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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40명’ 거느린 항일 영웅?…전설 걷어낸 판사오쩡의 진짜 인생

  • 허훈 기자
  • 입력 2026.09.1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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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오쩡의 ‘부인 40명설’을 소재로 재현한 장면. 판사오쩡에게 40명의 부인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만, 가족들은 실제 부인은 7명이었다며 이를 부인했다. [인터내셔널포커스]

[인터내셔널포커스] ‘부인 40명’, ‘판하얼(范哈儿·바보 판)’, 항일 장군.


중국 쓰촨의 군벌 판사오쩡(范绍增)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젊어서는 무장조직에 몸담았고 군벌전쟁을 누볐다.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부대를 이끌고 최전선으로 향했다. 국민당 장성이던 그는 1949년 휘하 병력과 함께 봉기했고, 신중국에서는 체육행정가로 여생을 보냈다.


1894년 쓰촨성 다주에서 태어난 판사오쩡의 젊은 시절은 평범하지 않았다. 10대 후반 무장세력에 들어갔고 파오거(袍哥) 조직과도 인연을 맺었다. 군벌들이 쓰촨의 패권을 놓고 싸우던 시절에는 수많은 전투와 세력 다툼을 거치며 장군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의 총구가 일본군을 향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화하면서다.


판사오쩡은 병력을 모집하고 무기를 마련해 항일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새 총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낡은 무기라도 수리해 달라며 비용을 자신이 부담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충칭에서는 저우언라이를 찾아갔다. 관련 회고자료에는 판사오쩡이 부대를 어떻게 이끌어야 일본군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지 의견을 구했고, 저우언라이는 군기와 장병 단결, 민간인 보호 등을 강조했다고 기록돼 있다.


1938년 판사오쩡은 국민혁명군 제88군 군장이 됐다. 이후 병력을 이끌고 쓰촨을 떠나 장시와 저장 등 항일전선으로 향했다.


1942년 저장에서는 그의 이름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해 저장·장시 일대에서 일본군이 대규모 공세를 벌이던 가운데 제15사단장 사카이 나오지 중장이 란시 부근에서 중국군이 설치한 지뢰를 밟았다. 사카이는 치명상을 입고 숨졌다. 당시 판사오쩡의 제88군도 이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다.


후대의 일부 글에서는 이를 ‘판사오쩡 부대가 일본군 중장을 사살했다’고 소개한다. 실제 상황은 조금 다르다. 여러 중국군 부대가 전투에 참여했고 사카이의 직접적인 사인은 지뢰 폭발이었다. 판사오쩡 개인의 전공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쟁 이야기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판사오쩡의 사생활이다.


그에게 ‘부인이 40명이었다’는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수십 명의 여성을 거느렸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퍼졌고 중국의 유명 수영선수 양슈충(杨秀琼)이 그의 ‘17번째 첩’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인터넷에서 판사오쩡을 검색하면 항일 장군이라는 이력과 함께 ‘40명의 부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하지만 가족들의 기억은 다르다.


딸 판즈리(范之俐)는 아버지에게 실제로는 7명의 부인이 있었다며 40명설을 부인했다. 아들 판즈웨이(范之伟)가 남긴 글에도 형제자매 12명이 7명의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명한 양슈충 이야기도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양슈충이 강제로 판사오쩡의 첩이 됐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만 가족들은 이를 부인했다. 판사오쩡의 화려한 사생활에 소설과 야사가 덧붙으면서 ‘40명’과 ‘17번째 첩’이라는 이야기가 점점 커졌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판사오쩡의 인생은 1949년 또 한 번 크게 바뀌었다.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지던 그해 12월, 그는 쓰촨 취현에서 휘하 병력 2만여 명과 함께 봉기를 선언했다. 20년 넘게 국민당군에서 활동했던 장성이 중국공산당 측으로 방향을 돌린 순간이었다.


신중국 수립 뒤 그의 삶은 전쟁터와 멀어졌다.


중남군정위원회 참사 등을 거쳐 허난성 체육운동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한때 수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전장을 누볐던 군벌 장성이 지방 체육행정을 담당하는 공직자로 변신했다.


판사오쩡은 1977년 3월 정저우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그의 83년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듯한 이력이 한꺼번에 들어 있다. 무장조직의 청년이 쓰촨 군벌 장군이 됐고, 군벌전쟁을 치르던 장수가 일본군과 싸웠다. 국민당 장성으로 살아온 그는 1949년 봉기를 선택했고, 말년에는 신중국의 체육행정가로 살았다.


그 위에 ‘40명의 부인’이라는 전설까지 덧씌워졌다.


하지만 확인되는 삶만 들여다봐도 판사오쩡은 충분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굳이 ‘부인 40명’이라는 전설을 사실로 만들 필요가 없다. 군벌에서 항일 장군으로, 다시 봉기 장군과 체육행정가로 이어진 그의 83년만으로도 이야기는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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