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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의 그림자 ⑦] 패망을 감지한 밀정들…‘76호’의 붕괴와 특무들의 마지막 선택

  • 김준하 기자
  • 입력 2026.08.09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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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후반, 상하이의 공기는 달라지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흐름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서도 동요가 시작됐다. 겉으로는 여전히 일본과의 협력을 외쳤지만, 일부 고위 인사들은 이미 일본이 패전할 경우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상하이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특무기관 ‘76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때 군통과 중통, 공산당 지하조직을 추적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전황이 바뀌자 조직 내부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밀정들은 이미 ‘전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패망을 감지한 특무들


변화를 빠르게 감지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주불해(周佛海)였다.


왕징웨이 정권의 핵심 인사로 재정과 경제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는 일본의 전황이 악화되자 충칭 국민정부와 연결될 통로를 모색했다. 그 접촉선 가운데 하나가 대립(戴笠)이 이끄는 군통이었다.


군통도 왕징웨이 정권 내부의 균열을 활용하려 했다. 전쟁 중 제거 대상이었던 인물이라도 일본 패망 이후 점령지 접수와 정보 확보에 도움이 된다면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전쟁의 끝이 다가오면서 적과 동지의 경계마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76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은 1943년 9월 이사군(李士群)의 죽음이었다.


76호의 실권자였던 이사군은 일본 헌병 관계자가 마련한 연회에 참석한 뒤 독극물 중독 증세를 보였고 사흘 뒤 숨졌다. 그의 제거를 둘러싸고 일본 측의 이해관계와 왕징웨이 정권 내부의 권력투쟁, 군통과 연결된 인물들의 움직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여러 해석이 제기돼 왔다.


이사군이 사라지자 76호의 권력구조도 급속히 흔들렸다.


정묵촌(丁默邨)은 이미 실권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이후 조직은 정치보위국 등으로 재편되면서 권한이 분산됐다. 한때 상하이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였던 거대한 특무기관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직이 약화됐다고 해서 그곳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일부는 왕징웨이 정권의 다른 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 다른 인사들은 충칭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패전 이후 살아남을 길을 찾았다.


1944년 11월 일본 나고야에서 왕징웨이가 사망하자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정치적 구심점이 사라진 데다 일본의 패색까지 짙어지면서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서는 충성보다 생존이 앞서기 시작했다.


한때 다른 사람의 충성을 감시하던 특무들이 이제 자신의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일본 항복과 ‘76호’의 최후


1945년 들어 일본의 패전은 더 이상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그해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왕징웨이 정권은 순식간에 존립 기반을 잃었다. 난징과 상하이의 친일 관료와 군인, 특무들은 하루아침에 전후 처벌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일본 항복 직후의 중국은 단순히 ‘친일 세력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상황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민정부에는 일본군 점령지역을 신속하게 접수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동시에 중국공산당과 누가 먼저 주요 도시와 교통망, 행정시설을 장악하느냐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 왕징웨이 정권의 군·경 조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치안 유지, 도시 접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전날까지 적이었던 세력을 당장의 질서 유지를 위해 이용하는 역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과거에 대한 면죄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국민정부가 주요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면서 왕징웨이 정권 핵심 인사와 친일 협력자에 대한 체포와 재판도 본격화됐다.


정묵촌은 한간 혐의로 재판을 받은 끝에 1947년 처형됐다.


주불해 역시 전쟁 말기 군통과 접촉하며 국민정부에 협력하려 했지만 과거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한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수감 중 사망했다.


다른 76호 관계자들의 운명도 엇갈렸다.


일부는 처형되거나 장기간 수감됐지만, 전쟁 말기 국민정부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접촉했던 경력을 내세워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끝까지 일본과 운명을 함께했고, 누군가는 패전을 감지하자 가장 먼저 돌아섰다.


이들의 서로 다른 선택은 민국 시대 정보전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정보기관은 충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생존과 권력에 따라 충성이 끊임없이 이동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정보원이 되고, 오늘의 배신자가 내일의 협력자로 이용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개인의 계산만으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돌릴 수는 없었다.


상하이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76호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힘은 군통의 암살이나 내부 배신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패전과 왕징웨이 정권의 붕괴였다. 일본이라는 후견 세력이 사라지는 순간 76호의 권력도 함께 무너졌다.


남은 것은 고문실과 감옥, 납치와 암살의 기록이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역사에 남은 것도 아니다. 항일 지하조직원뿐 아니라 기자와 은행원, 학생과 평범한 시민들까지 비밀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76호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이다.


다른 사람의 사상과 충성을 감시하고 고문과 죽음으로 복종을 강요했던 조직은 정작 자신들을 지탱하던 체제가 흔들리자 내부의 충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결사항전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줄서기와 탈출구 찾기였다.


상하이를 뒤덮었던 ‘76호’의 공포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어도 책임의 문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친일 정권 인사와 특무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어디까지를 협력과 배신으로 규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됐다.


총성이 멎은 자리에는 재판정이 들어섰다.

민국의 그림자는 이제 전장의 어둠에서 전후 심판의 기록 속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다음 회에서는 항일전쟁 종전 뒤 시작된 ‘한간(漢奸) 재판’과 친일 협력자 처벌, 그리고 같은 왕징웨이 정권에 몸담았지만 서로 다른 최후를 맞은 인물들의 운명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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