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1930년대 중국 상하이 영화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조선 출신 배우가 있다. 중국식 이름 진옌(金焰), 한국 이름 김염. 본명은 김덕린(金德麟)이다.
그는 중국 영화에 출연한 외국 출신 배우 정도가 아니었다. 중국 영화의 첫 황금기로 불리는 1930년대, 당대 최고의 남자 스타 자리에 올라 ‘영화황제(電影皇帝)’로 불렸다.
김염의 삶은 가족사부터 격동의 동아시아 역사와 맞닿아 있었다.
1910년 한성에서 태어난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였던 김필순의 아들이다. 김필순은 신민회에 참여했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관여했다. 어린 김염도 가족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아버지를 일찍 잃은 뒤 중국에서 성장한 그는 1920년대 후반 상하이로 향했다. 당시 상하이는 영화사와 극장, 신문·잡지가 몰려들며 중국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무명의 조선 청년에게 처음부터 스크린의 중심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영화사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작은 배역을 맡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극작가 톈한(田漢)이 이끌던 남국예술극사에서 연극을 경험한 것도 배우로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김염을 스타로 끌어올린 인물은 중국 영화사의 거장 가운데 한 명인 쑨위(孫瑜) 감독이었다. 1929년 「풍류검객」에서 주연을 맡은 데 이어 1930년 롄화영화공사의 「야초한화(野草閑花)」에서 롼링위(阮玲玉)와 호흡을 맞추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가 보여준 남성상은 당시 중국 관객에게 신선했다.
전통적인 문약한 남성이나 멜로드라마의 신사와 달리 젊고 건강하며 활동적이었다. 반듯한 외모와 자연스러운 연기,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당시 중국 사회가 갈망하던 새로운 청년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스타덤은 대중의 투표에서도 확인됐다.
상하이 전성일보(電聲日報)는 1932년 5월 ‘중국 10대 영화스타’를 뽑는 독자투표를 시작했다. 이듬해 공개된 결과에서 후뎨(胡蝶)가 1만3582표, 롼링위가 1만3490표, 김염이 1만3157표를 얻었다. 김염은 전체 3위였지만 남자 배우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이 무렵 그에게 붙은 이름이 바로 ‘영화황제’였다.
하지만 이 칭호에는 또 다른 면도 있었다. 당시 영화신문과 잡지들은 독자 확보를 위해 스타 인기투표와 사생활 보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김염의 ‘영화황제’ 역시 배우 개인의 인기와 함께 근대 상하이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스타 산업과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상징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염 자신이 화려한 스타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 중국 영화계에서는 일본의 침략과 빈부격차, 노동자 문제 등을 스크린에 담으려는 좌익영화운동이 확산됐다. 김염의 배역도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청년에서 노동하고 저항하는 새로운 시대의 청년으로 변화했다.
그 흐름을 대표하는 작품이 1934년 쑨위 감독의 「대로(大路)」다.
김염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로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의 중심인물 ‘진거(金哥)’를 연기했다. 영화 속 청년들은 땀 흘려 길을 만들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다 희생된다.
여기서 김염의 몸은 더 이상 스타의 외모를 보여주는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노동하고 저항하는 청년의 육체로 바뀐다. 일부 연구자들이 「대로」 속 김염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중국과 조선의 연대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유다.
김염 자신의 삶도 이런 영화와 분리하기 어렵다. 조선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성장한 그에게 일본의 중국 침략은 다른 나라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화되고 상하이가 일본군에 점령된 뒤에도 그는 일본 측이 통제하는 영화 제작에 협력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려했던 상하이 영화산업도 전쟁과 함께 급격히 재편됐다.
전쟁 이후 김염은 다시 상하이 영화계에서 활동했고 1949년 신중국 수립 이후에도 배우의 길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중국 영화사에 가장 강렬하게 새긴 시기는 역시 1930년대였다.
1983년 12월 27일 김염은 상하이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김염을 단순히 ‘조선족 스타’라는 한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가 태어난 1910년은 오늘날 중국의 민족분류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조선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한 배우’라고 보는 편이 그의 생애를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의 삶에는 식민지 조선과 독립운동가 가족, 근대 상하이의 대중문화, 중국 좌익영화운동과 항일전쟁이라는 20세기 동아시아의 굵직한 역사가 겹쳐 있다.
조선을 떠난 소년 김덕린은 상하이에서 진옌이라는 이름의 배우가 됐고, 마침내 수많은 중국 관객이 선택한 ‘영화황제’가 됐다.
김염이 중국 영화사에서 특별한 이유는 유명한 조선 출신 배우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스크린과 삶에는 국경을 넘어 살아야 했던 한 디아스포라 청년의 운명과 격동의 동아시아가 함께 투영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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