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1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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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김호웅(연변대학조한문학원교수) 요즘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최학송,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 길림신문, 2019.3.4.)이란 글과 <<우리말 굳이 배워야 하나>>(대가 숲을 이룰 때,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 zhixinzhe512.)라는 글을 읽었다. <<우리말 굳이 배워야 하나>>의 작자는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라는 글에서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안티 이오스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 공동체의 붕괴 또는 부재를 기성사실화하고 있다. 안티 이오스는 천하의 장사였지만 대지에서 발을 떼는 순간 힘이 빠져 웬만한 상대에게도 번쩍 들려 바다에 처박힌다고 한다. 조선족 사회도 대지를 떠난 안티 이오스가 되어 버렸으니 우리 족보와 같은 것들을 일찌감치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저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조선족 공동체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들불처럼 타오르는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은 주로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에 대해 토론하고자 한다. 이 글은“누구도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두 번 발을 담글 때 강은 같은 강이 아니고, 그도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만물류전(万物流转)의 사상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며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 된다는 진리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산해관이남의 대도시에 자리 잡은 젊은이들이 그 옛날 선비족(鲜卑族)처럼 강세문화 속에 깊이 들어가 스스로 발을 빼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철을 밟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비족은 옛날 북방에서 우리민족과 이웃해 살았고 종횡무진으로 맹활약을 했다. 그들은 선후로 10여개의 나라를 건립했고 중국의 절반 강산을 통치했다. 하지만 오늘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는 선비족이 없다. 지금 선비족의 일부 후예들이 시버족(锡伯族)이라는 이름으로 신강, 요녕성과 길림성의 일부 지역에 남아있다만 그들은 이미 망망대해와 같은 중국에서 창해일속과 같은 존재로 되여 버렸다. 물론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의 작자는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 산해관 이남의 대도시에 있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고충을 대변하고 있다. 현지에 조선족 유치원이나 소학교가 없으니 자녀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설사 가정교육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배웠다해도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는 어차피 한어를 써야 하고 한어의 수준여하가 학업성적과 졸업배치를 좌우지하게 된다. 그러니 어차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절해고도와 같은 상황에서도, 디아스포라로 천애지각을 떠도는 경우에도 자식들에게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유태인이 그러하고 중국인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제가 <<새는 좌우 두 날개로 하늘을 난다>>(김호웅, <<경계의미학과창조력>>, 연변인민출판사, 2019년 판.)라는 글에서 사례로 든 연변대학의 유일한 러시아인교수 다위도브선생의 자녀들이 그러하고 한국대전의 홍문장 중화요리집주인 왕 씨네 자녀들이 그러하다. 이중언어 구사 능력을 글로벌시대의 중요한 자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도시에서 끝끝내 자식들을 모국어를 아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자식들에게 모국어를 배워주자면 적어도 자식을 가정에서나마 모국어환경에 노출시켜야 하는데 이는 우리 젊은 부모들의 목표와 의지여하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 젊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중국어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자식을 모국어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다. 그런데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을 보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서로 모순이다. 전반부에서는“이제 우리와 조선어의 관계는 가부장제혼인에서 벗어난 자유연애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와서는‘엄마의 언어’즉 모국어의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강조했다. 참으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모국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인지, 아니면‘엄마의 언어’모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인지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자의 논지는 분명하다.‘강물’이 바뀌었고‘사람’도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이 변한 것만큼“누구도 우리에게 민족주의를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더욱이 우리 자녀들에게‘민족’을 부담으로 넘겨줄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를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체성을 잃고 주류문화에 두 손을 들고 나앉은 사람들, 달갑게 주류문화에 동화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이란 역사성을 띤 개념이요, 민족주의 역시 모든 역사단계에서 다 부정해야 할 명제가 아니다. 민족이란 개념을 두고 많은 견해들이 대립, 충돌하고 있다. 원초론과 근대론이 대표적이다. 스딸린은 원초론적 관점에서 민족이란 역사적으로 형성 되였으며 공통의 언어, 공통의 지역, 공통의 경제생활 및 공통의 문화생활에서 보여준 공통의 심리자질을 가진 안정된 하나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하지만 베네딕트앤더슨은 민족은 근대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서 그것은‘상상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베네딕트앤더슨 저,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나남, 2003.) 앤서니스미스 같은 학자는 원초론과 근대론의 종합과 절충을 시도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초적 요소에 기반을 둔 근대적 민족을 강조했다. 즉“민족은 공간적으로 위치 지어진 과거를 공유하는 전통을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적 정체성”을 그 표지로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민족은 근대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시간 속에 뿌리박은‘손에 잡히는 민족정체성’의 재료로부터 구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신화의 공유뿐 만아니라 역사적 기억의 공유가 있고 언어적, 문화적 전통의 공유라는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다.(앤서니스미스 저,이재석 역, <<민족과 인종의 기원>>, 그린비, 2018.) 민족이란 이렇게 숙명적인 존재인가 하면 또 오랜 세월을 거쳐 그 구성원들의 삶의 둥지로, 운명공동체로 되여 왔다. 하기에 이어령선생은 민족은 옷처럼 추우면 입고 우면 벗어던지는 그러한 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잘리면 병신이 되는 손과 발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하였다. 민족공동체를 잃었을 때,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확인할 없을 때 인간은 무서운 고통과 고뇌를 경험하게 된다. 조선왕조 인조왕시기 연경(燕京)에 파견 되였던 사신들이 이러한 아픔과 치욕을 경험한바 있고 알제리인의 후예이며 마르티니크 출신인 프란츠파농(1925~1961)이 이러한 아픔과 고뇌를 경험한바 있다.(프란츠파농 저, 이석호 역, 〈<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또한 김사량의 단편 <<뱃속으로>>, 이창래의 장편<<영원한 이방인>> 허련순의 장편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에 오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이 보존되고 그 민족이 강해야 그 구성원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고 사람답게 살수 있다. 민족 또는 민족국가를 잃었을 때 우리는 창씨개명, 치발역복과 같은 치욕을 받아야 했다. 민족이란 이처럼 소중한 이기에 우리 민족의 선열들은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자기의 목숨마저도 서슴없이 바쳤다. 우리 조선족의 선인들도 중국의 자유와 해방, 모국의 국권회복이라는 이중 역사사명을 짊어지고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싸웠다.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은 연변 땅에서 일어났고 우리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항일부대의 주요한 성원들이였다. 이러한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우리 후세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공연히 우리 자식들에게‘민족’이란 부담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될까? 민족과 언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의하고 불명확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애매모호한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라고 한다면 존재는 그 안에 거주한다. 고 하면서 언어를‘존재의 집’라고 했다. 즉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보존할수 있다. 이처럼 언어는 민족의 역사를 담는 그릇이요, 민족의 얼을 담는 항아리이며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다. 하기에 외솔 최현배(1894~1970)선생은 "우리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했고 당신에게는 "한글이 목숨”이라고 했다. 언어는 민족구성원들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될 뿐만 아니라 해당 민족의 사고방식과 심성(心性)을 가장 잘 드러낸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역사와 얼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에 고스란히 담겨져 살아 숨 쉬고 있다.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지만 말과 글이 없으면 우리의 유구한 역사도 내 가슴에서 너의 가슴으로 전달될 없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얼도 그 모습을 갖출 수 없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역사도, 문화도, 정신도 잃게 되고 그 어디에도 몸담을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된다.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은 서로 다른 방언계통을 갖고 어 남북 사이에 서로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지금도 간혹 복건성 남부(闽南) 출신의 인사가 북방에 와서 연설을 하면 상용중국어(普通话)를 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통역을 해야만 현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런데 한족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으로 되였을까?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는 지극히 중요한 문화통일의 역할을 했다. 한자에 내재한 일맥상통하는 안정된 계승성, 공용성과 민족성은 거대한 응집작용을 했다. 한자가 없다면 한족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한자가 표의문자가 아니고 표음문자였더라면 역시 강대한 한족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럽처럼 몇십개 민족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말과 글은 그 민족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문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경이 없고 민족의 계선이 없는 대동세계가 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나없이 한집이 되는 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아름다운 이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멀고먼 미래의 일이지 현실의 일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세계화의 진전이 빨라질수록 그만큼 민족주의 물결이 거세차게 일고 있다. 세계화는 개별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반면, 민족주의를 야기하고 다문화주의와 병행하게 한다. 따라서 세계화와 민족주의(또는 다문화주의)는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 두 바퀴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에서도‘다양화 자체가 미덕’이라 했다. 그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세계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중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켜든지 오보에를 불든지 팀파니를 치든지 자기특유의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하모니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민족도 자기 문화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민족들과 조화를 이루야 한다. 공자의 말 그대로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세계가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민족마다 최선의 민족국가를 이룩하고 최선의 문화를 일구어내서 다른 민족과 서로 교류하고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중변주곡이요, 우리가 동경하는 미래상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민족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 조선족만 해도 민족자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고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편의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스스로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고 있다. 사실 우리말과 글처럼 아름답고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언어와 문자도 세상에 별로 많지 않다. 총명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칠 수 있고 설사 머리가 좀 둔한 사람이라 해도 열흘이면 깨칠 수 있다. 또한 컴퓨터에 기초프로그램을 깔아야 기타 프로그램을 깔수 있듯이 먼저 모국어를 확고하게 배워두어야 다른 언어도 쉽게 배울 수 있다. 이렇게 갈고 닦은 이중 언어의 능력은 우리 조선족의 양 날개로 된다. 그런데 일부 젊은 부모들은 모국어라는 한 날개를 애초에 꺾어버리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정판룡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바로 다문화주의 사상이다. 다문화주의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한다.‘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다원일체의 조화로운 사회이다. 선생은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는 다수자와 담을 쌓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고수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낙후된 상태에서 다수자의 도움만 받을게 아니라 다수자와 적극 교류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존중을 받는 존재로 부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른바 평등을 이룸에 있어서 소수자의 주체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사상을 보다 널리 확산하고 우리 조선족의 피와 살로 되게 하기 위해‘며느리론’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 시집은 왔으되 허구한 세월 친정 생각만 하고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집동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시집어르신을 잘 모시고 남편공대를 잘하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내서 시집마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때라야만 비로소 친정을 도울 수 있고 친정마을과 시집마을에서 모두 사랑과 존중을 받을 수 있다.(정판룡,<<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문제>>,<<정판룡문집>>제2권, 연변인민출판사, 1997년 판.) 우리 조선족의 이중문화 신분을 염두에 둘 때, 또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할 때 정판룡선생의‘며느리론’은 우리 조선족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진로를 가장 형상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에 입각해 정판룡선생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도 금발 머리든 까만 머리든, 파란이든 까만 눈이든 폭넓게 친구를 사귀이었다. 또한 제자를 끝까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그들이 자기의 날개를 키워 중국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훨훨 날아가 자리를 잡게함으로써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연변대학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령토를 넓혀나갔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법, 밤낮 우는 소리만 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면 절대로 다문화사회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허구한 세월 자포자기하고 주류사회에 얹혀사는 존재가 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당당히 지키면서도 총명과 지혜, 헌신성으로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기여를 함으로써 이 공동체의 존경받는 구성원으로 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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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1
  • [연재] '삼국지' 재해석③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앞서 2부 말미에 삼국시대가 열리기 전 전란이 당시 시대배경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시 전란은 모두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크게 나누면 모두 네 가지 전란이 있었다. 환관과 외척의 싸움,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 황건적의 난, 반동탁의 난이다. 앞부분에서 이미 환관과 외척의 싸움을 자세하게 다뤘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주로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을 다루려 한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관료집단은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무관(巫官)이요, 다른 한 부류는 사관(史官)이다. 독자들은 무속인, 무속신앙이란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뭔 뜻일까? 무(巫)란 글자의 뜻은 위 가로는 하늘을 뜻하고 아래 가로는 땅이며 내리 줄은 하늘과 땅을 만나 교감을 이뤄내는 것인데 누가 이 역할을 담당하나? 바로 내리 줄 양 옆에 있는 두 사람이다. 뭘 어떻게 역할을 수행하나? 노래와 춤을 통해서, 즉 가무강신(歌舞降神)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민속종목에 그네뛰기가 있는데 이 그네뛰기 유래를 아는가? 농경사회에서 강수의 양에 따라 풍년과 흉년이 판가름 난다. 오월단오가 되면 파종이 끝나고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는 거국적인 이벤트였다. 진수의 <삼국지> 고구려 편에 의하면 “매월 오월과 시월이면 나라에서 군데군데 크게 모여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國中大會, 連日飮酒歌舞). 남녀 할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머리를 땅에 향했다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발로 땅을 힘껏 밟는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딴따라민족이 된지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적어도 2천년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오월단오에 처녀가 그네 뛰는 것은 여자는 음이고 천신은 양이며 음의 대표자 처녀가 하늘 공종에 치솟아 올라 양신과 결합하면 비를 내를 수 있다는 민속적인 신앙행위였다. 방울을 울리는 것은 처녀가 천신과 교감했다는 것을 대지에 알리는 신호이다. 이 때 여자는 시집갔거나 나이 지긋한 늙은 여인이면 안 된다. 반드시 음기가 왕성한 낭랑 처녀여야 한다. 조선시대까지 기우제 때 거국적으로 300여 명의 무녀(巫女)가 동원되어 속옷을 벗은 채 치마를 벌리고 앞뒤로 가로세로다리를 들었다 놓았다하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춤을 추었다. 무녀들의 음기발산을 통해 양신인 천신이 교감되어 비를 내려준다는 것이다. ‘바람피운다.’는 우리말의 유래.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련다. 이런 행사를 관장하는 관리가 천관(天官)이며 <주례>에 의하면 천관은 힘이 센 관직이었다. 천관이 바로 무관이며 무관은 주로 제사를 관장하는 관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제사행사가 으뜸의 행사였기 때문에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제정일치 시대였다. 이 제사장인 왕을 보좌하는 관료들 다수가 무관(巫官)이며 무관은 당시 정치무대에서 실세였다. 상나라 때까지 귀신의 일이 사람의 일보다 더 중요해서 모든 일에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점을 쳤으니 무관이 얼마나 굉장한 집단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주나라에 이르러 귀신의 일보다 사람의 일이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즉 귀신의 중심문화에서 인간의 중심문화로 전이되는 과정이었다. 요즘 말하는 ‘인문학’은 여러 가지 세상만사가 내포되어 있으나 실제로 인문학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 而遠之).” 뭘 뜻하는가? 귀신중심시대에서 인간중심사회를 구축하려는 사상과 이념이 담긴 말이었다. 당시 공자 같은 선비들(그의 500년 선배인 주공이 물론 인문학의 창시를 열었던 것), 각 학파들의 논쟁을 통해 확실히 인간중심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관직 중에 사관(史官)이란 관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자보다 더 명성이 높았던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노자 선생이 바로 주주사(周柱史)였다. 지금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중앙도서관의 관장을 맡고 있었는데 주나라에서 기둥역할 하는 사람의 일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높은 벼슬자리였다. 잠깐! 사관(史官)이라면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떠올리면서 역사책이나 쓰는 별 보잘 것 없는 관직이 아니냐고 생각하기 일쑤인데 노자가 맡은 사관(史官)이란 관직은 역사서를 쓰는 것이 업무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기록하고 관장하는 관직이었다. 갑골문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일 사(事)와 역사를 뜻하는 사(史)는 같은 글자에서 분리된 것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천하를 제패하고 겸병 전쟁을 벌임에 있어서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어 각국의 왕의 책사를 맡았다. 공자님도 무려 14년 동안이나 어디 마땅한 감투가 없을까 하면서 여기저기 머리를 기웃거렸던 것이다. 장자는 머리 쓰고 사람과 사람이 아귀다툼으로 부대끼는 것이 싫어 관직을 주어도 팽개치고 거지 삶을 살았던데 비해 가장 휘황찬란하게 자신의 뜻을 펼친 선비는 바로 상앙이었다. 위(魏)나라 출신이었던 상앙이 자신의 나라에서는 뜻을 펼치지 못하자 진(秦)나라에 가서 꿈을 펼쳤다. 물론 마지막 인생길은 참혹했지만 이 부분은 논외로 하고 그의 개혁업적 가운데 필자가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관료세습제를 폐지하고 군공에 따라 사회기여도에 따라 간부임명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개혁에 꼽히는 업적 중 하나이다. 당시 주나라 신분은 천자, 제후, 대부, 사인, 서민 등 다섯 계급이었다. 천자가 전쟁을 일으켜 빼앗은 이민족의 땅과 본래 대대로 내려온 토지소유권을 형제, 친인척, 전공이 있는 자들에게 땅을 나눠주고(分封) 제후를 세워 다스리는(建國) 제도 즉 봉건제에 있어서 천자는 천하의 태평을 도모하고 제후는 절대적 세력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에 힘쓰고 그 밑에 대부를 두어 채읍을 다스리는 것을 제가(齊家)라 하였고 대부 밑에 사인(士人)이 있는데 이들 집단은 공부하여 즉 수신(修身)하여 대부를 도와 제가에 힘쓰고 혹자는 대부를 뛰어 넘어 제후의 책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이념이 이렇게 유래된 것이다. 혹자는 제가(齊家)란 한 가족의 집식구를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역사에서의 제가는 대부의 채읍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굳건하던 봉건제 타파에 나선 인물이 바로 상앙이다. 그는 그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는 대부 집단의 기득권을 빼앗고 공에 따른 간부 임명제를 실시하였으니 당연히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고 종당에 가서 편안한 천수를 누릴 수가 없이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상앙의 군현제의 꿈은 진시황이 계승하여 능력에 따른 간부 임명제가 실시된다. 그런데 시황제의 태산에 올라 천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에 입을 나불거렸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변을 당하는 이른바 분서갱유 사건이 있었고 이때 선비들이 고전을 천정에 감추고 땅에 파묻으며 음지에서 연명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 결실은 한나라 무제 때에 이루게 된다. 그냥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동중서(董仲舒)라는 최고 엘리트에 의해 선비들이 출세의 길이 열린다. 동중서는 오늘날의 상식으로 말하자면 능력이 뛰어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무제와 다음과 흥정을 건다. 제국이 천년만년 가려면 법가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만약 법가에만 의지한다면 앞선 왕조 진나라의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도가의 이념은 어떨까? 무위자연을 이념으로 소국을 지향하는 도가이념으로 한나라 초기 재미를 쏠쏠하게 보았으나 황제는 힘이 없고 주변 오랑캐는 자꾸 시끄럽게 집작 거려 위협이 되고 있으니 강력한 제국 건설이 급선무라고 황제를 선동한다. 황제는 들어보니 들으면 들을수록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임자.” ‘흠, 드디어 황제께서 내가 던진 낚시에 코가 걸렸군.’ 동중서는 속으로 ‘쾌’자를 불렀다. 동중서의 주장은 이렇다. 유가의 선비들이 입을 나불거려 시끄럽긴 하지만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란 삼강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강으로 강력한 사회질서를 구축한다면 제국이 오래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황제는 결국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선비들의 출세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군현과 주에 간부를 임명함에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는 ‘천거(薦擧)’제에 의해 선비들이 대거 관직에 등용되어 세상을 주름잡기 시작하였다. 동중서의 덕분에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를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 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에 1,850개의 교실을 갖게 되었다. 아마 요즘 지구촌의 지식분야의 최대 상징인 하버드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 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그놈의 환관들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간부로 등용되고 싶다면 뇌물을 바치라고 노골적으로 대놓고 금품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어 유교적 의식에 고취되고 정상적인 관리 등용문이 가로 막힌 이들은 반환관 운동에 앞장섰다. 환관파와 유생을 주축으로 하는 반환관파의 대립은 '당고의 금(黨錮之禁, '당고의 옥'이라고도 불림)'으로 불리는 2차례의 대탄압으로 청류 지식인(유생들은 자신을 청류, 환관무리를 탁류로 여겼음)들이 관계에서 일소되었다. 그 후 원소가 환관학살에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 자신이 사족가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환관은 유생집단을 관직에서 씨를 말릴 정도로 몰아냈으나 결국 사족가문 출신인 원소에 의해 다시 자신들이 씨를 말릴 정도로 학살당했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기도 하고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당시 시대배경 중 한 축이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11
  • 中 해방전쟁 시기 실패한 미국의 대 중국 침투 전략
    [동포투데이] 중국의 국내 해방전쟁은 중국인민이 부패한 장개석 독재정권을 뒤엎고 자유와 독립해방을 쟁취하는 대 결전이었으며 중국의 두 가지 운명, 두 가지 전도를 가름하는 최후의 대 결전이었다. 이 대 결전 중 중국 국민당정권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컸으며 미국 또한 국민당 정권에 대한 원조를 대폭 늘이기도 했다. 이렇듯 엄준한 정세에 직면하여 중국공산당은 2차 대전 후의 국내 외 형세를 전면 분석, 미국을 두려워하고 미국을 숭배하는 당과 군대 내의 불안심리를 극복하면서 대 미국 투쟁의 책략에 대해 심중하게 정하였으며 일련의 유력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될수록 억제시켰으며 최종 미국이 국민당정권에 실망하여 중국 내전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중간 지대> 형성과 <양대 진영> 이론으로 사상을 통일 냉전초기, 미소가 전시 군사실력 균등의 기초에서 건립한 얄타 체계는 실질상 유럽의 정치판도와 미소의 세력범위를 다시 획분하였다. 당시 소련은 종합실력은 미국보다 한참 뒤 떨어졌기에 극동에서 미국과 타협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전승할 수 있겠는가를 의심하면서 장개석이 곧 이겨서 중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은 바로 이런 국제적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자 당시 국제형세에 대해 확실한 안광을 가진 모택동은 <중간 지대(中间地带)>와 <양대 진영(两大阵营)>의 이론을 제기, 이것으로 전 당과 전 군의 사상을 통일시켰다. 1946년 8월 6일, 모택동은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의 담화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광활한 지대가 가로막혀 있다. 여기에는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허다한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 그리고 반 식민지 국가들이 있다. 가령 미국반동파들이 이런 국가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기 전에는 절대 소련을 진공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모택동은 이 <중간 지대> 이론으로 반소반공을 외치는 미국의 직접적인 목적은 “반소의 구호 아래에 발광적으로 미국 노동자와 민주인사들을 진압하는 것과 대외확장의 일체 대상국으로 하여금 모두 미국의 부속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폭로하면서 미소 양대 진영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역량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냈던 것이다. 모택동은 <중간 지대> 이론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지어는 <양대 진영> 사이의 평행제약 외교를 신봉, 하지만 미소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 지지자였으나 미국은 도리어 중국혁명운동의 반대자였다. 그리고 중국의 정치형세가 격렬하고도 근본적인 변동이 발생할 시기마다 이런 본질적인 구별은 각 일방의 정치적 연변(演变)의 추향을 결정하군 했다. 미국정부가 장개석 정부를 부축하는 정책을 실행하기에 냉전이 폭발하자 모택동은 미국과 관계개선의 노력을 포기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은 외교정책을 제정하는 관건적인 단계에 들어 미국은 중국의 내부 사무를 간섭할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간파, 반드시 <양대 진영의 한쪽에 쏠리는(一边倒)> 외교 총 방침을 실행하기로 했다. <일체 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란 전략 논단으로 공미심리(恐美心理) 극복 항일 전쟁 후기와 항일전쟁 이 금방 끝난 뒤 미국정부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판단은 “미국은 유럽에서는 그리스를 놓고 영국과 쟁탈전을 펼칠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쟁탈전을 벌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인민해방군이 남경과 상해와 같은 대 도시를 점령하면 미국은 필연코 간섭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개입은 결정적인바 다르다면 강경개입인가 아니면 <연한 개입>인가 그리고 그 개입 역도의 크고 작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미국이 생각하는 2차 대전 결속 후의 세계판도 중 중국은 의연히 민국시기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고자원 유출지구에 농부산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공업산품의 시장 및 원자재 생산지로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피라미드 중 중국은 반드시 최하층에 위치해 있으면서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의 욕망은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의 동방전선을 무너뜨리고 독립지위를 수립하는 것이고 아울러 자주적으로 현대화건설을 진행하는 것으로 피라미드 최하층 같은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추구하는 전략 목표와 매우 심각하게 모순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국은 악랄하게 중국공산당의 집정을 반대해 왔으며 더욱이는 공산당을 대표로 하는 민족독립의 추구와 국가발전의 염원까지도 한사코 반대해 왔다. 이는 항일전쟁 시기와 전후 초기의 태세가 이것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전쟁 상대는 몹시 강대했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은 경제 및 군사 실력이 극도로 증강되었고 과학기술 역량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진정한 세계 제1의 군사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1946년 중국의 전면 내전이 폭발한 후 모택동은 “일체 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란 이론을 제기, 전략상에서 적을 무시하면서 적과 날카롭게 맞서 싸울 것을 전국인민들에게 호소하였다. 미국과 장개석의 압력과 무리한 요구 앞에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양보하여야 한다. 하지만 주요한 정책은 양보가 아니라 투쟁이다. 만약 우리 당이 상당한 양보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재차 무리한 압박과 요구와 두 번, 세 번이 되는 투쟁을 해야 하고 결과는 더욱 큰 양보를 해야 할 것이며 만약 견결히 투쟁하는 정신마저 없다면 결과는 곧 더욱 나빠지기 마련이다…”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열린 국공담판에서 만난 장개석(가운데)와 모택동(오른쪽).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한 주요한 수단은 물자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국공 담판이 진행되던 1946년 상반년만 해도 미국정부가 국민당정부에 제공한 각종 물자는 그 가치가 13.5억 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중국 내 전면 내전이 폭발한 후 미국정부는 또 국민당 군에 131척의 함정을 지원하였으며 일본이 투항한 후부터 1946년까지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내전 전선으로 수송한 국민당 군대는 도합 54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정부의 통이 큰 부축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정부는 부패했고 국민당 군대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투르먼 정부의 대 장개석정부 지원은 미국 내 여론의 물매를 맞았다. 한편 인민해방군은 방방곡곡에서 승전의 첩보를 올렸으며 특히 1948년부터 1949년의 5개 월 사이에 인민해방군은 전략적 대 결전을 강행, 연속 요심 전역, 회해 전역과 평진 전역을 펼쳐 5개 월 내 도합 154만 명의 국민당 군을 섬멸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부득불 국민당정부가 군사상에서의 실패가 이미 기정사실로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주중 미국대사 존 레이튼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1876-1962)가 1948년 미 국무장관 마셜한테 보낸 전보문에서 “우리는 매우 원하지 않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당 현 정부의 붕괴는 조만간 피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형식으로 반영되었다. 그 뒤 미국정부는 국민당정부에 대한 원조의 수량과 차수를 줄이면서 대 중국 정책을 개변하기 시작했다. 한 방면으로 미국은 여전히 매 주 400만 달러 가치에 달하는 군수품을 국민당정부에 제공하는 한편 다른 한 방면으로는 장개석의 일부 요구에 대해 거절하면서 다른 출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1월 2일, 미국정부는 국민당 군대에 실시하던 군사훈련을 정식으로 중단한다고 선포, 동시에 주중 미국 연합 군사고문단 단장 파다비를 귀국시켰으며 1월 27일에는 주중 미국 군사고문단을 전부 철수한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장개석을 두고 더 이상 이상적인 인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대 중국 이익은 이미 성사보다는 망치는 일이 더 많다고 인정하였다. 그 뒤 미국은 <중도환마(中途换马)>를 목적으로 국민당의 2인자 이종인과 접촉, 최종 장개석을 압박하여 은퇴하게 하고 이종인더러 대권을 잡게 했다. 헌데 유감스러운 것은 미국의 부축 하에 대권을 잡은 이종인이었건만 그 역시 국민당의 독재정치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장개석 또한 진짜 은퇴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어 1949년 봄에 북경에서 있는 국공 양당의 평화담판은 철저히 파탄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중국 내정 개입>의 목적이 실패로 돌아가자 백서를 발표하여 책임을 국민당 정권에 떠밀면서 더 이상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했다. 이렇게 되어 중국공산당은 중국내정에 개입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억제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취득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10
  • [연재] '삼국지' 재해석②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삼국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먼저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실제로 <삼국지>는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을 그리고 있긴 한데 역사지식이 없으면 이해가 어렵다. 그래서 당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삼국지> 재해석 제2편으로 ‘한나라 말기 환관과 외척의 권력 다툼’을 잡았다. 여느 왕조가 다 그러했듯이 왕조말기에 천하가 대혼란 상태에 빠져 있긴 했으나 한나라 말기 시대배경은 굉장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중국역사에서 통일제국의 문을 연 것은 진(秦)나라이지만 천년만년 이어가리라던 진 왕조는 15년 만에 홀딱 망해버렸다. 진 제국이 망하고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유방과 항우의 땅 따먹기 게임인 초와 한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자가 되어 한나라를 건립한다. 한나라는 서한과 동한을 전후하여 거의 400년 가까이 수명을 유지한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화폐, 도량형, 차바퀴 등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15년이란 세월이 너무 촉박하여 완전한 통일은 한나라에 이르러 이뤄졌던 것이다. 중국문자를 한자, 중국말을 한어, 중국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왕조라는 개념은 왕족혈통의 세습제를 의미한다. 유씨가 나라를 세웠으면 유씨 혈통이 황위(皇位)를 이어받는 것이 바로 세습왕조이다. 그런데 문제가 복잡하다. 황제가 아들이 있는데 너무 어려 황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황제로 등극시키는데 아들이 없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이 경우 붕어한 황제의 친동생을 황위에 앉히느냐, 조카 중 서열을 따져 앉히느냐는 쟁투가 벌어진다. 또는 종실의 번왕(藩王)들 중에서 후계자를 찾기도 하였다. 유씨 가문의 왕조를 이어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한의 황제 13명 중 10명이 마흔 살도 못 살았고 4명은 아들이 없었다. 또한 제위를 계승할 때 11명이 20살 이하였으며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가 19살의 장제(章帝), 가장 어렸던 이가 100일도 안 된 상제(傷帝)였다. 충제(冲帝)는 겨우 2살, 질제(質帝)는 겨우 8살이었다. 황제가 나이 어려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그 어미인 태후가 섭정한다. 태후가 섭정하게 되면 정권은 자연스레 외척이 잡게 된다. 한 화제(和帝) 때는 두태후(竇太后)가 국정을 맡고 두헌(竇憲)이 정권을 잡았고, 한 안제(安帝) 때는 등태후(鄧太后)가 국정을 맡고 등즐(鄧騭)이 정권을 잡았으며, 북향후(北鄕候) 때는 염태후(閻太后)가 국정을 맡고 염현(閻顯)이 정권을 잡았다. 또 한 환제(桓帝) 때는 양태후(梁太后)가 국정을 맡고 양기(梁冀)가 정권을 잡았고 한 영제 때는 두태후가 국정을 맡고 두무(竇武)가 정권을 잡았으며 소제(少帝) 때는 하태후(何太后)가 국정을 맡고 하진(何進)이 정권을 잡았다. 이렇듯 태후가 여섯 번 국정을 맡고 역시 여섯 번 외척이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태후가 섭정하고 외척이 정권을 잡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선 황제가 기분이 나쁘다. 어미와 외삼촌한테 휘둘리다 보니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 없게 된다. 이 문제는 황제가 나이를 먹어 성인으로 향해 성장해가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즉 황제는 자기주장을 세우려는데 어미와 외척이 양보를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권력의 맛이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는 어미와 외척을 제거하려 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한 허수아비가 되기 때문이다. 권력 구조에서 세력이 없는 어린 황제는 누구한테 기대야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바로 환관 무리다. 밤낮으로 황제 곁에 붙어 있는 것은 환관들이이니까 그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환관의 역사는 지구상 중국만의 특이한 현상이었다. 물론 이웃나라인 조선에도 환관역사가 있긴 하지만 ‘흉내’를 내는데 그칠 뿐 중국처럼 환관이 역사를 바꿀 만큼의 세력으로 역사무대에서 쥐락펴락하지는 못했다. 진 시황 때 환관 조고는 황제가 궁녀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장소에서 한쪽 모퉁이에서 쪽걸상에 앉아 지켜볼 정도로 하루 12시진(지금의 24시간)을 황제에게 붙어 있었다. 황제가 죽자 결국 조고가 천하를 쥐락펴락하였고 심지어 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여 장자를 밀어내고 둘째 호해(胡亥)를 황위에 앉힐 만큼 세도를 부렸던 것이다. 그 유명한 사슴보고 말이라고 하는 ‘지록위마’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조고였다. 진나라가 15년 만에 망한 이유 중에 환관 조고의 탓이 크다고 필자는 본다. 당나라가 전성기를 달리던 때 당 현종은 양귀비한테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하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황제의 옥쇄를 쥐고 국정을 맡아보기까지 했다. 명나라 때는 10만의 환관도 모자라 조선에서 빌려 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환관은 생리상 불구로 남자의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권력과 재산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 왔고 눈에 밟히는 가족(처자)이 없기 때문에 권력다툼에서 마음이 독하다는 속설이 있다. 어찌되었든 환관들은 황제의 신변에 늘 머물고 있기 때문에 황제의 믿음을 얻고 있었다. 한 순제(順帝) 때 외척 두목인 염현을 환관들이 황제와 논의도 없이 자기네들이 알아서 죽였던 것이다. 한 환제의 어미 양태후는 황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독살했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28살이 되도록 국정을 맡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손을 써야 했다. 그런데 외척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황제는 비밀모의를 화장실에서 꾸밀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비밀모의는 성공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외척 양기 부부는 자살했고 양씨 가문은 전부 참수되어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양기와 관련 있는 관리 300여 명을 파면하고서야 정권을 바로 잡을 수가 있었다. 2015년 12월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윤회 문건’ 파동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한 자들을 가리켜 ‘십상시’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 ‘십상시’의 유래가 바로 한나라 영제(靈帝) 때에 환관(宦官) 장양(張讓)·조충(趙忠)·하운(夏惲)·곽승(郭勝)·손장(孫璋)·필남(畢嵐)·율숭(栗嵩)·단규(段珪)·고망(高望)·장공(張恭)·한리(韓悝) 등 10인을 가리키는데 영제는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어 전혀 통치 능력이 없었으므로, ‘십상시’는 영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주색에 빠지게끔 만들고, 하진(何進)의 누이를 바친다. 장성한 뒤에도 십상시의 농간에 놀아나 정치를 돌보지 않자,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그 중에서도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黃巾賊)의 세력이 가장 컸고 황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십상시’는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진다. 십상시가 멋대로 천자의 칙명을 내리자, 하진이 누이의 세력을 빌려 ‘십상시’와 권력을 다투게 되고, 하진이 제후(諸侯)들을 불러 모아 ‘십상시’를 제거하려 하다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된다. 남을 물에 빠뜨리려다가 자신이 물에 빠진 격이었다. 환관무리와 외척 사이 권력투쟁에 ‘보리알’처럼 끼어든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제를 지키던 근위군의 두 번째 인물인 원소이다. “장군이 천하를 위해 그 화근을 제거하신다면 틀림없이 길이 이름을 남길 겁니다.” 원소가 환관을 모조리 죽이라고 하진을 선동한 말이다. 그러나 하진은 망설였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 돼지백정이었던 하진은 누이동생이 황후가 되는 바람에 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하진이 환관무리를 몰살할 배포도 그럴만한 간도 크지 못했다. 하진의 누이동생 하태후도 환관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그 이유는 환관들한테 빚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녀가 유협의 생모 왕미인을 독살했을 때 환관들이 황제에게 사정해 겨우 재난을 모면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하태후는 이렇게 말했다. “환관이 황궁을 관리하는 것은 전래의 법이자 제도인데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하물며 선제가 막 붕어하셔서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노골적으로 사대부의 편에 서겠습니까?” 태후가 허락하지 않자 하진은 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권력다툼에서 과감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 하진은 결국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진의 죽음은 일개 대장군의 개인의 목숨이 아니라 사대부 집단과 군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하진이 피살된 후 혼란에 빠진 낙양성에서 하씨와 원씨 두 가문이 각기 군사를 일으켰는데 원소가 더 적극적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성 안에서 환관들을 색출해 죽였다. 수염 안 난 남자만 보면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많은 젊은이가 부득이하게 바지를 벗어 보여야 했다. 마치 나치 독일에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가리는 방법인 ‘바지 벗기 증명’과 비슷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환관 중에도 선행을 베푼 환관들도 있었고 기타 좋은 일을 남긴 환관도 있었건만 물불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하여 죽은 자가 모두 2000여 명에 달했다. 환관도 죽고 외척도 죽었다. 이 두 집단의 다툼은 장장 90여 년간 벌어졌다. 매번 외척의 패배로 투쟁이 끝났지만 이번에는 양쪽 다 파멸되었다. 문제는 어린 황제였다. 외척도 환관도 모두 죽었으니 누구에게 기대야 하나? 천하지존이었던 대제국의 천자가 졸지에 몸도 의탁할 곳 없는 구차한 ‘난민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때 원소의 부름을 받고 성으로 향해 진군하던 서량(西涼)의 호족 동탁(董卓)이 칠흑 같은 야밤에 황하의 강 언덕에서 우연하게 피난길에서 방황하던 황제 변(辯)을 발견한다. 이 발견이 동탁에게는 로또를 맞은 셈이었다. 하늘이 준 기회를 동탁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황제를 모시고 입성하여 궁정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게 된다. 이때부터 천하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고 지방 호족과 권력의 제3의 세력인 사족(士族) 집단 및 군벌들의 군웅할거의 대전란이 시작된다. 여기까지가 한 나라 말기 시대배경이고 삼국시대가 열리는 서막을 알리는 ‘종소리’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8
  • 동포정책과 이민정책
    ●김도균 우리 민족처럼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 경제적 심지어 정치적 이유로 조국을 등지고 전세계 곳곳에 흩어져 부평초 같은 삶을 사는 동포가 750만 명에 이른다. 실무상 동포는 재외국민과 외국국적 동포로 나뉘는데 이는 국적 기준이다. 이런 배경으로 우리에게 동포정책은 각별한 관심과 포용 나아가 활용이 필요한 데 해외거주 동포는 외교부에서, 국내거주 동포는 법무부에서 어떤 경우는 서로 하겠다고 나서고 어떨때는 서로 자기 부처 일이 아니라고 우긴다. 법무부만 해도 동포업무를 전담하는 '외국적동포과'가 잠깐 생겼다가 사라지고 지금은 '체류관리과'에서 담당자 2명이 동포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국내 동포정책이라야 비자정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자정책 하나 하나에 동포사회가 일희일비 하였고, 그나마도 출신국 동포간 차별과 불편으로 점철된 것이 동포정책의 현실이다. 동포들의 출신국에 따라 비자발급을 달리하는 재외동포법이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나서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의 지시로 방문취업제를 시행한지도 14년이 지났지만, 동포들의 불편은 여전하고 최근에는 오히려 동포들에 대한 비자정책이 역행하고 있다. '이민동포청'을 만들어 동포라는 자산을 이민정책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활용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정치인들 표 계산과 정부부처의 이해관계를 뛰어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여러번 입법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현실 대안으로 법무부에 동포정책을 전담하는 '외국적동포과'를 부활시키고 동포들의 비자체계라도 서둘러 합리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외국 국적의 동포들을 이민정책의 틀 나아가 남북경협 분야에서 활용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음에도, 동포를 정부 부처의 업무활용이나 정치적 거래 대상쯤으로 치부하여 정책 후순위에 두는 것은 너무나도 국익에 반하는 행위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0-08-08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②
    ▲진의와 유명 영화배우 김염 [동포투데이] 이혼 후 진의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모든 정력을 쏟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맹세는 어디까지나 맹세에 그쳤고 실행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의의 그러한 맹세는 조선인 남자 김염(金焰)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렸다. 김염(원명: 김덕린) ㅡ 1910년 조선 서울에서 태어난 김염은 1912년 한의사이며 독립운동가인 부친한테 지명 수배령이 떨어지자 가족을 따라 중국 흑룡강성 치치할시에 이주, 1919년 부친이 사망되자 상해에 있는 고모한테로 가서 의탁했다. 그 뒤 고모가 천진으로 이주하자 김염은 천진 남개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혁명사상을 접수하게 되었고 남개 중학교를 졸업한 후엔 홀로 배에 올라 다시 상해로 향발, 상해에서 그는 소설도 써보고 영화회사의 잡부로 일하기도 하면서 유랑걸식 생활을 하다가 1934년 영화계에 입문했다. 영화 <대로(大路)>에 출연하면서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과시했으며 뒤이어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 <신도화선(新桃花扇)>, <들장미(野玫瑰)>와 <장지능운(壮志凌云)> 등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1930연대부터 상해의 <영화황제>로 입지를 굳혔던 김염이었다. … 이러한 김염이었으니 진의한테 있어서 우상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기실 진의가 김염을 알게 된 것은 1941년 김염의 생일연회에서였다. 당시 진의한테 있어서 김염은 우상같은 인물이었으나 둘 다 가정이 있는 상황이어서 진의는 김염에 대해 별다른 감정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김염과 진의가 선후로 상해로 다시 왔을 때는 이미 둘 다 가정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는 이런 짤막한 스토리도 있었다. 당시 김염과 진의는 영화 <망망한 대해(海茫茫)>를 함께 촬영하면서 함께 있을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홀아비로 된 김염은 자주 진의 집에 가서 진의의 어머니와 언니 등과 함께 마작도 두고 한담도 하고 음식도 얻어 먹 군 했다. 그럴 때마다 진의보다도 진의 어머니가 김염을 더 반겨 맞 군 했으며 맛나는 것을 감췄다가는 김염이 올 때마다 내놓군 했다. 그러고는 김염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내 딸이 자네를 좋아하는 것 같아. 자네 생각은 어때?”라고 하면서 김염의 속마음을 떠보기도 했다. 이러자 진의는 “엄마,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군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진의는 혼자서 전 가정의 11명 식구들의 호구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니 결혼보다는 일심전력으로 영화나 희곡에 출연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의 역시 여인이었으며 더군다나 사랑을 알고 사랑을 갈망하는 젊은 여인이었다. 거기에 김염같은 대 스타가 나타났으니 흔들리고 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기, 진의는 홍콩에 가서 자주 연예활동을 하군 했다. 그러면 홍콩의 거리에는 김염도 나타 나군 했다. 하긴 김염의 영화계 동료들이 홍콩에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염의 진정한 홍콩행 목적은 진의와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의 동료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김염의 옛 동료 오조광(吴祖光)이 불쑥 진의 앞에 나타나더니 “당신들은 왜 아직도 결혼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오조광은 더욱 열성스레 앞뒤를 뛰어다니며 동료들을 선동, 나중에는 문예계의 거장 곽말약까지 설복하여 두 사람 결혼의 증명인으로 나서게 했다. 이렇게 1947년 25세의 진의와 37세의 김염은 결혼에 올인하였고 곽말약 선생을 청해 결혼 증명인을 맡게 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7
  • 용이 살던 마을 와룡동
    ●김호림 창동학교는 8.15광복을 맞은 후 다시 와룡동에 부활한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서쪽 산비탈의 옛 터를 버리고 마을 북쪽의 평지에 따로 학교 건물을 세웠다. 김동욱옹은 어릴 때 새로 지은 이 창동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학교를 내놓고 또 과외처럼 즐겨 다니던 곳이 있었다. 그와 또래들은 예배를 보는 날이면 학교 북쪽에 있는 교회당으로 반달음을 놓았다. “전 씨 성의 집사가 우리 아이들을 모여 놓고 재미있는 옛말을 들려줬지요.” 교회의 전 집사는 조선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일본 전함을 물리치던 이야기 등을 구수하게 풀어놓았다고 한다. 서적이 금처럼 귀하고 별다른 문화생활이 없었던 시골에서 정말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과 같았다. 조선인 이민들의 최초의 민족계몽운동과 반일운동은 이처럼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현되였던 것이다. 간도에서 선교활동은 조선인 간민들의 대량 이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는 북간도에 선교사와 전도자를 파송, 1906년 광제암교회를 설립하였다. 뒤미처 용정의 기독교인이 간도의 조선인 전도를 위해 멀리 함경도 원산까지 가 기독교 서적을 구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도가 본격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7년 남감리회는 이화춘과 이응현, 캐나다 장로회는 김문삼을 간도에 파송한다. 이화춘은 와룡동교회, 이응현은 모아산 교회를 설립하며 장로회는 용정교회를 설립하였다. 모아산은 와룡동 골짜기에서 바로 정남쪽 방향으로 보이는 둥그런 산이다. 1915년경 간도에 36개 교회가 개척되며 또 교회의 주도로 많은 학교가 세워진다. 간도 지역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연변 교민회”(훗날 국민 회로 개칭)는 기독 인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국민회를 통한 기독인들의 반일운동은 군자금 모금, 독립군 양성 등으로 이어졌다. 바로 창동 학교에 국민회의 외곽단체인 간도 대한 청년회 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의 많은 교원과 학생, 졸업생들은 철혈 광복단에 참가하여 희생적으로 싸웠다. 1920년 용정 선바위 부근에서 조선은행권 15만 원을 탈취한 “15만 원 탈취사건”의 골간 임국정, 최봉석, 한상호 등 반일 지사들은 모두 와룡동 출신이다. 와룡동에서 교세는 연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8.15광복 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미구에 철거의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김신숙(1938년 출생) 노인이 와룡동으로 시집을 오던 1956년에만 해도 와룡동 교회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때 김신숙 노인은 바로 와룡동 교회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목사가 그들의 결혼 주례를 선 것은 아니었다. “그때 교회는 이름뿐 이였지요. 벌써 예배를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수십평 크기의 교회건물은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김신숙 노인의 시집은 마침 길 건너 바로 서쪽에 있는 이 널찍한 교회당을 예식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이 발길을 멈춘 곳은 와룡동의 제일 북쪽이었다. 거기에는 고층건물의 휴양소가 땅을 박차고 일어서고 있었다. 이 휴양소 앞마당의 동쪽 귀퉁이가 바로 교회당 옛 터였다. 옛 터에는 시공현장의 철근과 나무쪼각따위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와룡동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와룡동교회는 그렇게 역사의 흔적을 서서히 지워가고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민흥촌의 직속 마을이였던 과수마을도 어느덧 집단기억에서 소실되고 있었다. 과수마을은 일명 5대 마을로 서쪽의 고개 너머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예전에 동쪽의 와룡동과 짝을 맞춰 와호동(卧虎洞)이라고 불렸다는 속설이 있다. 이쯤 하면 누군가는 대뜸 와룡동과 와호동을 두고 좌청용이요, 우백호요 하면서 풍수설을 들먹거리겠지만 실은 이 지명이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용호상박(龙虎相搏)의 기세를 은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와룡동 마을에 영웅호걸이 많이 배출되였다는 것이다. 옛날의 샘물은 와룡동의 동쪽 골짜기에서 예나 제나 변함없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샘물을 마시던 용은 단지 지명에 화석으로 외롭게 남아있을 뿐이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6
  • [이슈 분석]체육강국 중국, 왜 축구만 약한가?
    ●리병천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가? 정말로 팬들의 씁쓸한 우스개처럼 메시가 될 인물이 시골에서 밭을 갈고 있기 때문일가. 중국축구가 아직도 부진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해본다. ◆중국, ‘체육강국’으로 우뚝 서다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 중국은 성공적 올림픽 개최와 세계 최강 미국을 꺾고 종합 1위를 달성하는 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올림픽 역대 종합순위를 살펴보면 각국의 국력과 세계 질서의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 1940년대 이전에 프랑스, 영국, 독일이 각각 한차례씩 종합 1위를 차지한 적이 있고 1948년 이후 대회부터는 미국과 소련이 종합 1위를 양분했으며 소련 붕괴 이후 1996년 이후는 미국이 종합 1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메달수가 국력을 직접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2008년 당시 중국은 금메달수에서 51대36으로 미국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종합 1위를 차지했고 종합 1위의 이 막강한 상징성은 중화민족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작동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차이로 종합 2위를 하면서부터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는 종합 1위를 차지해 이미 세계의 강자가 됐음을 보여줬다. 비록 중국은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는 2, 3위를 기록, 종합 1위는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세계적 체육강국임은 증명됐다. 당대 스포츠에서나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독주에 유일하게 도전장을 내고 있는 중국이다. ◆왜 축구에서만 유독 두각을 드러내지 못할가? 지난 7월, 국제축구연맹이 발표한 세계축구 랭킹에서 중국은 세계 76위, 아세아 9위를 기록했다. 일본, 한국, 이란 등 전통 강호들은 물론 카타르, 이라크 등 나라들에도 밀리고 있다.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서 중국은 2승, 1무, 1패를 기록, 필리핀과 승점은 7점으로 같지만 골 득실에 앞서 간신히 조 2위를 유지, 수리아(4승, 승점 12점)와는 어느덧 승점 5점 차로 벌어지며 최종예선 진출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11월 U-19팀은 26년 만에 아시아축구연맹 U-19 챔피언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근래 중국축구가 각 대회에서 보인 성적은 그야말로 암울, 그 자체이다.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지금까지도 제자리 걸음, 아니 후퇴를 하고 있을가? ◆‘한 자녀 정책’의 부작용 중국은 198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인구억제를 실시했다. 바로 ‘한 자녀 정책’이다. 축구가 조직력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개인 기량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탁구나 체조 등에서 중국이 세계 최정상을 달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11명이 하나로 묶여 움직여야 하기에 누구 한명의 기량으로 승부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또 80년대 이후 출생한 자녀들에 대해 부모들은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선수가 돼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축구에 대한 인식하에 부모들이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축구를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또 한 자녀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짙어지게 됐고 축구와 같이 조직력을 요소로 하는 종목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다. ◆젊은 선수들의 프로의식 부재 중국 프로축구리그는 자금적인 면으로만 볼 때 세계 5대 리그중 하나라고까지 할 수 있다. 최근 몇년간 거액의 투입을 해오며 외국인 용병들에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 그 지명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토종 선수들의 실력은 리그 수준과는 왼전히 동떨어져 있다. 젊은 선수들이 외국 리그에 대한 도전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국내에 안주한 것 역시 높은 년봉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험한 길을 가지 않아도 엄청난 년봉이 보장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축구의 자국내 인기와 대우는 좋아졌지만 자국 선수들의 성장에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 최근 몇년간 무수한 자국 유망주들을 유럽무대로 진출시켜 급격한 기량 향상을 일궈낸 것과 달리, 중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은 무뢰(에스파뇰) 등 일부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고 성공 사례도 부족하다.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같은 부유한 중동팀들이 겪었던 문제처럼 현재의 중국 프로 선수들은 높은 몸값과 스타대우를 받고 있는 자국리그에서의 성공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 선수들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도 팀플레이와 높은 전술 이해도를 요구하는 현대축구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중국축구가 아시아에서조차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문제점들을 감지한 중국축구협회는 최근 거품 빼기에 나섰다. 슈퍼리그에 년봉 상한제를 도입해 국내선수 년봉 상한을 1200만 위안으로 규정했다. ◆공격형 용병들 국내선수 발전 공간 점령 근래 중국 프로축구에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몰려들면서 국내 공격수들이 설자리가 없게 됐다. 이는 그대로 축구 유망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슈퍼리그, 갑급리그 각 팀들을 살펴보면 공격수들은 전부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쓰고 있다. 국가팀 역시 전방에 엘케손 등을 귀화시켰다. 때문에 젊은 유망주들도 공격수보다는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기 위해 훈련한다. 엄청난 재부를 상징하는 프로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공격수보다는 수비수가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젊은 선수들이 국내에서 공격수로서는 프로 무대의 경쟁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헐크, 자하비 등 세계급 용병들보다 잘할 수 없다면 그냥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는 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계속 중국으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중국축구의 공격수 부재는 앞으로도 더 심해질 것이다. 어쩜 메시와 같이 천성적 공격수 자질을 갖춘 국내 유망주가 이미 헐크와 자하비 등 세계급 공격수들 때문에 수비수가 돼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체계적으로 축구팀 만들기 위한 인내심 결핍 세계의 그 어느 프로리그든 경쟁은 치열하다. 하지만 중국리그에서의 경쟁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심각하다. 국내 구단들은 감독을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없다. 대기업이 축구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인내심이 극히 부족하고 성적에 따라 감독을 갈아치우는 게 전통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들이 전술실험을 할 수도 없고 새로운 선수에게 기회를 줄 수도 없다.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최전방에 배치해놓고 그들의 능력을 믿으면서 나머지 선수들은 안정적인 수비를 하는 것 뿐이다. 때문에 국가팀에서도 자유롭게 실험하고 도전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가 공인하는 스포츠 강국이다. 인구 14억의 거대한 인적자원을 배경으로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초강세를 보여왔다. 때문에 왜 축구에서 만큼은 ‘중국산’이 전혀 통하지 않는지, 중국축구협회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중국축구는 언젠가는 국력처럼 세계적 최강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주어진 숙제가 너무도 많아 보인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6
  • [연재] '삼국지' 재해석①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지(志)는 역사를 의미한다. 전국지(全國志)는 전국의 역사이고 지방지(地方志)는 지방의 역사이다. 중국에는 각 지방마다 모두 자체의 역사를 기록한 지(志)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한 책을 <삼국지>라 부르는데 <삼국지>는 본래 진(晉)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진수(陳壽)가 지은 사서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명나라 소설가 나관중의 삼국시대 펼쳐진 이야기를 소설화한 <삼국연의>도 <삼국지>라 부른다. 물론 <삼국연의>가 <삼국지통속연의(三国志通俗演义)>의 줄임말인데 ‘삼국지’에 통속연의를 붙인 것은 사서가 아니라 진수의 <삼국지>를 참조하여 이야기 식으로 풀어서 문학적 장르로 창작한 소설이다. 때문에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부르면 진수의 사서인 <삼국지>와 혼동되고 한란이 조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부르는 것이 너무 일반화되고 너무 보편화 되었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삼국지>라 칭한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삼국지>의 저자 나관중은 중국 원말·명초의 소설가 겸 극작가로서 강담(講談)의 이야기책을 기초로 해 구어체 장편소설을 지은 선구자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및 시내암(施耐庵)과의 공저인 <수호지(水滸誌)>의 2대 걸작을 비롯하여 <수당연의(隋唐演義)>,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평요전(平妖傳)> 등의 작품이 있다. 나관중의 이 여러 작품 중에서 <삼국연의>가 후세에 가장 많이 알려졌고 가장 유명해졌다. <삼국연의>는 오승은의 <서유기>, 시내암의 <수호전>, 조설근의 <홍루몽>과 함께 중국 4대 명작(역사소설)으로 꼽히며 연대서열을 따지자면 단연 가장 선배 격이다. 현재 중국에는 이 4대 명작을 연구하고 밥 먹고 사는 학자가 1만여 명에 이른다. 그만큼 이 4대 명작이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이 4대 명작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가? 아무리 대단한 석학이라도 <홍루몽>을 다 알고 읽는 학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물론 기타 3대 명작의 난의도가 <홍루몽>에는 못 미치지만 역시 다 알고 읽는 학자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3대 명작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것이 <홍루몽>이라면 가장 대중에게 많이 읽힌 것은 <삼국지>이다. <삼국지>는 중국에서는 물론이고 이웃나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소설이다. 이 두 나라에서는 <삼국지>가 가장 많이 읽혔을 뿐만 아니라 만화로 개작하고 게임소재로 사용하여 벌어들인 돈이 한국에서는 연간 수 천 억, 일본은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조(兆)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듯 유명한 소설에 대해 그 내용을 품평하기 전에 이 소설이 탄생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자못 의미가 크다고 생각되어 중국문학사를 한 번 여행해 보기로 하자. 문자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기록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자가 생겨난 것은 기록을 남기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예를 들어 농사를 지었는데 얼마 수확했고 얼마 먹어야 하고 얼마 남겨서 재생산에 사용해야 하는지, 농사는 사계절의 변화뿐만 아니라 수시로 일어나는 천재지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자로 기록해 놓으면 앞으로 시행착오를 덜 겪고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농경의 발전에 필요했던 문자는 잠차 인간의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문화적인 삶에 사용되기 시작한다. 인간의 문화적인 삶을 표현하는 문학작품은 대체로 시, 수필, 에세이, 소설 등 장르가 있는데 이 가운데서 시가 가장 ‘선배’였다. 왜냐하면 시는 노래가사이기 때문이다. 시는 최초로 제사 시 주술사(呪術詞)였고, 남녀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노랫말이었다. 중국 최초 문학작품은 <시경>이며 그 작품들은 다수가 사랑 타령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노래가사였다. 시에 비해 소설은 가장 늦게 세상의 빛을 본 막내였다. 시와 소설의 ‘나이’ 격차는 무려 3천여 년이나 되니 소설은 시에 비해 까마아득한 후배이다. 소설이란 장르의 탄생을 알려면 먼저 문화 전성기라 불리는 당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국에는 본래 종교가 없었다. 굳이 외래 종교와 어깨를 겨루기 위해 억지로 종교라는 라별을 붙이자면 유교와 도교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종교’는 미래의 삶, 즉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그래서 신앙이 부족했던 중국인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은 외래종교가 바로 불교였다. 불교가 중국 문을 두드린 것은 후한시기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이 된다. 위·진남북조시기에 탄압받다가 당나라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는다. 당 태종 때에 삼장법사가 서천(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 와 중국에서의 불교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다. 중국역사에서 유일한 여황이었던 무측천은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가축도살금지령까지 내릴 만큼 독실한 불교도였다. 여황은 자신이 불교를 좋아하다 보니 전국에 불교를 대중화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불교의 경전은 매우 어렵다. 스님들의 염불은 그들만이 알아먹을 뿐 일반 민중은 이해불가다. 그래서 불교를 대중화하려면 불교계가 일대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 불교를 대중화하는 그 변혁이 우리말로 말하면 바로 ‘야단법석’이다. ‘야(野)’는 도시 변두리 빈 공터이고, ‘단(壇)’은 제단 단이며 공연무대이고, ‘법(法)’은 불교를 뜻하고, ‘석(席)’은 불법을 전파하는 자리이다. 야외에 공연무대를 설치하여 불경을 강연하는 것이 바로 ‘야단법석’이다. 본래 산속의 절간에서 염불하던 스님들이 민중 속에 들어가 ‘연예인’이 되는 것이다. 즉 어려운 불경을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민중에게 이야기 식으로 풀어서 귀에 쏙쏙 들어오게 강연하는 것이 바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이 ‘야단법석’이 중국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일반용어가 되지 못한데 비해 한반도에서는 자주 쓰는 일반 어휘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어찌 된 영문일까? 원효 스님의 덕분이다. 우리말 ‘야단법석’은 시끌벅적 떠든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떠들었나? 경직되어 있던 스님들이 무대에 올라 ‘연예인’이 되어 재미있게 강연하고 스님의 강연이 끝나면 갑돌이 갑순이 모두 ‘각설이’ 되어 무대에 올라 노래와 춤을 맘껏 즐기고 무대 아래에서는 줄넘기, 줄다리기, 제기차기, 연 띄우기, 투호놀이, 패놀이 등 오락을 즐기고 심지어 여성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잠자리 잘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밸 수 있는지에 대한 ‘음담패설’을 맘껏 나누는 자리였다. 이렇듯 한바탕 터놓고 떠들었던 것이다. 이 떠드는 장소에서는 계급이 없고 남녀 차별도 없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신라 원효 스님이 바로 방방곡곡 촌락을 돌아다니며 ‘야단법석’을 벌려 불교를 전파하고 대중화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던 이유로 우리말 ‘야단법석’이 상용어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당나라 때 이 ‘야단법석’을 동양식 그리스 광장민주주의로 비유할 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스님들의 ‘야단법석’ 강연에 의해 강창문학(講唱文學) 이란 장르가 생겨났고, ‘송사(宋詞)’가 발달했고, ‘원곡(元曲)’이 발달하였으며, 명나라에 이르러 새로운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소설(小說)을 천자문 식으로 풀이하면 ‘작은 말’이다. 작다는 의미로 ‘잔’이라고 하는데 소설은 잔말, 잔소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잔소리는 누구를 꾸짖거나 흉을 보는 말이 아니라 잔잔하고 작은 말이라는 뜻이다. 중국에는 수천 년 동안 장터에서 이야기하고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야기꾼들이 있었으며 가문대대로 계승해온 집안도 있었다. 이 이야기꾼들의 말이 곧 ‘잔소리’이고 이 ‘잔소리’를 집대성한 것이 곧 소설이다. 역사소설 <삼국지>는 명나라 나관중이라는 글쟁이가 진(晋)의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国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쓴 소설이며 최초 판본은 1522년에 판각한 가정본(嘉靖本)으로,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国志通俗演义)>라 하여 모두 24권 240칙(則)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에 더해서 나관중은 1천7백여 년 동안 장터의 이야기꾼들이 대대로 전해온 이야기(잔소리)를 근거로 지었다는 것이 매우 설득력 있다. 삼국시대 때 있었던 일들을 1천7백 년 동안 전해오려면 한 사람이 30년 말할 수 있다고 치면 60여 대를 거쳐야 하는데 60여 대를 거치노라면 이야기들이 어떤 대목은 줄어들었고 어떤 대목은 뻥튀기처럼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재미 위주로 없던 스토리를 지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접하는 나관중의 <삼국지>는 본래 있었던 역사사실과는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된다. 그리고 좋게 말하면 문학적인 상상력이 뛰어난 나관중, 나쁘게 말하면 구라가 뛰어난 나관중이라는 글쟁이에 의해 탄생된 문학작품이다. 그런데 아무리 상상의 결과로 지어내는 소설이긴 하나 역사소설이라면 그래도 역사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실이 2~3할이라면 나머지 7~8할은 상상에 의해 지어진다. 예를 들어 중국역사에서 4대 미인 중 하나로 꼽히는 초선이란 인물도 미안한 일이지만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비가 제갈 공명을 모시는 삼고초려도 사실이 아니다. 유비야말로 다섯 번이나 주인을 배반한 간신이지만 그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고 조조는 진짜 괜찮은 인물이었으나 나관중은 그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관운은 무식한 무장일 뿐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받든다. 한국사극드라마 <미실>에서 미실이 선덕여왕과 권력투쟁을 벌이는 스토리가 있는데 전혀 역사사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미실이란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으나 법흥왕의 색신(色臣)으로부터 진평왕에 이르는 3대를 거쳐 궁중에서 위세를 부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선덕여왕과 나이 차는 80여 년이 된다. 미실이 살아 있을 때 선덕여왕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드라마 <미실> 뿐만 아니라 한국사극은 다수가 사서나 왕조실록에 기록된 한두 줄의 대목을 근거로 고무줄 늘리듯 늘려 지어내는 것이다. 이런 맥락과 비슷하게 한국 시중에 돌아다니는 <삼국지>는 이문열의 <삼국지>, 황석영의 <삼국지>를 비롯해 요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설민석의 <삼국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버전이 많아 나관중의 원작에 비해 수없이 개작되고 있다. <삼국지>가 본래 어려운데다 여러 버전이 있어 더욱 혼란스러울 것 같아 <삼국지>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기로 맘먹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4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①
    [동포투데이] 진의(秦怡 친이)ㅡ그녀는 중국대륙의 유명한 영화배우이다. 영사막에 나오는 그녀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용감무쌍한 기질을 보여주는 동방여성의 형상을 잘 부각하면서 많은 관중들의 심금을 사로잡군 하였다. 봉건전통이 각별히 심한 가정에서 태어난 진의는 여성이라는 본분을 지키면서도 쉽게 자아감정에 빠져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모순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자아감정에 쉽게 빠져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여성 진의ㅡ 바로 그것이 그녀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며 그것은 두 번 다 그녀의 혼인으로 하여금 엉망진창으로 되게 했다. 1922년 1월 상해의 전통적인 봉건 대 가정에서 태어난 진의는 어려서부터 다정다감했으며 특히 문예를 즐겼고 성격 또한 활달했다. 진의의 천부적인 재능은 그녀가 상해 중화직업학교에 다닐 때 나타났다. 당시 진의는 연극 <당신의 채찍을 놓으시오(放下你的鞭子)>에 출연, 14세의 앳된 소녀였지만 극 장면마다 관객들의 심정을 사로잡군 했다. 1938년 상해 중화직업학교를 졸업한 진의는 무한으로 달려가 항일선전활동에 참가, 그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16살이었다. 당시 진의가 무한으로 간 것은 신여성으로 항일구국 의식이 강한 면도 있었겠지만 각종 전통적인 예의범절로 모든 자녀를 구속하는 가정이 싫어진 면도 있었다. 그해 진의는 무한에 있는 중국영화촬영소에 들어가 실습배우가 되었고 그 이듬해 그녀의 첫 영화 <훌륭한 남편(好丈夫)>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서의 스타트를 뗐다. 바로 그때 천진난만한 소녀 진의한테는 한 남자의 그림자가 슬며시 다가왔다. 바로 당시 중국 연극계에서 꽤나 명성을 날리던 진천국(陈天国)이었다. 진천국은 진의한테 지꿎게 달라붙었다. 1939년의 어느 날, 진의의 손목을 잡고 산속으로 들어간 진천국은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그녀한테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 당시 진의는 선배로서의 진천국한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지만 이성으로서의 남편감으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의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헌데 착한 진의는 진천국한테 확실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진천국이 자기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자 진의한테 남아있던 마지막 한 가닥 방어선도 모래성처럼 붕괴되고 말았다… 지금 와서 보면 연극쟁이인 진천국의 그 거동은 일종 <쇼>에 불과했고 진의 또한 그런 것을 간파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진천국의 본성은 결혼하자마자 곧바로 나타났다. 그는 늘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는 행패를 부렸고 심지어 진의한테 발로 차고 주먹을 내휘두르기까지 했다. 1944년 8월, 딸 비항(斐姮)이 태어난 뒤 어린 것은 자꾸 앓았고 지어 당시 항일전쟁 시기라 딸애한테 먹일 우유 같은 부식을 얻을 길 없었으며 기타 부양비용도 큰 걱정거리였다. 헌데 진천국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셨으며 지어 어린 딸을 남한테 주자고까지 을러 메군 했다. 이에 진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전야에 진의와 진천국은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딸 비항은 물론 진의가 책임지고 부양하기로 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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