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김 미 선



1992년 5월 12일, 나는 남들처럼 빚을 내서 한 보따리 되는 중국약을 사 가지고 희망의 꿈에 한껏 부풀어 천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푸른 물결이 끝도 없이 무연히 펼쳐있는 바다도 처음 보았고 커다란 물고기 세마리가 곡예를 하듯이 공중에 솟구치는 것도 처음 보았다.
드디어 우물안의 개구리가 세상 구경 나왔다고 해야 할가?


내가 산 배표는 3등선실인데 노란 장판을 깔아놓은 넓은 방에서 사람들이 기쁨에 들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야단법석이다. 지금도 눈에 선한것은 선실에서 본 한국영화 “장군의 아들”이였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접했다. 우리와 같은 글,같은 말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에 친밀감이 들었다.


인천부두에 도착했지만 아직 새벽이라 해관 사무원들이 출근하지 않아 우리는 계속 배우에서 멀거니 몇시간을 더 보낸후 한국땅을 밟게 되었다.


나는 본래  별 걱정 없는 직장생활을 했었다.그럭저럭 먹고살기는 괜찮았으나 그냥 저축이 없이 빠듯한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 “직장에 적을 두고 나와 창업할 수 있다” 정책이 나왔다. 고민끝에 나는 직장에서 나와 자영업으로 돈을 벌기로 했다. 그해가 바로 1987년이었다.
 

식당도 해보고 멀리 관내에 가서 쵸콜렛 등 식품을 구입해 식품상점에 되넘겨 팔기도 하다가 침직기계 몇대를 사놓고 집에서  침직품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직장인들의 월급이 고작 인민폐 70원좌우였으나 유행에 맞는 털실세타 하나를 연구개발하면 하루에 300원이상 벌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한국행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와서 먼저 간 곳은 서울 전철역이었다.한보따리나 되는 약을 당장 팔야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아줌마들이 앞에 약들을 널어 놓고 앉아 있었다. 약장사하는 중국동포들이 적게 쳐도 이백명정도는 되었다.나도 자리를 찾아 앉아 그들처럼 약들을 차려놓고 앉으면 되는판이다.가방을 든채 몇번이나 돌고 돌았지만 손바닥만한 체면때문에 풍덩 물앉아 약을 팔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도저히 없었다. 결국 약가방을 메고 다시 돌아왔고 생각끝에 일자리나 얻어 돈을 벌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노원구의 한 음식점에 취직을 하였다. 한달 월급이 한화로 45만원이였다. 가지고간 약들은 후에 친구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다.


삼계탕을 하는 작은 음식점이라서 주인장과 내가 주방에서 일하고 그 안주인되는 이쁘장한 아줌마는 안방에서 화장하고 항상 어디론가 나갔다가 저녁에야 들어오군 했다. 그래서 나는 주방일 이외에 집청소도 도맡아야 했다. 그 집에 딱 한달 있었는데 거짓말보태 눈물 한동이는 흘렸을 것이다. 두고온 자식과 부모생각에 눈물이 났지만 더욱 화나는 것은 안주인의 횡포였다.


지금에 와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지만 급별과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했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안주인한테 말을 들을 때마다 억울하고 분해서 구석진 곳에 숨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열흘동안이나 배변을 보지 못하였을까?! 그것이 속에서 독이 되어 죽은 사람도 있다 하던데.


한달동안의 월급을 손에 쥐고 나는 가방을 챙겨 그 집을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안주인이 나를 신고해 중국에 붙잡혀 가게 만들겠다고 방방 떨었다. 그날 나는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두었던 비싼 다이어트약 4곽을 몽땅 주고 그집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의정부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거기서 한 일년을 하니 일부 단골 손님들이 나를 보고“ 어~ 이 아줌마 많이 세련됐네.”하고 말하는것을 가끔 들었다.그 말을 들으면서 한국 온후 일년간은 시골 암탉을 시내 장에 갔다 놓은 꼴을 보여줬을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푸후~ 하고 웃음이 나가기도 하였다.


불법체류하는 조선족 티를 내지 않자면 한국말을 빨리 배워야 했고 주인의 잔소리를 안듣자면 온 신경을 다 모아 일을 빈틈없이 깔끔하게 해야만 했다. 한국 음식점에서 일하는 목적이 두가지였는데 돈을 버는것이 하나이지만 그보다 중요한것은 번 돈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서 근사한 음식점 하나 차릴 목적에 한식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는 생각도 있었다.


한번은 회사내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장이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식당은 아침 40명, 점심 100명, 저녁에 40명에 밤 12시에 20여명이 식사하였다.사모님이 점심에 와서 잠간 거들어주고 오후에 가고 나면 나 혼자서 했는데 일하는 것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그래도 혼신을 다해 일했더니 가끔식 돌아보고 가던 사장님이 회사 노조에서 내가 하는 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칭찬하더라고 알려주면서 월급 십만원을 올려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후 식당일에 지겨움을 느낀 나는 안산에 있는 시화공단의 한 작은 회사에취직했다. 강철로 만든 각종 출입문, 간판, 매대, 또 용처를 알 수 물건들을 주문을 받아서 뼁끼 칠을 하는 공장이였다. 공장에는 또 한국에 온지 한달도 채 안되는, 김철이라고 부르는 흑룡강에서 온 조선족 남자가 있었다.처음에 그는 공장의 류수작업이 습관이 안된 모양이었다. 중국에서 한가하게 일하던 습관때문에 휴식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작업대 뒤에 가서 혼자 담배를 피우고 나올 때면 류수작업에 차질이 빚어지군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일은 터졌다. 회전하는 줄에 닦아 놓은 물건들을 걸어야 하는데 물건이 또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바로 이때 «야, 이 씨팔 놈아. 다른 사람들 일하는게 안 보여? 너만 피곤하냐. 너 같은 놈하고 일하다가 내가 스트레스 받아 못 산다. …..» 깜짝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평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움질을 잘하는 최씨성의 한국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 김철을 향해 삿대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철이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그 소리가 나오기 바쁘게 최씨가 김철이의 뺨을 철썩하고 후려친다. 김철이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 올랐다. 


«또 싸움이야, 그만두지 못해!»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에 있던 장과장이 최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그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는 뭔가 부글부글 끓어 번지고 있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혼자서 담배를 피운 김철의 잘못도 있지만중국동포라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최씨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최씨가 마음 먹고 나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그의 달라진 어투나 행동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한 두번은 참을수 있으나 중국동포를 사람취급 하지 않는 그의 언행을 보면서 나의 마음은 독으로 번져지고 있었다.


(기회를 보자. 네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을때까지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그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최씨가 무거운 쇠문짝을 받쳤던 스츠로프를 돌아서 일하는 나를 향해 걷어찼다. 스츠로프는 나에게 맞쳐왔고 그것이 아프지는 않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홱 돌아서는 찰나에 최씨가 곁에 있는 친구에게 입을 비쭉이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빽 소리 질렀다.


«이것을 왜 나한테 걷어차는거예요?!»
«왜? 내가 차고 싶으면 차는거지 그게 어떻단 말인데?» 최씨는 의기양양해서 소리쳤다.


«이런것을 함부로 차 저한테 맞혔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웃어대는 저의가 무엇이예요?» 내가 소리 질렀다. 공장은 기계소리 때문에 거리가 좀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기에 혼신을 다 해 소리 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독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야. 이 씨팔년아. 내가 웃고 싶으면 웃지. 너 때문에 내가 참아야 되는거니? 안 그래 .» 여전히 희죽거리는 그한테 나는 별렀던 포탄을 터뜨렸다.


«야, 너 부모가 있니? 너같은것도 아들이 있다고 밖에 나가 남들하고 말하겠지?!»이것이 내가 터뜨린 첫 번째 폭탄이였다.
«이 미친 년이 부모는 왜 욕 보이는거니?» 최씨는 그래도 효자일수는 있었다. 길길이 날뛰면서 나한테 때릴듯이 다가 왔다.
나의 고사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야, 너 학교라는데 다녀 봤니? 너 부모 교육이라는걸 받아 봤니? 인피쓰면 다 사람인줄로 아는데. 천만에! 분명히 알아 둬! 너보다 못한 사람은 이세상에 없어, 중국에서 살면서 소수민족이지만 너처럼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종래로 못 봤어. 이 개보다 못한 물건짝아! 대한민국에 너 같은 야만인이 있다는 것이 내가 다 창피스럽다. ……………» 또박또박, 높은 톤으로 내뱉는 나의 목소리에 공장은 가동을 뭠췄고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의 장과장을 비롯한 공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빙둘러 서 있었다.


나한테 다가왔던 최씨가 슬금슬금 자기 자리를 가고 있었지만 나는 따라가면서 계속 고사포를 쏘아댔다. 말을 마친 나는 그자리에서 로동복을 벗어 버리고 숙사로 들어가 나의 물건들을 챙겼다. 그리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밖에서 금방 들어온 사장님이 장과장한테서 방금 벌어진 일을 회보받고 있었다.


«사장님,저 인제 일을 그만 두겠습니다.»
«아줌마 그러지마요. 아줌마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물러서는거예요?아줌마가 가면 아줌마가 잘못했다고 승인하는것밖에 안 되잖아요.»

«저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고발하면 잡혀가요. 그러니 다른 일자리를 찾으렵니다. 그 동안 관심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그러자 사장님은 나를 자리에 앉혀주며 최씨가 신고 못하게 조치를 취할 것이라면서 안심하고 일하라고 다독여주었다.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 갔다. 이튿날부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변한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최씨의 친구인 고씨와 리씨도 “아줌마 중국에서 변호사한거 아니야?!” 하고 우스개를 했고 우리는 함께 통쾌하게 웃을 수가 있었다.


한국에 갔다왔기 때문에 우물안의 개구리였던 내가 너무나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던 거리감때문에 많은 오해도 있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친정집 같은 감정은 그 누구도 무마할 수가 없다. 내가 흘렸던 눈물과 내가 힘들어 했던 그 나날들이 내가 보다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주춧돌이었다.


吉林省 延吉市 金 美 善


(중국조선족대모임 한국생활수기 응모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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