와 여진어 olhe라는 문자가 들어있지 않지만 꼼꼼히 따지고 보면 돌과 바위의 뜻을 지닌 지명에 숨어 들어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의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 때는 월나악(月奈岳),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조선시대는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月奈>月生>月出’으로 변화했는데 두 번째 글자만 ‘奈>生>出’로 오랜 세월 두고 바뀐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암군 지명도 백제 때에는 월나군(月奈郡)이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영암군(靈巖郡)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월출산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 지명 月奈郡은 만주어에서 바위를 뜻하는 wehe 왜랑이란 음과 근접되여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개의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는 영암(靈巖)군이라는 지명은 이 신령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말로서 月奈는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과 근접하고 있어 월출산(月出山)의 옛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靈巖郡)의 옛 지명 月奈郡은 바위산 바위고을이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옛 지명도 옛 문헌들을 뒤적인 결과 희한하게도 월랑(月良 혹은 越浪)으로 적어 있다. ‘월랑’은 백제시대에 부르던 월량(月良)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도 진안의 대표적인 경관을 ‘월랑팔경(越浪八景)’으로 부르고 당지 주민들은 여전히 월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진안의 팔경을 꼽은 ‘월랑팔경’ 중에서 으뜸가는 마이산은 바위산으로서 진안군 지명도 이 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면 월랑은 만주어wehe 음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松月洞)은 송정동(松亭洞)의 「송」과 월암동(月岩洞)의 「월」자를 따서 송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월암(月岩)동은 원래 워렁바위라 하였고 이 바위가 있는 동네를 워렁바위골, 한자로는 월암동月岩이라 적어 왔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출판한 <<고지도를 통해 본 서울지명연구>>에서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만주어의 wehe 라는 바위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명에 사용된 한자들은 그 본래의 뜻과는 관련이 없이 발음만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시의 지명을 의미로서가 아닌 소리에 따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역시 月달이나 浪 파도의 한자 의미와는 무관한 당시의 바위 wehe라는 소리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月을 달 어음 변이 돌로 추정하고 지명을 해석하여 왔지만 月奈 月良 越浪 月岩의 소리 정체성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과 같이 옛 지명에 사용한 것이 여럿이 발견되고 이들 사이에 소리가 일정한 공통점이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古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에 자리 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토함산(吐含山) 옛 지명 월함산(月含山) ,경기도 파주시 월롱역(月籠驛) 지명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외에도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는 月良村面(경기도 이천부)이라는 지명,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월량골(月凉 혹은 月浪) 지명이 이에 해당한다. 여진어의 olhe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지명으로는 서울특별시 계남근린공원에 옮겨있는 우렁바위 ,전라남도 화순군 우렁바위이다. 한국에 어랑 만두라는 음식 이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랑이란 말은 산골을 말하는 뜻이고 어랑 만두는 그 지역에서 먹던 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보다 더 정확한 뜻은 돌이나 바위가 많은 산간 지대를 말하며 어랑 만두는 이런 깊은 산간 지대에서 먹던 음식을 뜻한다. 이와 같이 지명 어원을 꼼꼼히 따지고 보면 우리 언어의 밑바닥에 스며든 북방민족의 여러 언어요소를 살펴보게 되고 여진족과 만족 거란과 몽고족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언어는 방대한 북방 언어계통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지류이다. 오늘 날에 와서 다시 돌이켜 보면 많은 북방소수민족들의 언어는 치열한 언어전쟁에서 이미 그 자취가 사라졌지만 함경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평안도 지명들은 그 지방의 언어와 더불어 거세찬 역사의 파도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우리 역사와 문화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복잡하게 얽힌 지명들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관건적인 실 머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글 : 허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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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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