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충정 동포세계신문 편집위원
근래 언론보도를 보면, 조선족 사회 환경은 그리 낙관할 일이 아니다. 50%의 조선족 마을이 없어졌고, 나머지 50%는 한 두호, 혹은 10호 좌우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80%의 조선족학교가 없어졌다. 90%의 논밭이 타 민족에 의해 경작된다.
조선족 거주현황을 보면, 한국 60만명, 일본, 미국 등 외국 거주자 20만명, 중국 연해도시 50만명이 흩어져 살고, 동북3성 현지엔 70만명이 남아 황폐된 학교와 마을 논밭을 지키고 있다. 현지 조선족촌은 학교 교직원과 어린 학생들, 노인들과 한국에서 임시로 돌아간 귀국 동포들이다.
조선족 가정의 8다(八多)현상
조선족 가정의 8다(八多)현상도 심각하다. 과부, 홀아비, 늙은 총각, 이산가족, 한족사위와 며느리가 많아지고 있고 성(姓)은 알지만 본(本)을 모르는 젊은이가 많다. 50대 이하는 기본상 할아버지 한반도 고향 주소를 모른다. 컨로주(龈老族), 즉 일하기 싫어하는 아들이 늙은 부모에 의지해 살아가는 현상도 심각하다.
이미 중국에서 거대한 나라까지 세웠던 4개 민족은 이미 본 민족의 언어는 물론, 문자까지 모두 상실된 실태이다. 청나라를 세웠던 민족, 아랍민족인 회족, 서하(西夏)국을 세웠던 당항족(黨項族), 녕하 장족차지구의 장족(壯族) 등이다.
조선족 또한 중화(中華) 문화에 완전 용해될까? 필자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조선족의 오늘의 현실, 대한민국 오늘의 정책을 볼때 우리의 동포 4세, 5세가 완전히 한족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새 변화
1992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은 192만 5천명, 35가구 이상의 조선족 마을이 흑룡강성에 2,678개, 조선족의 논은 110만 ha였다. 한중수교 21년이 지난 지금 모두 땅을 버리고 한국에, 외국에, 연해도시로 떠났다. 이는 사회발전의 필연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어 조선족의 한국 진출은 정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현상이다. 중국 천진을 보면, 한국인 5만명, 조선족 3만명 현대, 삼성전와 그 계열 부품공장 등 기업체가 3000개에 이르고, 근로자는 15만명(한족 근로자와 조선족 간부 포함), 사무실 직원의 월급은 6000위안 이상, 노무근로자는 5000위안 좌우이며, 지금도 조선족의 수요는 무한이다. 연길 기준으로도 일반 국가 공무원의 봉급은 5000위안 이상, 일반 직장인의 월급은 3000위안 이상이다. 중국은 봉급 외에도 장금(奬金)이 많아 기본 월급을 몇배 초과할 때도 있고, 퇴직금은 3000위안 이상이다. 젊어서 정직하게 출근하면 노후 생활은 근심이 없다. 한국에 나올리 만무하다.
이런 시대 변화에 맞춰 우리 조선족은 어디로 가야 하나?
“시각장애인만 장애인이 아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도 장애인이다.”
어느 철인의 말이 생각난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중국으로 돌아가자. 제 18기 3차 회의의 결졍에 의하면 중국의 토지정책이 변하는 것 같다. 농호들이 경작하던 토지, 잔류지도 팔수 있는 조짐이 보이고, 농촌에서 60세 이상 노인들은 양로 보험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조상들이 일구어 놓은 동북삼성, 내몽고의 한국 농토의 3배 되는 땅을 되찾아 충북 홍성군 문당리 마을처럼 협동농장을 만들고 ‘새마을 운동’을 하여 유기농 녹색 식품 기지를 후대에게 물려주자.
둘째, 재한동포들은 단합하자. 중국이나 한국에서 소외된 군체! 말로만 뭉치지 말고 갑론을박의 국면을 타개하여 진정 활기가 넘치는 동포 공동페를 만들자, 지난 12월 8일 한중타임즈 이영한 사장에 의해 동포단체들의 공동주최한 ‘제1회 재한동포군영만회’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깊었다고 본다.
셋째, 옳고 그른 것을 바로 알고 피해근성에서 벗어나자. 조선족사회는 부실 여행사, 부실 언론사, 부실 학원 등의 소행으로 많은 폐단을 겪고 있다. 그 결과 정부정책에 대해 고마움 보다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한국정부의 노고도 이해하며 평가하여야 한다고 본다.
조선족 거주현황을 보면, 한국 60만명, 일본, 미국 등 외국 거주자 20만명, 중국 연해도시 50만명이 흩어져 살고, 동북3성 현지엔 70만명이 남아 황폐된 학교와 마을 논밭을 지키고 있다. 현지 조선족촌은 학교 교직원과 어린 학생들, 노인들과 한국에서 임시로 돌아간 귀국 동포들이다.
조선족 가정의 8다(八多)현상
조선족 가정의 8다(八多)현상도 심각하다. 과부, 홀아비, 늙은 총각, 이산가족, 한족사위와 며느리가 많아지고 있고 성(姓)은 알지만 본(本)을 모르는 젊은이가 많다. 50대 이하는 기본상 할아버지 한반도 고향 주소를 모른다. 컨로주(龈老族), 즉 일하기 싫어하는 아들이 늙은 부모에 의지해 살아가는 현상도 심각하다.
이미 중국에서 거대한 나라까지 세웠던 4개 민족은 이미 본 민족의 언어는 물론, 문자까지 모두 상실된 실태이다. 청나라를 세웠던 민족, 아랍민족인 회족, 서하(西夏)국을 세웠던 당항족(黨項族), 녕하 장족차지구의 장족(壯族) 등이다.
조선족 또한 중화(中華) 문화에 완전 용해될까? 필자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조선족의 오늘의 현실, 대한민국 오늘의 정책을 볼때 우리의 동포 4세, 5세가 완전히 한족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새 변화
1992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은 192만 5천명, 35가구 이상의 조선족 마을이 흑룡강성에 2,678개, 조선족의 논은 110만 ha였다. 한중수교 21년이 지난 지금 모두 땅을 버리고 한국에, 외국에, 연해도시로 떠났다. 이는 사회발전의 필연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어 조선족의 한국 진출은 정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현상이다. 중국 천진을 보면, 한국인 5만명, 조선족 3만명 현대, 삼성전와 그 계열 부품공장 등 기업체가 3000개에 이르고, 근로자는 15만명(한족 근로자와 조선족 간부 포함), 사무실 직원의 월급은 6000위안 이상, 노무근로자는 5000위안 좌우이며, 지금도 조선족의 수요는 무한이다. 연길 기준으로도 일반 국가 공무원의 봉급은 5000위안 이상, 일반 직장인의 월급은 3000위안 이상이다. 중국은 봉급 외에도 장금(奬金)이 많아 기본 월급을 몇배 초과할 때도 있고, 퇴직금은 3000위안 이상이다. 젊어서 정직하게 출근하면 노후 생활은 근심이 없다. 한국에 나올리 만무하다.
이런 시대 변화에 맞춰 우리 조선족은 어디로 가야 하나?
“시각장애인만 장애인이 아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도 장애인이다.”
어느 철인의 말이 생각난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중국으로 돌아가자. 제 18기 3차 회의의 결졍에 의하면 중국의 토지정책이 변하는 것 같다. 농호들이 경작하던 토지, 잔류지도 팔수 있는 조짐이 보이고, 농촌에서 60세 이상 노인들은 양로 보험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조상들이 일구어 놓은 동북삼성, 내몽고의 한국 농토의 3배 되는 땅을 되찾아 충북 홍성군 문당리 마을처럼 협동농장을 만들고 ‘새마을 운동’을 하여 유기농 녹색 식품 기지를 후대에게 물려주자.
둘째, 재한동포들은 단합하자. 중국이나 한국에서 소외된 군체! 말로만 뭉치지 말고 갑론을박의 국면을 타개하여 진정 활기가 넘치는 동포 공동페를 만들자, 지난 12월 8일 한중타임즈 이영한 사장에 의해 동포단체들의 공동주최한 ‘제1회 재한동포군영만회’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깊었다고 본다.
셋째, 옳고 그른 것을 바로 알고 피해근성에서 벗어나자. 조선족사회는 부실 여행사, 부실 언론사, 부실 학원 등의 소행으로 많은 폐단을 겪고 있다. 그 결과 정부정책에 대해 고마움 보다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한국정부의 노고도 이해하며 평가하여야 한다고 본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동포세계신문에 있습니다. 무단전재 재배포를 금합니다.>
ⓒ 인터내셔널포커스 & www.dspdaily.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
극우, 이제는 단호히 맞설 때
극우 정치가 국경을 넘어 세력을 넓히려 하고 있다. 국내 일부 극우 성향 단체가 미국에서 공개 활동을 벌였다는 소식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들이 내세운 것은 정책 경쟁이나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정부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부정선거 주장, 종교를 앞세운 선동이었다. ... -
[연변 기행 ④] 조선어 간판이 반기는 도시, 연길에서 만난 조선족 문화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중국조선족민속원을 찾은 관광객들이 조선족 전통의상을 입고 문화체험을 즐기고 있다. 민속원은 연길의 대표 문화관광지로, 조선족의 역사와 생활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 인터내셔널포커스 [인터내셔널포커스] 육정산에서 발해의 역사... -
[연변 기행 ⑤] 연길 시민들의 부엌, 서시장에서 만난 연변의 맛
연길서시장 일각 (인터내셔널포커스] [인터내셔널포커스] 연길의 하루는 서시장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 아침 시장 문이 열리면 주민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하나둘 골목으로 들어선다. 관광객들에게는 여행 코스이지만, 연길 사람들에게 서시장은 오늘 저녁 식... -
[민국의 그림자 ③] 장제스의 그림자, 군통의 황제 대립
왕아초(王亚樵)를 제거한 남자, 대립(戴笠). 그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정보기관 책임자 가운데 한 명이다. 국민당 군통(軍統)의 실질적 지휘자로 장제스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한때 중국 전역을 뒤덮은 정보·감시·첩보망을 움직였다. 그의 삶은 한 개인의 출세기가 아니라, ... -
[연변 기행 ⑥] 한눈에 3국을 품은 땅, 훈춘 방천… 국경 끝에서 만나는 동북아의 역사
중국 지린성 훈춘시 방천민속촌 입구. 전통 양식의 대형 패루를 중심으로 조선족 문화 체험과 향토음식, 민속공연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내셔널포커스] 연길의 조선족 문화와 서시장의 활기까지 둘러본 연변 기행은 이제 동북아의 가장 동쪽 끝을 향... -
[민국의 그림자 ④] ‘구국’을 내세운 투항…왕징웨이의 선택은 왜 실패했나
[인터내셔널포커스] 1910년 봄,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에서 섭정왕 자이펑을 겨냥한 폭탄 암살 계획이 적발됐다. 주도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대 혁명가 왕징웨이(汪精卫·왕정위)였다. 체포된 그는 죽음을 각오한 듯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옥중에서 남긴 “칼을 끌어 한 번 통쾌하게 죽어 젊은 날의 뜻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