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0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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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 분석]체육강국 중국, 왜 축구만 약한가?
    ●리병천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가? 정말로 팬들의 씁쓸한 우스개처럼 메시가 될 인물이 시골에서 밭을 갈고 있기 때문일가. 중국축구가 아직도 부진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해본다. ◆중국, ‘체육강국’으로 우뚝 서다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 중국은 성공적 올림픽 개최와 세계 최강 미국을 꺾고 종합 1위를 달성하는 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올림픽 역대 종합순위를 살펴보면 각국의 국력과 세계 질서의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 1940년대 이전에 프랑스, 영국, 독일이 각각 한차례씩 종합 1위를 차지한 적이 있고 1948년 이후 대회부터는 미국과 소련이 종합 1위를 양분했으며 소련 붕괴 이후 1996년 이후는 미국이 종합 1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메달수가 국력을 직접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2008년 당시 중국은 금메달수에서 51대36으로 미국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종합 1위를 차지했고 종합 1위의 이 막강한 상징성은 중화민족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작동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차이로 종합 2위를 하면서부터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는 종합 1위를 차지해 이미 세계의 강자가 됐음을 보여줬다. 비록 중국은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는 2, 3위를 기록, 종합 1위는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세계적 체육강국임은 증명됐다. 당대 스포츠에서나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독주에 유일하게 도전장을 내고 있는 중국이다. ◆왜 축구에서만 유독 두각을 드러내지 못할가? 지난 7월, 국제축구연맹이 발표한 세계축구 랭킹에서 중국은 세계 76위, 아세아 9위를 기록했다. 일본, 한국, 이란 등 전통 강호들은 물론 카타르, 이라크 등 나라들에도 밀리고 있다.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서 중국은 2승, 1무, 1패를 기록, 필리핀과 승점은 7점으로 같지만 골 득실에 앞서 간신히 조 2위를 유지, 수리아(4승, 승점 12점)와는 어느덧 승점 5점 차로 벌어지며 최종예선 진출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11월 U-19팀은 26년 만에 아시아축구연맹 U-19 챔피언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근래 중국축구가 각 대회에서 보인 성적은 그야말로 암울, 그 자체이다.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지금까지도 제자리 걸음, 아니 후퇴를 하고 있을가? ◆‘한 자녀 정책’의 부작용 중국은 198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인구억제를 실시했다. 바로 ‘한 자녀 정책’이다. 축구가 조직력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개인 기량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탁구나 체조 등에서 중국이 세계 최정상을 달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11명이 하나로 묶여 움직여야 하기에 누구 한명의 기량으로 승부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또 80년대 이후 출생한 자녀들에 대해 부모들은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선수가 돼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축구에 대한 인식하에 부모들이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축구를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또 한 자녀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짙어지게 됐고 축구와 같이 조직력을 요소로 하는 종목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다. ◆젊은 선수들의 프로의식 부재 중국 프로축구리그는 자금적인 면으로만 볼 때 세계 5대 리그중 하나라고까지 할 수 있다. 최근 몇년간 거액의 투입을 해오며 외국인 용병들에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 그 지명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토종 선수들의 실력은 리그 수준과는 왼전히 동떨어져 있다. 젊은 선수들이 외국 리그에 대한 도전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국내에 안주한 것 역시 높은 년봉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험한 길을 가지 않아도 엄청난 년봉이 보장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축구의 자국내 인기와 대우는 좋아졌지만 자국 선수들의 성장에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 최근 몇년간 무수한 자국 유망주들을 유럽무대로 진출시켜 급격한 기량 향상을 일궈낸 것과 달리, 중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은 무뢰(에스파뇰) 등 일부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고 성공 사례도 부족하다.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같은 부유한 중동팀들이 겪었던 문제처럼 현재의 중국 프로 선수들은 높은 몸값과 스타대우를 받고 있는 자국리그에서의 성공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 선수들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도 팀플레이와 높은 전술 이해도를 요구하는 현대축구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중국축구가 아시아에서조차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문제점들을 감지한 중국축구협회는 최근 거품 빼기에 나섰다. 슈퍼리그에 년봉 상한제를 도입해 국내선수 년봉 상한을 1200만 위안으로 규정했다. ◆공격형 용병들 국내선수 발전 공간 점령 근래 중국 프로축구에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몰려들면서 국내 공격수들이 설자리가 없게 됐다. 이는 그대로 축구 유망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슈퍼리그, 갑급리그 각 팀들을 살펴보면 공격수들은 전부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쓰고 있다. 국가팀 역시 전방에 엘케손 등을 귀화시켰다. 때문에 젊은 유망주들도 공격수보다는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기 위해 훈련한다. 엄청난 재부를 상징하는 프로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공격수보다는 수비수가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젊은 선수들이 국내에서 공격수로서는 프로 무대의 경쟁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헐크, 자하비 등 세계급 용병들보다 잘할 수 없다면 그냥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는 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계속 중국으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중국축구의 공격수 부재는 앞으로도 더 심해질 것이다. 어쩜 메시와 같이 천성적 공격수 자질을 갖춘 국내 유망주가 이미 헐크와 자하비 등 세계급 공격수들 때문에 수비수가 돼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체계적으로 축구팀 만들기 위한 인내심 결핍 세계의 그 어느 프로리그든 경쟁은 치열하다. 하지만 중국리그에서의 경쟁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심각하다. 국내 구단들은 감독을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없다. 대기업이 축구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인내심이 극히 부족하고 성적에 따라 감독을 갈아치우는 게 전통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들이 전술실험을 할 수도 없고 새로운 선수에게 기회를 줄 수도 없다.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최전방에 배치해놓고 그들의 능력을 믿으면서 나머지 선수들은 안정적인 수비를 하는 것 뿐이다. 때문에 국가팀에서도 자유롭게 실험하고 도전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가 공인하는 스포츠 강국이다. 인구 14억의 거대한 인적자원을 배경으로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초강세를 보여왔다. 때문에 왜 축구에서 만큼은 ‘중국산’이 전혀 통하지 않는지, 중국축구협회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중국축구는 언젠가는 국력처럼 세계적 최강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주어진 숙제가 너무도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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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연재] '삼국지' 재해석①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1.<삼국지>를 재해석하는 이유 지(志)는 역사를 의미한다. 전국지(全國志)는 전국의 역사이고 지방지(地方志)는 지방의 역사이다. 중국에는 각 지방마다 모두 자체의 역사를 기록한 지(志)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한 책을 <삼국지>라 부르는데 <삼국지>는 본래 진(晉)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진수(陳壽)가 지은 사서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명나라 소설가 나관중의 삼국시대 펼쳐진 이야기를 소설화한 <삼국연의>도 <삼국지>라 부른다. 물론 <삼국연의>가 <삼국지통속연의(三国志通俗演义)>의 줄임말인데 ‘삼국지’에 통속연의를 붙인 것은 사서가 아니라 진수의 <삼국지>를 참조하여 이야기 식으로 풀어서 문학적 장르로 창작한 소설이다. 때문에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부르면 진수의 사서인 <삼국지>와 혼동되고 한란이 조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부르는 것이 너무 일반화되고 너무 보편화 되었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칭한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삼국지>의 저자 나관중은 중국 원말·명초의 소설가 겸 극작가로서 강담(講談)의 이야기책을 기초로 해 구어체 장편소설을 지은 선구자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및 시내암(施耐庵)과의 공저인 <수호지(水滸誌)>의 2대 걸작을 비롯하여 <수당연의(隋唐演義)>,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평요전(平妖傳)> 등의 작품이 있다. 나관중의 이 여러 작품 중에서 <삼국연의>가 후세에 가장 많이 알려졌고 가장 유명해졌다. <삼국연의>는 오승은의 <서유기>, 시내암의 <수호전>, 조설근의 <홍루몽>과 함께 중국 4대 명작(역사소설)으로 꼽히며 연대서열을 따지자면 단연 가장 선배 격이다. 현재 중국에는 이 4대 명작을 연구하고 밥 먹고 사는 학자가 1만여 명에 이른다. 그만큼 이 4대 명작이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이 4대 명작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가? 아무리 대단한 석학이라도 <홍루몽>을 다 알고 읽는 학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물론 기타 3대 명작의 난의도가 <홍루몽>에는 못 미치지만 역시 다 알고 읽는 학자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3대 명작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것이 <홍루몽>이라면 가장 대중에게 많이 읽힌 것은 <삼국지>이다. <삼국지>는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이웃나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소설이다. 이 두 나라에서는 <삼국지>가 가장 많이 읽혔을 뿐만 아니라 만화로 개작하고 게임소재로 사용하여 벌어들인 돈이 한국에서는 연간 수 천 억, 일본은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조(兆)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듯 유명한 소설에 대해 그 내용을 품평하기 전에 이 소설이 탄생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자못 의미가 크다고 생각되어 중국문학사를 한 번 여행해 보기로 하자. 문자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기록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가 생겨난 것은 기록을 남기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예를 들어 농사를 지었는데 얼마 수확했고 얼마 먹어야 하고 얼마 남겨서 재생산에 사용해야 하는지, 농사는 사계절의 변화뿐만 아니라 수시로 일어나는 천재지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자로 기록해 놓으면 앞으로 시행착오를 덜 겪고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농경의 발전에 필요했던 문자는 잠차 인간의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문화적인 삶에 사용되기 시작한다. 인간의 문화적인 삶을 표현하는 문학작품은 대체로 시, 수필, 에세이, 소설 등 장르가 있는데 이 가운데서 시가 가장 ‘선배’였다. 왜냐하면 시는 노래가사이기 때문이다. 시는 최초로 제사 시 주술사(呪術詞)였고, 남녀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노랫말이었다. 중국 최초 문학작품은 <시경>이며 그 작품들은 다수가 사랑 타령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노래가사였다. 시에 비해 소설은 가장 늦게 세상의 빛을 본 막내였다. 시와 소설의 ‘나이’ 격차는 무려 3천여 년이나 되니 소설은 시에 비해 까마아득한 후배이다. 소설이란 장르의 탄생을 알려면 먼저 문화 전성기라 불리는 당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국에는 본래 종교가 없었다. 굳이 외래 종교와 어깨를 겨루기 위해 억지로 종교라는 라별을 붙이자면 유교와 도교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종교’는 미래의 삶, 즉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그래서 신앙이 부족했던 중국인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은 외래종교가 바로 불교였다. 불교가 중국 문을 두드린 것은 후한시기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이 된다. 위·진남북조시기에 탄압받다가 당나라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는다. 당 태종 때에 삼장법사가 서천(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 와 중국에서의 불교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다. 중국역사에서 유일한 여황이었던 무측천은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가축도살금지령까지 내릴 만큼 독실한 불교도였다. 여황은 자신이 불교를 좋아하다 보니 전국에 불교를 대중화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불교의 경전은 매우 어렵다. 스님들의 염불은 그들만이 알아먹을 뿐 일반 민중은 이해불가다. 그래서 불교를 대중화하려면 불교계가 일대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 불교를 대중화하는 그 변혁이 우리말로 말하면 바로 ‘야단법석’이다. ‘야(野)’는 도시 변두리 빈 공터이고, ‘단(壇)’은 제단 단이며 공연무대이고, ‘법(法)’은 불교를 뜻하고, ‘석(席)’은 불법을 전파하는 자리이다. 야외에 공연무대를 설치하여 불경을 강연하는 것이 바로 ‘야단법석’이다. 본래 산속의 절간에서 염불하던 스님들이 민중 속에 들어가 ‘연예인’이 되는 것이다. 즉 어려운 불경을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민중에게 이야기 식으로 풀어서 귀에 쏙쏙 들어오게 강연하는 것이 바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이 ‘야단법석’이 중국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일반용어가 되지 못한데 비해 한반도에서는 자주 쓰는 일반 어휘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어찌 된 영문일까? 원효 스님의 덕분이다. 우리말 ‘야단법석’은 시끌벅적 떠든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떠들었나? 경직되어 있던 스님들이 무대에 올라 ‘연예인’이 되어 재미있게 강연하고 스님의 강연이 끝나면 갑돌이 갑순이 모두 ‘각설이’ 되어 무대에 올라 노래와 춤을 맘껏 즐기고 무대 아래에서는 줄넘기, 줄다리기, 제기차기, 연 띄우기, 투호놀이, 패놀이 등 오락을 즐기고 심지어 여성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잠자리 잘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밸 수 있는지에 대한 ‘음담패설’을 맘껏 나누는 자리였다. 이렇듯 한바탕 터놓고 떠들었던 것이다. 이 떠드는 장소에서는 계급이 없고 남녀 차별도 없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신라 원효 스님이 바로 방방곡곡 촌락을 돌아다니며 ‘야단법석’을 벌려 불교를 전파하고 대중화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던 이유로 우리말 ‘야단법석’이 상용어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당나라 때 이 ‘야단법석’을 동양식 그리스 광장민주주의로 비유할 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스님들의 ‘야단법석’ 강연에 의해 강창문학(講唱文學) 이란 장르가 생겨났고, ‘송사(宋詞)’가 발달했고, ‘원곡(元曲)’이 발달하였으며, 명나라에 이르러 새로운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소설(小說)을 천자문 식으로 풀이하면 ‘작은 말’이다. 작다는 의미로 ‘잔’이라고 하는데 소설은 잔말, 잔소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잔소리는 누구를 꾸짖거나 흉을 보는 말이 아니라 잔잔하고 작은 말이라는 뜻이다. 중국에는 수천 년 동안 장터에서 이야기하고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야기꾼들이 있었으며 가문대대로 계승해온 집안도 있었다. 이 이야기꾼들의 말이 곧 ‘잔소리’이고 이 ‘잔소리’를 집대성한 것이 곧 소설이다. 역사소설 <삼국지>는 명나라 나관중이라는 글쟁이가 진(晋)의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国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쓴 소설이며 최초 판본은 1522년에 판각한 가정본(嘉靖本)으로,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国志通俗演义)>라 하여 모두 24권 240칙(則)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에 더해서 나관중은 1천7백여 년 동안 장터의 이야기꾼들이 대대로 전해온 이야기(잔소리)를 근거로 지었다는 것이 매우 설득력 있다. 삼국시대 때 있었던 일들을 1천7백 년 동안 전해오려면 한 사람이 30년 말할 수 있다고 치면 60여 대를 거쳐야 하는데 60여 대를 거치노라면 이야기들이 어떤 대목은 줄어들었고 어떤 대목은 뻥튀기처럼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재미 위주로 없던 스토리를 지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접하는 나관중의 <삼국지>는 본래 있었던 역사사실과는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된다. 그리고 좋게 말하면 문학적인 상상력이 뛰어난 나관중, 나쁘게 말하면 구라가 뛰어난 나관중이라는 글쟁이에 의해 탄생된 문학작품이다. 그런데 아무리 상상의 결과로 지어내는 소설이긴 하나 역사소설이라면 그래도 역사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실이 2~3할이라면 나머지 7~8할은 상상에 의해 지어진다. 예를 들어 중국역사에서 4대 미인 중 하나로 꼽히는 초선이란 인물도 미안한 일이지만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비가 제갈 공명을 모시는 삼고초려도 사실이 아니다. 유비야말로 다섯 번이나 주인을 배반한 간신이지만 그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고 조조는 진짜 괜찮은 인물이었으나 나관중은 그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관운은 무식한 무장일 뿐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받든다. 한국사극드라마 <미실>에서 미실이 선덕여왕과 권력투쟁을 벌이는 스토리가 있는데 전혀 역사사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미실이란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으나 법흥왕의 색신(色臣)으로부터 진평왕에 이르는 3대를 거쳐 궁중에서 위세를 부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선덕여왕과 나이 차는 80여 년이 된다. 미실이 살아 있을 때 선덕여왕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드라마 <미실> 뿐만 아니라 한국사극은 다수가 사서나 왕조실록에 기록된 한두 줄의 대목을 근거로 고무줄 늘리듯 늘려 지어내는 것이다. 이런 맥락과 비슷하게 한국 시중에 돌아다니는 <삼국지>는 이문열의 <삼국지>, 황석영의 <삼국지>를 비롯해 요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설민석의 <삼국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버전이 많아 나관중의 원작에 비해 수없이 개작되고 있다. <삼국지>가 본래 어려운데다 여러 버전이 있어 더욱 혼란스러울 것 같아 <삼국지>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기로 맘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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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4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①
    [동포투데이] 진의(秦怡 친이)ㅡ그녀는 중국대륙의 유명한 영화배우이다. 영사막에 나오는 그녀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용감무쌍한 기질을 보여주는 동방여성의 형상을 잘 부각하면서 많은 관중들의 심금을 사로잡군 하였다. 봉건전통이 각별히 심한 가정에서 태어난 진의는 여성이라는 본분을 지키면서도 쉽게 자아감정에 빠져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모순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자아감정에 쉽게 빠져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여성 진의ㅡ 바로 그것이 그녀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며 그것은 두 번 다 그녀의 혼인으로 하여금 엉망진창으로 되게 했다. 1922년 1월 상해의 전통적인 봉건 대 가정에서 태어난 진의는 어려서부터 다정다감했으며 특히 문예를 즐겼고 성격 또한 활달했다. 진의의 천부적인 재능은 그녀가 상해 중화직업학교에 다닐 때 나타났다. 당시 진의는 연극 <당신의 채찍을 놓으시오(放下你的鞭子)>에 출연, 14세의 앳된 소녀였지만 극 장면마다 관객들의 심정을 사로잡군 했다. 1938년 상해 중화직업학교를 졸업한 진의는 무한으로 달려가 항일선전활동에 참가, 그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16살이었다. 당시 진의가 무한으로 간 것은 신여성으로 항일구국 의식이 강한 면도 있었겠지만 각종 전통적인 예의범절로 모든 자녀를 구속하는 가정이 싫어진 면도 있었다. 그해 진의는 무한에 있는 중국영화촬영소에 들어가 실습배우가 되었고 그 이듬해 그녀의 첫 영화 <훌륭한 남편(好丈夫)>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서의 스타트를 뗐다. 바로 그때 천진난만한 소녀 진의한테는 한 남자의 그림자가 슬며시 다가왔다. 바로 당시 중국 연극계에서 꽤나 명성을 날리던 진천국(陈天国)이었다. 진천국은 진의한테 지꿎게 달라붙었다. 1939년의 어느 날, 진의의 손목을 잡고 산속으로 들어간 진천국은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그녀한테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 당시 진의는 선배로서의 진천국한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지만 이성으로서의 남편감으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의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헌데 착한 진의는 진천국한테 확실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진천국이 자기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자 진의한테 남아있던 마지막 한 가닥 방어선도 모래성처럼 붕괴되고 말았다… 지금 와서 보면 연극쟁이인 진천국의 그 거동은 일종 <쇼>에 불과했고 진의 또한 그런 것을 간파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진천국의 본성은 결혼하자마자 곧바로 나타났다. 그는 늘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는 행패를 부렸고 심지어 진의한테 발로 차고 주먹을 내휘두르기까지 했다. 1944년 8월, 딸 비항(斐姮)이 태어난 뒤 어린 것은 자꾸 앓았고 지어 당시 항일전쟁 시기라 딸애한테 먹일 우유 같은 부식을 얻을 길 없었으며 기타 부양비용도 큰 걱정거리였다. 헌데 진천국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셨으며 지어 어린 딸을 남한테 주자고까지 을러 메군 했다. 이에 진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전야에 진의와 진천국은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딸 비항은 물론 진의가 책임지고 부양하기로 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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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3
  • 미국의 대(對)홍콩 제재는 국제법 어기는 엄중 행위
    ● 세르게이 사나코예프(러시아) 최근 미국은 중국이 반포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국가안전수호법(中华人民共和国香港特别行政区维护国家安全法)>을 빌미로 우선은 홍콩에 대한 무역 우대 정책을 취소하고 수출허가 면제를 잠시 중단하였으며 이어 또 소위 <홍콩자치법안> 조인설법 등으로 제재를 실시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상술한 미국의 행위는 중국내정에 대한 조폭한 간섭이며 국제법과 국제관계 기본준칙을 엄중하게 위반하는 행위로 되고 있다. 미국은 또 <인권>, <민주>란 명의로 반 중국세력의 과격폭력범죄 행위를 미화하면서 홍콩 국가안전법 입법을 터무니없이 질책하면서 홍콩 주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흑백전도이다. 홍콩에서 소수의 반 중국 분자들이 외부세력과 결탁하여 부단히 폭력 활동 차원을 높이면서 홍콩주민들의 정상적인 사업과 생활을 엄중하게 방해하는 한편 중국의 국가안전에 현실적인 위해를 조성하고 있다. 중국이 홍콩국가안전법을 실시 추진하는 것은 국가의 주권과 영토의 완정을 수호하고 홍콩 사회의 정상질서를 유지하며 홍콩 주민들의 인신안전과 합법적 권익을 보장함에 있어서 유리하다. 미국이 중국이 추진하고 실행하고 있는 홍콩국가안전법을 빌미로 홍콩에 제재를 하는 것은 홍콩주민의 안전과 복지에는 근본 관심이 없고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은 자국의 이익과 패권뿐이라는 것을 표명하며 이른바 <인권>과 <자유>를 떠드는 것은 미국 측이 타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한 포장품에 불과한 것이다. 홍콩국가안전법을 제정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중국의 내정에 속하며 다른 국가들에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국가의 안전을 수호하는 것은 역대로 중앙정부의 사항이고 권리인 것이며 모든 나라마다 다 그렇게 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일들을 보면 중앙정부의 입법기구가 국가의 안전입법을 함에 있어서 모두 결정적인 주도 작용을 하고 있다. 홍콩국가안전법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법의 출범은 국가의 분열, 국가정권에 대한 전복활동, 테러활동의 조직과 실행, 외국 및 경외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의 안전을 해치는 범죄행위를 제지하거나 징벌하는 것으로 국가의 주권, 통일과 영토완정을 수호하고 홍콩의 장기적인 번영과 안정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홍콩국가안전법은 <일국양제(一国两制ㅡ한 나라 두가지 제도)> 방침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중국이 홍콩국가안전법을 제정 실행하는 것은 곧바로 매우 안정적인 행동이다. 중국정부는 1997년에 홍콩에 대한 주권행사를 회복하였으며 <일국양제>는 홍콩발전의 가장 큰 우세였다. <일국양제>의 성공적인 실천은 홍콩의 독특한 발전우세로서 홍콩주민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기도 했다. 다 년래 필자는 경상적으로 홍콩에 다녀왔으며 이 도시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 중국으로 반환된 이래 홍콩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인프라 시설이 더욱 개선, 특히 교통운수 시설안 빅토리아항구를 관통하는 해저터널을 포함한 홍콩, 저우하이(珠海)와 마카오 등 세 도시를 잇는 홍콩-저우하이-마카오 대교 등이 가장 좋은 사례이다. 그리고 홍콩의 상업, 금융업과 서비스업 등이 발랄한 발전을 가져왔다. 조국의 내륙과 멀지 않은 등 유리한 주위 환경과 개방자유의 상업운영 환경 그리고 안정된 사회질서 등으로 홍콩은 많은 대형적인 다국 회사들의 투자 지역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미국이 홍콩을 제재하는 것은 본질상에서는 타인한테 손해를 주고 자신도 해를 입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통계상 데이터를 보면 중국의 <일국양제> 정책으로 하여 미국은 대단한 수익자로 되었었다. 미국은 홍콩과의 경제무역 왕래 중에서 매우 큰 이득을 보았으며 2010년부터 2019년간의 10년 사이 미국은 대 홍콩 화물무역에서 310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현재 약 1300개의 미국기업이 홍콩에서 기업경영을 하고 있는 상황, 본지 기업이 내지시장으로 진입하는 것과 등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중국을 제압하는 것으로 현재 흔들리며 땅에 추락하고 있는 자국의 세계패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 년래 미국은 <세계경찰>로 있으면서 서방 주도의 가치체계를 주도해 왔으며 부동한 가치이념의 국가에 대해서는 걸핏하면 제재를 실시해왔고 아울러 시종 일련의 숭고한 어조로 자신을 감추어왔다. 구두 상에서 이들은 국제법과 국제규칙을 선양하였지만 실제상에서는 패권주의와 강권정치를 강행해 왔다. 국제규칙에 대해 미국은 경상적으로 입맛에 맞으면 이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군 했다. 최근 들어 미국은 더욱 창궐하게 많은 국제조직과 다변협에서 퇴출하면서 일찍 이행을 승낙했던 의무를 거절하고 있다. 현 단계에 있어서 미국은 국제규칙을 준수함과 아울러 마땅히 해야 할 국제적 의무를 이행해야 할 것이다. 이는 미국정부가 반드시 정시해야 할 문제이다. (작자는 러시아 싱크탱크 <러시아 중국분석 센터 사무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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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8
  • 아리랑 고개의 정자바위
    ●김호림 알고 보면 정암촌이라는 이름은 과연 이 마을에 딱 들어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자 바위는 멀리부터 마을의 비석처럼 시야에 안겨온다. 이 바위는 3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동, 서 두 쪽으로 나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바위 사이에 나무가 뉘여져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두 바위를 드나드는 경우를 두고 견우와 직녀의 상봉이라는 말고 가 생겨날 정도이다. 정자 바위는 옛날 군사들이 전망대로 사용하던 곳이다. 정자 바위가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옛 성벽이 울타리처럼 골짜기를 빙 둘러싸고 있다. 산에는 일찍 고구려 때 축성하고 사용하던 천 년 전의 성곽이 있다. 이 성곽에는 온돌 유적이 있는 게 자못 특이하다. 오랜 옛날부터 백의 겨레의 선조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자 바위 아래의 석두하 기슭에 늘 돼지머리 등 제물을 차려놓고 산신령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다. 옛 고향의 따스한 추억과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 민속은 어찌 보면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달래는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충청도 마을은 함경도 문화권인 연변에서 이 정자 바위처럼 유표했다. 공교롭게 함경도 마을은 바로 남쪽으로 몇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일명 석두촌(石头村)으로 부근을 흘러 지나는 석두하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만주국 강덕(康德) 원년(1934) 함경북도에서 백여 가구의 농부들이 집단 이주하여 이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은 조선 총독부에서 관리했다고 해서 시초에는 “총독부 부락”이라고 불렸으며 1936년 집단부락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남도 충청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북쪽에, 북도 함경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남쪽에 위치하면서 남도와 북도는 이 고장에서 서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정암촌에서 20여 가구가 따로 나와 석두촌의 북쪽에 밭을 일궜다.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솔밭자라고 불렸다. 이 마을은 나중에 소실되고 송전툰(松田屯)이라고 쓴 석물만 외롭게 길가에 남았다. 송전툰은 솔밭자를 중국어로 뜻을 옮겨 쓴 것이다. 아예 송두리째 소실된 마을도 있었다. 번신령(翻身岭)은 벌떡 자빠졌다는 속설 때문에 불리는 지명인데 정암촌에서 왕청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북쪽 약 3리부터 시작되는 골짜기이다. 세 부락이 있었고 한때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지난 세기 60년대 전부 골짜기 밖으로 철거 되였다고 한다. 정암촌도 미구에 새마을 건설을 하면서 남쪽방향으로 약간 자리를 옮긴다. 그래도 정자 바위를 그냥 뒤에 업고 있어서 마을 지명의 근원은 버리지 않은 셈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지역 우월감이 정말 대단해요.” 심범극옹은 마을의 텃세를 말하면서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면 마을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경상도 출신의 심범극옹 가족이 정암촌에 이삿짐을 풀 수 있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의지를 따른 게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적인 행위였다. 정암촌은 8.15광복 전까지 북쪽 왕청현 춘방구(春芳区)에 속했으며 훗날 동쪽 훈춘현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였다. 이때 이 지역에는 아홉 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부락마다 훈춘에서 이주하는 세 가구의 이민을 통일적으로 받게 되였다. 심범극옹의 가족은 마침 이 충청도 마을에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심범극옹은 이 충청도 마을의 토박이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의 그림자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심범극옹에게 예나 제나 “그 사람들”로 통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흥겨울 때는 노래를 했지요.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의 1번 노래는 “청주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심범극옹은 인터뷰 도중에 요청에 따라 노래 한가락을 멋지게 뽑았다. 그는 적어도 노랫가락을 건드려지게 넘기는 이때만은 어김없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세. 울 너머 담 너머 임 숨겨두고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이하 후렴)” 지금도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삼삼오오 모여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힘든 아리랑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작 노래의 발원지인 충청도에서 이 “청주 아리랑”은 이미 실전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청주 아리랑”은 이역의 새 마을 정암촌에 정착하였고 또 정암촌의 이미지로 되고 있다. 구경 이 노래가 이민들의 70년 이주생활에서 어떻게 변형되었고 또 어떻게 본고장의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충청도 사람들의 운명과 생활의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는 아무런 온난의 여지가 없다. 중 한두 교전에는 학자들이 와서 남도 방언과 민속을 연구하기도 했다. 학자들의 이런 발길은 날이 갈수록 뜸해지고 있었다. 정암촌은 더는 충청도 사람들만 살고 있는 고도(孤岛)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함경도와 가깝고 또 함경도 출신의 사람들이 인근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물결에 잠겨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지만 남도 충청도의 이름은 북쪽 골짜기의 옛 산성처럼 어느덧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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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3
  • 까울령 저쪽에 고려마을이 있었다
    ●김호림 예전에 도문에서 훈춘으로 가려면 꼭 그 산마루를 넘어야 했다. 일명 까울령, 그 무슨 까마귀가 날아가다가 울음을 떨어뜨린 이름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산이 하도 가파르고 높아서 새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넘었을까. 까울령은 두만강 기슭까지 머리를 쭉 내밀고 장벽처럼 앞뒤를 가로막고 있다. “겨울이 되면 어떤 차들은 산길을 버리고 얼음 위로 달렸지요.” 조만길씨의 어릴 적 기억에는 바퀴 달린 “썰매”가 그 무슨 동화의 한 장면처럼 또렷이 남아있었다. 그때 두만강의 빙판에는 네발 달린 소가 가서 얼음구멍에 빠진 네 바퀴 차량을 끌어내는 진풍경이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한다. 조만길씨가 살던 경영촌(庆荣村)에서 집집마다 식탁에 늘 반찬처럼 올리던 한담 거리였다. 아이러니하게 조만길씨는 훗날 그 얼음구멍을 만들던 강물의 관리자로 된다. 1989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귀향하여 진수력관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촌(흥진촌)입구에 있는 이름비. 경영촌은 까울령동쪽의 첫 동네이다. 광서 15년(1889년), 이곳은 나루터가 생기면서 배 선(船), 나들목 구(口)를 넣어 선구라고 불렸다고 한다. 1924년, 동네는 20여 가구로 늘어났으며 동쪽의 지상표지물 같은 굴륭산(窟窿山)의 이름을 빌어 공동산(孔洞山)이라고 새롭게 불렸다. 굴륭산은 북쪽 산비탈에 작은 동굴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1949년 마을은 상서로운 뜻을 부여하여 번영을 경하한다는 의미의 경영이라고 개명하였다. 1980년대 초 경영촌에는 약 200가구 살고 있었으며 그중 한족은 10가구 정도 되였다고 한다. 그 후 꾸역꾸역 밀려온 한족이 두만강의 물처럼 마을을 야금야금 잠식하며 지금은 마을을 거의 반 정도 삼키고 있다. 어쨌거나 조만길씨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을 무렵 경영촌의 사람들은 한족을 내놓고 선조가 거의 다 한 고향이였다. “저기 강 건너 쪽입니다. 저처럼 모두 함경북도에 원적을 두고 있었지요.” 조만길씨의 말을 따른다면 예전의 마을에는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산마루를 불렀던 이름인 “까울령”은 분명히 그들의 고향인 함경도의 방언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이 “까울령”은 훈춘의 지명지에서 그 원형을 드러낼듯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까울령은 옛날 고이산(高尔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이산은 만족말로 홰나무산이라는 의미이다. 이 고이산을 우리말로 음역하면 “까울령”이 된다. 1964년 고이산을 다시 경영촌남쪽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의 남고령(南高岭)이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까울령의 수목은 재생림이며 홰나무가 주종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서 홰나무의 산이라는 의미의 고이산이라고 이름을 달았는지는 영문을 알수 없다. 더구나 그 후의 이름인 남고령은 경영촌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위치한다. 기실 까울령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은 흥진촌(兴进村)이다. 창문을 열면 아스라이 솟아있는 산이 금방 시야를 가득 채운다. 흥진촌은 흥성하고 전진한다는 의미로 1984년에 지은 이름이다. 선통 2년(1910년)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 봄이면 산과 들에 살구나무꽃이 만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행화촌(杏花村)이라고 불렸으며 훗날 마을에 조선인만 살고 있다고 해서 고려촌이라고 불렸다. 한때는 서쪽의 수남촌(水南村)소속으로 있었다. 수남촌은 동쪽의 봉오골(凤梧沟)에서 흘러나오는 강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봉오골은 일명 봉오동이라고 하는데, 선통(1908~1912년)년간에 개발된 무려 25리의 긴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에는 하, 중, 상 등의 마을이 30~60가구씩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까울령”의 험준한 산줄기는 이 봉오골을 병풍처럼 빙 둘러치고 있다. 흥진촌 아니 고려촌은 그 병풍 바깥쪽에 기대여있었다. 고려촌의 북쪽 고개를 넘으면 금방 봉오골이 나선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봉오골을 북봉오골이라고 불렀고 고려촌을 남봉오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봉오골이라고 하면 대뜸 우리 마을인지를 알았지요.” 고려촌 태생인 한룡범씨의 말이다. 예전에 항간에서 남봉오골이라는 이 이름은 고려촌이나 흥진촌보다 더 잘 통했다고 한다. 한용범씨는 고려촌에 몇몇 남지 않은 토박이였다. 그의 증조부가 함경도 은덕군에서 자식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조손 4대가 거의 100년 동안 한 고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촌은 인가가 한때 50여 가구에 이른 적 있지만 현재는 30가구 정도이며 그나마 사람이 들어있지 않는 가옥이 적지 않다. 한용범씨의 말을 빈다면 두메산골이라서 사람들을 붙잡아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고려촌은 이전에는 조와 콩 농사를 지었으며 지금은 옥수수와 콩을 위주로 심고 있었다. 하도 척박한 고장이라 토지개혁을 하던 1947년 무렵 마을의 으뜸가는 부자는 지주 아닌 부농이었다고 한다. “북 봉오 골운 정말 ‘만석 부자’의 고향이지요.” 한용범씨는 고개 하나를 사이 둔 봉오 골에 여간 부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봉오 골은 금처럼 귀한 송이버섯은 물론이요, 영지와 황기, 기름 개구리 등 특산물이 산판에 널려있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봉새가 깃든 오동나무의 골짜기라는 것. 전하는 바에 의하면 봉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으며 오동나무의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동나무가 나는 터는 천하의 길지라고 한다. 그러나 봉오 골이 세간에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오동나무 때문이 아니다. 1920년 6월 봉오골에서 홍범도(洪范图), 최진동(崔振东)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韩军北路督军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 추격대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 명을 내고 완전히 참패했다. 한편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였다. 봉오동전투는 유명한 청산리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투가 된다. 이때 일본군은 함경도 풍서리에서 봉오골에 지원부대를 파견했다고 한다. 풍서리는 반도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이며 바로 경영촌의 강 맞은쪽에 위치한다. 일본군 지원부대는 두만강을 건너고 경영촌을 지나 봉오골로 향발했다. 이 무렵 경영촌은 또 “용배미”라고 불렸다고 한다. “배미”는 함경도 사람들이 뱀을 이르던 말이니 “용배미”는 용과 같은 뱀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원체 마을 동쪽의 굴륭산에는 뱀이 유난히 많았고 또 용과 같은 큰 구렁이가 있었으니 그럴법하다. 각설하고 이날 저녁 까울령동쪽에 있는 비파골(琵琶沟)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후문이지만 일본군 지원부대가 봉오동에서 철수하는 부대와 저들끼리 혼전을 벌렸던 것이다. 비파골은 골짜기가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데 현지인들은 중국말 발음을 따서 피페골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인가가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벌에 내려와 살고 있다. 진짜 피페한 골짜기로 된 것이다. 봉오동전투의 일부인 비파골의 전투 역시 “피페”한 역사로 사라질 번 했다. 다행히 20여년전 연변의 사학자들이 경영촌에 가 현지 70, 80세 노인들의 목격담을 채집하여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주전장인 봉오골은 끝내 세월의 깊은 물에 종적을 감췄다. 봉오골을 흐르는 시냇물은 바로 봉새가 골라서 마신다는 전설의 단물이라고 한다. 이 시내물이 나중에 도문사람들의 수원지로 되였던 것이다. 1977년 골짜기에 저수지를 세우면서 봉오골의 사람들은 골짜기를 떠나 도문의 여러 지역에 흩어졌다. 이제 저수지의 물 위에는 구름과 산과 나무가 비껴있을 뿐이며 옛날 골짜기를 메웠던 총과 칼의 그림자를 볼수 없다. 산비탈에 고독히 서있는 봉오동전투기념비가 흐릿한 옛 기억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다. 봉오골은 더는 인가가 여기저기 널려있던 동네 봉오동이 아니다. 오동나무는 물에 잠기고 봉새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사실 오동나무에 깃드는 새는 봉새이지만 오동나무의 씨앗을 먹고 배설하는 새는 까마귀라고 한다. 까마귀는 산마루에 울음소리만 아니라 오동나무에서 물어온 씨앗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까울령은 애초부터 봉오골과 뭔가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러했다. 봉오골 역시 고려촌처럼 시초부터 조선족들이 살고 있던 고려마을이며 이 때문에 예전에는 봉오골과 고려촌의 남쪽에 위치한 높은 산을 남고려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풍문이 아니라 도문지명지의 기록이다. 나중에 줄인 말로 남고령 혹은 고령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까울령은 “고령”이 중국지명으로 고착된 후 다시 우리 말로 음역된 이름이라는 해명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산 하나를 두고 지방 문헌마저 이렇듯 이름의 뜻을 제각기 해석하여 혼선을 주고 있다. 더구나 산은 또 두 지역의 경계선으로 되고 있어서 이름 못할 뭔가의 뉘앙스를 피여올리고 있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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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9
  • 용두레 우물과 포대 그리고 장성
    ●김호림 마을 한복판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반듯한 돌로 둘레를 쌓아올렸고 용두레를 잣아 드레 박으로 물을 퍼서 올렸다. “물이 많고 맑았는데 맛 또한 좋았지요.” 최흥수씨는 우물처럼 깊은 기억을 퍼서 다시 눈앞에 떠올렸다. 그는 이 우물 근처의 동네에서 집을 짓고 살던 사람이다. 예전에 우물은 동네방네 소문을 놓았다고 한다. 용두레우물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우물이 있는 마을도 용두레마을이라고 불렸다. 용두레마을은 청나라 선통(1908—1912)년간 조선인들이 와서 세웠다고 한다. 훗날 중국말로 지명을 적으면서 용두레의 용(龙)자와 우물 정(井)자를 묶어서 “용정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옛 우물가에 있었던 백년가옥. 잠간, 이야기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용두레마을 즉 용정이라고 하면 뉘라 없이 자연스럽게 해란강기슭의 옛 마을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실 이 용두레마을은 해란강이 아닌 훈춘하의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연변에서 이런 동명의 지명은 결코 한두 개가 아니다. 남쪽의 양지바른 곳 혹은 작은 여울이라는 의미의 남양(南阳)은 무려 일여덟 번이나 등장한다. 다만 용정은 하도 유명한 지명이라서 류달리 이상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이 용두레 우물 역시 몇 십 년 전에 땅밑에 묻혔다. 이에 비하면 우물가에 있던 옛 기와집은 운이 좋은 셈이다. 허물리지 않고 길 서쪽에 통째로 옮겨졌던 것이다. 용두레 우물의 옛 주인이 살고 있었을지 모를 백 년 가옥이었다. “마을에서 잘나가던 부자라고 해요. 토지개혁 때 청산되었다고 하지요.” 미구에 용두레마을 역시 선후하여 동광촌(东光村) 1대(촌민 소조), 전선촌(电线村) 4대로 이름이 바뀌면서 집단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옛 우물은 그렇게 옛 가옥의 부자처럼 말끔하게 “청산” 된 셈이다. 한때 용두레 우물이 두레박처럼 이름을 걸고 있던 동광촌은 춘경촌(春景村)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춘경은 민국(1912—1949) 초년 조선인 몇 가구가 이주하면서 생긴 마을인데 말 그대로 “봄날의 경치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1940년 무렵 일본 다카스 개척단(高鹫开拓团)이 진입하면서 이 “봄날의 아름다운 경치”는 산산조각이 되여 버린다. 개척단은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원래의 이름을 삼켜버렸던 것이다. 일본개척단은 일명 “만몽개척단满蒙开拓团)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조직되었다. 대규모의 이민은 1936년 백만 가구 이민계획이 실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약 10년간 무려 860여개의 개척단이 만주땅에 들어섰다. 이때 일본은 수매(收买)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땅을 빼앗았으며 또 “위험한 땅”, “군용지”, “치안유지” 등 잡다한 구실로 좋은 땅을 몰수하여 개척민들에게 나눠줬다. 원주민들은 부득불 외지로 이주하거나 황량한 지역에 가서 또 다른 “개척민”이 되였다. “만주개척년감(满洲开拓年鉴)”의 기록에 따르면 1943년까지 이런 개척민은 무려 4만 0771가구의 20여만 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훈춘에 출현했던 개척단은 8개, 의용단은 1개로서 도합 3004명이었다. 의용단은 말이 개척단의 일부이지 실은 일본군 예비대로 주요하게 청소년들로 구성되었다. 개척단과 의용단은 모두 1부락, 2부락, 3부락 혹은 상, 중, 하 부락 등 이름으로 원래의 마을 이름을 바꿨다. 와중에 다카쓰 개척단은 여섯 부락을 설립하며 이때 동광 지역에도 그들의 집단부락을 앉혔다. 일본이 전패하면서 그들의 개척단도 파산한다. 다카쓰 개척단은 1945년 8월 훈춘진에 집결하며 난민 수용소에 있다가 6년 후인 1951년 일본 정부의 통지를 받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훈춘 경내의 일부 조선인들이 옛집단 부락에 와서 국영농장을 세웠다. 1956년 고급 농업생산 합작사를 세울 때 “동광”이라는 새 이름을 짓고 일본인 부락의 흔적을 밀어냈던 것이다. 동광촌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이르러 22가구의 작은 동네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개척단 일본인의 잔영은 오랜 후에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일본 사람들이 ‘닭 덕대 산’까지 전깃줄을 늘였다고 합니다. 그 전깃줄이 우리 마을을 지났다고 하지요.” 최흥수씨가 자못 정색해서 말하는 전선촌의 내력이었다. 옛날 전깃줄은 시골에서 사막의 물고기만큼이나 생소한 물건이었다. 이에 따라 전깃줄이 드리웠던 마을은 아예 “전선촌”으로 불리게 되였으며 나중에 그 이름이 다른 지명을 물리치고 현지에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18
  • '중국 특색'과 '미국 예외'의 가장 큰 구별 점
    ● 왈리드 (튀니지) 오늘의 세계는 신흥시장 국가와 발전 중 국가들이 군체적으로 굴기하고 국제역량 대비가 더욱 균형 발전하며 세계의 단극화 구조와 미국 패권의 시대가 몰락하면 다시는 더 이상 그 복귀가 어려운 시대로 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다극화의 주요한 추동자로 되고 있지만 미국은 도리어 여전히 자아 우월감과 패권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생기는 중미사이의 모델은 서로 충돌하면서 세계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후 냉전시대의 중미모델: 개혁개방과 세계화 추세에 대한 역행 중국은 정확한 발전도로를 모색하고 발전과 번영에 들어서기 전, 허다한 고난에 봉착했다. 이 동방의 거물 사자가 잠에서 깨어나 개혁개방의 도로를 선택하기 전에는 빈곤, 실패, 기아와 동란 등을 수없이 겪었다. 그러나 냉전의 결속은 중국의 자아반성을 독촉했다. 반대로 미국은 여전히 그 창궐함이 극도에 달했고 맹목적인 자신감으로 거들먹거렸다. 그리고 중국은 구소련 모델의 교훈을 섭취,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모델이 결합된 새로운 것을 탐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제기했고 국가 주도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유시장과 사영기업에 대한 제약을 풀어놓았다. 하다면 미국은 냉전이 결속된 후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 미국의 모델이 세계 기타 국가들에 계발과 창조적 능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도록 하고 있다. 냉전이 결속된 후의 수 십 년 래 중국의 주류는 <중국특색>으로 주로 중국의 원소(元素)와 대외개방, 국가의 방대한 통제조정과 자유경제의 상호 결합 및 중국 모델과 기타 국가의 모델이 상호 존중하고 상호 윙윙의 기초상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는 도리어 <역사의 종결(历史的终结)>과 <미국화>로 군사력과 기타의 파워로 자기의 생각에 따라 <동맹이 아니면 적으로 취급>하는 대외정책으로 세계를 개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미국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 국가들을 놓고 말하면 미국식 모델은 일종의 압박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이른바 미국식의 자유는 허다한 국가의 눈에는 패권으로 보이었고 소위 그 <안전관> 또한 기타 국가한테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냉전이 결속된 지 40년이 지난 오늘 <중국의 굴기>와 <미국의 쇠퇴>는 자주 여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의 충돌 중에서 중국과 미국의 모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등지고 달리고 있는 것이다. 예하면 중국과 세계는 날로 밀접해지는 한편 미국은 도리어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은 무역자유, 글로벌화, 투자와 자본의 자유유동 등을 호소하는가 하면 미국은 관세보루를 설치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역전쟁을 도발하고 글로벌화를 반대하고 있으며 아울러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기업의 투자와 교역을 간섭하면서 더 이상 공평경쟁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이른바 자유의 토대위에서 건립되었다는 미국모델은 그 시작부터 자아모순에 빠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상 미국모델과 중국모델의 행위적 차이는 망상적으로 바닷물을 다 마시자는 사람과 바다를 헤치면서 배를 모는 사람과의 대비이라고나 할까? 현재 차별화로 가득한 세계에 직면하여 강대한 실력의 미국은 마치도 익수자마냥 부단히 국제주의적 의무에서 탈퇴하고 글로벌 세계에서 철퇴하려고 발악하면서 고립주의로 향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러나 중국모델은 도리어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하면서 큰 파도에 영활하게 대응, 이는 최종적으로 성공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르는 수영선수와도 같은 모습이다. 미국은 현재 자기 자신들이 설치해놓은 전 지구적 전략의 미궁 중에서 전전긍긍하면서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도리어 타국에서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선박의 항해를 저애, 이것이 곧바로 현재 미국의 대 중국정책으로 되고 있다. 헌데 이런 선박들의 항해는 단지 자신노력의 결과만이 아닌, 이미 세계적인 대 추세로 되고 있다는 것을 미국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냉전 시기, 미국의 정책 제정자들은 “미국의 모델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식이란 것이 증명될 것이다”라고 자고자대했다. 이와는 달리 현재의 무역전쟁 중 중국의 지도자들은 반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일을 잘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아 주동성을 상실했고 그 정책 또한 중국굴기에 대한 피동적인 대응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특색>과 <미국 예외>란 모델의 구별 세계의 판도가 다극화로 발전함에 따라 현재 <중국굴기>와 <미국쇠퇴>론이 성행,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중국이 새로운 패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해하자면 중국모델과 미국모델을 비교해보면 이 문제에 대한 답안이 나오게 된다. 중국과 미국의 모델을 살펴보면 3대 주요한 구별이 있다. 이런 구별은 중미 각 자의 행위 및 이들과 기타 국가와의 관계를 결정한다. 첫째, <중국특색>과 <미국예외>는 개념상 비슷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다. 중국의 특색성와 미국의 예외성은 표달하는 것은 동일한 함의를 갖고 있다. 곧바로 타국과는 부동하고 모델이 독특한 것이다. 하지만 기실 양자는 완전히 상 반대되는 우의(寓意)를 갖고 있다. 미국의 예외성은 자기 자신을 기타 사회와 문화의 앞자리에 놓는 표현으로 되고 있다. 일부 미국인들은 미국의 발전사는 다른 국가나 지구와는 다르다고 인정하고 있다. 자기들은 봉건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나치스주의를 경유하지 않았으며 미국은 인류자유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자유를 수호하고 전파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반대로 중국특색은 다시 말해 중국모델은 수 천 년 자국의 역사문화와 사회전통 습관 및 본국 특정을 거울로 삼은 특점이 있다. 미국 모델은 미국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중국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미국인들은 미국식 모델이 부동한 문화배경을 갖고 있는 전 인류한테 모두 가장 적합한 모델이라고 인정하겠지만 중국인들은 도리어 세계상에는 많은 부동한 성공모델이 존재하며 아울러 한 가지 모델을 전 세계에 파급시키려는 생각은 충돌 혹은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인정, 때문에 인류는 부동한 모델 사이에서 평화공존의 방법을 찾고 이를 실현해야지 모종의 특정 모델을 전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서 알 수 있는바 미국식 모델 목표는 확장이고 중국의 모델 취지는 가장 적합한 자아발전방식을 찾으며 아울러 자아 특색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뚜렷하게 반대되는 국가안전관이다. 미국과 중국의 안전관의 구별은 크다. 심지어 완전히 상반대로 된다. 미국 모델의 안전관은 <내부안전>의 사상위에 있으며 이들은 미국을 <산정에 있는 성(山巅之城)>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위치해 있고 거기에 인국들 또한 공격성적인 나라들이 아니기에 자기의 생명과 재부에 대한 안전감이 십분 만족하고 있다. 때문에 미국은 줄곧 영토 외에 군사력 확장에 치중하면서 세계패왕의 지위를 지키려 하고 있다. 반대로 중국의 안전관은 <외부의 위협> 위에 있다. 중국은 많은 강국과 미국 군사기지들에 포위되어 있고 또한 내부로는 분열세력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다. 해양을 놓고 말하면 아편전쟁으로부터 8국 연합군의 중국침략에 이르기까지 해양은 줄곧 외국세력이 중국을 침략하는 문호(门户)로 되어왔다. 신 중국이 창립된 후의 수십 년간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한 이유로 중국은 시종 외부로부터 거대한 압력에 시달렸고 내부 구세력의 음모를 방지해야 했는가 하면 외부세력의 침략도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한 후 중국은 여전히 외부세력의 간섭과 내부로는 지구분열주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중국의 안전관은 오직 충족한 군사세력이 있어야 만이 외부세력의 침략을 억제하고 국가의 통일과 현유의 자원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세계 각 국과의 관계이다. 중국현대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매번 중국내부가 더욱 안정할 때일수록 중국과 기타 국가와의 관계가 정비례로 좋아졌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중국은 자기의 모델을 <수출>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동시에 외국모델의 압력도 접수하지 않고 있다. 내부의 안정이 공고화 되고 외부의 위협이 억제되는 것, 이 양자가 평형을 이룰 때 중국은 합작공동이익의 토대위에서 세계 각 국과 관계를 건립하고 있다. 중국은 그 어떤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고 있으며 군사 혹은 의식형태의 연맹으로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왔다. 때문에 중국 모델은 그 운행형식에서 <정수 + 변수(定数+变数)>로 국내적으로는 중국특색을 위주로 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합작 상대방의 가치관이 부동하고 주어진 환경이 달라도 여전히 기타 국가와 공동이익을 토대로 한 합작관계를 건립하고 있다. 주지하다 싶이 오늘 날 중국은 조선, 한국, 인도,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 국가와 모두 온건한 합작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은 상하이(上海) 합작조직 및 브릭스(金砖国家) 그룹의 중요한 성원으로 이 두 개의 조직은 모두 문화 혹은 의식형태의 통일로 건립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중국은 자신의 국제이익을 실현함에 있어서 공동이익을 기초로 하고 있지 동맹관계를 기초로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 외 <일대 일로(一带一路)>의 발기가 파급되는 다양한 문화와 부동한 합작방식은 부동한 국가와 지구의 발전전략에 잘 융합되면서 중국의 희망과 기타 국가와의 합작공동이익이 잘 반영되고 있으며 아울러 이는 결코 확장을 꿰하거나 패권을 노리는 것은 아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상대적으로 미국 혹은 서방의 모델은 <정수 + 정수(定数+定数)>의 형식으로 세계 각 국과 거래하기에 이들은 자기네들의 모델이 모범이라고 표방하면서 타국들로 하여금 자기의 복제품으로 되어 자기네들의 가치관을 접수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방의 모델을 공동이익, 가치관과 의식형태의 기초위에서 통일로 건립된 동맹과 규칙으로 삼을 것을 호소, 자신의 모델 영향을 확대하고 기타 부동한 모델을 억제하기 위하여 시도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동맹을 통해 패권을 산생시키고 패권으로 하여금 자체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해야 더 적절할 것 같다. 총적으로 중미 모델은 그 개념, 가치관, 이익을 실현하는 방식 및 기타 국가와 내왕하는 방식 등에서 모두 큰 구별점이 존재한다. 일찍 중국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등소평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不管白猫黑猫,会捉老鼠就是好猫)>라고 말했다. 현재 중국 모델은 이미 성공한 모델로 활력이 충만하고 현실적 의의가 풍부하며 아울러 국제합작 영역에서도 모두 공동이익을 실현하였다. 이와는 달리 동맹과 공통점을 중시하는 미국 모델이 계속 세계에 대한 미국의 리드와 다양화한 세계의 평화공존과 발전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미지수이다. (작자는 중국 베이징 대학 역사학부 졸업생이며 박사학위 획득자이며 현직은 인민망의 아랍문판 편집임) <편역 : 철민>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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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민국의 제일자객 왕아초
    ●김수희 왕아초(王亚樵), 장개석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틀 이가 시큰거렸고 대립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문을 든든히 잠갔는가 검사했어?”하고 소리쳤다. 구상해탄의 3거두인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도 길에서 왕아초를 만나기만 하면 급히 길을 되돌아 다른 길로 가군 했고 늘 부하들에게 절대 왕아초의 기분을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원 국민당 군통의 핵심 인물인 심취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귀를 두려워하지만 마귀는 왕아초를 두려워한다”고 말 한 적이 있다. 별 기이한 일이 다 벌어지고 있던 민국의 난세에 위세가 등등한 신비한 인물 왕아초가 나타났는데 그는 무예가 뛰어나고 경공(轻功)이 탁월하며 신출귀몰하고 행방이 묘연하며 올 때는 소리 없이 왔다가 갈 때는 흔적 없이 사라지군 했다. 그는 전문 상층사회의 고관 요인들과 일본군 고급 관리들을 암살했다. 그는 늘 상해, 남경, 무한, 복주, 홍콩, 난닝 등지를 귀신같이 달려 다니며 어디에 탐관, 한 간, 일본군이 있으면 그곳에 가서 제거해버리군 했다. 그의 손에서 도끼가 번쩍하면 악인들의 머리가 날아갔고 그의 손에서 총이 “땅”하고 울리면 악인들의 심장이 멎어버리군 했다. 그는 몸매가 왜소했는데 검은 테 안경을 끼고 다녀서 매우 점잖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살기등등한 도끼방(斧头帮) 방주, 항일철혈한간제거퇀 퇀장이였다. 그는 “강회대협(江淮大侠)”, “암살 대왕”, “민국제일자객”, “원동제일자객” 등으로 불리면서 강호에서 위세를 떨쳤고 그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어느 한번 왕아초와 상해경비사령 양호는 무슨 문제 때문에 상의했는데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게 되였다. 화가 난 왕아초는 키가 작기에 걸상에 올라가서 양호의 양쪽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양호였지만 왕아초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찍소리 못하고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여기서 왕아초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보아낼 수 있다. 1889년에 합비에서 출생한 왕아초는 일찍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후에 사회당에 가입하여 사회당안휘지부 부장을 담임했다. 1913년 겨울에 환계군벌 예사충(倪嗣冲)이 안휘의 정권을 빼앗고 사회당을 “난당(乱党)”이라고 하면서 진압했기에 왕아초는 상해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안휘노동자동향회”를 조직하고 암살 테러조직인 도끼방을 묶어세웠다. 도끼방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높아졌고 왕아초의 이름은 상해를 진동했다. 그가 통제하고 있는 “상해노동자총회”의 회원은 가장 많을 때 10만 명에 달했다. 왕아초와 그의 암살조직은 시종일관하게 “장개석을 반대하고 항일하자”는 기치를 높이 들고 암살을 통해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랐다. 왕아초는 상해 포동에 들어선 일본 해군 제3함대의 “출운호”를 폭발해버렸고 매국협정을 맺은 왕정위 괴뢰정부 외교부 부부장 당유임, 온갖 나쁜 짓을 다 저리른 송호경찰청 청장 서국량 등을 암살했다. 장개석, 왕정위, 송자문 등도 하마터면 왕아초의 손에 죽을번 했다. 왕아초는 여산에서 장개석을 암살하려고 했고 남경에서 왕정위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북경역에서 송자문을 암살하려고 했다. 장학량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사직하고 상해로 갔을 때 그를 맞아준 것은 기폭장치를 빼버린 작탄 이였다. 이것은 왕아초가 동북의 3000만 동포를 망국노로 만든 민족죄인 장학량에게 보낸 경고였다. 왕아초는 장학량이 정신을 차려 다시 항일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일본군, 왕정위 괴뢰특무, 군통특무, 검은 패거리 등 여러 세력들이 여러 번이나 왕아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다. 장개석은 왕아초의 머리에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었고 왕정위 괴뢰특무들은 층층이 병력을 배치하고 왕아초를 죽음으로 내몰려고 했으며 일본첩보기관은 덫을 놓고 왕아초를 유혹하여 붙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기민하고 용감한 왕아초는 번마다 위험한 상태에서 안전하게 벗어나 계속 악세력과 완강하게 싸웠다. 1933년 가을에 장개석은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고 왕아초의 목숨을 끊어오라고 명령했다. 당시 장개석은 왕아초의 도끼에 목숨을 잃을가봐 몹시 두려워했다. 장개석이 현상금을 내건 명단 중에 임표, 서해동 등이 있었는데 현상금은 10만원을 초과하지 않았다. 군통특무들과 경찰들이 전면 수색에 나서자 왕아초는 교묘하게 부두노동자로 변장하여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도망쳤다. 1935년에 리제심, 진명추, 왕아초 등은 홍콩에서 비밀회의를 가지고 국민당 제4기 6중전회에서 장개석과 왕정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왕아초는 화극지를 남경에 파견하여 암살을 책임지게 하고 하파광과 장옥화가 옆에서 협조하며 기자신분을 얻은 손봉명이 구체적 암살행동을 맡기로 했다. 그해 11월 1일에 손봉명은 권총을 사진기 안에 감추고 예당으로 들어갔다. 회의가 개막된 후 대표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왕정위가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보이지 않았다. 손봉명은 권총을 꺼내들고 왕정위를 향해 사격했다. 왕정위는 몸에 총알 세발을 맞았는데 한발은 몸속에 숨어있다가 9년 후에 왕정위를 일본도쿄 제국대학병원의 수술대에서 죽게 만들었다. 왕정위 암살을 왕아초가 지휘했다는 것을 알게 된 장개석은 두려워서 대립을 불러놓고 명령했다. “빠른 시일 내에 왕아초를 잡아와! 산채로 잡지 못하면 죽여도 좋아. 왕아초를 잡아오기 전에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대립과 정개민은 왕아초를 잡으려고 수백 명의 군통특무를 홍콩에 파견했지만 헛물만 켜고 말았다. 1936년 2월에 왕아초는 군통특무들의 추격을 피하여 몇몇 부하들과 함께 광서의 오주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이종인과 백숭희를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를 동원해 장개석을 토벌하라고 건의했지만 이종인과 백숭희는 거절했다. 오주에 거주하면서 왕아초는 궁지에 빠졌다. 홍콩에서 왕아초를 붙잡지 못한 대립은 왕아초가 의협심이 강해 부하들에 대한 보살핌이 매우 지극하다는 것을 알고 왕아초의 부하 여립규를 붙잡아 남경의 감옥에 처넣었다. 여립규가 죽어도 왕아초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자 대립은 여립규의 처 여완군을 찾아가서 “우리가 너의 남편 여립규를 놓아주고 상금을 톡톡히 주겠으니 왕아초한테 연계하여 경제형편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해라"며 구슬렸다. 1936년 10월초에 여완군은 갑자기 홍콩에서 오주로 와서 왕아초의 부하들과 연계를 가진 후 왕아초에게 전화를 하여 “홍콩에서 경제형편이 힘들어 오주로 왔다”고 말했다. 그때 여완군은 이미 대립에게 회유당했던 것이다. 그녀는 오주에 온후 즉시 군통 주요책임자의 한 사람인 정개민과 연계를 가졌다. 10월 20일에 그녀는 일이 있어 상의하자고 하면서 왕아초를 자기의 거처로 청했다.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는 여완군을 도와주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여완군의 거처에 도착한 왕아초는 수십 명의 특무들이 매복해 있는 줄도 모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왕아초가 들어서자 방안에 매복해있던 특무들이 석회가루를 그의 얼굴에 뿌렸다. 왕아초는 석회가루가 눈에 들어가 눈을 뜰수 없었지만 원래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몇몇 특무들을 쓸어 눕혔다. 하지만 특무들의 쏜 총이 다섯 발이나 그의 가슴에 명중되었고 세 곳에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특무들은 잔인하게 왕아초의 얼굴가죽을 벗겨버렸고 살인멸구하기 위해 여완군까지 죽여 버렸다. 대립은 1923년에 호종남, 호포일과 함께 왕아초와 의형제를 맺었지만 의리를 저버리고 왕아초를 살해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의 약점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하고 소리 없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암살대왕” 왕아초를 살해했다. 일본 놈들의 손에도 넘어지지 않던 일대의 민족영웅은 처참하게 장개석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아초는 길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서슴없이 칼을 뽑아 도와주는 호한이었고 탐관오리, 악당, 일본군을 보면 처단해버리는 영웅호걸 이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05
  •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남편을 두었던 산음공주
    [동포투데이] 중국의 황제는 아마도 가장 편안하게 살면서 향락을 누렸을 것이다. 그들은 삼궁육원에 수천명의 궁녀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만이 절대적인 향락을 누릴 수 있었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송(宋)나라에는 산음공주(山阴公主)라고 불리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름이 유초옥(刘楚玉)이다. 그녀는 이런 남자들만의 특권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삼궁육원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수많은 남자들을 남편으로 두고 마음껏 향락을 누렸다. 산음공주의 모친은 문목황후(問目) 왕헌원(王宪嫄)이다. 왕헌원은 효무제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낳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폐제(废帝) 유자업(刘子业), 예장왕(豫章王) 유자상(刘子尚), 산음공주 유초옥, 임회강애공주(临淮康哀公主) 유초패(刘楚佩), 황녀 유초수(刘楚琇), 강락공주(康乐公主) 유수명(刘修明)이다. 문목황후는 미녀였고 그녀가 낳은 딸들도 모두 그녀를 닮아 미녀들이였다. 이 네 명의 딸중에서 가장 자색이 뛰여나고 음탕하기로 유명한 딸이 바로 산음공주이다. 대명8년(464년) 5월에 산음공주의 16살 된 남동생 유자업이 황위를 계승했는데 역사에서 전폐제(前废帝)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유자업은 황음무도한 호색한 이였다. 아마도 중국 역사상에서 가장 호색한 황제일 것이다. 그는 민간에서 미녀를 많이 뽑아들였을 뿐만아니라 부친의 후궁, 심지어 자신의 친고모, 친누나까지 침상에 끌어들여 향락을 즐겼다. 그에게 강점당한 고모는 신채공주(新蔡公主)라고 불리우는 여인이다. 신채공주는 일찌기 장군 하매(河迈河邁)에게 시집갔었는데 유자업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궁녀를 죽인 후 그 시신을 하매의 집으로 보내면서 신채공주는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말했다. 하매는 이 치욕을 견디지 못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유자업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신채공주는 그때부터 성을 사(谢)씨로 바꾸고 궁중에 남아 황제인 조카의 여인으로 되였다. 유자업은 심지어 신채공주를 황후로 세우려고 까지 하였으나 신채공주가 스스로 거절했다. 산음공주는 고모와는 달랐다. 그녀는 남동생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산음공주는 자주 궁중에 들어와서 유자업과 함께 먹고 한 침대에서 함께 잤으니 부부와 같았다. 유자업은 이 누나가 하는 말이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한번은 산음공주가 유자업에게 말했다 “저와 페하는 모두 선황의 자손인데 페하는 삼궁육원을 거느리는데 첩은 부마 1명뿐이니 이것은 너무 불공평합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원 5세기경에 한 중국 공주가 내뱉은 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말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녀가 주장하는 이치는 이렇다. 공주와 황제는 모두 한 부친에게서 태어났는데 왜 황제는 후궁을 만명이나 거느리고 공주는 겨우 부마 1명만 둘수 있는지? 유자업은 누나의 이 말을 듣고는 즉시 누나의 뜻을 받아들였다. 유자업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 일은 신속히 처리했다. 그는 즉시 30명의 잘생긴 미소년들을 뽑아서 산음공주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산음공주는 이들을 모두 남첩으로 받아들였다. 산음공주의 남편 이였던 부마 하집(何戢)이 갑자기 이렇게 30명이나 남첩이 생긴데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사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집은 원래 명문가 출신이고 아주 잘 생겼을 뿐만아니라 풍채가 름름했다. 어린 남자들을 많이 가지게 되자 산음공주는 다시 성숙한 남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당시 송나라의 조정에는 두 명의 미남자가 있었다. 한명은 바로 산음공주에 장가든 하집이였고 다른 한명은 남군공주(南郡公主)에게 장가든 저연(褚渊)이였다. 저연의 자는 언회(彦回)이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저연은 산음공주의 고모부였다. 이 사람도 풍채가 뛰어나고 아주 준수하였다. 그리하여 산음공주는 이 저연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유자업을 찾아가 저연으로 하여금 자신과 며칠을 놀아주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유자업은 저연의 품행이 단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에게 아무 이유없이 산음공주와 며칠을 놀아달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에게 공주 집으로 가라고 조서를 내렸다. 저연이 공주집에 도착한 후에 어떻게 하는지는 산음공주의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산음공주는 신경을 써서 매일 화장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저연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10일이 지나도록 저연은 나무조각 같았고 교태를 부리는 산음공주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주는 마음이 급해졌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산음공주는 “그대는 구레나룻이 철극과 같이 강한데 어찌 조금도 사나이답지 못한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저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언회는 비록 똑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산음공주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강온의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저연은 전혀 동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은 공주이니 당신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주님이 이렇게 계속 핍박한다면 소인은 자살로서 끝낼 수밖에 없나이다.” 이 지경이 되자 산음공주도 더 이상은 어찌하지 못했고 저연을 곱게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산음공주의 좋은 시절은 결국 끝이날 수밖에 없었다. 경화원년 11월 29일(466년 1월 1일)에 유자업은 궁중의 반란으로 목이 날아났다. 다음날에 다른 황제가 등극했는데 구정치를 일소하기 위하여 유자상과 산음공주를 죽였다. 산음공주 류초옥이 죽었을 때 나이가 22살 내지 23살이였다. 젊은 나이에 죽은 그녀도 가엾지만 진정으로 불행한 것은 그녀가 거느리던 30여명의 남첩들이였다. 산음공주가 피살될 때 그들도 산음공주와 함께 순장되였다. <김희수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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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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