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글로벌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세계 첨단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거점인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고성능 컴퓨팅 수요가 늘어날수록 첨단 공정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아지기 때문이다.
스탠다드차타드 글로벌 최고투자책임자(CIO) 오피스 측 분석에 따르면 세계 7나노미터(㎚) 이하 첨단 반도체의 90% 이상이 대만에서 생산되고 있다. 다만 첨단 공정의 범위와 조사 기준에 따라 구체적인 비중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핵심은 단순한 생산량보다 최첨단 공정과 파운드리 분야에서 대만이 구축한 높은 경쟁력이다.
이 같은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만은 1980년대부터 기술산업 육성을 본격화했고, 다른 기업이 설계한 반도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파운드리' 모델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세계 반도체 산업의 분업 구조를 바꾼 중요한 계기가 됐다.
팹리스 기업들은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생산시설을 직접 구축하지 않고 연구개발과 설계에 집중할 수 있게 됐고, 대만 파운드리 업체들은 세계 각국의 주문을 확보하며 생산 규모와 기술력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주문 확대가 생산 경험 축적과 수율 향상, 원가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다시 새로운 고객과 투자를 끌어들이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됐다.
특히 신주과학단지를 중심으로 구축된 산업 생태계는 대만 반도체의 강력한 경쟁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도체 제조업체뿐 아니라 장비 유지·보수, 소재와 부품, 패키징·테스트 업체와 전문 인력이 밀집해 있다. 첨단 반도체 공장 몇 곳을 건설한다고 해서 이러한 생태계까지 단기간에 복제하기 어려운 이유다.
AI 투자 확대는 대만 반도체의 중요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스탠다드차타드 측은 2025년부터 2030년까지 세계 AI 관련 자본지출이 연평균 32%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늘어나면 GPU와 AI 가속기는 물론 고대역폭메모리(HBM), 첨단 패키징과 관련 장비·부품 수요도 함께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대만 증시가 기술산업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스탠다드차타드 측 분석에서는 기술주가 대만 증시의 약 88%를 차지하는 것으로 제시됐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전자부품과 서버 등 광범위한 공급망 기업들이 포진해 있어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AI 설비투자 방향이 대만 산업과 증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다.
세계 각국은 동시에 대만에 집중된 첨단 반도체 공급망을 분산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을 확대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반도체 산업 재건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유럽도 역내 반도체 생산능력을 높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 생산시설 확대가 곧바로 대만의 경쟁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첨단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공장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생산기술과 수율 관리 경험, 숙련된 엔지니어, 장비·소재 업체와의 협업, 고객사와 장기간 축적한 신뢰가 함께 작동한다. 새로운 생산거점을 건설하는 것보다 이러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위험 요인도 존재한다. AI 투자 열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식거나 첨단 공정 개발 과정에서 기술적 병목이 발생하면 성장 속도가 둔화될 수 있다. 미중 기술 경쟁과 수출통제, 대만해협을 둘러싼 지정학적 불확실성 역시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주요 변수다.
결국 세계 반도체 산업은 하나의 딜레마와 마주하고 있다. 공급망 안정성을 위해 대만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AI 시대에 필요한 최첨단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당분간 대만의 생산능력과 산업 생태계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AI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각국은 반도체 생산거점을 자국과 우방국으로 분산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대만의 기술과 생산 경험, 전문 인력과 공급망을 단기간에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세계가 '탈대만'을 준비하면서도 동시에 대만 반도체를 더 필요로 하는 역설, 이것이 AI 시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직면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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