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하영이 증조부 안상호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의혹과 관련해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영은 12일 자필 사과문을 통해 “과오를 무겁게 받아들이며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가족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논란 이후 관련 자료를 직접 확인하면서 과거 행적을 알게 됐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논란은 하영이 지난 7일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자신을 4대째 의사 집안이라고 소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증조부가 일제강점기 의사로 활동한 안상호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과거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됐다.
비판할 부분은 있다. 가족사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증조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소개한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 논란 초기 소속사가 충분한 검증 없이 친일 의혹을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가 입장을 정정한 대응도 아쉽다.
하지만 비판에도 선은 있어야 한다.
논란이 커지면서 하영이 출연한 방송의 다시보기가 중단되고 관련 영상이 비공개 처리됐다. 광고 영상도 내려갔으며 신작 관련 인터뷰까지 취소됐다. 약 100년 전 증조부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증손녀의 현재 연예 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증조부의 잘못까지 증손녀가 책임져야 하는가.
친일 행적은 역사적 자료에 따라 철저히 규명하고 평가해야 한다.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책무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후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영 자신이 친일 행위를 한 것도, 이를 옹호한 것도 아니다. 증조부의 행적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미화했다는 사실 역시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영에게 물을 수 있는 책임은 자신의 말과 행동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가족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부주의는 비판받을 수 있지만 증조부의 역사적 책임까지 증손녀에게 넘기는 순간 비판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우리 헌법 제13조 3항은 자기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는 국가에 의한 법적 불이익을 막는 원칙이어서 방송사의 편성이나 기업의 광고 판단, 대중의 비판을 곧바로 법률상 ‘연좌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회적 책임 전가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잘못했으니 후손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인식이 당연시되면 법에서 사라진 연좌제적 사고가 여론 속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친일 행위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될 수도 없다. 사람은 혈통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동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하영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제 우리가 지켜볼 것은 증조부의 과거가 아니라 하영 자신의 앞으로의 행동이다.
안상호에게 친일 행적이 있었다면 안상호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된다. 그 책임을 한 세기가량 뒤에 살아가는 증손녀에게까지 물을 이유는 없다.
역사를 잊어서도, 친일의 과오를 덮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연좌제를 만들어서도 안 된다.
증조부 안상호의 삶은 역사 앞에서 평가하고, 배우 하영의 삶은 하영 자신의 행동으로 평가하자.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현재의 개인에게 공정한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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