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8년간 이어진 중일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중국에서 총성이 멎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서로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전쟁은 만주와 화북, 중원으로 번졌다. 수십만 병력이 움직이는 전선 뒤에서는 또 다른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 병력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지휘부가 어떤 작전을 준비하는지 먼저 알아내기 위한 정보전이었다.
국민당에는 이미 오랜 경험을 쌓은 정보조직이 있었다.
대립(戴笠)이 이끌었던 군통은 항일전쟁을 거치며 중국 전역에 방대한 정보망을 구축했다. 대립이 1946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조직은 개편됐지만 인력과 정보망 상당 부분은 남았다.
공산당 역시 오랫동안 지하조직을 운영해왔다. 항일전쟁 시기에도 도시와 국민당 통치지역에 비밀조직을 두고 정보를 수집했다.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되자 이 조직들은 국민당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중요한 통로가 됐다.
국민당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정보가 새는 곳이 외부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군과 정부기관 내부에도 공산당과 연결된 인물이 숨어 있었다. 작전계획과 병력 배치가 상대에게 넘어간 사례가 드러나면서 국민당 내부의 의심도 깊어졌다. 암호를 바꾸고 검열을 강화했지만 정보 유출을 완전히 차단하기는 어려웠다.
1948년 들어 전쟁은 결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랴오선전역과 화이하이전역, 핑진전역이 잇따라 벌어졌다. 중국 현대사에서 이른바 ‘3대 전역’으로 불리는 전투다. 수십만 명의 병력이 움직인 만큼 상대의 배치와 이동 방향, 지휘부의 판단을 알아내는 정보전도 치열했다.
이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궈루구이(郭汝瑰)다.
그는 국민당 국방부에서 작전 업무를 담당했던 고위 장교였다. 훗날 공산당 측에 국민당군의 군사정보를 전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공내전 정보전을 상징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됐다.
국민당 입장에서는 뼈아픈 일이었다. 적의 정보를 캐내야 할 전쟁에서 자신의 작전 관련 정보가 내부를 통해 상대에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한 원인을 첩보전 하나로 돌릴 수는 없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민당군은 지휘체계의 혼선과 파벌 갈등, 부패에 시달렸다. 물가 폭등과 경제난도 정권의 기반을 흔들었다. 반면 공산당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며 병력과 조직을 빠르게 확대했다.
정보전은 이런 흐름 속에서 국민당의 어려움을 더 키웠다.
국민당 정보기관 내부의 문제도 있었다. 군과 당, 정보기관이 각각 정보망을 운영하면서 조직 사이의 경쟁과 견제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군통을 장악했던 대립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과거처럼 조직 전체를 강하게 틀어쥐는 인물도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묘한 장면이다.
국민당 정보기관은 1930년대부터 수많은 지하조직과 비밀결사를 추적했다. 왕아초를 집요하게 뒤쫓았고 공산당 지하조직을 색출했으며, 중일전쟁 시기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특무기관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마지막 싸움에서는 자신들의 내부로 들어온 상대의 정보망을 끝내 뿌리 뽑지 못했다.
1949년 1월 베이핑의 국민당군이 평화적으로 개편되면서 공산당이 도시를 장악했다. 4월에는 인민해방군이 장강을 건너 난징을 점령했다. 국민당 정부는 계속 남쪽으로 밀렸고 결국 타이완으로 이동했다.
중화민국 초기부터 이어진 비밀전쟁도 여기서 큰 갈림길을 맞았다.
왕아초와 대립이 상하이의 골목과 기차역, 부두를 무대로 벌였던 암살과 추적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대신 상대 정부와 군 내부에 사람을 심고 작전계획과 암호, 군사정보를 빼내는 첩보전이 전면에 등장했다.
1949년 이후 중국 대륙과 타이완 사이에는 바다가 놓였다.
그러나 정보전까지 바다가 가로막지는 못했다.
국민당은 타이완에서 정보기관을 다시 정비했고 중국공산당 역시 섬 안으로 정보망을 뻗으려 했다. 대륙에서 끝난 줄 알았던 민국의 비밀전쟁은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두고 다시 시작됐다.
다음 회에서는 1949년 이후 타이완에 침투한 중국공산당 지하조직과 이를 추적한 국민당 정보기관, 그리고 양안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비밀전쟁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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