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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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중 한국대사관, 항공권 판매사기에 유의 조언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주중 한국대사관은 일전 공지를 내어 최근 항공권 판매사기 피해 신고를 접수한 바 있다면서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항공권 구입시 경각성을 높일 것을 희망했다. 신고인에 따르면 범죄자들은 교민ㆍ유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사이트에 일반 항공권보다 저렴한 가격에 항공권을 판매한다는 광고와 휴대폰 연락처를 게재해 놓고는 광고를 보고 연락한 교민들에게 실제로 발권된 항공권을 배송하여 그 대금을 수령한 후, 비행기 탑승 전 항공사에 연락하여 일부 위약금을 지불하고 항공권을 취소한다. 주중 한국대사관 측에서 이러한 사기수법이 가능한지에 대해 항공사에 확인해 본 결과 항공사와 대행계약을 체결한 정식 여행사가 아닌 개인의 경우에는 탑승자 본인이 항공사에 직접 연락해야만 항공권 취소가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본인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이 각종 인적사항(여권번호, 주민번호, 영문 성명 등)에 대한 질의ㆍ응답 밖에 없으므로 충분히 타인이 본인임을 사칭하여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주중 한국대사관측은 공지에서 교민들이 항공권 구매 시 항공사 또는 공인된 여행사를 이용하고 위와 같은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는 즉시 110에 신고하시기 바란다고 조언했다. 또 피해자가 관련 내용을 파출소에 신고하려 하였으나 관할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고를 받아 주지 않은 사례가 있다고 하니 관할 파출소에서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상급기관인 관할 공안분국에 신고하시기를 바랐다. 한편, 대사관은 교민들의 신고사례 등을 근거로 해당 공안기관에 이와 같은 피해가 재발ㆍ확대되지 않도록 적극적인 수사를 요청할 예정이라면서 피해를 입은 교민들은 대사관 영사부(02-8532-0404)에 알려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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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6
  • 중국 올해 국방지출 12.2% 증가한 8082.3억위안
    신화통신의 영문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2014년의 국민총생산(GDP) 증가목표를 7.5%좌우, 국방지출을 지난해보다 12.2% 증가한 8082억 3000만위안으로 책정했다고 중국경제망이 보도했다. 중국 군비예산 연 4년간 두 자리수 증가 2013년 중국 국방예산은 7201억 6800만 위안으로 그 전해보다 10.7% 증가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 수치는 2012년의 년 11.2%보다 그 증가폭이 조금 낮다. 올해의 국방예산은 지난해보다 12.2% 증가, 이는 중국 국방예산이 연속 4년간 두자리수 성장을 해온 것이다. 대만 “중국시보”는 일전 중국정부의 공식언론을 인용해 중국인민해방군은 향후 중점적으로 해군을 발전시키는바 핵잠수정부대, 해방군 항천항공부대 편제를 확대하며 향후 5년간 중국대륙의 군비를 평균 10% 성장을 유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 보도에 따르면 중국대륙은 해방군 3대 함대에 새로운 구축함, 호위함 지대를 포함한 새로운 군비를 증가하고 대량의 수륙양용상륙함 지대와 보급함 지대를 증설하며 해방군 핵잠수정부대를 증가하고 새로운 핵잠수정 기지를 건설한다. 또 해방군의 공군부대는 운수기, 경보신호비행기, 폭격기 부대 편제를 확대하고 방공, 방천 부대를 설치하며 태공방어를 강화한다. 중국 전국정협위원이고 해군소장인 윤탁증은 중국의 군비가 국민총생산에서 점하는 비례가 기타 국가에 비해 낮은바 “12ㆍ5” 기간에는 1.4%―1.6%에 불과했으며 발전도상의 대국으로서 비교적 합당한 비례는 2%―2.5%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국은 과거 근 20년간 군비가 줄곧 하락하다가 2000년 이후부터 회복성 증가를 해왔다면서 적지 않게는 군인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고 군대의 주택문제를 해결하는데 썼으며 이같은 회복성 증가는 10%가 높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의 군비는 중국의 4배 미국이 2013에 공포한 2014년 국방예산 법안에 따르면 미국의 올해 국방예산은 5521억 달러이다. 그 외에도 해외 긴급행동경비 807억 달러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아프가니스탄전쟁과 기타 해외군사행동이 포함된다. 일본의 군인당 군비는 중국의 5배 일본의 해마다의 국방예산은 근 500억 달러이다. 헌데 일본자위대 병력은 20여만명으로 평균 군인당에 해당되는 군비는 20여만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중국의 총병력은 약 230만명으로 평군 군인당에 해당되는 군비는 몇만달러, 일본 군인당 군비의 1/5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의 군비지출계획에는 미국 락-마회사에서 생산한 F-35 은형전투기 구입, “제우스순” 구축함 추가구입 그리고 “물수리” 운수기와 “전 지구 매” 등 무인기 여러 대 구입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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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6
  • 북한 전략군, “미사일 발사는 자위적 행동”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북한 조선인민군 전략군 대변인은 5일, 일련의 단거리 미사일 등 발사에 대해 “정상적인 훈련계획에 따른 발사훈련”이며 “자위적 행동”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이는 일련의 발사에 대한 첫 표명으로 된다.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4일 새벽에서 저녁까지 신형을 포함한 2종류의 방사포를 총 7발, 모두 남동부 원산 주변에서 북동 방향 동해로 발사했다. 이 가운데 4발은 사정거리 155킬로미터 정도로 보이는 신형 300밀리 방사포 ‘KN09’이며 나머지 3발은 사정거리 55킬로미터인 240밀리 방사포로 보인다고 한다. 한국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은 2월 21일에도 동해 쪽으로 KN09를 발사했다. 27일과 이달 3일에도 각각 미사일을 발사했다. 3일 발사한 2발은 500킬로미터 이상 비행해 미 한 당국은 단거리 탄도미사일 ‘스커드’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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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5
  • 중국 하남성서 차번호 120만위안 천문가에 경매돼
    -공중들 “가장 비싼 철피”라 조롱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에서 인민페로 100만위안짜리 차를 샀다고 해도 사치라고 하는데 하남성 주마점시에서 한 사람이 120만위안을 주고 차번호를 사 사람들로부터 “제일 비싼 철피(铁皮)”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주마점시에서 3월 4일 소형차 번호 경매회가 열렸는데 4자리수가 붙은 번호(즉 1234, 5678), 4자리수가 같은 번호(즉 8888, 9999) 등을 포함한 57개의 소형차 “길상” 번호를 경매에 내놓았다. 이날 경매된 55개 차번호의 총수입은 759만 1000위안으로 그 가운데의 QS8888, QS9999는 각기 보기 드문 고가로 각각 120만위안씩에 경매돼 경매회의 쌍왕 기록을 창조했다. “가장 비싼 철피” 현상은 중국 각지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일주일전인 2월 26일, 하남성 남양시에서 이와 비슷한 소형차 “길상” 번호 경매회가 있었는데 “6666”, “7777”, “8888” 4자리수가 같은 차번호가 각기 54만위안, 80만위안, 75만위안이라는 천문가에 경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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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5
  • 중국동포 언론사, 기사 베끼기 열풍.... 저작권 침해 심각
    - 기자 이름까지 그대로 사용…온라인도 저작권 침해 심각 일부 중국동포 관련 언론사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타 언론사의 기사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저작권 침해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다. 기사 베끼기는 물론 기자 이름까지 그대로 사용하는 사례가 빈번해 문제가 심각하다. 신뢰성과 진실성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사에서 이 같이 양심을 파는 행위가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에 있는 중국동포 관련 언론사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편이다. 타 신문의 보도기사를 적당히 손질하거나 개편하여 보도하는 일은 심심찮게 발견되고, 아예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겨 놓는 일도 다반사다.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해도 “기사 내리면 되지”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 문제를 삼은 쪽만 이상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런 관행은 온라인에서 더 심각하다. 직접 취재한 기사보다 타사 기사를 베껴 가공하는 기사들이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다. 언론사가 아닌 조선족 관련 매체들도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베끼기 한 언론사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와 제목만 바꾸는 식으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황용석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신문 기고를 통해 “국내 언론은 대부분 온라인 뉴스의 장점인 링크나 태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반면, 외국 주요 언론들은 뉴스에서 언급되는 정보를 친절하게 링크로 연결시켜 독자들이 사실을 보강하거나 지식을 증강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언론사는 아니지만,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원고 작성 가이드라인으로 출처를 명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사실을 다룸에 있어 반드시 그 근거를 링크나 참고문헌 형식으로 제시하라고 작성자들에게 지시한다.”며 “이제부터라도 다른 언론의 특종에 박수를 쳐주고 인용해줘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경쟁의 출발점이자 보도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다. 또 기사 정보를 가능한 한 링크로 연결 지어 정보 검색의 출발점으로서 뉴스의 가치를 높였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흑룡강신문’의 경우 본지의 기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기자 이름까지 똑같이 표기하여 마치 ‘흑룡강신문’의 기자인 양 사용했다. 본지가 2014년 2월 27일에 <하이트진로, 중국동포 위한 ‘꿈프로젝트’ 본격화>라는 기사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리자, 흑룡강신문은 2월 28일 <하이트진로, 조선족 자녀 지원 프로젝트 시행>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옮겨 쓰는 과정에서 본문은 물론 기자 이름까지 그대로 표기했다. 그러자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 ‘조글로미디어’가 흑룡강신문의 동일한 기사를 <하이트진로, 재한조선족 자녀에게 1년 장학금 지급>으로 제목만 살짝 바꾼 뒤에 그대로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흑룡강신문’ 홈페이지에 관련 기자의 이름을 검색하자 베끼기 하여 그대로 사용한 많은 기사들이 나열된다. 기사뿐 아니라 기자까지 훔친 셈이다. 본지는 관련 문제로 수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기사 베끼기와 같은 잘못된 관행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공정한 보도와 기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타 언론의 기사를 그대로 베끼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인용이 필요할 경우에는 그 출처를 반드시 명기해야 하며, 해당 신문사의 동의를 받아 게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지가 지난 27일 <하이트진로, 중국동포 위한 ‘꿈프로젝트’ 본격화>라는 기사를 올리자, 흑룡강신문은 28일 기사를 옮겨 쓰면서 중국동포신문 홍미은 기자 이름까지 그대로 표기했다. ‘조글로미디어’가 흑룡강신문의 동일한 기사를 <하이트진로, 재한조선족 자녀에게 1년 장학금 지급>으로 제목만 살짝 바꾼 뒤에 그대로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기사제공: 중국동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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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5
  • 중국 환경보호부 고위관원 밖에서 자기직무 감히 말 못해
    ―시민들 관원들에게 스모그에 대한 책임 물어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전국정협위원이고 국가환경보호부 총량사 사장(司长)인 류병강은 3월 4일에 있은 전국정협회의 민건계 소조토론에서 몇 차례나 발언을 끝마치려 했지만 정협위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중국신문망이 5일 전했다. “우리 북경의 이 스모그는 앞으로도 계속되겠지요? 스모그를 다스리는데 시간이 얼마나 수요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어제는 스모그가 그렇게 엄중하더니 오늘은 날씨가 이렇게 맑습니까?” “지난해 주류 언론들에서 보도한 일부 기사들은 놀랍던데요. 스모그가 페암발병률을 증가시킨다니, 맞아요?” 류병강은 지금 자기는 밖에 나가 자기가 국가환경보호부의 고위관원이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데 택시운전수가 류병강을 보고 “관리(当官的)” 같다면서 류병강으로 하여금 몸둘바를 모르게 관원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보세요, 당신들이 이 하늘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 “누가 하늘이 맑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류병강은 정협위원들에게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중국 30년의 발전, 그 어느 국가가 우리처럼 자동차가 해마다 2000만대씩 증가하고 석탄이 해마다 2억톤씩, 2억톤씩 증가하며 시멘트 생산량이 세계의 2/3씩이나 되겠습니까? 사람마다 원시적인 생태환경을 요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기들이 가장 현대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장내에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결국 그는 더는 묻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다싶이 하고 나서 “앞으로 5년간 공기가 뚜렷이 좋아질 것입니다”고 사장자리를 걸고 담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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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5
  • 다문화 자조모임은 낯선 서울생활의 활력소
    - 자조모임으로 다문화가족 간 네트워크 구축 및 적극적인 사회 참여 ‣ 자기역량개발, 가족관계 향상, 문화예술 활동, 지역사회 봉사 등 다양한 활동 실시 - ’13년에 이어 ’14년에도 우수 자조모임에 활동비·활동장소 등 지원 ‣ 25개 우수 자조모임 대상 5개월 동안 단체별 40만원 활동비 지원 - 市, 다문화가족이 지역사회에서 당당히 활동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 될 터…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다문화 자조모임이 낯선 타지에서 언어·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정착의 어려움, 사회 및 가정 적응 스트레스 등을 겪고 있는 결혼이민자들에게 친구들을 사귀고, 여가 활동을 함께 하면서 사회구성원으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톡톡히 도움을 주고 있다. 마포구 중국 전통춤 자조모임「T.G.M」에서 활동 중인 중국 출신 결혼이민자 위엔위홍(거주 기간 11년차)은 “한국에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고 힘들어 1년에 10개월은 중국에서 보내고 2개월만 한국에 있었어요. 그런데 자조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같은 나라 언니, 동생들도 사귀고, 편안하게 모국어로 대화도 할 수 있어 스트레스도 풀고 너무 좋아 요즘에는 중국에 안가고 한국에서 계속 지내고 있어요. 또 중국 전통 춤을 통해 중국 문화를 알릴 수도 있어 너무 좋아요.” 라고 밝혔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민자 딤후왠(거주기간 11개월)은 “임신 8개월이라 베트남 음식을 먹고 싶은데, 남편이 베트남 음식을 싫어해요. 혼자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어 힘들었는데, 자조모임을 통해 다른 임산부들과 함께 베트남 음식을 요리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산전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고 말했다. 서울시는 결혼 이주여성들이 함께 모여 정을 나누며 다양한 취미활동을 통해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나아가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13년도에 처음 시작된 다문화가족의 자조모임 지원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14년에는 자조모임이 단순한 정서적 교류의 장을 넘어 모임을 통해 결혼이민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25개 우수 자조모임을 선별하여 활동비와 모임장소 등을 지원하고 있다. 선정된 자조모임은 5개월 동안 활동비 40만원과 모임장소를 지원받으며, 모임장을 주축으로 자조모임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자조모임장을 대상으로 리더십 교육도 실시할 예정이다. 자조모임은 결혼이민자, 배우자, 일반시민 등 최소 8명 이상으로 구성되며, 각 자조모임은 월 2회 이상 정기모임 및 수시모임을 통해 자기역량강화, 문화예술 활동, 재능 기부 봉사활동 등 다양한 활동 하게 된다. 상반기에 활동이 우수한 자조모임은 하반기에도 지속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서대문구「무지개 약손」자조모임은 결혼이민자들이 내국인 여성들과 함께 혈액순환을 돕는 약손 마사지를 배우고, 사회복지관 등에 방문하여 약손 마사지 봉사활동을 하며, 주민들의 다문화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고, 지역사회 참여 봉사 활동을 할 예정이다. 은평구「뿌잉뿌잉 동화나라」동화구연 자조모임은 다양한 국적 결혼이민자들이 모여 2012년부터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금년도부터는 서울시의 지원에 힘 입어 월 3회 이상 모여 연습을 하고, 장애인 복지관 등에서 동화 구연 봉사 활동을 할 예정이다. 동작구 다사모(다문화가족을 사랑하는 모임) 자조모임은 한국인 배우자 10명이 근무 시간 외에 월1회 모여 부모역할, 자녀 학습 방법 공유 등 자녀 바른 선장과 긍정적 학교생활에 도움을 주고, 배우자간의 유대감 형성으로 상호상담, 자립적 안정적인 생활 지원 활동 할 예정이다. 윤희천 서울시 외국인다문화담당관은 “거주기간이 짧은 결혼이민자들이 한국에 온지 오래 된 결혼이민자들과 만나 멘토․멘티 활동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사회에서 당당힌 활동 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자조모임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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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5
  • 막내한테 각별했던 어머니의 그 사랑
    ■ 현룡선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이 있기 마련이랄가? 지천명에 들어서면서 나는 가끔씩 홀로 방안에 조용히 앉아 과거에 대한 회포에 잠기는 시간을 가져보군 한다. 그때마다 지금껏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온 자애로운 어머니가 눈앞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뭉클해나고 눈가에 이슬이 맺혀오군 한다. 그도 그럴것이 자식이 많았건만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각별했으니말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던 해는 1961년, 바로 우리 나라가 3년 재해로 극히 어려울 때였다. 그때 나를 낳은 어머니는 지나친 영양실조로 근본 젖 한방울 낼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좁쌀죽물로 젖을 대신, 간혹 나는 동네 애기엄마들의 젖을 빌어먹기도 하였지만 하여튼 당시 나는 동네의 여느 애들보다 더욱 어렵게 자랐다 한다. 나는 6남매중 다섯째였으며 그 고난의 년대에 태여나서인지 늘 앓군 하여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 썩이였다. 내가 7살나던 해로 기억된다. 어느날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며 비자루를 들고 장판구들을 쓸던 나는 갑자기 어지럼증으로 눈앞이 캄캄해나며 그만 쇼크하고말았다.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집과 가까이에 있는 신흥위생원으로 가게 됐다. 의사는 나의 기색을 살펴보고 또 맥을 짚어보고하더니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증이라 진단을 내렸다. 내가 점적주사를 맞는동안 어머니는 마음이 퍽 속상했던 모양이였다. 어머니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갔고 몇번이나 이런 말을 곱씹는것이였다. “엄마가 너에게 미안하구나. 빚진게 너무 많구나.” 그때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었다. “엄마, 왜 울어요? 울지 말아요.”나 또한 너무나도 어린지라 어머니의 말뜻을 리해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흐느끼니 리유없이 따라 울었다. 그후의 나날에 어머니는 여러 자식들중 나한테 각별한 관심을 돌려오셨다. 당시 그 많은 식구들이 아버지 혼자로임에 매달려살다보니 생활난에 쪼들리기가 일쑤였다. 어머니는 식량사정이 어려워 밥을 지어도 밑에 감자를 썰어 납작하게 깔고는 그우에 옥수수쌀을 얹고 맨우에 입쌀을 조금 얹어서 짓군 했다. 그러면 이밥과 옥수수밥을 섞어 먼저 아버지그릇에 담고 다음 나의 그릇에 담았으며 그 다음 입쌀 한알 없는 옥수수에 감자투성이인 밥을 다른 형님누나들과 함께 나눠드시군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색다른 반찬만 있으면 어김없이 따로 그릇에 담아 나한테 특별히 안겨주군 했다. 어머니는 내가 다른 집 애들과는 달리 키가 작고 몸이 약한것이 젖을 못먹고 자란탓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자식한테 큰 죄를 진 못난 엄마라고 장탄식하군 했다. 그 죄책감을 떨쳐버리느라 어머니는 나한테 늘 지극정성을 다했으리라. 아직도 나의 기억속에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초 아마 내가 소학교 2학년때였을것이다. 어느날 학교에서 운동대회를 하였는데 학부모 한명씩 참석하게 하였다. 운동경기가 반쯤 진척이 됐고 점심시간이 되자 학급의 애들은 저마끔 자기 부모를 찾아 나무아래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게 되였다. 어머니는 도시락으로 이밥에 콩나물반찬을 준비했었다. 우리 집 생활형편에서는 일년에 몇번쯤이나 먹어볼수 있을가싶은 고급반찬이였다. 헌데 나옆에 앉은 아이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돼지고기반찬을 아주 맛나게 먹고있는것이였다. 구수한 고기냄새가 나의 코구멍안을 살살 간지럽히고있었다. 그 세월 돼지고기는 아주 희귀했다. 명절이 돌아와야 집집들에서 표를 가지고 살수 있었는데 한사람당 몇냥씩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가정들에서는 심한 경제난으로 몇달에 한번씩이나 먹어볼수 있는 돼지고기도 사지 못하다보니 표는 그냥 남아 다른 집에 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먹는 돼지고기반찬이 너무도 먹고싶어 침을 꿀꺽 삼키며 부러운 눈길로 넉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머니가 나의 한팔을 확 끄잡아당겨서야 나는 제정신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나를 외면하는 어머니의 두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어머니는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 소리없이 가냘픈 두어깨를 들먹이고있었다. 내가 그토록 돼지고기반찬이 먹고싶어 침을 흘리고있을 때 나를 그처럼 애지중지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 아팠으랴. 철없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다 읽을수 없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나의 생일날이 돌아오게 되자 어머니는 매일 강변에 나가 모래와 자갈을 치는 부업을 했다. 전에도 어머니는 가끔씩 강변에 나가 그런 푼돈벌이를 해서는 집살림에 보탰다. 사실 찜통더위속에서 자갈을 치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여서 아버지로부터 우리 형제들이 한사코 말렸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꺽지 못했다. 어머니는 섬약한 녀인의 몸으로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일을 며칠간 견지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 한푼한푼에는 어머니의 피땀이 고스란히 슴배여있었다. 드디여 내 생일날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러해동안 모아두었던 돼지고기표 여러장을 갖고 시장에 가더니 내가 그토록 먹고싶어하던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채로 사왔다. 그날 저녁, 구수한 돼지고기국 냄새가 집안에 감돌았고 온집식구가 기분좋게 밥상에 마주앉았다. 어머니는 다 익은 돼지고기를 칼도마우에 놓고 썰어 큰 그릇에 가득 담아 밥상에 올렸다. “네가 지난번 운동대회때 그렇게도 먹고싶어했는데 오늘 생일날 실컷 먹어라.”어머니는 손수 젖가락으로 고기 한점을 짚어 간장에 뚝 찍어서는 내입에 넣어주며 말씀하셨다. “야, 맛있다!” 나는 감탄을 련발하며 냠냠 맛있게 먹어댔다. 그 시각 어머니는 분명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즐거웠으면 나의 볼에 뻑뻑 뽀뽀까지 해주셨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오늘 그날의 그 정경만은 기억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류수같은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젠 나이 50세를 넘겼고 딸애도 이젠 나의 키를 넘어서고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끔찍히 아끼고 감싸안아주고싶은 응석둥이아들로 남아있다. 인젠 85세 고령의 년로한 몸이여서 시름시름 앓는 형편이면서도 짬만 있으면 집에서 나의 빨래감부터 찾는다. 극구 말려도 어머니의 고집을 못말려낸다. 어머니는 또 나와 함께 식사할 때면 부지런히 내가 즐겨먹는 반찬을 내 밥그릇에 집어놓아주시군 한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그 옛날 젖이 나오지 않아 나한테 젖 한방울 먹이지 못했던 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던것 같다. 긴긴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도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그 일이 평생의 빚으로 맞혀오고있는것이였다. 아! 부모란 바로 이런 존재로구나. 순간, 나의 두눈에 이슬이 맺혔다. 눈앞의 모든것이 뿌옇게 보였다. 미구하여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씻고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왜 다른 자식과는 달리 이다지도 나를 사랑합니까?” 어머니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씀하셨다. “다른 원인이 없지, 너는 내자식이기때문이란다.” 어머니의 이런 말씀에 접한 나는 또다시 눈앞이 부옇게 흐려났다. 평생 자신의 모든것을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바쳐왔음에도 그에 대한 보답은 꼬물만치고 바라지 않는 어머니이시다. 정녕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 하신 어머니이시다. 까놓고말해서 나는 지금껏 어머니한테서 너무 많이 받은 대신 엄청 많은 빚만 지면서 살아왔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다함없는 사랑이 자꾸 하늘처럼 높이 쌓여만 가니 자식으로서는 도저히 갚을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질수밖에 없다. 늦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내가 어머니한테 해드려야 할일은 오직 효도일뿐이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어머니한테 효성을 다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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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잡문] 세상살이와 취미생활
    ■ 연변 리포터 김철균 불현듯 “조물주”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우리 인간을 놓고 보더라도 머리 하나에 눈, 귀, 코구멍이 각각 둘 씩이고 몸뚱아리에도 손 둘, 발 둘 등으로 대칭되니 얼마나 기묘한가?! 또한 인간 몸뚱아리의 둘 씩 있는 이 물건은 이렇게 서로 대칭되면서도 “상부상조”한다. 예하면 바줄을 당길 때 두 손은 엇바꿔 바줄을 쥐며 힘을 가하고 길을 걸을 때 두발 또한 엇바꿔 내디디면서 앞으로 전진하며 두 귀와 두 눈 역시 각각 오른 쪽 혹은 왼 쪽의 사물과 소리를 분별하며 보고 듣고 하기도 한다. 그럼 세상만물이 처음부터 이렇게 됐을까? 아니라는 생각이다. 생존을 위해 진화되면서 인간의 오늘도 이렇게 된것이라 점치게 된다. 그럼 우리의 옛조상 할아버지들인 유인원이 오늘의 인류로 되기까지는 수천수만갈래의 진화를 거쳤을 것이며 현재의 우리의 삶 역시 계속되는 진화속에 있을 것이 아닐까? 가령 그것이 맞다면 현재 우리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나 또 다른 삶의 형태인 취미 - 즉 요즘의 유행어로 말한다면 레저생활도 진화과정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다면 나 역시 뭇인간들처럼 무수한 진화속에서 오늘의 내가 “창조”됐다고 터놓고 싶어진다. 지난 세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비록 형수님의 슬하에서 자랐지만 별로 생활적 압력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헌데 내가 뭐 다혈질인지는 몰라도 취미가 좀 다각적인 것 같았다. 뭐든지 하고 싶으면 하는 성질이었다. 동관악기인 트롬베트를 전공해 음악가로 되고 싶었고 미술을 전공해 멋진 화가로도 되고 싶었다. 또한 사내애면서도 부뚜막일에 각별히 집착했던 모양이던지 형수님이 뭘하면 그 모양새를 따느라고 무척이도 신경을 썼다. 한번은 형수님이 계란에 부추를 섞어 볶았는데 나도 그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날 형님과 형수님이 퇴근하기 전에 일찌감치 계란을 먼저 볶아내고는 부추를 함께 넣었다. 헌데 암만 봐도 물이 적은것 같아 물을 좀 넣었더니 글쎄 부추란 야채에서 물이 나오면서 계란부추요리인 것이 아니라 계란부추국이 돼버렸다… 내가 이렇게 부지런하다고 하면 남들은 혹간 공부도 잘했으리라 여길 것이다. 허나 천만에다. 한번은 화학시험을 57점을 맞아 형한테 야단맞은 적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인 것을 알 것이다. 또 있다. 사내로서 밖에서 뛰여다니고 망치를 쥐고 뚝딱거리며 못이나 박는 일은 죽도록 질색이었다. 그러니 취미가 다 방면이란 것도 새빨간 거짓말로 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한편 내가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자꾸 신경을 쓰니 형님은 “누가 네가 해주는 음식을 먹자고 하던?”라고 하며 공부만 하라고 강요해댔다. 헌데 들을 놈이 들어줘야지 형님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나중엔 형님도 “어쩔수 없어 지금이 어디 공부를 하는 세월이라구. 공부를 잘해도 대학에 못가겠는데 뭐” 하면서 포기했다. 그러니 난 제딴에는 형님이 나의 취미를 인정해 주는 줄 알고 더욱 외딴 일에 열을 올렸다. 그림을 그릴라치면 밤이 새도록 도화지를 펴놓고 이른바 “초상화”를 그린다 했고 트럼베트를 불라치면 윗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도록, 동네방네서 귀를 막고다니도록 불어댔으며, 또한 영화(당시는 TV가 없었음)에서 식당요리사들이 채써는 걸 보고서는 그대로 잽싸게 칼질을 해대느라 흉내내다가 칼에 손을 벤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긴 지금은 딱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 나한테도 이른바 이상과 개성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이 다 하는걸 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악사나 화가는 멋지고 요리사는 잘 먹을 수 있다” 등등으로 말이다. 헌데 나는 그중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오늘날 요꼴, 요모양이 됐다. 후회되는가?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취미가 여러 종이 되니 써먹을 곳이 많아 좋기만 하다. 예하면 내가 소고기 꽃등심으로 불고기를 하거나 생신한 꽃게를 갖고 무침을 해서 남들한테 선보였을 때 그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 이상 즐거운 일이 없었다. 또한 어린 딸애한테 가요 “아리랑”, “고향의 봄” 등을 오선보로 일필휘지해줬더니 딸애가 눈이 동그래졌으며 딸애학교에서 부모와 함께 제작하라는 소제작작품을 만들 때, 그제날 내가 타던 선박 “코리안스타”호를 모양내서 만들어 줬더니 뭐 주급이란던지 국가급이라던지 하는 상도 탔단다. 그외 현재 내가 기자이니 딸애의 작문지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바탕 제자랑을 늘여놓았더니 어쩐지 좀 게면쩍기도 하다. 평생 반장 한번 해보지 못한 놈이 자랑은 무슨 개떡같은 자랑인가! 하지만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 아닌 이런 “재간”이 있으니 큰 전문가는 되지 못해도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 가기에는 이전엔 별로 거침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또 이한 모든 것도 내가 처음부터 알고 있은 것이 아니라 이른바 노력하는 “진화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취미로 익히고, 살아가기 위해 배우고, 또 자랑하기 위해 숙련시키고 말이다. 화제는 다시 서두로 돌아간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몇가지 취미가 있다면 어떤 어르신들은 참 별난 취미생활이 있는 것 같다. “조물주”가 만들어준 건강하고 영활한 몸뚱아리와 총명한 영혼을 별로 좋은 일에 쓰는 것 같지를 않고 있다. 국녹을 타먹는 이가 절로 인생을 개척하는이를 보고 무능하다고 비웃는가 하면 남을 헐뜯는데도 재간이 가지각색이다. 남이 일을 잘하면 그 사람을 라이벌로 여기면서 헐뜯고, 남한테 좀 불행이라도 생기면 잘코사니를 부르며, 심지어 남의 아내의 발이 큰 것마저 그런 사람한테는 커다란 “이슈”가 돼버린다. 왜 그렇게 살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사는 “재간”은 별로 없고, 자아업무에도 게으르고, 제로(령)이지만 엉뚱한 두뇌는 아주 발달된 것 같다. 사회기반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지도자한테 질러주고 여하튼 사교술은 “외교부 장관”의 버금으로 간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참 이상한 취미,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살런고? 한편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강한 사람은 질투를 하지 않는다. 질투하는 사람을 보면 꼭 어딘가 부족하거나 약한 곳이 있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니까, 심리평형이라도 잡아야 하니까 말이다. 인류사회란 모순과 갈등, 사람 사이의 같지 않은 취미에 따라 각종 질투와 오기가 있기 마련이다. 중국이 그런가 하면 외국도 그렇고, 남자가 그런가 하면 여자도 그러하다. 다만 우리가 사는 이 지역사회가 좀 더 심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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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단편소설] 전쟁과 칠성영감의 여인들
    □ 김철균 올해 85세인 칠성영감이 오랜 투병생활 끝에 며칠 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임종전 칠성영감의 부탁으로 안노인은 한국에서 사는 한 80대(87세)의 안노인과 60대 초반의 한 남성을 초청했다. 임종을 앞두고 칠성영감은 손을 내밀어 한국에서 온 여인 윤씨와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마누라 오씨의 손을 동시에 잡아 주었다. “한국에서까지 와준…임자가 고맙수. …임자한테 미안하구려. 그리고… 여보 피붙이 한명 없이 … 마지막까지 나를 거들어 주어 고맙수. 당신…한테… 당신한테 더욱 미안하구려…” 그러고는 다시 한국에서 온 60대 장정 박씨의 손을 잡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두…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너한테…너한테 맡긴다. …애비로서 부끄럽다만…” …… 1 칠성영감이 태여난 곳은 조선 전라도 남원지방의 어느 한 시골이었다. 당시 일제시대라 여느 가정이라고 살림이 넉넉할리 만무했지만 칠성이네 가정은 더욱 가난했다. 때문에 칠성이는 17살 되도록 장가갈 엄두도 못냈다. 한살 아래인 여동생 봉녀(애명)가 머리얹을 나이가 됐건만 칠성이 때문에 매파가 문턱이 닳도록 찾아와도 그냥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밤, 마을동쪽 홰나무아래에서 모기불을 피워놓고 한담하던 중 문득 칠성이의 송아지친구인 석동이가 기발한 착상을 내 놨다. “칠성아, 우리 이러다간 평생 총각딱지 뗄 수 없능기라. 우리 이러믄(이러면) 아주 멋질 것 같응기라. 니와 방아칸집 금돌이 그리구 나 모두 누이들이 있으니 서로 엇바꿔 누이들한테 장가들면 어떠항기라. 허긴 금돌이한테는 두살 많은 누이라지만…헤헤헤.” 석동이의 뜻인즉 칠성이가 금돌의 누나 윤삼월한테 장가들고 석동이가 칠성의 여동생 박봉녀한테 장가들고 금돌이 또한 석동의 여동생인 함인애한테 장가든다는 이른바 “누이바꿈”이었다. 칠성이로 말하면 서운했지만 아주 그럴듯 했다. 부모님한테 엿주었더니 부모님 역시 칠성의 생각과 같았다. … 약 한달 뒤 이들 세 친구는 같은 날에 혼례식을 올렸다. 그날 밤 사랑채에 신혼방을 차려놓고 한방에 든 칠성이네 내외간- “나이 두살이나 더 먹구 서방님 모시기가 부끄럽구만이라.” “아니 나야 뭐 좋기만 한디. 없는 집안에 들어온 임자가 고맙기만 항기라.” …… 이는 백연해로를 약속한 이들 부부의 첫 대화였다. 한편 체통이 우람지고 얼굴까지 준수한 칠성에 비해 삼월이는 나이 두살 더 많은데다 그 때 벌써 눈언저리에 잔주름이 가기 시작한 것이 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칠성이한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가난한 팔자에 장가를 든 것만 해도 기쁘기만 했다. 가난속에서도 그들의 신혼생활은 달콤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칠성를 비롯한 동네 젊은이들이 학도병에 끌려가게 됐던 것이다. … 마모루모 세무루모 꾸로가네노 우까베루 시로조따노 미나루 (싸움도 지킴도 떠오르는 강철성의 힘이요) 독우까베루 소노 시로 히노모또노 미꾸니노 요모오 마모루베시 (떠오르는 그 성의 힘으로 태양의 근본 황국의 사방 지킬 것이리) … 일본군가(일명: 군함행진곡)가 주악되는 가운데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은 일장기로 숲을 이루었고 반자이(만세)소리가 역광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들이나 남편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조선인 어머니와 안해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기적소리가 길게 울리자 칠성이네를 앉힌 군용열차는 서서히 플래트홈을 빠져 나갔다. “서방님, 와 나 빈몸으로 남겨두구 떠나는깅라? 부디 살아서 돌아오랑께…” 그 때까지 삼월이한테는 태기가 없었다. 2 조선인학도병을 실은 군용열차는 10여일 가량 달리다가 지나땅(중국)의 광주에 도착했다. 거기서 칠성이네는 다시 군함에 올라 남쪽으로 향했다. 며칠 뒤 군함이 입항한 곳은 버마(지금의 먄마)의 어느 작은 항구였다. 조선인학도병들은 인차 진지에 배치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인도, 방글라데쉬와 버마 삼각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맹군의 상육을 저지시키는 것이었다. 칠성이네가 포진한 후 며칠 안되어 과연 동맹군의 폭격기편대가 하늘을 뒤덮더니 융단식 폭격을 퍼부었다. 군막사가 날아나고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채로 뽑히면서 폭격은 기승을 부렸다. 일본군 스츠키 이치로 중대장이 인솔하는 일본군은 며칠동안 지속되는 동맹군의 폭격에 30% 이상이 저승사자가 됐다. 그리고 보급로가 끊어진데다 창고가 폭격에 불타면서 식양도 바닥났다. 이어 동맹군 함정들의 무차별한 함포사격이 4시간 동안 지속되던 끝에 드디어 동맹군의 상육이 개시됐다. 동맹군의 전술은 대량의 물양공세로 일본군 진지를 초토화시킨 뒤에야 상육하는 것이었다. “진지를 사수하라. 육탄으로 미군을 막으라. 나중엔 옥쇄까지 각오하라.” 스츠키 중대장이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일본군 진지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칠성이는 난생 처음 전쟁을 경험하는지라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일본군을 위해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동맹군이 진지에 오르기 시작하자, 부분적 사병들만 날창을 꼬나들고 결사적으로 저항할 뿐 조선인 학도병들을 비롯한 대부분은 총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사수하라, 육탄으로 막으라. 도망하면 즉결처분이다.” 아니나다를가 스츠키 중대장은 도망치는 사병들을 쏘아 죽이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병들의 무리는 계속 이어졌다. 신변에 사병 한명도 없게 되자 스츠키 중대장은 탄약 한알이 남은 권총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겨누었다… 도주병들이 진지를 떠나 다른 정글속에 들어서자 동행한 사병은 겨우 6병뿐이었다. 나머지는 살상됐거나 실종된 것이 분명했다. “지나땅으로 간다. 그곳은 우리 황군의 대후방이다. 황군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지나땅에서 재정비해 다시 출격한다.” 6명뿐인 패잔병은 일본군 상등병 다즈치가 인솔했다. 말이 인솔이지 누구도 다즈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지치고 허기지고 까딱할 기운도 없었지만 모두가 기계적으로 걷고 있을뿐이었다. 북상 3일째 되여 선후로 일행중 2명이 졸도해 죽자 다즈치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들더니 시체의 엉덩이살을 베여내서는 불에 굽는 것이었다. “야 이놈 조센징, 너 이걸 먹어라. 먹어야 산다. 네가 죽으면 나 너의 살점도 먹을 수 있어.” … 아무리 굶었다고 어떻게 사람의 고기를 먹을 수 있담?! 칠성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즈치를 쳐다 보는 것만도 무서웠다. 죽어가는 자가 계속됐다. 며칠 지나 또 2명이 죽자 칠성이는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인육으로 배를 채운 다즈치보다 굶은 자기가 먼저 죽는다는 건 불보듯 뻔했다. 칠성이는 죽은 자의 고기를 굽고 있는 다즈치한테 덮쳐 들어서는 단도로 그의 목부위를 향해 죽어라고 찍어댔다. 다즈치의 목에서 선지피가 비린내를 풍기며 콸콸 쏟아졌다. 이윽하여 다즈치는 온몸을 몇번 떨더니 인차 축 늘어졌다. 칠성이는 단도를 땅에 꽂으며 주저 앉았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칠성이는 단도로 땅을 파서는 다즈치와 기타 2명의 사병을 묻어 주었다. 마지 못해 다즈치를 죽인 칠성이었지만 그는 죽은 자를 묻어 주었다. 이는 다즈치에 대한 그의 마지막 예의였다. … 그 뒤 칠성이는 산열매로 요기하고 뱀도 잡아먹으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걷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작은 골짜기를 벗어나자 앞이 탁 트인 개활지가 나타났다. 작은 논과 몇 채의 인가도 보였다. 순간 칠성이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 3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면서 / 비단구도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이 노래는 어릴 때 삼월이가 즐겨 부르던 동요였다. 헌데 크면서 부르지 않던 이 노래를 삼월이는 다시 부르게 되었다. 분명 칠성이가 사무치게 그리워서였다. 그러다가도 삼월이는 자기보다 두살 어린 서방을 두고 “우리 오빠 말타고”란 대목을 부를 때면 몰래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그날 따라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하더니 돌배나무위에 앉은 까치가“깍깍”하고 울어댔다. (오늘은 웬 기쁜 일이 있다구 까치마저 울어대능기라?…) 아니나다를가 점심무렵 자전거 방울소리가 나더니 배달부가 사립문가에 나타났다. 분명 기쁜 소식인 것 같았다. 삼월이는 재차 “우리 오빠 말타고”를 흥얼거리며 배달부를 반겼다. 배달부는 정색해하며 전보 한통을 내밀었다. 이에 삼월이는 전보문을 받다 말고 배달부를 쳐다보았다. 글 읽을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읽어줄 것 없능기라. 댁에 학도병에 간 사람 있수? 버마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전보문잉기라.” 배달부는 투명스레 내뱉고는 휑하니 자리를 떴다. 순간 삼월이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더니 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 칠성이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시가어른인 박씨영감은 삼월이를 앉혀놓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너한테는 참 안됐다만 널 보면 내 맘이 더욱 심난항기라. 칠성이는 박씨네 하나밖에 없는 대들보 아들이라. 아들없는 집에 며느리를 그냥 둘 수 없능기라. 그렇다고 서방의 씨를 받은 것두 아니구…” 박씨영감은 뒤 말을 잇지 않았으나 삼월이는 어른의 뜻을 알만 했다. 삼월이는 그날로 시가를 나왔다. 시어머니가 며칠만 있으며 마음을 가라앉인 다음 떠나라고 만류하는 것도 마다했다. 그렇다고 어디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그대로 그냥 살고 싶지를 아니했다. 삼월이는 그 길로 동구밖의 늪으로 향했다. 늪가에 이른 그녀는 하늘에 향해 간단히 용서를 빌고는 치마를 뒤집어 쓴채 늪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삼월이는 죽을 팔자가 아니었다. 얼마 후 삼월이가 눈을 뜨니 자신은 중국인 외토리인 장서방네 참외밭 오두막에 누워 있었다. “왜 날 살렸수?!…그냥 내버려 둘거지 왜 살렸느냐 말잉기라.” “이렇게 좋은 임자를 어떻게 죽게 나눈다 했소! 히히… 이 새뽀얀 살결 좀 보라 했소. 나 처음 임자같은 여자의 속살 봤다 했소.” 당시 삼월은 요해 부분만 제외하고는 온 몸이 발가 벗기운채로였다. 장서방이 그 녀의 옷을 벗긴 후 해볕에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삼월이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장서방한테 운명을 맡겨 버렸다. 그런데 장서방과의 운우지정도 오래 나누지 못했다. 손가락 까딱하지 못하도록 삼월이를 아끼고 고와하던 장서방마저 얼마 뒤 온역으로 하루 아침 새에 덜컥 죽어버렸던 것이다. 삼월이는 더는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남자 둘이나 꺾어 먹은 여자라고 등을 돌렸고 친정집 부모님조차 가문의 망신을 시킨 딸을 용납할 수 없다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받아주지 않는 친정집을 향해 절을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향을 떠났다. 그렇다고 전번처럼 죽고 싶은 마음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4 한편 바로 그럴 즈음 칠성이는 중국 - 버마국경의 중국측 어느 시골의 한 중국인농가의 온돌 위에 누워 있었다. 며칠전 국경을 넘은 뒤 쓰러진 칠성이는 중국인 곽씨여인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원되었다. 당시 곽씨여인이 칠성이를 업고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부친은 “쑈르번(小日本ㅡ일본쪽바리의 뜻)”을 집에 들인다고 호통치다가 “물”하고 입을 여는 칠성의 말을 듣고서야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중의인 곽노인은 칠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일본말이 아니란 정도는 일고 있었다. “쩌머양, 호이댄러마?(어때요, 좀 나아졌어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칠성이는 곽씨여인의 말이 몹시 관심어린 어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칠성에 대한 곽씨여인의 정성은 지극했다. 그녀는 미음을 끓여주기도 하고 계란을 삶아주기도 했으며 부친이 처방해주면 산에 올라 약초를 캐서는 직접 닳여 칠성이한테 대접하기도 했다. 칠성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춰섰다.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되자 칠성이는 바람을 쏘일 겸 산기슭이나 호수가를 산책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곽씨여인은 함께 동행해 주군 했다. 둘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나 손시늉으로 얼마든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칠성이가 낚시를 하다가 대어 한 마리를 잡아올리자 곽씨여인은 탄성을 지르며 칠성의 목에 매달리더니 키스세례를 퍼붓는 것이었다. 둘은 대뜸 한덩이로 됐다. 아무리 목석같은 칠성이었지만 그 역시 젊었으며 여자를 아는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곽씨여인과 매번 “사고”를 치고 나면 뇌리에는 또 한명의 여인 삼월이가 떠올랐다. 아무리 살갑고 어여쁜 곽씨라지만 칠성이를 놓고 볼 때 중국인 여성인 그녀와 함께 고향에 나타날 자신이 없었고 삼월이를 쫓아내고 곽씨여인을 안방에 들일 용기는 더욱 없었다. 칠성이는 몇번이고 속심말을 그녀한테 털어 놓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한테 차마 떠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어느날 밤 칠성이는 자기의 팔을 베고 달콤하게 자는 곽씨여인의 목에서 팔을 살며시 빼내고는 살금살금 문을 나섰다. 심한 자아모순속에 빠지면서 말이다. 5 그 몇년 뒤 칠성이는 조선인민군 군관이 되어 38선 부근에 나타났다. 칠성이로 말하면 자신의 뜻과는 다른 운명의 계속이었다. 몇년전 중국 광서에서 곽씨의 집을 도망쳐 나온 뒤 칠성이는 조선을 바라고 발길을 다그쳤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국민당군에 붙잡혀 다시 군복을 입었고 항일전쟁이 승리함과 동시에 중원지구로 진출했으며 공산당이 인솔하는 팔로군과 총부리를 마주하게 됐다. 이어 국민당군이 팔로군(후엔 해방군)한테 수세에 몰리면서 칠성이는 팔로군한테 포로됐고 그 다음엔 전향해 해방군으로 됐다. 그렇게 남정북전을 하다가 1949년 4월 해방군에서 근무하는 기타 조선인 군인들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으며, 그 소속사단은 인민군주력으로 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고요하던 38선 상공에 신호탄이 연속 솟아 올랐고 대포소리, 탱크 무한궤도의 굉음으로 복새판을 이루었다. 가슴에 끓는 피를 조국에 바치니/ 영예로운 별빛이 머리위에 빛난다// 나가자 인민군대 용감한 전사들아… 장비와 수적으로 우세인 인민군앞에서 한국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한 채 연이어 무너졌고 전쟁개시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서울에 진출한 칠성이는 이제 오래잖으면 고향에 가서 부모님과 그립던 삼월이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던 칠성이는 너무도 생각 밖으로 서울시청 광장에서 삼월이를 만나게 됐다. 당시 삼월이는 어느 한 찻집의 레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해방된 남조선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할데 관한 법령”을 반포하는 모임에 참가했다가 칠성이를 만난 삼월이는 꿈이냐 생시냐 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칠성이 역시 서울에서 생활하는 삼월이를 보고 크게 놀랐다. 삼월이는 무작정 자기의 숙소로 칠성이를 끌었다. 칠성이 또한 군규율을 망각한 채 삼월이가 이끄는대로 몸을 맡겼다. 이튿날 칠성이가 부대로 귀속되자 마자 사단은 남쪽을 바라고 진격을 개시했다. 당시 인민군은 “진주, 전주, 광주로ㅡ 대전, 대구, 부산으로”란 슬로건을 내걸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칠성이는 삼월이의 손을 잡고 “이제 남조선 전체가 해방되면 임자와 함께 고향인 남원으로 내려가 아들 딸 낳으며 살련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이였지 실천은 아니었다. 그해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육과 더부러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은 포위되어 양쪽협공을 받는 수세에 몰렸으며 부득불 전반 전선에 거쳐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칠성이가 소속된 부대 역시 북을 향했으나 서울을 거치지 않고 원주 쪽으로 38선을 넘었다. 그 뒤 중국인민지원군의 입조참전으로 1951년 1월초 중조군대가 다시 서울을 재점령했으나 칠성이가 찾는 삼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인생만년에 들어 칠성영감은 윤삼월여인과의 세번째의 상봉을 하게 됐다. 1992년 중한수교가 되면서 칠성영감은 고향인 한국의 남원을 다시 찾게 되었고 수소문끝에 윤삼월이 여전히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40대 초반의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40대의 아들, 그렇다면 6.25 당시 서울에서의 만남과 맞아 떨어졌다. 그때로부터 칠성영감은 과묵해졌다. 필경 자신의 피붙이는 있었으나 윤씨와의 재결합은 말도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돌아온 칠성이는 민정부문에서 중매해준 여인 즉 지금의 오씨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장시기의 군인생활에서 여러 차례 부상을 당한 그가 생육능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칠성이는 이 역시 자기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한국행을 통해 자기한테도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안 뒤부터는 많이 달라졌다. 한편 오씨녀인이 불쌍했다. 오랫동안 함께 살다보니 정도 들대로 든 모양이었다. 칠성영감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그는 다각역의 인물이었다. 처음엔 일본군 학도병으로 동맹군과 싸웠고 후엔 국민당군대로 팔로군과 싸웠으며 이어 다시 해방군에 편입돼 국민당군과 싸우다가 조선으로 간 뒤에는 유엔군과 같은 동포인 한국군과 싸우게 된 군인생활, 어떤 뜻에 의해서나 정치이념을 갖고 군인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다. 여인들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었다. 운명에 의해 윤삼월의 곁을 떠났고 광서에서는 곽씨와의 짧은 로맨스도 있었으며 후에는 오씨와의 만남도 이뤄졌다. 그외 “6.25” 당시 부상으로 후방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호사 여인과 여차여차하게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를 증명할만한 증거는 없다. 생전에 칠성영감은 마누라인 오씨한테 자신과 기타 여인들과의 관계를 두고는 단 윤삼월에 대해서만 알려줬을뿐 기타의 곽씨여인 등에 대해서는 함구무언이었다. 인생만년의 투병생활 중 칠성영감은 정신이 혼미할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군 했다. 꿈속에 일본군 스츠키 중대장, 다즈키 상등병 그리고 중국 중원에서의 전투장면과 조선에서 피로 물든 낙동강전선 장면 등이 자주 떠 올랐는가 하면 윤씨, 곽씨와 오씨 등 여인들의 얼굴도 교차되여 떠오르군 했다. 어찌보면 이는 한편의 대하드라마와도 같았다. 여하튼 칠성령감의 남다른 생애는 특수한 시대에 생긴 일장풍운록이 아닐 수 없으며 우리 민족 력사의 한측면을 말해 주는듯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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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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