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회 과외의무보도원
■ 김철균
순자네가 연길시 신흥가로 이사를 간 뒤 몇년 안되어 아들 영남이는 중앙소학교에 붙었고 그와 연연생인 딸 영순이가 1년 뒤 또 연길시 중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의 교원들과 자주 대면하는 일이 가끔씩 있게 되자 순자는 오래동안 접었던 교원의 꿈을 꾸던 시기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교원 – 아,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성스러운 인민교원인가! 해빛도 찬연한 교정에서 수십쌍의 어린 눈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단에 올라 나라의 미래들한테 지식의 꿈을 심어주고 이상의 날개를 펴게 하는 인민교원 ㅡ …
애들을 학교로 데려가고 또 학교로부터 집으로 데려오면서 인민교원들을 볼 때마다 순자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는 눈길로 대할 수가 없었다.
오, 어린 소시절부터 바라마지 않았던 교원사업이었다. 순자는 인민교원사업을 포기하고 남편 김용환과의 결혼을 선택했고 또한 이러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해 단 한번도 후회한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교원의 꿈을 머리속에서 영영 묻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일찍 소학교 시절부터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그 꿈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없는 순자였다. 인민교원 ㅡ 순자는 다만 국록이나 타먹고 남들한테서 “선생님”으로 불리기 위해서 인민교원을 흠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애들이 더 없이 사랑스러웠고 그만큼 애들속에 있고 싶었다. 그것은 단 한시간이라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어느날, 순자는 반급의 전체 학부모들을 대표하여 교단에 서는 일이 있게 되었다. 순자가 자청해서 교단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학부모 중 순자와 한동네에서 살고 있는 한 중년여인이 순자를 적극 추천하여 교단에 서게 하였던 것이다.
그 중년여인이 순자더러 교단에 오르도록 적극 추천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 것인즉 신흥가에 이사와서도 순자는 여전히 하남가두에 있을 때처럼 모든 활동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특히 민족단결과 위생청결에 관한 국가의 해당문건같은 것을 선전할 때면 조리성이 강한데다 말 또한 청산유수여서 가두주민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그 어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주 순자를 청하여 조언같은 것을 듣군 하였는데 이번에는 그 중년여인의 추천으로 신흥소학교의 교단에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이는 기실 순자 자신이 바라마지 않던 일이기도 했다.
그날의 모임은 그 옛날 우리 말이 있어도 우리 조선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일제의 노화교육을 받으며 힘들게 공부하던 부모세대의 동년시절을 회억하면서 지금의 어린이들한테 교양을 주기 위한 모임이었다.
어린친구들, 지금 친구들앞에 나선 이 아지미는 일찍 1938년 용정의 육도소학교에 입학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해온 사람이랍니다. 그 때 우리 연변은 일본놈들의 강점하에 있었습니다. 일본놈들이란 어떤 놈들인지 여기에 앉아있는 친구들은 거의 모를 것입니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불사르는 이른바 “3광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우수하고도 아름다운 우리 말이 있어도 우리가 조선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조선글을 쓸 수가 없게 하였습니다. 누가 만약 조선말과 조선글을 사용하기만 하면 구두발에 채이거나 볼기를 얻어맞기도 했으며 쩍하면 벌을 서기가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몰래 조선말을 하였고 조선문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인들한테서 옛말같은것을 들으면서 중국의 사마천, 이백, 두보, 백거의, 임측서와 조선의 이순신장군, 남이장군과 농민폭동을 일으킨 임꺽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
친구들, 현재 친구들은 아무런 구속도 없이 우리 말과 글을 맘껏 배울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소수민족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우리 연변에도 주덕해 주장과 연변대학의 임민호교장 등 많은 조선족간부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친구들도 공부를 열심히 잘하여 나라의 훌륭한 인재로 자라나야 될 것이 아닙니까?(박수)
……
억양이 부드럽고도 조리정연한 순자의 발언은 모임에 참가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큰 아들 영남이네 반급의 담임교원은 너무도 감탄된 나머지 순자의 두손을 꼭 잡고 “참 말씀을 잘하셨습니다. 정말 훌륭한 말씀을 하였습니다”라고 하며 탄복하였다. 그리고 방청객으로 교실로 들어왔던 교장선생님과 기타 학교지도부 일군들도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수군대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뒤 며칠이 안되어 영남이네 담임교원은 순자를 부르더니 학교의 총 보도원을 맡아줬으면 하는 교장선생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순자는 원체 교단에 오르고 싶었던터라 쾌히 승낙하였다. 그러자 신흥가두 판사처에서도 순자한테 신흥가두의 총 보도원을 맡고 신흥가두에 집을 둔 학생들의 학습성적이 올라가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 때로부터 순자는 영남이가 다니는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 및 신흥가두의 과외보도원이 되어 학생들앞에 자주 나서군 하였는데 학생들은 물론 기타 교원과 가두판사처의 직원들까지 순자를 “김선생님”이라고 하며 깍듯이 존경하군 했다. 참, 노임 한푼 없는 과외보도원 선생님, 하지만 순자는 이것으로 하여 무한한 긍지를 느낄 때가 많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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