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당방위 외면한 국가, 피해자에게 61년의 침묵을 강요했다
[동포투데이] “국가는 1964년, 생사를 넘나든 그날의 사건을 어떤 대가로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23일 오전 부산지방법원 형사5부(재판장 김현순) 법정에 선 최말자(78)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 만 18세였던 1964년 5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중상해 혐의로 기소됐던 그는, 61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섰다. 이번엔 피고인이 아니라, 피해자로서였다.
이날 열린 재심 첫 공판이자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이례적으로 무죄를 구형했다. 검찰은 “본 사건은 갑작스런 성폭력 범죄에 대한 정당한 방어 행위이며, 과잉방위라 볼 수도 없다”며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만큼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검찰은 이어 “피해자를 범죄 그 자체뿐 아니라 2차 피해와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검찰의 책임”이라며 “그러나 과거 검찰은 그 책임을 외면했고, 피해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고 자성했다. 최 씨에게 직접 “사죄드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법정에서 외면당한 ‘정당방위’
1964년 5월 6일, 부산의 한 주택가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18세였던 최 씨는 이웃집 21세 남성 노 모 씨에게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저항하던 그는 노 씨의 혀를 깨물어 약 1.5cm가량 절단되게 했다. 그러나 정당방위를 주장한 최 씨에게 내려진 판결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반면 가해자 노 씨는 강간미수 혐의는 적용되지 않고, 특수주거침입·특수협박 혐의로만 기소돼 최 씨보다 가벼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뒤바뀐 판결이었다.
사라지지 않은 기억, 지워진 권리
최 씨는 2020년 5월, 사건 발생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1·2심 법원은 “검사의 불법 구금이나 자백 강요에 대한 증거가 없다”며 이를 기각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건을 다시 들여다봤다. 3년 넘는 심리 끝에 “최 씨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며 판결문과 수사기록, 당시 언론 보도 등을 토대로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사건은 파기환송됐다. 결국 올해 2월, 부산고등법원이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며 최 씨는 다시 법정에 섰다.
이날 재판에서 최 씨의 변호인은 “이 사건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무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도 당연히 무죄였던 사건을 사법당국이 오판한 것”이라며 “변호인으로서 선배 세대가 놓친 미완의 변론을 마무리하려 한다”고 말했다.
“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해”
최 씨는 마지막 진술에서 “나는 61년간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며 “희망이 있다면, 후손들이 성폭력 없는 세상에서 인권과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대한민국이 그런 법과 제도를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한 세대를 지나 다시 열린 법정은 과거의 잘못을 묻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뒤틀고, 여성의 저항을 ‘범죄’로 낙인찍었던 국가와 사법의 책임은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재심 재판부는 오는 9월 10일 오후 2시, 최 씨 사건에 대한 선고를 내릴 예정이다. 법정의 시계는 61년 전 멈춘 시간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되돌아가고 있다.
BEST 뉴스
-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日 전 총리 포함 외빈 명단 공개
[동포투데이] 28일 오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기념행사’의 기자회견에서 외빈 명단이 공개됐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26개국 국가원수 및 정부 수반이 이번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참석 예정 인사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 -
“핵미사일·스텔스 전투기 총출동…세계 언론, 중국 열병식 충격 보도”
[동포투데이] 중국 인민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이 3일 오전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리자, 세계 주요 외신들이 이를 일제히 주목했다. 열병식 시작 전, 미국 CNN은 “이번 열병식에서 첨단 무기가 대거 공개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CNN 기자는 현장에서 “광장에는 ... -
中, 9월 3일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 지정 배경은?
[동포투데이] 중국은 오는 9월 3일 베이징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열어 중국인민항일전쟁과 세계반파시즘전쟁 승리 80주년을 기념한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날짜는 1945년 8월 15일이지만, 중국은 왜 9월 3일을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로 정했을까. 1945년 9월 2일 오전,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도쿄만... -
장춘 조선족 민속마을, 논 위에 피어난 ‘이야기하는 그림’
[동포투데이] 장춘의 한 조선족 민속마을에서 수만 평 논이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했다. 서광 조선족 민속마을의 4만㎡ 논에는 7가지 색 벼가 심겨, 장관을 이루는 대지 예술을 완성했다. 왼쪽 논에는 조선족 여성 아마니의 치마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진달래꽃이 논 물결 사이로 피어나며, ... -
중국인만 노린 폭행…혐오 범죄에 면죄부 있어선 안 된다
[동포투데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혐오와 차별의 늪에 빠져드는지를 보여준다. 중국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이들을 뒤쫓아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소주병으로 머리를 내려친 행위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명백한 혐오 범죄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지난달 21일, 중국인 관광... -
“중국인 안 와도 여전한 쓰레기”…한국 관광지, 반중정서의 희생양 되나
[동포투데이] 중국인 관광객이 급격히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관광지의 쓰레기 문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온라인 공간에서는 “쓰레기의 주범은 일본 관광객”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해 눈길을 끈다. 이는 오래된 반중 정서가 이번에는 다른 나라로 옮겨 붙은 사례라는 지적도 나온다. 환경부의 &l...
NEWS TOP 5
실시간뉴스
-
“거절했을 뿐인데”…홍대서 중국인 여성 인플루언서 폭행
-
광복 80주년, 중국서 한국광복군 기념행사 개최
-
갯벌 고립 중국인 노인에 구명조끼 내준 해경, 끝내 순직
-
중국인만 노린 폭행…혐오 범죄에 면죄부 있어선 안 된다
-
“외국인보호소는 폭력집단인가, 인권보호기관인가”
-
“중국인 안 와도 여전한 쓰레기”…한국 관광지, 반중정서의 희생양 되나
-
광복 80돌…미국인 선교사·쿠바 한인·10대 소년까지, 독립유공자 311명 포상
-
광복 80년, ‘함께 찾은 빛’으로 미래를 밝히다
-
“가슴의 일장기 지운 언론의 용기”…‘일장기 말소사건’, 8월의 독립운동 선정
-
양구서 외국인 노동자 91명 임금 체불…노동부, 전담팀 구성해 조사 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