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전체기사보기

  • 2030클럽 "씽씽~ 스키타기 너무 신난다"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중국조선조대모임 "2030클럽" 맴버들은 지난 15일 강원도 오크밸리 스키장에서 겨울문화체험을 가졌다. 이번 겨울문화체험은 평소 경험할 기회가 적은 맴버들을 대상으로 스키타기와 기타 체험 등 다양한 체험 활동으로 맴버들간의 소통과 우애를 다지는 뜻깊은 기회가 됐다. 참여맴버들은 이구동성으로 “맴버들과 스키를 타보는 기회를 가져 기쁨은 두 배로 맴버들과 또 오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조선조대모임 2030클럽은 정기적으로 문화체험, 스키캠프 등 운영을 통해 소통과 단합, 사회생활의 질을 높여나가고 있다.
    • 뉴스홈
    • 국내뉴스
    • 사회
    2014-02-16
  • 김수현, 이민호를 초월해 올해의 “한국드라마 남신”으로 부상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한국드라마 “상속자들”이 2013년의 대세였던 이후 다른 한 한국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새해 2014년을 기습해왔다. “별에서 온 그대”는 시청률이 지속 상승하는 가운데 드라마에서 “외계인교수” 역을 연기하는 배우 김수현은 더욱이 “긴다리의 오빠” 이민호를 초월해 올해의 “한국드라마 남신”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중국 텅쉰망이 14일 보도했다. 보도는 또 사실, 한국드라마가 형형색색의 남신, 여신들을 탄생시킨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이라면서 이전의 원빈, 현빈, 이영애, 송혜교 등 모두가 한국드라마를 통해 신속히 중국 나아가 아시아에서 인기를 받았고 평가, 그들 가운데서 일부 남신들은 참군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대체됐고 또 일부 여신들은 결혼과 출산으로 연예계에서 퇴출했으며 전지현과 같은 여스타들은 한국드라마로 또다시 여신의 보좌에 오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문장은 과거와 현재 한국의 남신, 여신들을 되짚어보았다. 새로 떠오른 한국 연예계의 남신들이민호 2009년, 한국 스타배우 이민호는 “꽃보다 남자”(한국판, 일본판)에서 구준표 역을 담당해 이름을 날리며 한국 제1선의 남스타로 떠올랐고 2011년 드라마 “시티헌터”가 방송되면서 이민호는 주연으로서의 인기가 재차 크게 올랐다. 지어 그가 드라마에서 입었던 표범무늬 진바지가 물건이 없어 못파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2013년 한국드라마 “상속자들”이 인기리에 방송된 가운데 드라마에서 김탄 역을 맡은 이민호는 신속히 아시아를 풍미하는 인기절정의 거성으로 되었으며 따라서 중국팬들의 마음속에 손색없는 남신으로 되었다. 적지 않은 중국팬들은 친철하게 이민호를 두고 “긴다리의 오빠”라고 불렀다. 그같은 높은 인기로 이민호는 올 말해의 중국 중앙텔레비죤 음력설야회에 올라 대만 가수 유징경과 함께 대만판 “꽃보다 남자”의 주제곡 “정비득이”를 불러 말해 중국 음력설야회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프로로 되었다. 김수현 전지현, 김수현 주연의 한국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지속적으로 시청률을 갱신하고 방송량이 상승하면서 일전 폭발적인 인기속에 끝난 “상속자들”을 초월하고 있다. “별에서 온 그대”는 외계인교수와 국민 여스타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외모가 출중한 배우에, 세련되고 아름다운 스타일에, 우여곡절의 정절로 하여 한국 본토에서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외계인교수” 역을 맡은 한국 배우 김수현은 점차 이민호를 초월하며 “제1위의 남신”으로 도약, 14만의 검색지수로 중국 바이두 풍운방(风云榜) 오락명인 순위에서 제1위에 올랐고 더욱이는 Vlinkage 신매체지수―종합미디어 리서치 인기배우 평가에서 9.66의 높은 점수로 제1위에 올랐다. 이전의 한국 연예계 남신들 원빈2000년에 드라마 “가을동화”가 인기리에 방송된 가운데 귀공자 한태석 역을 연기하며 원빈은 새 일대 한류의 거성(巨星)으로 떠올랐다. 원빈은 2005년 11월 29일 군에 입대, 2006년 6월에 부상으로 앞당겨 제대했으며 영화 “마더”(드라마, 일본판 영화, 한국판 영화)로 다시 연예계에 회귀했다. 원빈은 2010년에 영화 “아저씨”로 2010년 관객 수가 가장 많은 영화의 배우로 되었고 아울러 제47회 한국영화대종상, 제8회 한국영화대상 등 영화제서 대상을 받았다. 현빈현빈은 2005년, 한국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일약 한국에서 가장 눈부신 남스타로 부상했다. 이 드라마는 당년 한국에서 연속 시청률기록을 깨고 마지막엔 51%라는 최고 시청률을 내며 완벽하게 막을 내렸다. 2010년에 현빈은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 출연하여 그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2011년 3월 7일, 현빈은 군에 입대하게 된다. 21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2012년 12월 6일 제대, 영화 “역린”에 출연했다. “역린”은 현빈이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한 것이며 이 영화는 올해 한국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소지섭소지섭은 2004년,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차무혁 역으로 인기가 대단했고 국내외 영화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새 일대 한국영화의 남신으로 떠올랐다. 소지섭은 2005년 2월 28일 군에 입대해 2007년 4월 27일에 제대, 2008년 영화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연예계에 회귀했다. 그는 드라마 “주군의 태양”에서 주군 역을 맡아 일거에 낭만의 희극지왕으로 등극했다. 새로 떠오른 한국 연예계의 여신들전지현 전지현은 2001년 영화 “엽기적인 그녀”(영화판, 드라판, 일본드라마판)을 통해 일약 한국 정상급 여스타로 부상했다. 전지현은 2013년, 드라마극장에 복귀해 “별에서 온 그대”에 여주인공 천송이 역으로 출연, 이 드라마는 방송을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뜨거운 열풍속에 방송되고 있다. 그제 날의 영화계 여신 전지현은 “별에서 온 그대”를 통해 한국드라마 여신의 보좌를 탈취했고 그녀의 연기를 두고 네티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한 네티즌은 “한국 배우들 가운데서 그렇듯 사랑스럽게 경솔함을 연기해 사람들로 하여금 혐호감 없이 열광케 하는 배우는 전지현 외 김삼순 뿐이다”고 썼다. 박신혜한국드라마 “상속자들”에서 박신혜는 여주인공 차은상의 역을 연기, 이 드라마의 열풍이 뜨거워지면서 원래부터 중국에 팬을 확보하고 있던 박신혜는 중국팬이 신속히 증가되였는바 현재 박신혜의 중국 블로그의 팬은 500만명을 돌파, 명실공히 새 일대 한류의 거성으로 부상했다. 이전의 한국 연예계 여신들 이영애 이영애는 2003년, 드라마 “대장금”에 주연으로 출연해 세계 각국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이영애는 2009년, 자기의 노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학력에 극히 적은 추문, 단아한 모습으로 “산소같은 미녀”로 불리웠다. 이영애는 2011년 2월 20일, 한국 서울에서 오누이쌍둥이를 보았고 최근년에는 남편과 함께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 이영애는 허다한 남성들의 우상이고 허다한 사람들 마음속의 “완미한 여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지우최지우는 1996년, 드라마 “첫사랑”을 통해 인기를 받았고 2002년 배용준과 함께 드라마 “겨울연가”에 출연해 중국 시청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최지우는 연기 다년간 출연 역 대부분이 자기의 기질에 맞는 청수가인이였고 이같은 형상은 아시아 각국에서 총애를 받으며 “지우공주”라는 아름다운 별명을 얻었다. 송혜교 송혜교는 2000년에 “가을동화”에 주역으로 출연해 높은 인기를 받았고 신속히 중국 관중들 마음속의 여신으로 되었다. 그녀는 2001년과 2004년에 연이어 “호텔리어”(한국판, 일본판)와 “수호천사”, “해빛 쏟아진다” 등 드라마에 출연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송혜교는 2005년부터 영화쪽 발전에 주력했고 2008년에는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 출연했다. 2009년에 송혜교는 중국영화 “일대종사”에 출연했으며 4년간 스크린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2013년에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 연예·방송
    2014-02-15
  • 중국, 남북한 정상회담 협의달성 환영
    ▲중국 외교부 대변인 화춘영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중국 외교부 화춘영 대변인은 14일, 북한(조선)과 한국 정상회담이 협의를 달성한데 대해 환영을 표했다. 북한과 한국이 선후하여 2월 12일과 14일, 판문점에서 2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14일, 양측이 협의를 달성한데 대해 중국은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기자의 물음에 화춘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과 한국은 고위급회담에서 예정대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고 서로 비방과 중상을 멈추며 계속 고위급회담을 진행하기로 하는 등 3가지 협의를 달성한데 대해 중국은 지지와 축하를 표한다. 오늘은 정월대보름으로 북한과 한국은 관계의 적극적인 진전을 거두어 명절을 기쁘게 경축했다. 이는 북한과 한국 양측이 민족대의와 지역평화, 대국안정으로부터 출발해 서로 양해하고 양보한 결과로 우리는 이를 높이 평가한다. 중국은 일관하게 반도 남북 양측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지지한다. 양측이 계속 합작을 강화해 반도형세가 진일보로 완화되도록 추진하기를 희망한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14-02-15
  • WFP 2013년 북한 식량상황 다소 호전
    [동포투데이 국제]2013년도 북한 식량 상황이 국제기관의 원조와 해외 지역국가들의 도움으로 다소 향상됐다고 14일 연합뉴스가 세계식량프로그램 보고 내용을 인용해 전했다. 보고 내용에 따르면 약 46% 국민들이 '충분한' 식량을 공급받았고 17%가 '불충분한' 식량을 공급받았으며 38%는 '기근의 경계'에 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 같은 조사 내용은 북한 119개 가정을 상대로 펼친 설문 조사와 북한 지도부와의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작성됐다. 2012년도에는 26%만이 '충분한' 식량을 공급받았고 50%는 '기근 상태'에 처한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세계식량프로그램 전문가들은 2014년 상반기 단백질 부족으로 식량 공급 상황이 다시 악화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중동·아프리카
    2014-02-15
  • 인연을 소중히 여긴 홍성남의 차별화된 출판기념회
    지난 12일(수) 오후 서울 강북구 미아동 서울컨벤션웨딩홀에서는 여타 정치인들과 차별화된 특이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그 주인공은 4권을 동시에 출간한 강북경제연구소 홍성남 대표이다. 언론인 출신으로서 시인이면서 정치인인 홍 대표는 이날 <장무상망(長毋相忘)>, <택시운전과 정치>, <삼국지 영웅들의 인연>, <인생과 관상>을 처음으로 동시에 선보였다. 이날 사회를 맡은 한남대학교 손용우 교수는 “그동안 한반도선진화재단과 통일학교에서 한반도 선진통일전략을 홍성남 대표와 함께 공부했다. 또한, 홍 대표와 같이 매월 1회 남산 길을 달리면서 강북구 현안을 놓고 많은 논쟁도 했다. 그때마다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홍 대표의 모습을 보고 그분을 신뢰할 수 있었다.”라고 하면서 출판기념회의 말문을 열었다. 국민의례가 끝나고 축하 떡을 자른 후 각계 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먼저 선약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던 세 분이 영상으로 축하의 말을 전했다. 손병두(전, 서강대학교 총장) 삼성꿈나무장학재단 및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우리가 살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안다면 갈등과 다툼은 줄어들고 이해와 용서는 늘어날 것이다. 나와 홍 대표의 인연은 벌써 15년이 넘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홍 대표와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의 마음으로 함께했다.”라고 홍 대표를 소개했다. 그리고 실물 경제 전문가로서의 손 이사장은 홍 대표가 강북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우택(전, 충청북도지사) 새누리당 최고위원(국회의원)은 “사회문제에 깊은 식견을 가진 정치인 홍성남은 성실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나도 지난 지방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뒤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당시 민생 속에서 시민들과 동행하며 참된 정치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라고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희망의 도시 강북구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 홍성남 대표와 함께 의미 있는 열정을 느껴보길 권했다.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내가 홍성남 대표를 알고 지낸 지 5년 이상 됐다. 그동안 옆에서 지켜보면서 홍 대표는 우선 마음이 굉장히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라 사랑, 지역 사랑, 국민 사랑의 마음이 각별하다. 본인이 시인이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이웃 문제에 관심이 많다. 이웃이 어려울 때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할 때 같이 행복해 했다. 또한, 홍성남 대표는 몸으로 움직인다. 민생현장, 정치현장을 부지런히 누빈다. 택시운전을 하며 민생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 곳곳을 살피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라고 홍 대표의 따뜻한 인간미를 높이 샀다. 이에 덧붙여 참석자들에게 홍 대표가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임덕기 (사)대한민국건국회 건국유공자유족회 회장은 “나도 시인으로 오래전 등단했지만, 아직 한 권의 시집도 출간하지 못했다. 그런데 홍 대표가 4권 을 동시에 출판하다니 정말 놀랍고 존경스럽다. 마포에서만 51년을 살았다. 눈 오는 날 자기 집 앞 눈도 안 치우는 공무원·정치인들이 많다. 그런 기본도 안된 정신을 갖고 제대로 정치를 하겠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며 홍 대표는 그런 사람들과 달리 직접 발로 뛰는 정치인이 될 것임을 믿는다고 역설했다. 서종환 선진통일연합 고문은 “홍 대표와 관계를 맺은 지 5년 이상이 지났다. 그동안 홍 대표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우리가 하는 일에 늘 앞장섰다. 몸으로 말했다. 심부름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홍 대표의 인간 됨됨이를 언급했다. 더불어 시민 위에 군림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의 손과 발이 돼 열정적으로 뛸 것을 주문했다. 긴급 현안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장인 이주영 국회의원은 “홍성남 대표님, 출판기념회를 축하하오며 앞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라는 축하 전문을 기념식장으로 보내왔다. 책을 소개하는 시간에 미아사거리 방천시장 상인 2명과 택시기사 1명이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날 출간한 4권의 책이 인연으로 연결돼 있듯이 이 세 분과 홍 대표도 아름다운 인연으로 묶여져 있었다. 이들의 인연이 곧 시로 탄생한 것이었다. 호남식당 주인아주머니는 “홍성남 대표는 강북구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다. 항상 겸손하고 서민적이어서 좋다. 처음 가게에 밥 먹으러 왔을 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결같은 홍 대표가 방천시장 상인들의 시를 30여 편이나 쓴 것을 보면서 방천시장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하면서 시집 <장무상망>에 실린 ‘호남식당 백반’이란 시를 낭송했다. 홍 대표가 이 시에서 ‘누부’라고 칭했던 당사자는 홍 대표의 서민을 대하는 넉넉한 마음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빵가게 젊은 주인 박수호 씨는 “홍성남 대표와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인사를 나누며 형님과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이다. 4권의 책을 동시에 출간한 것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장무상망>이란 시집에 실린 ‘빵이 좋은 사람들’의 시에서 ‘잊힌 사람들 불러내는 추억의 단팥빵’이란 구절이 좋다.”라고도 언급했다. 더불어 박 씨는 홍성남 대표에게 항상 공부하고 발로 현장을 뛰면서 서민이 행복해하는 정치를 구현해 주길 당부했다. 창일택시 운전사는 “언론인 출신의 시인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홍성남 대표가 처음 택시운전을 하러 왔을 때 며칠 하다 말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계획했던 100일을 무사히 마치는 것을 보고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홍 대표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이 행복했다.”면서 앞으로 정치가로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기를 기원했다. 이어서 이번에 출간한 책 4권을 모두 열독한 김광석 ‘착한교육실현학부모협동조합’ 설립추진위원장(한우리 독서·논술지도사)이 서평을 낭독했다. 김 씨는 그동안 여러 미디어에 올렸던 4권의 서평을 하나로 축약해서 발표했다. ‘시인이 정치인이 돼 광야에 던져졌다’는 내용이었다. 끝으로 홍성남 대표가 무대에 등장했다. 홍 대표는 “지난 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방했다. 외롭고 힘들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105일 동안 택시운전을 하며 민생현장을 샅샅이 살폈다. 낙후된 강북구를 위해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 싶었다.”라고 인사말을 하면서 북받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홍 대표의 울부짖음이 우리 정치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가난이란 장애도 젊고 유능한 정치인의 깨끗한 정치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한국인권신문>
    • 뉴스홈
    • 국내뉴스
    • 정치
    2014-02-15
  • [탐방기] 역사유적지 탐방 4박 5일
    ■ 연변 리포터 김철균 필자가 가족사를 써 달라는 김성범씨의 청에 의해 흑룡강성의 해림시 신합진 삼부락촌을 비롯한 목단강지구에 대한 현지 역사탐방을 떠난 것은 지난해 11월 2일 오후였다. 연길 동북아 중심버스부에서 차에 앉아 4시 40분 버스가 떠나자 마자 날씨는 급작스레 어두워졌다. (이번에 가보는 해림시와 삼부락이란 곳은 대체로 어떤 곳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솔직히 말해 필자는 이전에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 목단강시에 잠깐씩 들린 적은 있었으나 목단강 시가지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나 다름이 없었고 해림시나 삼부락이란 곳에 대해서는 더군다는 깜깜부지었다. …… 버스는 길림성의 왕청을 거쳐 천교령을 지나 어느 덧 흑룡강성 땅에 들어섰다. 흑룡강성 땅에 들어서서 한참 달리니 녕안으로부터는 고속도로가 뻗어 있었다. 흑룡강성의 경제발전 상황에 대해 한눈으로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 목단강에서 김성범씨의 동생을 만나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은 택시에 앉아 곧추 해림으로 향발, 10 여 분 뒤 해림에 도착하자 벌써 밤 11시 40분이 되었다. 우리는 곧바로 여관을 잡고 간단한 샤와를 마치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삼부락의 형성 이튿날 아침 8시 30 분 경, 김성범씨가 부탁 한대로 해림시 설원 주업유한회사의 류상(刘翔) 이사장으로부터 우리한테 승용차 한대를 보내왔다. 운전석에 앉은 김성범씨가 시동을 걸자 차는 인차 떠났다. 역사탐방이 실제로 시작된 셈이었다. 첫 코스는 해림시 평화촌이었다. 그 곳에는 김성범씨의 고모 김옥분 할머니(77세)가 살고 있었는데 김성범씨네 가족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것이었다. 김옥분 할머니네 집은 해림으로부터 평화촌에 들어서는 길어구에 있었는데 아주 수수한 한족식 온돌방으로 된 구조었다. “살아가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으나 알고 보니 해림 시가지에 80여 평방미터가 되는 아파트가 있었으며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촌에서 보내고 겨울에는 시가지의 아파트에서 산다고 했다. 우리 일행이 도목나무를 지펴 뜨근뜨근한 온돌방에 앉자 김옥분 할머니는 미리 김성범씨의 연락을 받았던 터라 평화촌의 연장자이며 지난해 당시 82세에 나는 윤천오 노인을 모셔 왔다. 김옥분 할머니와 윤천오 노인은 말그대로 평화촌과 삼부락 일대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산증인이었다. 김옥분 할머니에 따르면 삼부락이 형성된 것은 1930 연대 말이라 한다. 삼부락이 형성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삼부락 사람들이 원래 살던 고장은 흑룡강성 동녕현 노흑산란 곳이었는데 지난 세기 30연대 말 일제는 노흑산에 철도를 부설한다는 이유로 그 고장 사람들을 몽땅 강제 이주시켜 해림에서 30여리 되는 산골에 정착하게 했던 것이다. 말이 철도를 부설하기에 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것이었지 기실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노흑산 주민들이 소련과 접촉하면서 밀정이 되는 것을 막아 보기 위한 것이 그 실정이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노흑산지구의 주민 대부분은 원래 중국에서 살다가 일제가 중국 동북을 점령하자 소련으로 이주했다가 1930연대 중기 소련에서 연해지구에 있는 조선인들을 중앙 아시아에로 집단이주시킨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피해 하루 밤 새에 변경을 넘어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노흑산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만주땅으로 이주한 뒤에도 늘 소련땅을 넘나들며 소금장사 혹은 소장사 등을 하였고 또 항일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례로 김옥분 할머니의 조상 분들도 전형적인 반일 가정이었다. 김옥분 할머니에 따르면 20세기 30연대 김성범의 증조할아버지 김여백씨는 늘 항일유격대한테 양식(석마로 찧어 껍질까지 섞인 보리쌀)이나 소금, 군복(나무껍질과 함께 천을 삶아 물을 들인 후 손으로 돌리는 재봉침으로 지은 옷) 등을 보내주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당시 운수도구란 당나귀를 메운 달구지로 밤마다 유격대 숙영지에 몰래 날라다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번은 유격대 몇명이 김여백씨의 집에 와서 잠을 자던 중 특무의 밀고를 받고 일본군들이 이 집을 불시에 기습,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의 습격에 당황해 난 집문앞 보초는 급기야 총을 쏘는 것으로 잠자는 유격대들한테 알리는 수밖에 없었고 잠을 자던 유격대들이 사처로 도망을 치자 붙잡힌 사람은 결국 김성범씨의 할아버지 김춘익씨 뿐이었다. 일제놈들은 김성범씨의 할아버지인 김춘익씨를 붙잡아서는 달아 매놓고 때리기도 하고 입안에 코구멍안에 고추물을 부어 넣기도 하면서 모진 고문을 들이 댔다고 한다. 나중에 놈들은 김여백씨의 가족으로부터 많은 예물을 받았고 거기에 김춘익씨가 인사불성이 되여 살아날 가망이 없자 집에 알려 데려 내가게 했는데 다 죽어가게 된 것을 김옥분 할머니의 조부모가 양귀비꽃(아편)을 태워서 매맞은 곳에 붙여 주었으며 결국 그 양귀비꽃 덕분이었던지 아니면 다른 약의 효과를 봤던지 김춘익씨가 사경에서 기적같이 살아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제에 의해 해림부근의 산골로 강제이주 된 사람들은 대충 집터를 닦고 화전농사를 지으면서 그 곳에 정착, 호수가 늘어 남에 따라 200여호로 되는 제법 큰 마을이 되었고 마을 이름을 삼부락으로 지었던 것이다. 김춘익씨의 일가는 삼부락에 이주한 후 자식 9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김옥분 할머니에 따르면 김옥분 자신은 삼부락에서 태어 났고 아래로 남동생 셋이 있었는데 선후로 곰보병, 홍역 등으로 죽었으며 결국 자신은 형제중 막내로 남게 되였던 것이다. 그렇게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형성되었던 삼부락에서 조선인들이 몽땅 자리를 뜨게 된 것은 일제가 망한 뒤 해림지구에 마적떼들이 득실거리면서 조선인들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희산을 두목으로 하는 마적떼들은 주로 조선인부락들을 습격하군 했는데 바로 삼부락이 중점습격 대상이었다. 마적들은 주로 밤중에 마을로 쓸어 들어서는 식량이고 가축이며를 닥치는 대로 빼앗아 간데서 그 놈들의 등살에 도무지 살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삼부락에서 살던 조선인들은 그 거개가 약 40여리 상거한 안가툰(지금의 평화촌)으로 다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전후의 안가툰 안가툰이란 성이 안씨인 형제가 정착해 살면서 그 이름이 붙여졌지만 해방 전후에 들어서는 제법 큰 조선인 마을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윤천오 노인에 따르면 그의 나이 9살 때인 1930년 조선 경상도로부터 만주로 온 이주민들이 이 마을에 정착할 때만 해도 이미 조선인 7-8개호로 이미 조선인부락을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뒤 먼저 정착한 이들이 형제와 친지들을 소개해 들어오면서 해방전야에는 거의 250 여 호의 조선인 부락으로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조선인 지주도 생겨났다. 당시 조선인 지주로는 장도원과 김광열이 큰 지주에 속했는데 장도원은 밭 10여헥타르가 있었고 김광렬한테는 무려 수십헥타르나 있었으며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이 두 지주의 밭을 소작맡아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이주해온 조선인들과 당지의 토착민이었던 한족들 사이의 민족 모순도 비교적 첨예했었다고 한다. 이는 주로 일제놈들의 민족이간책에 의해서었다. 그 사례로 일제 놈들은 한족들의 밭을 빼앗아 조선인들을 고용하여 논으로 개간하게 하는 것이었다. 해림지구의 대부분의 논은 이렇게 조선인들에 의해 개간되었으며 그 틈 사이에 큰 이득을 챙긴 조선인이 바로 일본군 국경수비대에서 근무하던 장도원이었으며 큰 피해를 본건 조선인과 한족 농민들이었다. 이렇게 일본놈들에 의해 생겨난 민족모순은 해방 직후에도 줄곧 이어졌는바 우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마적들도 주로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살인방화 등 고약한 짓이란 고약한 짓은 골라가며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방 직후 삼부락의 대부분 조선인들은 자기들이 개척한 정든 땅을 떠나 사처로 이주, 그중 안가툰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원 안가툰사람들과 함께 이 마을 이름을 평화촌으로 고치고 자체로 자위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곳의 조선인들은 우선 일본놈들이 남겨놓은 해림비행장에 가서 숱한 총과 탄약, 수류탄 등을 날라와서는 무장했고 부락 둘레에 토성을 쌓고 보초막을 지었으며 젊은이들이 밤낮으로 마을을 지켜나섰다. 그리고 마을 밖에서 가끔씩 비행장에서 날라온 폭탄을 터치우고 실탄연습도 하면서 마적들한테 자위대의 위력을 시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해림지구의 마적들도 평화촌만은 감히 건드리지 못했었다. 1946년의 겨울인가 한 번은 마적무리 150 여 명이 이 부락근처를 지나가면서 “이 마을만은 건드리지 않을테니 밥 한끼만 해달라”고 해서 밥을 해준적은 있었는데 2일 후 그 마적들이 신안진 쪽의 조선인 마을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그 뒤 민주연군이 건립되면서 그 마적떼들도 몽땅 소멸되어 해림지구의 조선인 농민들도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공산당의 민족정책이 낙실되면서 조 한 족간의 민족모순도 점차 풀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필자의 청에 의해 우리 일행은 곡파의 유명한 소설 “임해설원”에서 나오는 마적소굴 위호산으로 향했다. 위호산으로 가는 길은 평화촌에서 일부락, 이부락, 삼부락, 쟈피거우 등 마을을 거쳐서 가는데 쟈피거우를 지나자 마을 이름이 “35마을(35公里)”, “22마을”, “7리지(7里地)” 등으로 지은 곳들이 나타났다. 괴상한 마을 이름이라고 필자가 의아해하자 김성범씨는 이는 옛날 위호산 웃쪽에 있는 횡도하자로부터 35킬로메터가 되는 곳의 마을에 적당히 지을 이름이 없어 그저 “35마을”라고 부른 것이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쟈피거우란 소설에서는 익숙히 보아 왔지만 실제로 가본 적이 없는 지라 쟈피거우에 도착하자 필자는 김성범씨더러 차를 세우게 했다. 쟈피거우란 산골마을 치고는 꽤나 큰 편으로 수백호의 인가는 있음즉 했다. 그리고 아직도 가난의 때를 채 벗지 못하었는지 벽돌 기와집은 별로 보이지 않고 토벽집이 대부분이었으며 가끔씩 소설 “임해설원”의 한 모퉁이를 연상케 하듯 통나무로 지은 귀틀집도 보이군 했다. 쟈피거우에서 우리는 기념사진 한 장 씩 남겼다. 쟈피거우에서 약 100리 정도 달리자 그제야 눈앞에는 “위호산 홍색관광구”라는 현수막이 보이었다. 거기에는 위호산에서 양자영과 소검파가 상봉하는 동상, 양자영이 말을 타고 달리는 동상 등이 세워져 있었다. “위호산 홍색관광구” 어구에 들어 섰으나 산벼랑 바위에 “위호산”이라고 씌여진 것이 나타나기는 약 30리쯤 달린 후였다. 위호산의 풍경을 대충 소개하면 주봉으로 오르는 길어구에 우에서 언급한 “위호산”이라고 글발이 새겨진 바위산이 있었고 그 사이로 벽계수가 돌돌 구을며 흘렀는데 그 샘물을 마시니 도시의 광천수는 뺨을 칠 정도로 시원하였다. 우리는 돌층계로 만들어진 산길을 따라 위호산 주봉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면서 들을라니 가끔씩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낮이라지만 인적기라고는 없는 산 중에서 나는 저도 몰래 몸이 오싹해 나기도 했다. 산을 어느 정도 오르자 쉼터가 생겼고 쉼터옆에는 그제날 손달득이 바로 여기서 양자영의 비밀 쪽지를 찾게 되었다고 씌여져있었다. 소설을 볼 때에는 손달득과 양자영의 연락지점이 위호산 주봉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겼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위호산 주봉의 코밑이었다. 쉼터에서 숨을 돌린 우리는 계속 주봉으로 올랐는데 이제부터는 산세가 가파로왔고 진짜 힘들었다. 하지만 필자보다 산골에서 나서 자랐다는 김성범씨는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이전에 자기도 아버지를 따라 이 곳으로 사냥하러 다니군 했는데 당시에는 이 곳이 위호산 주봉인지조차 모르고 다녔다는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인 김두만씨기 이 일대에서 표범 한마리를 잡았었고 자기 또한 수달피 한마리 잡았는데 20여 년 전이라 그 때의 시세로 수달피가죽 한장에 1000원을 받고 팔았단다. 한동안 오르자 이번에는 소검파의 소분대가 위호산 첫 보초선을 통과 했다는 곳이 나타났다. 거기에 역시 양자영이 보초들을 불러들여 술을 먹인데서 소분대가 첫 보초선을 쉽게 통과했다는 것이 적혀있었다. 거기에서 자리를 뜨자 이번에는 바위틈 사이에 있는 동굴이 나타났고 동굴 왼쪽에 “위호산 주봉”이라고 쓴 패쪽이 보이었다. 우리는 안깐힘을 써가며 주봉에 올랐다. 위호산 주봉은 들쑥 날쑥한 바위산과는 달리 사방 50-60메터씩 되는 넓은 공지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설 “임해설원”에서 부각한 것처럼 5 개의 토치카 자리도 있었고 중간이 아마 위호청인 모양이었으며 한 쪽 옆은 깎아 지를듯한 벼랑이었는데 거기에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고려해서인지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었다. 지금 필자가 이 글을 적는 이 순간까지도 소검파의 소분대가 그 지세가 험준한 위호산을 탈취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의 전쟁이라면 비행기로 폭격하고 포로 조준사격을 들이 대는 것으로 탈취하기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당시 극상해서 기관총 한 두 정이 있는 상황에서 그 것도 36명 밖에 안되는 소분대의 힘으로 극히 적은 손실로 그 토비소굴을 탈취했다는 것이 어찌보면 믿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한편 그 마적소굴에서 독수리라는 그 마적두목의 신임까지 얻은 양자영의 지혜에 진짜 탄복이 갔다. 위호산 주봉에서 약 20 분 간 지체한 우리는 서둘러 산을 내렸다. 산에서 내려오니 짧은 겨울해는 이미 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해림시 산시(山市)에 있다는 백야 김좌진 장군이 살던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헌데 돌아오던 중 길을 잘못 들어서다 보니 오랫동안 생뚱 같은 곳에서 헤매게 되었다. 그러다가 겨우 길을 찾은 뒤 이부락 근처에서 산시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약 50여리 달려 김좌진 장군이 살던 옛집을 찾아보니 이미 밤 9시가 되었다. 한 밤 중이라 김좌진 장군이 살던 옛집은 안팍의 등불도 모두 꺼져있고 대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별수 없이 우리는 김좌진 장군 옛집의 대문밖 광장을 한동안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광장어구에 “중 한 양국 친선 만세!”라고 쓴 글발 앞에서 사진을 찍었으나 후에 볼라니 사진효과가 엉망이었다. ▲동녕요새앞 광장에 이덕생 장군의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장”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바위돌 ▲요새앞 광장에 세워진 소련홍군열사 기념비 ▲요새입구 ▲요새로 내려가는 층계 ▲ 영화 “갱도전”을 방불케 하는 굽이굽이의 갱도 ▲이곳은 요새내 군인들이 식사를 하던 홀이다 ▲요새는 철근과 콩크리트 등으로 몹시 견고했다 아시아서 가장 큰 군사요새 찾아서 그 이튿 날 우리는 해림시 남라고촌의 옛 당지부서기인 이수학, 임진동 등 당지의 노인 두 분을 모시고 동녕현 쪽으로 향했다. 목적은 김성범씨 조상들이 동녕현 노즈거우(闹子沟)라는 곳에서 살면서 반일활동에 참여하던 때의 역사에 대해 보다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서었다. 또한 동녕현의 삼차구진에는 필자의 모사촌형인 채수근씨가 살고 있기에 그를 통해 동네의 노인들을 모셔놓고 옛날의 역사에 대해 탐문해 보노라면 어느 정도 파악이 있기도 했다. 그날 우리가 동녕현 삼차구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 다 되었다. 모사촌형 채수근씨를 만났으나 사전에 연락을 하지 못한 터라 동네의 연세가 많은 노인들을 수소문하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채수근씨가 동네 노인들을 수소문하는 동안 우리 일행은 우선 삼차구에 있는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위만주국시기 일본군 군사요새를 돌아 보기로 했다. 우리가 찾은 훈산요새(勋山要塞)는 삼차구진에서 약 5킬로메터 상거한 거리에 있었다. 우리가 요새에 도착하자 요새어구의 돌로 깐 길에 “아시아에서 제일 큰 군사요새”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넓은 광장에 들어서자 소련홍군 동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제일 마지막 전장”이라고 쓴 이덕생 장군의 제사가 있었다. 그리고 소련홍군이 동북으로 진격할 때의 역사를 반영한 전람관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우선 요새의 동굴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요새의 동굴어구는 산 중턱에 있었는데 층계를 따라 내려 가는데만 20메터는 잘되는듯 싶었다. 요새의 동굴은 흡사 영화 “갱도전”에서 나오는 갱도를 방불케 했는데 다르다면 굴을 판 후 콩크리트로 동굴천정과 양측 벽을 때려 넣어서 무너질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동굴안은 사처로 뻗어 있었는데 가끔씩 가다가 지휘실, 사관실, 사병실, 식당, 목욕실, 작전실,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삼차구진 지역의 옛 일본군 군사요새는 “승홍산요새”, “훈산요새”, “삼각산요새”, “마달산요새”, “조일산요새”, “출환산요새”, “북천산요새” 등으로 그 것을 합치면 길이가 110 킬로미터에 달하고 너비가 50킬로미터에 달하는바 그 모두가 중소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었고 내부구조가 사통 발달했으며 그날 우리가 들어가 본 “훈산요새”는 전반 요새군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한편 일본군들은 1933년 8월 동녕을 강점한 후 즉시 이 곳을 소련으로 진공하는 데에서의 기지로 삼고 이 요새군을 구축하기 시작, 도합 17 만 명에 달하는 인부들을 이 요새구축공사에 투입하였는데 살아서 돌아간 인부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한다. 1945년 8월, 소련홍군은 이 요새군을 점령하느라고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한다. 그 해의 8월 15일, 일본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 선언을 낭독했지만 통신연락이 두절되어 이를 알 수 없었던 이 요새군의 일본군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었다. 전쟁은 8월 30일에 이르러서야 결속되였는데 소련홍군은 1500명이 희생되었고 일본군은 100 여명이 죽고 900 여명이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고 한다. 이 요새는 그 규모가 방대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군사요새인데다 이 요새에서의 전투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제일 마지막 전투란데서 그 의미가 더 짙을것 같다. × × × 그날 오후 사촌형 채수근씨가 동녕의 노흑산지구에서 살았다는 올해 80세에 나는 여송학로인을 모시고 왔다. 헌데 삼차구진의 토배기라는 그 노인은 그 옛날 김여백이라는 사람의 력사에 대해 좀 아는 것이 있는가고 물었으나 도리질을 할뿐이었다. 그래서 그제 날의 항일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혹시 김여백과 김춘익의 항일사연이 나올가 하고 청을 들었으나 그제 날 안중근이요, 홍범도요 하는 얘기는 많이 들었으나 기타 항일이야기에 대해서는 들은 것들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동녕현에서 허탕을 치자 우리는 이번 행차의 마지막 코스인 계서지구의 이수진(梨树镇)으로 향했다. 이수진에는 그제 날 목단강의 고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목단강 북망당서점의 점원, 일본인 회사의 통역 및 해방 후에는 목단강 독립퇀의 비서로 있었던 임활동(林活东) 노인이 있었던 것이다. 임활동 로인은 바로 우리 일행 중 임로인의 4촌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밤길을 헤가르며 계서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중도에서 또 길을 잘못 들어서서 생뚱같은 곳으로 한동안 달리다가 겨우 계서로 가는 길에 들어서다 보니 이수진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리 전화연락을 했기에 임활동 로인네 일가에서는 물만두를 빚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범씨의 증조할아버지 김여백과 할아버지 김춘익의 역사에 대해서는 임활동 노인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김여백 노인이 아편을 피웠고 사격술이 능하다는 등만 대충 알고있을 뿐이었다. 하긴 해방전 오랫동안 일본인 회사에서 근무했기에 항일유격대거나 기타 반일단체의 활동에 대해서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제 유일하게 김성범씨의 조상역사에 잘 알고있을 분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살고있다는 김성범씨의 큰 고모할머니라고 할 수 있었다. 헌데 그 분을 만나자면 러시아로 건너 갈 여권을 내야 하고 시간을 짜내야 하기에 다음 행차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탐방길에서 예정된 목적은 다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얻은 수확은 매우 컸다. 특히 평화촌의 윤천오 노인과 김옥분 할머니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반일가요를 들어보게 되었고 안중근의사, 김좌진장군 등 항일투사들에 대해서도 들어보지 못한 부분을 적지 않게 들어보게 되었다. 한편 우리 세대들이 어깨에 짊어진 중책에 대해서도 가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탐방길에서의 아쉬웠던 점이 많은 노세대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보다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면 노세대 분들이 살아계실 때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한 건이라도 더 파헤쳐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노세대분들마저 다 돌아간다면 우리 민족의 어떤 역사는 영원히 세월의 흐름속에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끝)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14-02-15
  • 평양 호화 수상낙원 개방,시민들 수영복 입고 물놀이
    현지 시간으로 2014년 2월 12일 북한 평양 주민들이 한창 새로 건설된 수상낙원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알려진데 의하면 이 수영장은 2013년 10월 15일에 완공되였다.[사진=신화넷]
    • 뉴스홈
    • 국제뉴스
    • 중동·아프리카
    2014-02-14
  • 中,여행사 북한 거지 생활 참관활동 조직
    1990년대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절부터 주민생활 빈곤도가 상상을 초월해 수백만 인구가 아사했으며 거지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중국 여행사들이 이 생활 곤경을 이용해 북한 거지 생활 관광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편집자주 [사진=북한 거지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시절부터 북한 주민생활 빈곤도가 상상을 초월해 수백만 인구가 아사했으며 거지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중국 여행사들이 이 생활 곤경을 이용해 북한 거지 생활 관광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지린성 옌볜의 옌지시(延吉市), 훈춘시(珲春市)와 투먼(图们) 일대가 북한 아동 거지 거주지로서 중북 변경지대의 일부 중국 여행사들이 북한 난민 아동들에게 토굴을 제공해 거주하게 하고 참관활동을 조직하면서 외국 관광객들의 토굴 참관 활동을 안내하고 있다. 한 중국 여행사 직원은 “우리는 북한 거지들에게 거주소를 제공하며 먹을거리를 준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언론들도 이러한 보도를 하고 있다. 한 한국신문사 보도에 따르면 랴오닝성 단둥(辽宁省丹东)의 한 여행사도 기회를 포착하고 먼 곳에서 북한측을 내다 보는 관광활동을 조직했는데 관광객들이 단둥에서 쾌속보트를 타고 야루강(鸭绿江)을 따라 동쪽으로 25km 달리면서 북한측 강변을 구경하게 한다. 관광객들은 북한 풍경을 구경하는 동시에 빵과 과자를 북한 주민들에게 던져 먹게 한다. 이러한 관광상품 비용은 인당 100위안이다. 중국의 쾌속선 운전기사들은 “북한 거지들이 관광객들이 던져준 과자, 빵, 담배를 주어 암시장에 가지고가 옥수수 가루와 바꿔 먹는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전문 쾌속선 부두에서 과자와 빵 등 식품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1990년대 중북 양측이 북한 무역 우대를 중지한후 북한에는 기름, 원자재, 공농업 생산능력 위축현상이 출현하고 1990년대 중반 기근이 폭발했으며 300여 만명이 아사했다고 한다. 한국정부에 따르면 북한 고아원의 수용자들과 인구 비율로 추산할때 북한 국내에는 현재 거지가 7만-10만에 달하는 듯하며 중북 변경지구에도 1만-2만명 아동거지들이 있는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최근들어 북한이 탈북자 타격강도를 강화하면서 양국 변계지구 아동 거지수가 5천명으로 감소했다.중북 변경지구에서 북한 아동을 돌보는 한국 인사들은 “이렇게 계속되면 남북 통일후 이러한 아동 거지문제가 ‘손을 데우는 뜨거운 감자’로 될 것이다”고 일치하게 우려하고 있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중동·아프리카
    2014-02-14
  • 한국스타 김수현 열풍 중국대륙 뜨겁게 달군다
    한국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전반 아시아 연예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요즘 중국 대륙에서는 “외계인” 도민준 교수 역을 연기하는 한국 스타배우 김수현 열기가 뜨겁다. - 편집자주 ▲ 중국 팬이 중국 “신경보”에 발표한, 김수현에게 보내는 연인절 축하 광고 중국팬 신문광고로 김수현에게 연인절과 생일 축하 2월 14일 아침, 중국 “신경보”의 제C02 지면에 연인절광고가 한개 면으로 발표됐는데 김수현의 한 중국 팬이 자금을 모아 “신경보”의 광고 면을 사고 김수현이 2월 14일 연인절에 즐겁게 보내기를, 그리고 2월 16일 생일을 즐겁게 보내기를 축원했다고 중국 현지 언론이 14일 전했다. 이 광고에는 김수현의 완벽한 사진과 함께 산뜻하고 아름다운 장미꽃 한송이가 있는 외 사람을 감동시키는 축하문이 적혀있었다. 축하문에서 중국 팬은 자기가 중국 수천만명의 “교수의뢰증환자”들을 대표하여 김수현이 연인절을 즐겁게 보내기를 축원한다면서 김수현은 이 지구상 가장 완미한 사랑수호신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 김수현의 2월 16일 생일을 축하하고 나서 김수현이 이제 중국에 온다는데 이같은 특별한 방식으로 김수현의 중국행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김수현에게 보내는 축하광고가 발표된다는 소식을 미리 알고 중국 “심양석간”은 질세라 13일, 광고 면 판매에 나섰다. 공식블로그에 한국스타 이민호의 팬들이 광고를 통해 이민호에게 사랑을 표달할 것을 호소했다. 그 호소문을 읽고 한 네티즌은 우스개로 “인민일보 지면을 사서 이민호가 연인절을 즐겁게 보내기를 축하해야만 신경보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중국 영화사: 김수현의 중국영화 출연 희망 한편 한국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화권(중국어권)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양천화, 양멱, 황효명, 서기 등 중국의 적잖은 스타들이 “별에서 온 그대”를 추구하고 있으며 남주역 김수현은 중국인들의 남신으로 떠올랐다. 중국 성호영화회사에서는 올 여름 영화 “거픔의 여름(泡沫之夏)” 촬영에 들어가는데 김수현 출연을 계획, 초청을 준비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14일 보도했다. 이 제의가 성사되면 김수현은 중국어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하게 된다. 강송위성 “대뇌” 프로 김수현 출연 초청 중국에서 처음으로 내온 대형 과학달인 프로그램인 강소위성텔레비죤방송 “가장 강한 대뇌” 프로그램은 2월 13일 공식블로그를 통해 “가장 강한 대뇌” 제작팀은 이미 2월 10일, 한국 “도교수” 김수현 소속사 키이스트에 초청서를 발송했으며 김수현이 “가장 강한 두뇌” 프로그램에 출연할 것을 제의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은 발표되자 네티즌들의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네티즌들은 “도교수님, 속히 ‘가장 강한 대뇌’에 오세요!”, “천송이아가씨를 위해 지구에 남으세요!”, “당신의 공간이동 능력으로 즉시 중국에 올 수 있잖을가요?”라고 썼다. “대뇌” 관계자는 만일 김수현이 “대뇌”에 출연한다면 그를 사랑하는 중국 팬들과 함께 과학의 한 시대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그의 높은 인기는 과학열풍을 힘 있게 추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교수 인기 대단해 요즘, “별에서 온 그대”가 아시아를 휩쓸면서 무수한 팬들이 “교수의뢰증”에 걸렸고 “도민준” 김수현은 그 인기로 보나 몸값을 보나 “상속자”들의 이민호를 초월하고 있으며 “도교수”가 언제 중국에 와 활동할 것인지가 중국 팬들의 관심사로 되고 있다고 중국 텅쉰망이 14일 전했다.일전, 김수현의 소속사는 김수현이 3월부터 아시아를 순방, 중국 내륙과 대만, 일본,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한국 등지에서 9차례 팬들과의 만남행사를 가질 예정이이며 중국에서만 3월 22일에 대만, 3월 23일에 상해, 4월 4일에 광주, 4월 6일에 북경에서 등 4차례 팬들과의 만남행사를 가질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알아본데 따르면 김수현은 이번 중국 팬들과의 만남행사에서 전업가수 못지않은 실력으로 노래 3수를 중국 팬들에게 선사한다.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 연예·방송
    2014-02-14
  • 중국 한 농촌 결혼식장 붕괴로 8명 사망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13일 저녁 5시 30분경, 중국 절강성 반안현 만창향 아장촌에서 낡은 회당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해 8명이 숨지고 90여명이 상했으며 그중 1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알아본데 의하면 당시, 반안현 만창향 아장촌의 한 촌민이 낡은 회당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있었는데 산간지역에 지속적으로 내린 눈이 많이 쌓여 지붕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발생 후 금화 각 시, 현, 향, 촌에서는 즉시 인력을 조직하여 전력 구조, 모든 부상자들을 병원에 옮겨 치료받게 했다. 반안현에서도 즉시 의료위생, 소방, 무장경찰, 공안 등 8개 구조팀을 조직하여 아장촌에 파견, 구조 및 사후처리 등 작업과 조사작업을 전개하게 했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14-02-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