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4(토)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지난 5월 13일, 2차 세계대전시기의 일본육군항공병 특공대기지의 소재지었던 미나미 큐슈시와 일본 “지식전람회관”은 재차 보도브리핑을 열고 약 1.4만건의 “신풍(神风)” 특공대원들의 유서를 세계무형문화재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들의 이유는 “단순히 전쟁의 참혹성을 세계에 알리어 이러한 비극이 재차 발생하는 것을 피면하려는데 있다”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극이 재차 발생하는 것을 피하려는데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이 초래된 근원이 바로 일본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신풍”특공대도 천황을 호위할 수 없어

일본에서 “신풍”이란 단어가 기원된 것은 중국 원나라의 원세조가 일본을 침략할 때 생겨난 것이다. 1274년과 1281년 중국의 원나라 군대는 두차례에 거쳐 일본에 대한 동정을 시작했으나 번마다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 때문에 원나라 함대가 큰 손실을 보았으며 두차례의 동정은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러자 당시 일본은 해상에서 불어친 “신풍”으로 인해 원나라 군대를 물리친 것으로 간주, 전쟁 때마다 “신풍”으로 명명한 특공대를 전쟁의 최전방에 내세우군 하였다. 이는 자살공격으로 상대방의 목표를 파괴하는 전술로서 일찍 일러전쟁 시기에도 일정한 효과를 본 것으로 기재되고 있다.

2차 대전시기인 1944년에 이르러 전쟁의 국세는 일본에 대단히 불리하게 되었다. 특히 태평양 해상전에서 일본 해군은 연속 패배를 거듭했다.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상전에서 일본해군이 자체로 발동한 해상전에서 첫 좌절을 당한 이래 그해 6월에 있은 해상전과 1943년의 미드웨이(中途岛) 해상전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1943년 10월의 산타 크루스 해상전에서는 미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항공병의 원기가 크게 상했다. 그리고 11월에 있은 미드웨이 제도 해상전에서 대패하면서 그 때로부터 동맹군은 전략적 반공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1944년 10월 17일, 갓 임명된 일본 제1 항공함대 사령관 오니시 다키시로 중장은 급급히 필리핀으로 향발하여 일락서산의 운명을 만구하려고 시도했다. 다키시로는 일본제국의 골수군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심복으로 역시 진주항 기습의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전 전선에 거쳐 일본이 전면 붕괴되는 위기앞에서 다키시로는 미약한 역량을 최대의 효율을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전투기로 편성된 특공대를 조직, 매 전투기마다 250kg의 폭탄을 싣고 적의 항공모함과 충돌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주지하다 싶이 합격된 비행사는 그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아주 아껴야 할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자살식 공격으로 비행사를 소모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게 했다. 거기에는 두가지 큰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줄곧 유효적으로 비행사들을 구조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즉 해상비행임무를 집행할 때 일단 비행기가 손실보면 비행사는 거의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당시 허다한 비행사들은 일단 임무집행에 나갔다가 회항이 불가능하게 되면 모두 자살성적인 출돌작전으로 죽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었다고 한다.

한편 회항으로 기지에 돌아올 수 없는 일본군 항공병들의 소모속도는 보충속도 시간을 크게 초과, 2차대전 후기 일본군내에는 합격된 비행사들이 매우 모자랐다. 특히 미드웨이 제도 해상전중 많은 일본군 폭격기는 목표를 제대로 명중하지 못하였으며 미군이 필리핀을 진공할 때 일본군 항공병들은 거의 반격의 힘조차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본전통의 “무사도”정신의 자살성적인 기습도 미군에게 주는 영향은 아주 미약하였다. 하긴 전쟁초기 이런 동방식의 인원소모의 전술앞에서 미군도 속수무책이었지만 일본군의 효율은 실제상 아주 낮았으며 명중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선택권리가 없는 “옥쇄”

일본군의 자살성적인 기습의 효율이 낮은 것은 이런 특공인원들의 자질과 심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훈련시간이 아주 짧아 필요한 공중전 기술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미국항공모함과의 “공동훼멸”의 목적에 이룰 수 없었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어떤 특공대원들은 자원희생을 내비치었지만 기타 많은 대원들은 이런 죽음에 대해 원하지 않아 자살성 기습의 효과가 제대로 체현될 수 없었다.

일본학자 카타키 토시로는 역사사료를 찾고 특공대원 행존자들을 방문하는 등으로 3권에 달하는 “육군특별공격대”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저서에 따르면 일본군이 생산하는 폭탄은 투하할 수 없고 전문 항공모함이거나 군함과 부딫칠 때 폭발하는 자살성무기었다. 때문에 이는 비행사로 하여금 희생될 의무만 있게 했다. 하지만 당시 특공대의 지휘관을 맡은적이 있는 육군대위 이와모토 익신은 이렇게 주기 싫은 나머지 비밀리에 비행기 내부구조를 고쳐 폭탄투하장치를 가설, 비교적 순리롭게 회항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또 사사키 토모치 오장에 따르면 그가 자살성적인 비행집행을 피해 회항했을 때 그한테 차례진 것은 “군사령부는 그대가 이미 적함과 부딪치는 것으로 이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제 그대는 진정으로 적함과 부딪치기를 바란다”고 하는 “안위”였다.

이는 일본군부의 숨겨진 진상을 남김없이 말해주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천황의 명예을 위하여 허다한 “신분특공대”의 조직건립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들은 “천황페하는 자기의 몸으로 적의 함정과 부딪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댜”면서 많은 특공대원들이 비행기를 몰고 미군함선에 부딪치는 것을 자신의 개인행위라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기실 당시 일본천황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당시 일본항공병 “신풍특공대”를 “천황한테 충직한 용사”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주필 와타나베 츠네오에 따르면 당시 이들 “신풍특공대” 대원들은 자원해서 용감하게 전선에 나갔고 또한 죽기 전에 “천황페하 만세!”를 부른 것이 아니라 기실은 매 특공대원마다 모두 몹시 망설이었으며 지어 어떤 대원들은 땅에 주저 앉으면서 일어나지도 못했기에 헌병들한테 떠밀려 전투기에 올랐다고 한다.

“옥쇄” 영광? 아니면 수치?

현재 유엔의 과학교육문헌 기구에서는 이미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을 무형문화재로 등록시키기로 하였다. 예하면 2차대전 시기, 세계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뽈스까의 “집중영” 등이다. 일본에서는 “무라야마의 담화”가 발표된 1년 뒤에 히로시마 원폭사건을 유엔 과학교육문헌 기구에 신청하여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시켰고 현재 한국에서는 “종군위안부”를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이 출범한 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세력들은 부단히 가짜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침략전쟁을 미화시키고 있다. 이들은 지난날의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를 무형문화재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특공대”, “옥쇄” 등을 미화시키는 언론을 퍼뜨리면서 군국주의 분자들을 춰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이른바 일본의 “지식전람회관”을 참관한 사람들 역시 이와 비슷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지식전람회관”이야말로 평화의 기치를 내건 군국주의 찬양하는 전형으로 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특공대원”들은 시대의 영웅으로 부각하고 있으며 침략전쟁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공대원”들의 “사적”으로 침략전쟁을 미화시키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신풍특공대”의 역사에 대해 기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제는 명확해야 하는바 이런 특공대원들의 유물과 유언을 주제로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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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풍(神风)특공대 모두 자원으로 죽음 선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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