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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북-중 관계의 악화와 저우언라이 방북

  • 화영 기자
  • 입력 2025.03.03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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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1965년,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두 나라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북한은 심지어 중국과의 전쟁까지 준비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직접 방북하여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북-중 관계의 악화


1965년, 북-중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북한 내 친중파가 완전히 숙청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줄곧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형제 국가였던 두 나라가 이렇게 긴장된 상태로 치닫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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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여 동북 지역을 통해 중국을 침략하려 했다. 이에 대항하던 일부 혁명가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 북부에 남아 독립 운동을 이어갔고, 이들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다. 다른 일부는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투쟁을 이어갔으며, 이를 대표한 인물이 무정이었다.


무정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 전쟁에 참여했고,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 북부에 자신의 정권을 세웠다. 이후 무정은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당시 북한 수뇌부와의 정치적 의견 차이로 인해 친소 세력에 밀려 북한의 2인자에서 포병 사령관으로까지 밀려났다.


결정적인 계기는 한국 전쟁 당시였다. 유엔군에 맞서라는 명령을 받은 무정은 군의 전력을 살리기 위해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으며, 이는 김일성에게 큰 분노를 샀다. 김일성은 무정을 비난하며 모든 직위에서 파면하고 처형하였고, 이로써 북한 내 친중 세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당시 북-중 관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소련이 북한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한국 전쟁 당시 중국의 원조도 상당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균형 외교를 시도했다. 그러나 1959년 소련이 중국의 핵무기 개발을 돕기로 한 협정을 파기하고 중국에 있던 소련 전문가들을 철수시키면서 중-소 관계는 깨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김일성은 중국의 마지막 지원군이 철수한 후 대대적인 숙청 운동을 시작하여 친중파와 친소파를 모두 제거했다. 그 결과 북한에는 김일성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두 나라의 지원이 필요했다. 따라서 누가 더 많은 혜택을 주는지에 따라 외교 정책을 선택했다.


1961년, 중국 경제는 큰 어려움을 겪으며 대북 원조가 지연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중국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있으며, 중국에 원조를 촉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국은 체면을 잃을까 두려워 허리띠를 졸라매고 북한에 원조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석탄 공급 문제가 발생하였고, 김일성은 중국에 공급된 석탄의 질 문제를 지적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에 대해 "품질이 좋지 않으면 언제든지 알려달라"고 약속하며 긴장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1965년,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소련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북-중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소련에 기울다

 

북-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북한은 중국과 북한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소련이 북한을 지원하면서 북-중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소련은 북한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강화하며 중국을 견제했다.


1964년, 소련과 유럽의 일부 사회주의 국가들은 경제 상호 원조 위원회(EEC)를 설립했다. 북한은 소련의 권유로 EEC에 가입했고, 이로 인해 소련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소련은 북한에 군사 장비, 기술 지원을 제공하며 경제적 지원도 강화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소련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은 북한에 의도치 않은 지원을 경계하라고 경고했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하고 소련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결국 북한은 소련에 완전히 기울며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로 인해 중국과 북한 국경에 군대가 배치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방북


1965년, 북-중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자,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직접 북한을 방문하여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 저우 총리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가지며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저우 총리의 방북은 북한의 태도를 완화시키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다.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사를 보였지만, 소련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후 1969년, 소련이 중국 영토를 침공하면서 중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때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다시 개선하려 했고, 1970년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며 북-중 관계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북-중 관계의 회복에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은 바로 푸에블로호 사건이다. 1968년, 미국의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역에서 첩보 활동을 하던 중 북한에 나포되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중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중반에 북한 편을 들며 북한을 지원했다.


푸에블로호 사건은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다시 한번 악화시킬 뻔했으나, 중국의 지원으로 인해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과 북한 간의 협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5년 북-중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전쟁의 위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의 방북과 푸에블로호 사건을 통해 북-중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들은 국제 정치에서 외교적 노력과 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오늘날의 북-중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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