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 서구에 뒤처졌는가. 그리고 어떻게 근대국가가 될 수 있는가."
1938년 출간된『중국근대사(中國近代史)』는 이 질문 하나로 중국 근대사 연구의 방향을 바꿨다. 저자 장팅푸(蒋廷黻·1895~1965)는 중국 근대사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동시에 서구 중심주의와 국민당 정권을 옹호한 대표적 지식인이라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단순히 한 역사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근대화와 외교 노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과 맞닿아 있다.
후난성 사오양 출신인 그는 미국 선교학교를 거쳐 오벌린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1923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다. 난카이대 역사학과 창설과 칭화대 역사학과 주임을 맡아 서구의 실증주의 역사학을 중국 학계에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왕조의 흥망이 아니라 국제질서와 국가 경쟁 속에서 중국 근대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연구 방법을 제시해 중국 근대사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대표작『중국근대사 』는 5만여 자에 불과하지만 "중국인은 근대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중국의 쇠퇴와 개혁을 분석했다. 그는 과학기술과 산업화,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을 국가 생존의 핵심 조건으로 제시했고,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중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입문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그의 근대화론은 가장 큰 논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장팅푸는 사실상 서구식 자본주의 발전 모델을 근대화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청말 개혁이 실패한 이유도 서구 문명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관점은 새로운 역사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는 동시에 중국의 발전 경로를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으로 바라봤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장팅푸의 삶이 특별한 이유는 역사학자에 머물지 않고 직접 외교 현장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1935년 국민정부 행정원 정무처장을 맡으며 정계에 진출한 그는 이후 소련 주재 대사, 유엔 주재 중화민국 상임대표, 미국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국제질서의 대전환기 속에서 그는 국민정부의 외교 노선을 국제사회에 설명하고 미국 등 서방국가와의 협력을 유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과 미국 유학을 통해 쌓은 국제 감각은 장제스가 그를 외교 전면에 배치한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특히 1949년 이후 중국 대표권을 둘러싼 국제사회 논쟁에서 그는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를 대표해 유엔 무대에서 외교전을 벌였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열린 유엔 회의에서는 중화민국 대표 자격으로 미국 측 입장을 지지했고, 이에 맞서 신중국 대표단은 "중국 인민을 대표하지 못한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이 장면은 냉전 초기 '두 개의 중국' 문제가 국제무대에서 어떻게 충돌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중국 본토에서는 장팅푸를 국민당 정권의 외교 전략을 뒷받침한 정치인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2025년 중국 학술지『역사평론(历史评论)』은 그를 "미국화된 중국인"으로 규정하며 『중국근대사』가 장제스의 정책과 대외 노선을 정당화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국제 학계에서는 그의 정치적 선택과 별개로 중국 근대사를 국제질서와 국가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한 학문적 공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결국 장팅푸를 둘러싼 논쟁은 정치와 학문을 어디까지 분리해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으로 이어진다.
장팅푸는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이었고, 지식인이면서 현실 정치인이었다. 그는 역사책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중국의 길을 제시했고, 외교관이 된 뒤에는 그 역사관을 국제무대에서 직접 실천하려 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이력이 아니라 근대 중국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치열한 사상과 외교의 충돌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장팅푸가 끊임없이 재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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