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지금은 중국동포 밀집지역으로 익숙한 이름이지만 처음부터 ‘조선족 거리’였던 것은 아니다.
가리봉동의 역사는 한국 산업화와 맞닿아 있다. 1960년대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젊은 노동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공장 주변에는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은 이른바 ‘벌집’이 생겼고 시장과 식당, 여관도 노동자들을 따라 들어섰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산업구조가 바뀌고 공장들이 이전하면서 동네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 새로운 사람들이 빈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중국동포였다.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연변과 중국 동북지역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가리봉동은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곳이었다. 주변에 공장과 일자리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방을 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정착한 동포를 통해 일자리와 숙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 한국에 도착한 사람에게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어디에서 사람을 구하는지, 어느 공장의 품삯이 나은지, 싼 방은 어디에 있는지 같은 정보가 사람을 통해 전달됐다.
한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친척과 고향 친구가 찾아왔다.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불렀다.
1970~80년대 지방에서 올라온 한국인 노동자들이 살았던 벌집과 작은 방에는 새로운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 산업화의 노동자 주거지였던 가리봉동이 중국동포들의 새로운 정착지로 다시 변해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중국음식점과 식품점, 여행사 등이 밀집한 ‘연변거리’가 1990년대부터 완성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였다.
2002년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 자진신고제 시행 등을 거치면서 중국동포들의 생활공간과 상권도 점차 거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동포를 상대로 하는 음식점과 식품점, 노래방 등이 하나둘 자리 잡으면서 가리봉동은 본격적인 중국동포 생활권으로 변해갔다.
고향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생기고 중국 식재료를 파는 가게가 문을 열었다. 한국에서 번 돈을 중국의 가족에게 보내고 일자리와 숙소 정보를 주고받는 일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가리봉동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다.
낯선 한국에서 중국동포들이 서로를 찾아 만든 생활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몰리면서 갈등도 나타났다.
생활방식과 문화의 차이를 둘러싸고 기존 주민과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중국동포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낯선 시선과 선입견도 더해졌다. 2004년에는 한국인 상인과 중국동포 등이 함께 ‘화합과 공존의 거리’를 선포하며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리봉동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조선족 타운’, 그리고 때로는 ‘우범지대’.
그러나 외부에서 바라본 가리봉동과 그곳에서 생활한 사람들의 가리봉동은 반드시 같은 공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동네였지만 누군가에게는 한국에서 처음 마음 놓고 고향말을 하고, 고향 음식을 먹으며 일자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하고 가정을 꾸리며 한국 생활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들도 늘어났다.
잠시 돈을 벌고 돌아가려던 사람들이 어느새 5년, 10년을 살게 되면서 질문도 달라졌다.
우리는 언제까지 ‘잠시 한국에 온 사람’인가.
가리봉동은 그 질문이 시작된 공간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중국동포들의 생활권은 가리봉동에 머물지 않았다.
재개발과 주거환경 변화, 중국동포 사회의 성장과 함께 생활권도 주변 지역으로 넓어졌다.
그 중심에 대림동이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대림동은 가리봉동을 넘어 중국동포들의 또 다른 생활 중심지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이자 새로운 편견도 따라왔다.
다음 회에서는 그 거리로 들어가 보려 한다.
※ 이 연재는 정부·공공기관 자료와 당시 언론보도, 연구자료 등 공개된 기록을 토대로 한국과 중국동포 사회의 변화를 살펴보는 사회문화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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