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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 재해석⑨ 배신의 아이콘 여포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난세의 장수는 용(勇), 지(智), 덕(德) 등 세 가지 기질을 갖추어야 훌륭한 장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를 다 갖춘 장수는 삼국시대에 조조나 유비 밖에 없을 만큼 매우 드물다. 삼국정립 전 수많은 강호의 장수 중에 무예가 가장 뛰어난 장수는 여포이다. 여포는 무예가 가장 뛰어난데다 인물 또한 잘 생기기로 요명했다. 힘이 세기로 정평이 나 있는 관우나 장비는 키꼴이 장대한데다 얼굴이 구운 수수떡처럼 검붉어 힘이 펄펄 넘쳐나 보인다. 동탁도 무예가 뛰어나기로 유명한데 얼굴형이 사나워 사람을 겁나게 한다. 이들에 비하면 여포는 키도 장수치고는 큰 편이 아니고 얼굴이 미남형인데다 피부색 또한 희어서 여성들이 좋아할 이상형이다. 보통 이런 생김새를 갖고 태어난 사내들은 힘이 부족해서 유명한 싸움꾼이 될 수가 없지만 여포만은 예외였다. 여포는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숙했고 남보다 힘이 세서 자신을 비장(飛將, 한 무제 때 명장 李廣은 궁술과 마술에 뛰어나 당시 흉노들은 그를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고 두려워했다. 여포는 자신을 이광에 비유한 것)이라 불렀다. 진수의 <삼국지> 여포전에 의하면 하진이 죽고 동탁이 궁에 도착했을 때 정원(丁原)이 실세였다. 동탁은 정원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손에 넣으려고 했는데 정원에게는 천하제일 싸움꾼인 여포가 있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정원이 병주에서 벼슬할 때 여포를 출세시켜 여포에게는 정원이 인생의 은인이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정원과 여포는 부자관계를 맺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원은 여포의 양아버지가 되고 여포는 정원의 양아들이 된 셈이다. 이 정도로 가까운 관계이니 동탁이 정원을 숙청하는데 있어서 여포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포는 싸움에는 뛰어나지만 머리가 모자라 지혜롭지 못해 지장도 아니고, 덕이 부족해서 덕장도 되지 못한 용장일 뿐이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주요 포인트로 작용했다. 무슨 말이냐면 동탁 진영에서 당대 최고의 전마(戰馬)인 적토마를 여포에게 주고 금은보화를 얹어 주는 조건으로 정원을 죽이게 했는데 눈앞의 하찮은 이익에 넘어가 그만 자신의 양아버지를 죽이고 동탁에게로 귀의한다. 포악무도하기로 끝이 없는 동탁은 황제를 갈아치우는 바람에 천하의 미움과 원한을 사게 되었고 물불 가리지 않고 무고한 백성마저 무리로 살해하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반동탁연맹이 생겨났고 조정에서 사도 왕윤이 동탁을 살해하는 기획을 세운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동탁을 죽인 일등공신이 미녀 초선이라는 스토리를 그럴듯하게 그려냈다. 소설에 의하면 초선은 사도 왕윤의 양녀다. 즉 왕윤이 좋아한 기녀의 사생아인데 어미가 일찍 죽자 왕윤이 양녀로 키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명문가문에 입양된 초선은 어릴 때부터 공부도 하고 비파를 타고 춤과 노래는 물론이고 시까지 지을 만큼 지적으로 성장한 처녀였다. 초선의 용모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후대의 중국인은 초선을 역대 4대 미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4대 미녀들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당시에는 사진이라는 존재가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녀들을 비유한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춘추시대 월나라의 서시(西施)를 본 물고기들이 수영하는 걸 잊고 강바닥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을 본 기러기들이 날갯짓을 멈춰 떨어졌다고 하고, 당나라 양귀비가 꽃을 만지자 꽃마저 부끄러워 잎을 말고 감추었다고 한다. 초선에 대한 일화도 이 세 미녀에 뒤지지 않는다. 하루는 초선이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 왕윤이 찬탄을 금치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달조차도 초선을 보니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는구나. 과연 폐월(閉月)이로다.” 이 4대 미녀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가 현재 중국인의 입에 자주 회자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서시, 왕소군, 양귀비는 역사인물인데 비해 초선은 역사인물이 아니고 문학이 각색해낸 상상속의 인물이다. 역사에 존재하지도 않은 초선을 4대 미녀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나관중이란 작가가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대에 있어서 잘 생기고 무예가 가장 뛰어난 사내에게 여러모로 걸 맞는 상대 여성을 그려내려면 천하제일 미녀였던 것은 이해가 충분히 가는 일이다.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고전 소설 중에 가장 많이 읽힌 이유가 강호의 영웅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잘 그려낸 것이 크게 한 몫을 했던 것이고 금상첨화로 초선이라는 미녀를 등장시킨 것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던 것이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했던 것이다. 사서에 의하면 여포가 동탁을 죽인 것은 초선 때문이 아니고 동탁이 여포에게 안방 문을 지키게 할 만큼 신임했는데 그만 동탁의 여인을 건드려 불륜을 저지른 것이 들통 날까 두려워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탁은 여포를 믿으면서도 기분이 안 좋을 때 쩍하면 창을 여포에게 마구 던져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로 불안해 왕윤을 찾아 고충을 털어놓아 왕윤은 때가 왔다고 속으로 쾌자를 부르고 여포를 설득하기에 나섰다. 여포도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몰라 왕윤과 사손서의 동탁 죽이기 기획과 의기투합이 되어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사실 왕윤이 여포에게 동탁을 살해하라는 주문을 했을 때 처음에는 여포가 많이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포가 양아버지 정원을 죽이고 나서 동탁과 또 부자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그는 부자 관계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왕윤이 말했다. “당신은 성이 여씨(呂氏, 중국인은 남의 성 뒤에 氏를 붙이지 않는다. 이 대화는 한국 작가들의 버전에 등장한 것임을 밝혀둔다)이니 동탁과는 본래 골육이 아니지 않소. 그대는 언제 죽을지 몰라 근심하면서 무슨 부자 관계를 말하시오.” 여포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일을 도모할 것을 허락하고 칼을 들어 동탁을 찔러 죽였다. 여포는 인생에서 두 번이나 양아버지를 죽였다. 배신도 이런 배신이 천하에 또 있을까?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동탁을 죽이고 나서 세상이 여포의 천하였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건데 동탁이 죽고 40여 일만에 궁에서 쫓겨나 유랑 길에 오르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여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원술이었다. 그런데 원술은 받아주지 않았다. 여포는 할 수 없이 황하 북쪽에 있는 원술의 형 원소를 찾아간다. 여포는 원소를 도와 상산(常山)에 있는 장연을 공격했고 적토마를 갖고 있는 여포가 전장에서 얼마나 뛰어났는지 쉽게 상대를 격파했다. 승리 후 원소에게 군대를 늘려 줄 것을 요구하고 게다가 여포의 장수와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자 원소도 여포를 두려워 기피했다. 눈치를 챈 여포가 원소를 떠나려 하자 원소가 후일이 두려워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해 여포는 달아나 장양(張楊)과 합세했다. 원소는 병사들에게 여포를 추격하도록 명령했으나 다들 여포를 두려워하며 감히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가 없었다. 흥평 원년(194)에 여포는 유비를 찾아가서 유비를 동생으로 삼기로 하는데 유비는 여포의 말이 일관성이 없어 겉으로는 받아주는 척하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유비가 동쪽으로 가서 원술을 공격할 때 여포는 하비성을 습격하여 취했다. 유비는 돌아와서 할 수 없이 여포에게 귀의했다. 싸움에서 밀린 원술은 여포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여포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 사돈이 되고 싶어 했지만 여포는 과거에 받아주지 않은 복수를 하려고 거절했다. 조조는 여포를 어떻게 보았을까? 진등이 조조를 만났을 때 “여포 장군을 대하기를 마치 호랑이를 기르듯 해야 합니다. 호랑이는 고기를 먹어 배가 불러야지 배부르지 않으면 사람을 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자 조조는 말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지 않소.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소. 굶주리면 솜씨를 발휘할 것이고 배부르면 날아가 버릴 것이오.” 난세에는 적도 아군도 임시적인 것으로서 그때그때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진다. 어제 원수와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오늘 동지가 내일 배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건안 3년(198) 여포는 다시 원술과 힘을 합쳐 모반했다. 고순을 파견해 소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조조는 하우돈을 보내어 유비를 구하도록 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원술이 칭제를 자처하고 나서자 조조는 원솔을 공격한다. 그때 조조는 여포를 끌어들여 힘을 함께 하고자 하자 유비 삼형제는 게거품 물고 반대한다. 조조가 겨우 설득해서야 여포와의 협력, 즉 ‘적과의 동침’이 이뤄진다. 여포는 싸움에는 이골이 나 있으나 궁을 떠난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 잡지 못해 여기저기 몸을 의탁하며 살았다. 아울러 머리가 모자라고 덕이 부족해 어디가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건안 3년(198) 결국 조조가 직접 여포 정벌에 나섰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이다.’ <손자병법>에 있는 전략전술이다. 조조는 여포가 있는 성 아래 이르러 여포에게 편지를 보내 싸움과 항복의 이해득실을 설명해주었다. 여포가 투항하려고 하자 진궁 등은 자신들이 지은 죄가 깊음을 생각하여 그의 계획을 가로막았다. 여포가 싸움을 하려면 병력이 모자라 사람을 보내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원술은 스스로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곧 패배하여 돌아가 성을 지키고 감히 나와서 싸우려 하지 않았으므로 원술 역시 여포를 구하지 않았다. 여포는 비록 날래고 용감했지만 계책이 없고 의심과 질투가 많아 부하를 통제할 수 없었으므로 단지 몇몇 장수만 믿었다. 그러나 장수들마저 저마다 의견이 달라 서로 믿지 않았으므로 싸울 때마다 대부분 크게 패배했다. 조조는 참호를 파고 포위한 지 석 달 만에 상하 간에 마음이 벌어져 장수 몇 명이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직속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白門樓)에 올랐다. 군대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여포는 하는 수 없이 내려와 투항했다. 포승줄이 너무 단단하게 조여져 여포가 말했다. “너무 꽉 조이게 하지 말고 조금 느슨하게 묶으면 안 되겠소.” 이에 조조가 말했다. “큰 호랑이를 묶었으니 부득이 꽉 조여야 하지 않겠는가.” 여포는 마지막으로 요청했다. “명공(조조)께서 근심거리로 여기던 것 중에서 나 여포보다 더 지나친 것은 없었소. 이제 내가 항복했으니 천하에 근심거리가 될 만한 것은 없소. 명공이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게 한다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오.” 이 때 곁에 있던 유비가 말했다. “명공께서는 이 자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를 섬기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뜻인즉 여포는 양아버지 둘씩이나 죽인 인간인데 언젠가 명공(조조)을 배신할지 모를 일인데 살려두다니요. 말이 됩니까? 이 말을 들은 조조는 즉시 여포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잘생긴데다 무예가 뛰어나 세상의 주목을 받던 여포는 용장의 기질은 충분했지만 지장의 기질도 덕장의 기질도 갖추지 못해 천하를 누비며 달리고 달렸으나 아무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씁쓸하게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0-21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⑧
    ▲4월 24일, 우한에 있는 화중 과학기술 대학 퉁지의과대학 부속 세허병원(同济医学院附属协和医院) 서원이다. 사진은 의무일꾼들이 핵산검사 결과 음성으로 돌아선 코로나 19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장면이다.ⓒ신화사 (전번 계속)후베이, 우한이 전국의 코로나 19 저격 대응의 주 전장이었고 단계성 승리를 이룩했지만 코로나 19의 잠재적 위협은 여전히 존재했으며 전국 곳곳이 직면한 전염병 예방 통제의 형세는 여전히 낙관할 수 없었다. 3월 27일, 1명의 무증상 감염자가 경외로부터 입국함에 따라 헤이룽장 성 수이펀허시(黑龙江省绥芬河市)의 고요를 깨뜨렸으며 수이펀허는 점차 전국의 ‘대외유입 예방’의 화이라이트(焦点)로 되었다. 각 지의 전문가와 의무일꾼들은 긴급 지원에 나섰고 방역물자 또한 신속히 조달되었으며 후베이에서 귀환했던 백의전사들이 재차 출정, 핵산검사실험실이 신속히 건립되고…이렇게 수이펀허 통상구를 통해 입경한 코로나 19 환자들은 적시적인 구급 치료를 받게 되었고 변경 선에는 한 갈래의 생명 수호선이 구축되었다. 5월 6일, 0시부터 수이펀허시 전염병 위험 등급은 하향 조정되었고 생산과 생활은 점차 그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폭풍우는 전진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고 정확하고도 강력한 예방 통제의 대응조치는 코로나 19를 전승할 수 있었다. 수이펀허 외 수도 베이징(北京)의 급작스런 코로나 19 촉발 또한 인심 당황하게 했다. 6월 11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 신파디(新发地)에서 코로나 19가 집중 발생, 이에 베이징 시는 제 1의 시간대에 즉시 전시상태에 진입하면서 한 차례의 ‘반드시 이겨야 하고 져서는 안 되는 전쟁(只能赢不能输)’을 개시했다. 이 전쟁은 ‘물을 등지고 펼치는 싸움(背水之战)’이라 몹시 간고하고도 관건적인 전역이라 우한과 후베이에 이어 규모가 큰 코로나 19와의 한판 승부였다. 베이징의 의료진과 각 사회구역의 책임일꾼들은 단 시일 내에 코로나 19를 효과성 있게 박멸하여 당 중앙과 수도인민들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신속하게 호응하여 강력하고도 정확하게, 높은 효율 그리고 과학적인 예방과 통제로 26일이란 짧은 기간의 간고한 노력을 통하여 7월 6일 베이징 본지의 코로나 19 사례가 ‘0 증장’으로 되게 만들었다. 7월 19일, 베이징시 정부 해당책임자는 코로나 19 예방 통제 보도 브리핑에서 “2020년 7월 20일 0시부터 베이징 시 공공위생 돌발사태 비상대응 급별을 2급에서 3급으로 하향 조정한다”라고 선포했다. 이로써 한 차례 근 40일간에 거친 베이징시의 코로나 19와의 전쟁은 단계성 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중국 국내의 코로나 19 예방 통제 형세는 여전히 준엄하고도 복잡하였다. 베이징에서 공공위생 돌발사태 비상대응 급별을 2급에서 3급으로 하향 조정한다고 선포하던 당일, 7월 19일, 신장 위그르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 지휘부에서는 연구 끝에 우룸치시(乌鲁木齐市)의 텐산구(天山区)와 사이바커구(沙依巴克区)를 고 위험 지역으로, 우룸치 경제기술개발구, 고신기술 산업개발구, 수이머거우구(水磨沟区)를 중등 위험지역으로 했으며 기타 현(시와 구)를 저 위험구역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7월 22일 새벽, 랴아오닝성 다렌시(辽宁省大连市)에서 1건의 코로나 19 본토사례가 발견, 30분 후 확진사례가 출현한 다련 카이양(大连凯洋) 세계 해산물주식 유한회사 직원과 가족들이 원 지점에서 격리되었고 기업은 전면 봉쇄되었다. 한 쪽은 동쪽이고 다른 한 쪽은 서쪽이었으며 하나는 연해지구였고 다른 하나는 내륙지구였다. 신장과 다렌의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출현에 직면하여 중국은 대응의 경험이 더욱 풍부해졌고 더욱 파악이 있게 됐다. 중국의 다렌과 신장에서는 과학적으로 위험등급을 확정하고 ‘관할 통제권(管控圈)’을 엄하게 틀어쥐는 한편 전면적인 핵산검사를 추진, 이는 일장 바이러스와의 밀고 당기는 ‘조우전’이었다. 드디어 25일이 지난 후인 지난 8월 16일, 다렌 전역이 저 위험지구로 하향 조정되면서 경제와 사회질서가 전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같은 희소식이 신장으로부터 전해오기도 했다. 국무원 코로나 19 대응 연합방지, 연합통제 기제의 해당 규정과 신장의 코로나 19 확산형세에 따라 자치구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지휘부에서는 8월 29일 0시를 기점으로 우룸치 텐산구, 사이바커구의 위험등급을 고 위험 지구로부터 저 위험 지구로 조정했고 우룸치 경제기술 개발구, 우룸치 고신기술 산업개발 그리고 수이머거우구의 위험 등급을 중등 위험 지구로부터 저 위험지구로 하향 조정하였다. 이렇듯 코로나 19와 대응 전쟁을 펼치는 위대한 실천 중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인민은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초인간적인 용기와 지혜를 과시하여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인민이 첫째이고 생명이 첫째’란 이념을 철저히 이행하였다. 서기 2020년 9월, 우한의 2800여개 소의 중소학교와 유치원이 개학을 맞았고 백만의 학생들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교당으로 회귀하였다. 중국 대륙 중부의 이 대 도시는 사통 발달한 9개성의 교통요도로서의 본색도 되찾아왔다. 하지만 2020년의 이 도시와 이 국가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세상에 남겼다. 시계바늘은 다시 경자 년 춘제로 되돌아가 보기로 한다. 1월 26일, 바로 음력 정월 초이튿날, 만가정의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나날, 바로 장수 옌청(江苏盐城)에서 춘제를 보내던 왠촨워이(袁传伟)은 우한을 지원하라는 한 건의 ‘전선지원 주문서’를 받아 쥐게 되었다. 그가 밤도와 수저우(苏州)에 있는 회사로 돌아갔을 때 그의 수하에는 단 1명의 직원도 없었다. 왠촨워이는 이전에 익혀두었던 기술을 바탕으로 생산라인을 가동했다… 10 후, 왠촨워이의 신근한 노동으로 이 회사에서는 생산된 100세트에 달하는 소독설비가 우한의 제 1선으로 보내 질 수 있었다. 이렇듯 코로나 19 저격전은 실제상에서는 후근 보장전쟁이기도 했다. 당 중앙의 통일적인 인솔 하에 여러 부문에서는 신속하게 연합행동을 개시, 전국이 ‘하나의 바둑판’처럼 되어 각 방면의 자원이 전력으로 공급 조달되었다. 하루 속히 생산을 회복하기 위하여 중점 기업들은 임시생산 관리 제도를 건립하여 기업의 원료, 직원과 물류 문제를 도와주었고 기업의 확대생산의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해 국가임시 수납제도(收储制度)를 건립하여 많이 생산한 중점 의료방호물자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구입수납을 대리해 주었으며 이런 중점 기업에 대해서는 세수(税收)와 금융의 지지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단 시일 내 일선의 구급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국가에서는 통일적으로 산품조달을 배치, 엄격한 규정에 따라 의료용 방호복 등을 조달하게 했다… 생산기업들은 단시일 내에 만부하 생산에 돌입했다. 중국 항공공업그룹, 중국석유화학 공사, 비야디 자동차……수천 개 소의 기업들의 계선을 뛰어넘으며 완전히 다른 제품의 생산에 들어가기도 했다. 2월 29일에 이르러 중국의 마스크 단일 생산량은 1억 1600개에 도달, 2월 1일의 12배에 달했으며 4월 5일, 중국의 1차성 방호복 단일 생산량은 150만 건 이상에 달했으며 의료용 95 마스크의 단일 생산량 역시 340만 건에 달해 기본상 국내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우한 ‘봉쇄’후, 90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면서 매일 5400톤의 식량, 4000톤의 야채와 1200톤의 육류를 소모했다. 이에 중앙에서는 통일적으로 생활물자를 보장하기로 결정, 1월 27일부터 5월 30일까지 전국에서 후베이 지구로 운송된 방역물자 및 생활물자는 누적으로 173톤을 초과, 석탄과 연료 등 생산물자는 근 395만 톤에 달했다. 중외 역사상 큰 전염병과 재해 등은 흔히 사회질서를 교란시켰고 혼란한 사회질서 또한 전염병 방지 및 재해 방지에서의 설상가상으로 되었다. 코로나 19란 대 고험에 직면하여 중국의 생활필수품, 의료물자, 전력, 수돗물 등 기본공급은 총체적으로 안정했고 국계민생(国计民生)과 관련되는 중점항목은 질서 있게 운행되고 있었으며 14억 인구의 기본민생은 효과적으로 보장되고 경제사회의 발전은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정 건(暂停键)’으로 잠시 나라를 지탱하고 있던 대국은 미구하여 기세 드높은 생산라인을 가동, 막힘이 없는 물류동맥을 유지했으며 크나큰 재난 중 역행에 나선 것은 의사, 간호사와 수많은 화물차 운전기사 그리고 사회구역 사업자, 자원봉사자, 배달원, 청결공과 건축 노동자 등이었다…… “나는 그들의 몸에서 자기의 가정과 자기의 사회구역, 심지어 전 세계 아주 먼 곳의 질병침해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일종 거대한 책임감을 분명 보아냈다. 또한 남한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몇 주간 자가 격리에 들어간 사람들도 분명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나타난 영웅들이었다.” 이는 중국 - 세계위생조직 코로나 19 연합전문가 고찰 팀의 외국 측 팀장 브루스 엘워드가 감격에 젖어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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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9
  • '삼국지' 재해석⑧ 대세를 읽지 못하고 수성만 하다가 자멸한 유표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후한서>에서는 원술과 유표를 묶어 하나의 열전으로 구성했고, 유언, 원술, 여포를 합하여 하나의 열전으로 만들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동탁, 원소, 원술, 유표를 하나의 챕터로 묶어놓고 다음과 같이 평을 달았다. “동탁은 사람이 흉악하고 잔인하며 포악하고 비정했으니 문자로 기록한 이래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며 음탕했으므로 생을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원소와 유표는 모두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당시 이름을 떨쳤다. 유표는 한수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했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했고 모략을 좋아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며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았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웠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니 후계자의 대에 이르러 거꾸러지고 넘어지는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유표가 영향력이 있는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사서에서의 유표는 비중이 꽤 컸고 영향력도 괜찮은 인물이어서 필자는 진수의 <삼국지> 배열 순서에 따라 이번 편에서 유표를 다루기로 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유표는 노공왕(魯恭王)의 후예였고 키가 8척(184센티미터) 남짓하고 모습이 온화하고 훤칠했으며 장검(張儉) 등의 사람들과 함께 ‘팔고(八顧, 덕행이 있어 남들을 선도하는 여덟 명의 명사)라고 불렸다. 유표가 황실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비의 황실후손 주장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심을 받은 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유표는 후한 말기 환관들의 눈에 나 지식인을 탄압한 ‘당고의 화’를 입어 환관집단의 추적을 물리치고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헌제 초평 원년(190) 장사태수였던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이자 조정에서는 유표에게 이 직무를 맡겼다. 그러나 원술이 그의 부임을 가로막았고 ‘종적(宗賊)’이 성행하여 직무수행이 매우 어려웠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유표는 인복이 있었는데 그를 도와 준 사람은 괴월과 채모였다. 채모는 비첩(婢妾)이 수백 명이고 별장을 오십여 채나 소유한 대부호였다. 채모는 후일 유표와 동서 사이가 되고 제갈량의 처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괴월은 지혜가 뛰어나고 계략이 많아 조조가 가장 좋아한 형주의 사인(士人)이었다. <후한서> 유표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건안 13년(208) 유종(유표의 차남)이 투항하자 조조는 형주를 차지했는데 이때 그는 순욱에게 편지를 써서 ‘형주를 얻은 것이 기쁜 게 아니라 이도(異度, 괴월의 자)를 얻은 것이 기쁠 뿐이오.” 이는 조조가 얼마나 인재에 목말라 있었는가 하는 좋은 증거이다. 만약 괴월이 없었다면 유표의 형주자사 직무수행이 이뤄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과연 괴월의 계책은 무엇이었을까? “평화로운 상황을 다스리는 사람은 인의를 우선하고 혼란한 상황을 다스리는 사람은 권모를 우선합니다. 군사(軍事)는 그 숫자의 많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의 인물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형주를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도덕적인 감화와 무력적인 위협이 필요합니다. 공의 적은 원술과 종적들 아닙니까? 원술의 특징은 대체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먼저 종적을 멸한 후에 원술을 막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무도한 자들을 주살하고 그 인재들에게는 등용의 길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공이 위엄과 덕행을 행하면 모든 사람들이 귀순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남으로는 강릉(江陵)에 근거하고 북으로는 양양을 지킨다면 형주 8군은 격문만 돌려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술이 공격해온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유포는 괴월의 이 계책을 받아들여 괴월로 하여금 종적 두목 15명을 불러들인 다음 그들을 모두 참수하고 그들의 군대를 습격했다. 결과 강남(후난성과 후베이성에 해당함)을 모두 평정했다. 유표도 양양에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원술은 손견과 손잡고 유표를 습격하자 황조가 유표를 구원했고 손견은 황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때부터 원술은 형주 접근을 포기하고 말았다. 양대 주적을 제거한 유표는 훌륭한 정치를 펼쳐 동네방네 소문난 훌륭한 주목(州牧)으로 거듭났다. 땅이 사방 천리에 달하고 병사 10만을 거느렸으며 영토 내에는 만 리가 숙청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복종하였으니 실로 명실상부한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중원의 선비들이 이를 보고 다투어 형주로 피난을 왔고 유표에게 의탁한 학사들이 모두 1천여 명에 달했으며 유표도 그들을 위로하고 재물로 도와 모두가 구제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학교를 세우고 유학을 진흥시켰으며 형주를 난세 속의 ‘왕도 정치가 시행되는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만들었다. 유표가 역사에서 중시 받는 이유는 형주라는 곳의 중요성도 한몫 하고 있었다. 형주는 익주와 함께 100개 현을 갖고 있는 규모가 가장 큰 주(州)였고 유비의 세력과 강동의 손씨 세력 및 조조마저 탐내고 있었던 곳이다. 당시 삼대 전투 중 하나인 관도대전도 결국 원소와 조조가 형주를 차지하려고 벌였던 전쟁이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는 사람을 보내 유표에게 원조를 요청했는데 유표는 원소의 청을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출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조조를 도와주지도 않았다. 후일 조조가 오환을 정벌할 때 유비가 그에게 허현(조조의 근거지)을 습격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역이 요지부동이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기회를 모두 날려 보내게 되었다. 과도대전에서 산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 유표에 대해 답답함을 느낀 부하 한숭(韓嵩)과 유선(劉先)이 그에게 말했다. “호걸들이 함께 다투어 두 영웅이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의 무게중심은 장군에게 있습니다. 장군이 만약 성과를 내시고자 한다면 그들 지친 틈을 타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그중 한쪽을 선택하십시오. 현재 장군께서는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안히 앉아서 관망하고 계십니다. 지지해야 할 사람을 보고서도 돕지 않고 강화를 권하지도 않는다면 결국 양쪽의 원한이 모두 장군에게로 집중될 것입니다.” 괴월마저 이 두 사람의 말에 동조하고 나서자 유표는 한숭을 조조 진영에 보내 정탐하고 상황판단하라고 부탁했다. 조조 진영에 다녀온 한숭은 조조의 위엄과 덕을 자세하게 말하자 유표는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죽이려고 한바탕 조사에 착수했다. 결국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하자 체면 유지차원에서 한숭을 감옥에 처넣었다. 역사학자 진수는 이 사건을 두고 “유표의 외모는 온화하고 품위 있어 보이지만 속마음은 시기심이 많아 일처리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고 기록했다. 유표는 시기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큰 뜻도 없었다. 진수의 <삼국지> 곽가전에 의하면 곽가는 “유표는 앉아서 반말이나 해대는 자에 불과합니다.”고 말했다. 조조는 “내가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는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구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만을 지키는 놈이다.” 한숭은 얻기 힘든 인재였다. 이런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였으니 유표는 실로 이 면에 있어서 유비나 조조에 견줄 바가 못 되는 속 좁은 인간이었다. 여기서 <후한서>에 기록된 한숭이 유표에게 올린 진실하고도 멋진 간언을 감상해보자. “저의 어리석은 견해에 따르면 조공의 영명함으로 볼 때 앞으로 반드시 천하에서 뜻을 이룰 것입니다. 장군이 만약 조조에게 의탁할 생각이시라면 저를 중원에 파견하여 사신으로 가게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속에 주저하는 바가 있다면 적합하지 않습니다. 폐하는 제가 일단 경사(京師)로 들어갔기 때문에 아마도 저에게 말단 관직이라도 내릴 것입니다. 제가 사양하고 사양하지 않고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양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때부터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어 장군에게는 옛 관리가 됩니다. 천자에게 있을 때에는 천자를 위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장군을 위해서는 죽을 수 없을 테니 청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십시오.” 한숭을 이렇게 냉대했을 뿐만 아니라 유표는 인재등용에 문제가 많았다. 유표는 유비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먼 거리까지 나가 마중하였으며 상빈의 예로 대접했고 군대까지 나눠주었다. 그러나 유표는 유비를 항상 경계했고 중용하지 않았다. 뒤늦게 유비가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연회를 베풀어 유비를 죽이려고 했는데 유비는 소피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밖에 나가서 그 걸음으로 도망가 버렸다(홍문연을 연상). 곽가는 유표가 유비를 대한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도 유비를 막기에 재주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통제할 수 없을까 염려할 것이고 또 가벼운 임무를 맡기면 유비가 그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는 또 그에게 귀의한 1천여 명의 지식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의식주를 제공했을 뿐 적당히 알맞게 인재로 등용시키지도 않았다. 유표는 후사처리에도 문제가 심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후사처리는 계승자 선정을 뜻한다. 유표에게는 유기와 유종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둘 다 정실의 소생이다. 그런데 유표의 후처인 채부인은 친정 쪽의 조카딸을 유종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유종이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고 실제로 유표를 설득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해 적자가 아닌 서자를 후계자로 세워 성공한 사례가 매우 드물다. 장남은 집안의 전통과 대통을 이으려는 야망이 큰 반면에 차남부터는 대세에 따르는 경향이 있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던 건안 13년(208) 유표는 병들어 죽었다. 장남인 유기는 조조를 대항하는 항조파(抗曹派)인데 비해 차남인 유종은 후계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투항해 가문에 먹칠하는 항조파(降曹派)였다. 유표가 일궈놓은 강산을 후계자가 조조에게 바쳐버렸다. 이로서 유표의 강산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유표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큰 뜻이 없고 넓은 흉금과 도량도 없었다. “조그마한 땅 한 뙈기 지키며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집 한 채 정도를 소유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너무 지나친 평가기이긴 하나 결과적으로 유표는 보수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한 때 형주를 천하 난세 속에서도 지상낙원으로 만든 그의 공로는 마멸할 수 없이 역사에 길이 남아 내려오고 있다. ‘삼국지 강의(品三國)’로 유명해진 이중턘은 유표의 생애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난세에 태어나지 않고 치세에 태어났다면 훌륭한 관리였을 것이다. 유표는 실로 불행한 행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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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3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⑦
    ▲ 4월 12일, 베이징 세허(协和)병원 의료진 성원들이 우한 퉁지병원 의무일꾼들과 함께 코로나 19 환자 1명을 우한 퉁지병원 중파신청원구(中法新城院区) ICU(중환자 실)로 이송하는 장면으로 이송 도중 ECMO(인공막폐) 치료를 계속 하고 있다.ⓒ신화사 (전번 계속) ‘환자가 빈 침대 기다리기’가 마침내 ‘빈 침대 환자 기다리기’로 !   2월 17일까지 코로나 19 환자는 발병으로부터 확진에 이르기까지 전국 평균 소모시간은 4.95일까지 짧아졌다. 그리고 우한의 중증환자 비율은 초기의 38%로부터 18%로 내려갔다. 이는 환자가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모여들던 우한의 조기현상이 점차 완화되었음을 설명했다. 치유 율을 높이고 사망 율을 하강시키며 최종 코로나 19를 전승하자면 관건은 과학기술에 의거해야 했다. 3월 2일, 시진핑 총 서기는 전문 군사의학연구원, 칭화대학(清华大学) 의학원을 찾아 코로나 19 예방 통제 과학연구 공략 사업을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현재 코로나 19를 이기자면 인민전쟁, 총체 전과 저격 전 그리고 간고한 노력의 대가를 수요한다. 그러나 이런 국면을 맞을수록 우리는 과학에서 답안과 방법을 찾는 것을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관건시기인 3월 10일, 시진핑 총 서기는 전문 후베이(湖北)와 우한을 찾아와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을 고찰하면서 코로나 19 예방 통제를 계속 당전의 가장 큰 대사와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삼고서 마비되지 말고 늦추지 말아야 하며 긴밀하고도 세절 적으로 틀어쥐어야 한다면서 기어코 후베이 보위전과 우한 보위 전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약 사용은 군사를 사용하는 것과 같고 의사를 채용하는 것 또한 장군을 채용하는 것과 같다. 진료방안은 임상의사의 치료에 달린 것이며 또한 국가 첨단 의료진한테 있어서 하나의 질병에 관한 이해이기도 하다. 의료진은 점차 코로나 19 위급중증환자의 사인은 단지 폐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많은 기관의 쇠약에 따른 것이며 전통적 통기(通气), 지어는 ECMO(체외막 산소공급) 등 수단 역시 환자의 쇠약속도를 저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몹시 고난의 모색 중 조기 삽입호스와 부와식(俯卧式) 통풍기기 등 두 가지 구급치료 경험이 수면위로 떠올랐으며 이는 곧바로 환자의 상태 전환에 관건적인 작용을 했다. “관건은 호스를 삽입하는 시기이다.” 중증 전문가들은 한 침에 피는 보는 격으로 ‘호스를 삽입 후 다시 뽑아내기가 어렵’기에 호스 삽입을 근심하는 우려를 없애야 한다고 인정했다. 우한 퉁지병원 중파신성 병원 구(武汉同济医院中法新城院区)에서는 20명으로 구성된 ‘호스삽입 돌격대’을 조직, 동시에 ‘특전 첨도 련(尖刀连)’도 신속히 조직, 여기에는 심장보호 팀, 신장보호 팀, 간장보호 팀, 두뇌 보호팀 등이 포함되었으며 상하이(上海), 칭다오(青岛) 등지에서 온 17개 의료진이 협동작전으로 중증환자들을 구급하기로 했다. 생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5월 말까지 중국에서 코로나 19 중증환자 1명이 쓴 치료비용은 평균 15만 위안을 초과, 특히 소수의 위 중증환자의 치료비용은 수십 만 위안 심지어 100만 위안을 초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으며 그 모두가 의료보험 규정에 따라 처리되었다. 결코 희망이 있어 견지한 것이 아니고 아울러 견지했기에 비로소 희망도 있게 되었다. 중국은 가장 정예한 의료자원을 가장 수요 하는 지방에 집중했으며 중증치료는 ‘일인 일책(一人一策)’의 방침을 실시했다. 결과 지난 5월 말까지 중국에서는 도합 3000여명에 달하는 80 이상의 코로나 19 환자를 성공적으로 완치, 위로는 100세가 넘는 노인으로부터 아래로는 갓 태어난 유아에 이르기까지 완치율은 94%에 달했다. “중대한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인민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선명하게 제출했습니다. 우리는 전국 범위에서 가장 우수한 의사, 가장 선진적인 설비, 가장 급히 수요되는 자원을 집중해서는 전력으로 코로나 19 치료에 투입했으며 구급치료 비용은 전부 국가에서 부담했습니다. 인민이 첫 번째이고 생명이 첫 번째였기에 인민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위해서는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난 5월 22일, 중국의 ‘양회(两会)’ 기간, 시진핑 총 서기가 네이멍구(内蒙古) 대표단의 심의에 참가했을 때 한 발언이다. 한편 이렇듯 코로나 19와의 사투를 벌이는 기간, 장쉐칭(江学庆), 류즈밍(刘智明), 리원량(李文亮), 샤스스(夏思思), 펑인화(彭银华) 등 이들이 생명으로 사명을 이행, 큰 사랑으로 푸른 생명을 보우했으며 많은 의무일꾼, 간부 직원과 사회구역 사업자들이 공직을 수행하다가 순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지난 1월 16일에 제 1판의 코로나 19 국가진료 방안이 출범해서부터 50일 기간 동안 그 진료방안이 제 7판까지로 업그레이드가 되었으며 코로나 19 중증환자의 진료방안에 대해서는 3 차례에 거쳐 수정했다. 그리고 무증상 감염자의 전파가능성, 완치 자 회복기간의 혈장치료 등 일련의 새로운 발견에 대해서는 모두 적시 적으로 새로운 수정판에 기입하는 것으로 코로나 19 구급치료 수준을 부단히 개선하였다. 우한은 세계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4월 8일, 우한은 마침내 ‘봉쇄가 해제’ 되었다. 코로나 19의 기승 중에 사망한 매 한명의 생명은 가정의 비애일 뿐만 아니라 전반 도시가 명기해야 할 아픔이었다. 정보의 공개 투명도와 데이터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코로나 19 확산 초기 수용치료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환자가 집에서 사망하여 정보등록이 되지 않은 등 원인으로 4월 17일, 우한 시에서는 정정 후의 코로나 19 확진사례와 사망사례를 공포, 이 중 확진사례는 확인 뒤 325건이 증가했고 사망사례는 확인 뒤 1290건이 증가되었다. 당일, 세계위생조직은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19 확진사례와 사망사례를 정정한 것은 원래 통계했던 데이터의 기초 상 반복해서 통계한 것으로  그 어떤 누락된 확진사례거나 사망사례의 기록도 없다고 표했다. 그리고 코로나 19의 확산진전에 따라 기타 나라에서도 코로나 19 데이터를 정정하는 상황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데이터 정정은 합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4월 24일, 후베이의 중증 및 위 중증 환자의 0기록을 실현, 4월 26일, 우한에서 병원 투병중인 코로나 19 환자의 0기록을 실현! 이는 생명이 모든 것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준 76일이었고 영웅적 우한인민들이 간고하고도 어렵게 써 온 역사의 한 막이었다. 1800여 시간 ㅡ 용감한 중국인민은 인류문명사상에서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계를 경악하게 한 장거를 창조했던 것이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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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9
  • '삼국지' 재해석⑦ 푼수도 모르고 황제를 참칭한 원술(袁述)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후한 말기 기원 220년 전, 그러니까 3국 정립이 이뤄지기 전에 동탁은 황제를 지마음대로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는 이른바 ‘황제폐립’이란 패악무도한 짓을 저질렀고, 원소는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려는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다가 좌절되었고, 다음에는 원술이 아예 자신을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이 세 인물의 행위를 정리하자면 동탁은 ‘황제 폐립’을, 원소는 ‘황제 별립(別立, 另立)’을, 원술은 ‘황제 자립(自立)’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황위(皇位)를 건드리는 것은 최대 난신적자로 취급받기 때문에 이 세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 세 사람을 비슷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맥락에 의해 한 챕터에 묶어놓았다. 원술은 원소의 동생이다. 둘 다 같은 아버지 원봉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 형제를 친형제라 하기도 하고 사촌 형제라 말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분명한 것은 원소는 첩의 자식으로서 ‘서출(庶出)’이고 원술은 정실의 자식으로서 ‘적출(嫡出)’이라는 것이다. 전통시대에 있어서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지위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심했다.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자식일지라도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적자에게만 부여하고 서자는 배제시켰다. 서자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는데 그들은 출세의 길이 막혀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키는 두목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홍길동, 장길산, 최제우 등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 한편 적자는 서자보다 타고난 자질이 좋고 인물도 낫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원소와 원술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원소는 인물이 잘 생기기로 유명했고 정계에서 명망도 원술보다 훨씬 높아 인기가 매우 좋았다. 원술은 이에 불복하여 이를 갈고 형과 죽기내기로 싸워서 누가 나은지 승부를 보려고 했다. 원술이 원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지 <후한서> 원술전에 의하면 세상은 원소의 편에 서는 호걸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원술은 욕을 퍼부어댔다. “더러운 놈들, 나를 안 따르고 거꾸로 우리 원씨 집안의 종놈을 따르다니!” 또한 원술은 공손찬에게 편지를 써서 원소는 원씨 집안의 씨앗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원소는 원술에게 크게 격노하게 되었다. 원술이 원소를 이렇듯 경멸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원술이 정말 원소보다 나은 점이 있었을까? 이 형제는 서로 피장파장이요, 도진개진이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원술을 ‘도량이 좁고 모략만 좋아한 탕아’라고 요약했다. 사실 이 두 형제는 출신이 고귀해서 콧대가 높았고 오만했으며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다. 이 면에 있어서 원술이 원소보다 더 어리석었고 더 멍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술은 원소의 행위에 대해 얕잡아 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원소가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원술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원술은 편지를 보고 콧방귀를 꼈다. “첩에게 난 자식은 역시 싹수가 노랗다더니 뜬금없이 이런 멍청한 생각이나 하는구나. 따로 황제를 세운다고? 남을 세우느니 차라리 제가 황제로 서지! 우리 유서 깊은 원씨 집안이야 일찍부터 사세삼공의 가문이라 네가 황제를 옹립한 공을 세워도 기껏해야 사세삼공에서 오세삼공으로 바뀌는 정도인데 무슨 대단한 게 있다고?” 원술은 동탁이나 원소와 달리 자신이 황제가 되는 방법을 택했다. 나름대로 황제가 되려는 논리도 그럴듯했다. 한나라는 이미 관 속에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고 유씨도 이미 서산에 지는 해이므로 반드시 다른 사람이 대신 나서야 한다. 유씨를 대신할 자격은 누구보다 원씨에 있다. 원씨 집안은 사세삼공의 오래된 집안이며 필적한 만한 다른 집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따라서 원씨 가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은 원술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적출이고 원소는 서출이기 때문에 첩의 자식이 황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술은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히 뜸을 들여 봤다. 원소와 조조 연합군에게 패한 원술은 양주 자사 진온(陳溫)을 죽이고 양주를 지배했을 때 같은 삼공 집안의 자식인 진규(陳珪)에게 편지를 보냈다. “옛날에 진(秦)나라가 통치를 잘못하여 천하의 모든 영웅이 다투어 그 정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이 마침내 천명을 받아 정권을 잡았소. 지금 세상일은 혼란스럽고 또한 와해되는 형국이니 진실로 영웅호걸들이 일어나야 할 때요. 나와 그대는 오랜 친구지간이니 설마 나를 돕지 않겠소? 만일 내가 큰일을 성공시킨다면 그대가 실로 내 심려(心膂, 가슴과 등뼈로서 임금을 보좌하는 중신을 의미함)가 될 것이오.” 진규는 답장에 이렇게 썼다. “옛날 진나라 말기에는 내키는 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제멋대로 굴어 포악함이 천하에 넘쳐 그 해악이 백성에게 미쳤소. 낮은 위치에 있는 백성이 살아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진나라는 붕괴된 것이오. 지금은 비록 말세이지만 멸망한 진나라처럼 가혹한 폭정은 존재하지 않소. 조조 장군이 명민하고 무용이 있으면서 시대의 요청에 순응해 과거의 법과 형벌을 되살리는 한편 흉하고 사특한 세력을 쳐서 평정하고 천하를 안정시키려 하니 진실로 그렇게 될 것이오. 그대가 천하 영웅들과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 하여 한나라 왕실을 돕는다지만 법규도 없는 계략을 몰래 세워 직접 화를 실험하는 모습을 보니 어찌 애통하지 않으리! 만일 그대가 길을 잃었다가 돌아올 줄 안다면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그대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그대에게 진실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오. 비록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육친의 애정이 들어 있소. 내가 사사로움을 쫓아 그대에게 아부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죽음에 처하더라도 할 수 있소.” 원술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려는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흥평 2년(195) 겨울 천자가 이각과 곽사에게 추격당한 끝에 조양에서 패하자 원술은 부하를 소집하여 말했다. “지금 유씨는 쇄미하고 천하라는 솥은 들끓고 있소. 우리 가문은 4대가 모두 삼공을 지냈으며 백성이 귀의하고자 하는 바이오. 나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민심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여러 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다들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주부 염상(閻象)이 진언했다. “옛날 주나라는 후직에서부터 문왕에 이르기까지 인덕을 쌓아 공을 세우고 셋으로 나뉜 천하 중 둘을 다스리면서도 은나라를 섬기고 그 명에 복종했습니다. 공께서 대대로 번영했다고는 하나 주나라처럼 번성한 적은 없으며 한나라 왕실이 비록 쇠약하다고는 하나 은나라 주왕처럼 폭정을 일삼지는 않았습니다.” 원술은 침묵한 채 매우 불쾌해 했다. 원술은 하내 사람 장형(張炯)의 부명(符命, 하늘이 제왕에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을 이용하여 결국 스스로 황제를 참칭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원술은 한 개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전국적인 세력도 턱 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스스로 황제가 되는 일에 그토록 목을 맬 정도에 이르렀을까? 남달리 무언가 그만이 갖고 있는 비밀무기가 있지 않았을까? 맞다. 원술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강력한 비밀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황제의 옥새다. 저런, 황제의 옥새가 어떻게 원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이 비밀을 알려면 반동탁연대 투쟁을 돌아봐야 한다. 관동연합군 맹주 원소와 조조 그리고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연합을 맺어 작전을 짰다. 손견은 수도 낙양에 진입하고, 조조는 장안으로 도망가고 있는 동탁 무리를 추격하고, 원소는 후방에서 군량미와 군수물자 공급을 맡기로 했다. 그런데 이 셋은 한마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원소는 두 갈래 진영의 군수물자 공급을 하지 않았다. 조조가 동탁과의 싸움에서 패해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후방 지원을 잃은 조조는 장안 입성을 이루지 못했고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손견도 조조가 망하기를 바랐고 조조도 손견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는 동상이몽이었다. 낙양에 입성한 손견은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동탁이 휘황찬란하던 궁전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고 능묘들을 파헤쳐 보물을 약탈해갔다. 불에 탄 궁정 폐허에서 목이 말라 우물의 물을 길어 올려 마시려고 했던 찰나 두 눈이 황소 눈이 되었다. 두레박에 노란 황금색 보자기가 건져졌고 그것을 풀어보니 옥새가 들어 있었다. 큰 꿈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손견은 전쟁 중에 유표의 부하 황조의 손에 죽는다. 후계자 손책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까짓 옥새에 목을 매지 않고 원술에게 군대를 빌리는 조건으로 넘겨준다. 이 스토리는 소설 <삼국연의>에 등장한다. 소설은 소설이다. 문학적인 표현일 뿐 역사사실이 아니다. <후한서>에 의하면 손견은 원술의 부하였고 원술은 손견의 부인 손에서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소설이든 역사사실이든 아무튼 옥새가 원술의 손에 있었고 그는 그것을 무기로 스스로 황제를 참칭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가짜 황제였다. 당연히 온통 천하의 반대에 부딪혔다. 원술과 가장 관계가 좋았던 손책마저 편지를 보내 절교를 선언했다. 가짜 황제든 진짜 황제든 황제를 칭했으면 정치를 잘해야 하는데 원술은 그런 재목이 아니었다. <후한서>에 의하면 “향락과 사치가 점점 심해져 수백 명의 후궁들은 모두 수놓은 비단 옷을 입는데 사졸들은 헐벗고 굶주려서 장강과 회수 사이의 지역은 사람의 자취가 끊기고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또 자신은 산해진미를 매일 먹으면서 수하 병사들은 차례로 얼려 죽이고 굶겨 죽였다. 원술의 칭제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조조였다. 조조는 직접 원술 징벌에 나섰다. 원술은 조조의 상대가 아니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원술은 2년간 버티다 건안 4년(199) 여름 도망갈 길이 없어 결국 자신이 황제노릇을 더 이상 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국옥새를 원소에게 넘겨주었다. 원씨 형제가 그토록 물고 뜯고 죽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원수 사이였는데 관건적인 시각에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조조는 원술을 말려 죽이는 작전을 취했다. 유비를 보내 하비(下邳, 원술의 근거지)에서 퇴로를 차단했다. 원술은 할 수 없이 회남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들어 죽었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한때 황제를 참칭했던 원술의 말로는 꿀물 한 모금, 보리밥 한 끼도 제대로 구하지 못할 만큼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0-07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⑥
    (전번 계속) 한편으로는 병동을 개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환자를 접수하여 치료했다. 우한의 몇몇 종합병원들에서는 일반 병동에 칸막이를 하고 밀봉하는 방법으로 지정 병원으로 만들어 코로나 19 환자들을 집중 접수하기 시작했다. ‘도시봉쇄’와 더불어 ‘베이징 쇼탕산(北京小汤山)’ 모델이 우한에 재 출현했다. 군민의 협동작전으로 환자를 집중 접수하고 치료 - 훠선산(火神山), 레이선산(雷神山)이란 2개소의 전염병전문병원이 10여 일만에 준공되어 2500개의 침대를 제공하였다. 억만의 중국인들은 이 시간과 공간이 극 도록 압축된 전쟁터를 견증하였다. 최고봉 시 4만 여명에 달하는 건설 자들이 주야로 악전고투, 수천 대에 달하는 굴삭기, 불도저들이 쉼 없이 움직이며 밤을 밝혔다. 또한 강 유력한 의료지원 행동이 대 규모로 집중되면서 우한과 후베이 성 의료자원이 몹시 결핍한 엄중 재해구의 곤경과 압력을 해소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 코로나 19와의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 보이지 않았으며 형세는 오랫동안 바이러스와의 대치상태에 처해 있었다. ▲3월 2일, 우한시 장안구 사회구역 자원봉사자들이 사회구역 내 기초생활 수급 가정에 일용품을 전달해 주고 있다.ⓒ신화사 2월 2일, 우한의 코로나 19 누적 확진사례는 5142건이었고 2월 3일에는 누적 확진사례가 6384건, 2월 4일에는 누적 확진사례가 8351건, 2월 10일에는 누적 확진사례가 1만 8454건…… 확진사례 증장의 곡선은 거의 한 갈래 수직선을 이루었다. 이렇듯 나라 전체가 만중일심으로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관건시기인 2월 3일,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소집, 다음 단계의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에 대해 연구하였다. 회의에서 시진핑 총 서기는 시간과 달리기 경주를 하고 마귀와 겨루기를 하는 것으로 코로나 19의 만연추세를 견결히 억제하여야 하며 이번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 전에서 견결히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한의 모든 통로를 봉쇄하여 2월 중순이 되었을 때 2개의 관건적인 조치가 시종 전반 국면을 유력하게 받쳐 주었다. 하나는 전국의 중증치료 의무역량이 자체로 구급설비를 갖고 와 전반 적으로 우한의 병동들을 접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를 집중하고 전문가를 집중하고 자원으로 집중하고 치료를 집중하는 즉 ‘4가지 집중’의 원칙으로 우세한 병력을 주 전장에 집중한 것이었다. 코로나 19 저격 전에서 이기자면 중점을 ‘예방’에 두어야 했다.    2월 10일 오후, 시진핑 총 서기가 베이징 시 차오양 구 안화리 사회구역(北京市朝阳区安华里社区)을 찾았을 때 그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옷소매를 롤업(卷袖子)했으며 체온을 체크하고 사회구역 주민위원회에서 힘있게 걸으면서 ‘전민 전역(疫)’을 호소했다. “코로나 19에 대한 예방 통제 사업은 한 차례의 인민전쟁입니다. 대중을 믿고 대중을 발동하면서 사회구역 전염병 예방 통제 사업 중의 ‘저격 작용’을 충분히 발휘시켜야 합니다.” 코로나 19 방역과 의료구급 이 두 개의 ‘전역’을 총괄 계획하였다. 연합방지 연합통제 진지를 구축하고 군중들의 방역과 군중들의 통제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전례 없는 대 규모 격리조치를 취하여 전국적인 자원을 집중하여 구급치료를 전개하였다. ‘야전병원’격인 방창병원은 평화시기의 대 규모 구원행동을 창조적으로 응용해 이 생명보위 전의 ‘기병’으로 되었다. 한편 코로나 19에 대한 요해가 점차 깊어짐에 따라 의료일꾼들은 감염자 중에 경증환자의 비례가 약 80%이고 수량이 방대한 경증환자가 곧 바이러스 확산의 ‘수도꼭지’이며 또한 중증 ‘언색호(堰塞湖)’의 근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큰 공간을 이용하고 침대수가 많은 ‘방창병원’은 우리 이 국가가 관건시기에 내놓은 관건적인 거동이며 중국이 내놓은 중대한 공공위생 조치었다.” 이는 중국 공정 원 부 원장인 왕천(王辰)의 말이다. 하루가 좀 넘는 시간의 품을 들여 개조한 우한 시 회의전시 센터의 장한 방창병원(江汉方舱医院)은 2월 5일 저녁 10시에 선참으로 사용하기 시작, 1500여장의 침대가 일차적으로 각 사회구역에서 호송해온 환자들에게 개방되었고 첫 진 3개소의 방창병원 중 다른 2개소 역시 뒷 따라 재빨리 사용에 교부되었다. 엄동의 계절, 비록 남방지구라지만 우한에는 비와 눈이 교차하며 내렸다. 하루 사이에 수천 장에 달하는 침대를 마련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그 내막에는 수많은 간부와 의료일꾼들의 시간과 박투하는 정신과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우한의 여러 대형병원의 책임자들이 방창병원을 전면 접수 관리하기 시작, 방화용 전용망부터 하루 세끼의 영양배합에 이르기까지, 도서열람실부터 전문 경찰역량을 배치하여 치안순라를 하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질서가 정연하고도 모든 순서가 명백했다. 2월 28일에 이르러 16개의 방창병원에서 접수 치료하는 환자 수는 1만 2000명, 우한의 환자 매 4명 중 1명은 방창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이런 방창병원들은 최종적으로 ‘0 감염, 0 사망과 0 재발(零感染、零死亡、零回头)’을 실현하였다. “방창병원은 중국이 성공적으로 코로나 19를 대응한 극히 중요한 창신 거동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언급한 영국간물 ‘랜스(lance;lancet)’의 주필 리처드 호턴은 또 이는 세계의 기타 나라들에서도 따라 배울만한 중요한 경험이라고 평가했다. 2월 16일, 우한에서는 재차 예정 3일에 달하는 집중적인 융단 식 대 조사를 전개, 내막을 철저히 파악하고 바이러스의 확산을 견결히 억제했으며 감염자에 대해 단 1명의 누락도 없이 수용 치료 하였다. 전 시 421만 호의 주민가정들에 대해 2 라운드에 거쳐 융단 식 조사를 통하여 우한 시에서는 도합 9037명의 확진 및 의심 환자 그리고 대량의 밀 접촉자들을 발견, ‘접수할 건 마땅히 접수하고 치료할 건 마땅히 치료 한다’는 시진핑 총 서기의 명령을 100%로 수행하였다. 한편 36개의 질병 통제 방역 팀이 우한에 재집결, 전국적으로 3개의 이동 P3 실험실을 옮겨와 조사와 접수 치료에 영향을 주는 ‘애로’ 환절을 해결하여 핵산검사 능력을 지속적으로 승화하도록 했다. 이로써 우한에서는 ‘급과 유형에 따라 접수 치료하고 경증과 중증의 병원 배치가 순리로운 구급 시스템’이 형성, 예하면 호텔과 합작하여 집중 격리 장소로 정하여 밀 접촉자를 격리했고 방창병원에서는 경증 확진환자와 의심환자를 접수하였으며 훠선산(火神山), 레이선산(雷神山)과 퉁지(同济) 등 대형종합병원에서는 중증환자를 접수 치료하기 시작, 개방된 침대 수는 9000여 장이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0-01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⑤
    (전번 계속) 모든 훌륭한 환경, 유효 혹은 무효 등을 막론하고 최종에 가서는 모두가 사실에 근거하여 말하기 마련이다. 전염병의 예방 통제 또한 그 모두가 점차 인식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며 이는 인류와 바이러스 사이의 이기고 지고 하는 잔혹한 싸움이었다. 중국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격리검역 법을 사용, ‘유동하는 중국’은 과단성 있게 ‘잠시 중단(暂停键)’이란 버튼을 눌렀다. 3월 20일, 대륙 본토의 코로나 19 확진사례가 단계적으로 소실되기까지 중국의 누적 확진사례가 보고된 것은 57일 사이에 800건으로부터 8만 여건에 이르렀으며 이 57일 사이에 중국은 바이러스의 전파를 유효하게 지연시키었다. 미국 예일대학과 중국 지난대학(暨南大学)이 합작하여 전개한 한 최신연구에 따르면 2월 29일, 중국이 실시한 국가 급과 성 급의 공공위생 조치는 후베이(湖北) 외 140만 명의 감염과 5.6만 명의 사망을 피면하게 했다. 아울러 바이러스 전파 정황의 기본 감염 수(R0)를 보면 1월 말의 2.992로부터 2월 말에는 1.243으로 하강시켰으며 후베이 외 지방에서는 0.614에까지 하강시켰다. “중국 측은 행동속도가 빨랐고 규모가 방대했는바 이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이는 중국제도의 우세로 해당 경험은 기타 나라들에서도 거울로 삼을 가치가 있다.” 이는 중국에 대한 세계위생조직(WHO) 사무총장 탄데세의 평가였다. ▲2월 24일, 우한시 장안구(江岸区) 황쓰루(黄石路)에 위치한 한커우(汉口) 약방, 후이민왠(惠民苑) 사회구역의 그리드맨(网格员) 펑펑(丰枫)이 주민들을 위해 구입한 약을 몸에 걸고 있다.ⓒ신화사 (2) 2020년 1월 23일 10시 정각, 불수강으로 제조된 가드레일(护栏)이 우한(武汉), 한커우(汉口)와 우창(武昌) 등 3 대 기차역에 들어가면서 출입구 통로를 모두 봉쇄하였다. 이에 앞서 ‘눈치 빠른 시민’ 500만 명은 진작 우한을 벗어났으며 남아있는 시민은 900만 명이었다. 이렇듯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코로나 19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 속에 빠지게 하였다. 대외 통로를 모두 봉쇄했지만 더욱 위험하고도 간고한 도전은 어떻게 하면 1000만 명을 초과하는 도시 내에서 전염병의 재 확산을 막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생명에 대한 의료일꾼들의 책임감은 미지에 대한 공포를 추월, 6만 여명에 달하는 당지 의무일꾼들은 솔선수범으로 ‘백색장성’을 구축하였다. 의사 찾기, 약 구하기, 생활필수품 사재기…… 올해의 춘제(春节)는 우한 시민들로 하여금 평생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각 병원의 발열 진찰부마다 환자들로 차 넘쳤으며 의사들이 과자, 라면 등으로 제야 음식(夜饭)을 대체하는 장면이 TV영상에 방영 되군 했다. 억만의 중국인들이 즐겨 시청하는 쥐띠해의 춘완(春晚)은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임시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다. ‘바이러스와 격리하자. 하지만 사랑만은 격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구절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했다. 관건적인 시기에 중공중앙 시진핑 총 서기가 “전염병은 곧 명령이고 예방 통제는 곧 책임”이란 총 동원령을 내렸다. 1월 25일, 즉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에 대해 재차 연구하고 재차 포치했으며 또 재차 동원하였다. “생명은 태산보다 중하다”ㅡ 시진핑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중앙은 코로나 19 대응 사업 지도 소조를 성립하기로 결정, 후베이(湖北) 등 전염병이 엄중하게 만연되는 지역에 파견하여 코로나 19 예방 통제 사업의 집중적인 통일 영도를 강화하기로 했다. 한편 당중앙의 요구에 의해 국무원 연합방지 연합통제 기제에서는 코로나 19를 대응하는 통일협조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1개 도시의 승패 여하, 전반 국면에 관계돼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의료진, 가장 선진적인 설비와 가장 급히 수요하는 자원을 집결 이동시키는 목적은 최대한으로 검사율과 치료율을 높이고 최대한으로 감염율과 사망률을 하강시키기 위한 것, 이 5개의 ‘가장’은 시종 중국의 코로나 19 대응에 있어서 관철 실행되었다. 만가정이 한 자리에 모이는 춘제 전날 밤, 한 대 또 한 대의 비행기가 ‘역행(逆行)’으로 하나의 목적지 ㅡ 우한 텐허 비행장(天河机场)에 착륙! 우한 ㅡ 우한의 전염병과의 인민전쟁은 2008년 원촨(汶川) 강진 후 전국에서 가장 큰 한 차례 재난구조행동이었다. 1월 27일, 시진핑 총서기의 위탁으로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무원 총리이며 중앙 코로나 19 대응 사업지도소조 조장인 리커창(李克强)이 우한으로 날아 가 전염병 예방 통제 사업을 고찰하는 한편 당중앙과 국무원을 대표하여 코로나 19 예방 통제 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료일꾼들을 위문하였다. 같은 날, 국무원 부 총리 쑨춘란(孙春兰)을 조장으로 하는 중앙지도 소조 역시 우한으로 진주, 우한에서의 체류기간 수차에 거쳐 코로나 19 정보에 대해 투명하게 발표할 데 관한 요구를 제출하였다. 1월 31일, 세계위생기구는 코로나 19는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공공위생 돌발사건이라고 선포하였다. 그 뒤 리란줸(李兰娟), 왕천(王辰), 황루치(黄璐琦), 장버리(张伯礼), 천워이(陈薇), 챠오제(乔杰), 퉁샤오린(仝小林) 등 여러 명의 원사들이 정예 전문가 팀을 거느리고 사면팔방으로부터 우한에 집결하였다. “여러분에 대해 전국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한은 이 고비를 꼭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한은 워낙 매우 영웅적인 도시였습니다.” 1월 말, 중난산(钟南山) 원사는 신화사 기자의 취재를 접수하면서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2월에 들어서면서 10여개 성의 종합병원 중증의학과 골간의료팀이 우한으로 집중, 이런 팀 중에는 원장 혹은 당서기가 인솔하는 팀도 적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새로운 병동을 접수, 아울러 호흡기, 감시 모니터, 체외 막 산소공급기(ECMO) 등 구급설비를 자체로 갖고 오기도 했다. 이번 후베이로 달려온 생명구조 대오 중에는 4.26만 명의 의무일꾼, 900여 명의 공공위생일꾼 등을 망라, 이 중에는 또 군에서 파견한 4000여 명의 의무일꾼이 있었다. 19개 성시에서 후베이로 달려온 지원대오는 우한 외의 16개 도시에 포진되었다. 시진핑 서기의 ‘받을 건 다 받아야 하며 절대 유예하지 말아야 한다(应收尽收、刻不容缓)’는 요구에 따라 중앙지도소조에서는 매일 후베이 성 특히는 우한 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다. 중앙지도소조의 인솔 하에 우한 시에서는 사회구역의 확진환자, 의심환자 및 확진환자와의 밀 접촉자와 일반 발열환자 등 ‘4류 인원’을 분류하여 집중관리, ‘받을 건 반드시 받고, 치료할 건 반드시 치료하며 검사할 건 반드시 검사하고 격리할 건 반드시 격리 한다’는 요구에 따라 망거두기 식 순서로 조사하고 집중 수용 치료를 했으며 끝까지 철저히 조사하는 등 공략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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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8
  • '삼국지' 재해석⑥ 황제를 폐립(廢立)한 포악무도한 동탁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사서인 진수의 <삼국지> 동탁전의 제목을 저자는 ‘대세를 타고 천하를 호령한 현실주의자’라고 달았다. 동탁이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함축한 제목치고는 너무나도 점잖은 표현이다. 동탁의 실제 모습은 <삼국지>에 등장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가장 가혹하고 잔인하고 ‘포악무도한 자였다. 동탁은 자가 중영(仲潁)이고 농서군(隴西郡) 임조현(臨兆縣) 사람이다. 농서군의 ‘농(隴)’은 ‘농’을 얻고 나니 ‘촉’을 넘본다는 고사성어 ‘득롱망촉(得隴望蜀)’에 등장한 중국 서북 지역에 있는 지명이다. 동탁은 재능이 있고 무예가 출중했으며 특히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군의 사마(장교)로 어느 한번 전공을 세워 비단 9천 필을 하사받았는데 그것을 모두 관리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아마 이때의 동탁은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참 십상시가 천하를 쥐락펴락 할 때 대장군 하진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는 도중에 동탁은 북망(北芒)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된 어린 황제를 뜻밖에 만나 모시고 궁으로 진입했다. 마침 동탁이 궁에 들어갈 때 외척 우두머리인 하진은 환관들 손에 목숨을 잃었고 환관무리가 잇따라 전멸된 뒤였고 원소와 조조마저 도망가다 보니 대적할만한 상대가 없었다. 천하가 자기 손에 잡히자 동탁은 당시 최고 실세였던 하태후를 살해하고 영제의 어린 아들 진류왕을 황제로 세웠다. 이렇게 동탁은 첫 스타트로 황제부터 갈아치웠다. 황제를 갈아치운 목적은 진류왕 유협은 생모인 왕부인이 하태후한테 독살 당했기 때문에 대신 국정을 맡을 태후가 없어 자신이 모든 것을 호령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동탁은 상국(上國)으로 옮기고 미후(郿侯)로 봉해졌으며 황제를 만날 때 종종걸음을 할 필요도 없었고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되고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궁전에 올랐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용상(황제의 침대)에서 가끔 잠을 잤고 궁녀도 마음대로 짓밟았으며 심지어 황실 공주도 지마음대로 간음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나라를 운영하려면 군사의 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사족(지식인)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동탁일지라도 이 정도의 도리와 원칙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탁은 ‘당고의 화’에 의해 음지에 있던 지식인들을 대규모로 복권시키고 환관들에게 핍박을 받았던 명사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자신이 서북지역에서 데려온 옛 부하들을 고작 하급관리에 머물게 하는 조치로 몸을 낮추려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결코 동탁과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탁의 임금을 폐립한 행위는 최대의 난신적자이기 때문에 유교를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지식인들이 그를 지지할 리가 없었다. 동시에 동탁도 지식인들과 어떻게 손을 잡아야 할지 그 방법조차 몰랐다. 예를 들어 동탁이 명사 채옹(蔡邕)을 등용하려 했지만 채옹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자 동탁은 뜻밖에도 사람을 보내 채옹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나라는 사람은 남의 가문을 멸하기를 좋아하니 알아서 하세요.” 동탁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싶었으나 어떻게 세워야할지 몰라 제멋대로 행동하다보니 지식인들의 환심을 사지 못했고 오히려 천하를 대란으로 몰아갔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무식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탁은 무식한데다 성정이 매우 포악무도했다. 그의 군사도 그를 닮아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잔인한 짓을 벌이기가 일쑤였다. 동탁은 일찍이 군대를 양성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마침 그때 2월의 봄 제사가 있어 백성은 각기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동탁의 군사들은 그곳에 있는 남자의 머리를 전부 베어 떨어뜨리고는 그들의 수레와 소를 타고 여자와 재물을 싣고 잘린 머리를 수레 축과 바퀴에 매어 달아 낙양으로 돌아와서는 도적을 공격해 승리하여 얻은 것이라고 말하고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다. 군대는 개양성 문으로 들어와 잘린 머리를 불태웠으며 여자들은 사병에게 주어 종이나 첩으로 삼도록 했다.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의 난이 한창일 때 도원결의를 맺고 황건적과 싸웠으나 상대의 병사들은 오합지졸이어서 싸움 같은 싸움을 해보지 못하다가 동탁의 군사를 만나 싸움 같은 싸움을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아마 싸움꾼이었다가 동탁의 군사를 만나 프로에 데뷔한 셈이었다. 동탁의 군사 중에 화웅이란 장수가 있었다. 반동탁연맹 장수 중에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모두가 벌벌 떨고 있을 때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관우란 자가 나타나 겨루겠다고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얕잡아 보았으나 조조만은 적극 지지했다. 심지어 조조는 따뜻한 술 한 잔 따라주며 격려했다. 그러자 관우 왈, "술이 식기 전에 목을 베어 돌아오겠습니다." 과연 관우는 단칼에 화웅의 목을 베어버렸다. 화웅이 죽자 여포가 직접 나섰다. 여포가 어찌나 대단한 장수인지 유비 삼형제가 달려들었으나 반나절 싸우고 승부가 나지 않자 돌아갔다. 천하에 적수가 없다던 여포가 유비 삼형제와 싸운 후 불안해진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했다. 그는 서울 낙양궁을 불태우고 능묘를 모두 파헤쳐 진귀한 물건들을 탈취했다. 그런데 관우가 동탁의 장수 화웅과 싸워 술이 식기 전에 목을 베었다느니, 천하의 여포가 유비 삼형제와 싸워 승부가 나지 않자 걱정되어 수도를 옮길 계획을 했다느니 하는 스토리들은 전부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의 문학적인 허구의 산물일 뿐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진수의 <삼국지> 동탁전에 의하면 '동탁은 산동의 호걸들이 모두 일어나자 벌벌 떨며 불안해서 천도를 결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탁은 천도 이후 포악무도한 횡포가 극에 달했다. 동탁은 장안에 도착해 태사가 되어 상보(尙父)라고 불렸고, 푸른색 덮개와 금꽃으로 장식한 수레를 탔으며 양쪽 번(轓, 수레에 흙이나 먼지가 튀거나 앉는 것을 막기 위한 덮개)에는 짐승 발톱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간마거(竿摩車)'라고 불렀다. 동탁의 동생 동민(董旻)은 좌장군이 되었고 호후(鄠侯)로 봉해졌으며 형의 아들 동황(董璜)은 시중과 중군교위(中軍校尉)가 되어 군대를 이끌었고 동씨 종족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조정 관리가 되었다. 공경(公卿)이 동탁을 만나려면 수레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했다. 하지만 동탁은 예의를 갖추어 답하지도 않았다. 태위, 사도, 사공(司空) 등 삼공과 상서 이하 관료는 동탁의 거처로 와서 업무를 보고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동탁은 미오(郿塢)를 세웠는데 높이를 장안 성벽과 같이하고 30년간 먹을 양식을 비축했다. 동탁은 일이 성공하면 천하를 지배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이곳을 지키며 일생을 마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번은 동탁이 미오로 나가자 공경 이하 관리들이 횡문(橫門, 장안에서 북쪽으로 나가는 문 가운데에서 서쪽에 있는 문)밖에서 송별연을 열었다. 동탁은 먼저 장막을 설치하고 술을 마시다가 북지군(北地郡)의 항복한 반란군 수백 명을 끌고 오라고 명했다. 좌중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혀를 자르고 손발을 절단하고 눈을 뽑아 큰 가마에 삶았다. 또 죽지 않는 자는 땅에 엎드린 채로 술잔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하니 모인 사람들은 벌벌 떨며 그릇과 젓가락을 떨어뜨리는데도 동탁은 태연하게 계속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태사가 하늘의 기운을 보고 대신 중에서 살육을 당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태위였던 장온(張溫)은 평소 동탁과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동탁 역시 내심 그를 증오했다. 동탁은 그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고 사람을 시켜 장온이 원술과 내통했다고 말하게 하고는 그를 매질하여 죽였다. 동탁의 법령은 가혹했고 좋고 싫음에 따라 형벌을 어지럽게 적용했으며 사람들이 서로 무고를 당했으므로 비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마주치면 단지 눈빛으로만 호소할 뿐이었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있듯이 지도자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죽음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사도 왕윤, 상서복야(尙書僕射) 사손서(士孫瑞), 동탁의 대장 여포가 함께 동탁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때 천자는 병세가 막 호전되어 미앙전(未央殿)으로 신하들을 모두 모이도록 했다. 여포는 같은 군(郡) 출신인 기도위(騎都尉) 이숙(李肅) 등에게 명해 친병 10명을 인솔하여 위사(衛士)의 의복을 입어 변장하고 궁전 옆문을 지키도록 했다. 여포는 조서를 품고 있었다. 동탁이 도착하자 이숙 등이 동탁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동탁이 놀라 여포는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자 여포가 말했다. "그대를 죽이라는 조서가 여기 있소."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장안의 선비와 백성은 모두 서로 축하했으며 동탁에게 영합한 자는 전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당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 초선이 여포와 동탁 사이를 오가는 삼각관계 때문에 여포가 질투해서 동탁을 죽이는 스토리가 있는데 이것도 완전 문학적인 허구로서 역사에 초선이란 인물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찌되었든 동탁이 여포의 손에 죽은 것은 역사사실이다. 그렇다면 동탁을 죽인 여포가 이젠 천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들 수 있기 마련이지만 이것은 그냥 추측일 뿐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동탁이 죽고 나자 이각과 곽사가 반란을 일으켜 여포를 몰아냈고 쫓겨난 여포는 떠돌아다니는 나그네가 되었고 결국 조조와 유비 손에 죽는다. 여기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가설을 말하자면 만약 원소가 포신의 말을 들었다면 역사는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즉 동탁이 서북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포신이 원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탁은 강성한 병사를 거느리고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일찍 손을 쓰지 않는다면 장차 그에게 제압당할 것입니다. 그는 방금 서울에 도착하여 피곤에 지쳐 있으니 이 틈을 타서 그를 습격한다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신의 이 말은 원소에게 소귀에 경 읽기였다. 진수의 <삼국지> 원소전에서 저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오만방자하고 우유부단하여 천하를 놓치다' 과연 원소는 쓸데없이 거만하기만 하고 정작 해야 할 일에서는 우유부단하여 동탁을 죽이지 못했고 오히려 동탁한테 쫓겨나 주객이 전도되는 비극을 맞았다. 필자 :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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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7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④
    (전번 계속) 우한에서의 첫 조사 자료를 얻은 후 전문가 팀 성원들은 코로나 19는 누군가의 전파에 의해 확산된 현상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우리는 즉시 우한 사람은 우한을 떠나지 말 것과 외지 사람은 우한으로 가지 말 것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문가 팀 성원들의 회억이었다. 1월 20일 아침 일찍 6명의 고급별 전문가들은 베이징의 중남해로 들어가 직접 결책 층과 대면하여 코로나 19에 대한 판단과 의견을 회보하였다. 당일의 국무원 상무회의는 전문 코로나 19를 예방 통제할 데 관한 포치 의정으로 진행, 중난산(钟南山), 리란줸(李兰娟) 등은 요청에 의해 열석했으며 아울러 코로나 19의 예방 통제 및 환자 구급 등에 대해 구체적인 건의를 했다. 이는 코로나 19 만연 국세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점으로 되었다. ▲우한방창병원(方舱医院)ⓒ신화사 1월 20일, 시진핑(习近平) 총 서기는 코로나 19 만연 국세를 두고 중요한 지시를 내리면서 인민대중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첫 자리에 놓고 코로나 19의 만연 국세를 견결히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날 오후, 중국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는 고급별 전문가 팀을 조직하여 브리핑을 열었고 브리핑에서 팀장 중난산은 엄숙한 어조로 “현재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바 이번의 이 전염병은 누군가에 의해 전파된 현상이란 것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당시는 한창 중국의 가장 큰 전통명절인 춘제(春节) 기간인지라 인구가 큰 범위로 밀집 이동하고 있었다. 특히 우한은 춘윈(春运)의 중추 위치에 있는지라 9개성으로 사통 발달했기에 인구유동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전염병 예방과 통제, 용단을 내려야 할 때는 과감히 용단을 내려야 1월 20일, 중국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는 공고를 발부하여 코로나 19를 전염병 방치법규의 규정에 따라 을 급류 전염병에 규합, 갑 급류 관리를 실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가 앞장서고 30개 부문이 포함되어 연방연공사업기제(联防联控工作机制)를 성립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은 적시 적으로 세계의 해당 국가와 국제조직에 통보하여 해당 정황을 교류하였다. 1월 하순 이래 시진핑 주석은 여러 나라 정부요원 및 국제조직의 책임자들과 수차 통화하거나 회견하는 등 형식으로 밀접한 소통을 유지하면서 중국의 코로나 19 예방 통제 상황을 공유했으며 중국인민이 일치하게 단결하여 ‘전염병’과 박투하는 견정한 결심을 전해 주었다. 코로나 19의 흉악하고 위험한 정도 인간의 예측을 훨씬 추월하였다. 우한 진인탄 병원(金银潭医院)의 중환자실(ICU)에는 호흡장애로 입원한 중증환자들로 가득 찼다. 환자는 급증하고 바이러스 감염 진단 키드가 엄청 부족한 상황에서 수많은 의심환자들은 적시 적으로 검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확진할 수 없고 집으로 돌아가면 집식구들한테 전염될까봐 두려워 많은 사람들은 사처로 도주하기 시작, 괴로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 ㅡ 이들 또한 거대한 유동 전염 원의 대 군체로 되었다. 폭풍우의 중심으로 된 후베이(湖北)와 우한은 대뜸 긴급 ‘전시상태’로 진입하였다. 1월 22일, 후베이 성에서는 중대돌발 공공위생 사건 Ⅱ급 긴급 경보를 가동하였으며 2일 후에는 그것을 Ⅰ급으로 상향 조정하였다. 1월 23일, 우한 시는 당 중앙의 결책포치에 따라 우한의 모든 통로를 봉쇄하였다. 이는 아주 어렵고도 힘든 중대 결정이었다. 중국의 춘윈이란 인류의 가장 큰 대규모 인구 이동시기에 인구가 1000만 명을 초과하는 현대화의 대 도시를 ‘봉쇄’하기로 한 결책 자들이 받는 압력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이 결책을 내리기까지 거대한 정치적 용기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용단을 내려야 할 때는 반드시 용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물쭈물하다가는 더 큰 재난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진핑 총 서기의 말이었다. 인류세계와 바이러스 세계와의 한 차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여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은 아무런 우려도 없이 선참으로 저격 전을 벌였다. 1월 23일부터 30개 성, 자치구와 직할시에서 선후로 ‘중대 돌발 공공위생 사건 I급 경보’를 발령했고 각 사회구역마다 예방 통체 조치를 낙실하고 온라인화를 실행했으며 융단 식 관리에 들어갔다. 2020년 춘제 연휴기를 연장, 각 대학을 비롯한 고등학교와 중소학교에서는 개학을 미루었고 중국의 ‘양회(两会 - 전국인대와 전국 정협 회의)’ 또한 미루어 소집하기로 했다…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의 견강한 영도 하에서 각지에서는 ‘대외적으로는 바이러스 유입을 방지하고 내부적으로는 확산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가장 전면적이고, 가장 엄격하며, 가장 철저한 전국적 규모로 되는 코로나 19 예방 통제 ‘전역’을 펼쳤다. 하나의 도시를 격리하여 하나의 나라를 보호하기 중국의 전례 없는 이 전염병 예방 통제의 거동은 세계 각국에 보내는 가장 명확한 경고신호이기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마귀이며 우리는 절대 마귀가 은닉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는 1월 28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에서 세계위생조직 사무총장 탄데세를 회견하였을 때 한 말이다. 한편 세계 각국에서는 중국의 코로나 19 예방 통제 거동에 대해 고도로 주목했다. 영국의 로이터 통신, 타임스 등 언론들은 우한의 통로를 봉쇄하는 현대의학사상의 첫 시험대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했지만 어떤 언론들을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도시봉쇄’의 유효성은 아직 증거가 없으며 격리는 공포를 인기시켜 의료자원의 긴장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9-20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③
    ▲2월 2일, 중국공군은 8대의 대형운수기를 출동시켜 군대의 후베이 지원팀을 우한 텐허 비행장에 수송하였다ⓒ신화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월 2일, 후베이 성에서 보낸 병례 샘플을 받은 후 중국 질병통제 센터 생물안전 수석 전문가 우구이전(武桂珍)과 바이러스 병 연구소 탄원제(谭文杰) 연구팀 그리고 자오샹(赵翔) 연구팀은 즉시 바이러스가 유전되는 ‘비밀번호’ 해독에 투입되었다. 2개 연구 팀이 릴레이를 하듯 주야로 실험하고 연구한 결과 24시간 뒤 드디어 바이러스 전체의 유전체 서열이 해명되었다. 유전체 대비 결과에 따르면 이 바이러스와 이미 알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차별이 비교적 컸으며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증후군)과의 유사성은 82%였다. 1월 3일, 중국 질병통제 센터, 중국 의학과학원, 중국 과학원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 군사의학 과학원 등 4대 최고의 과학연구 기구들에서는 병례 샘플에 대한 실험실 평행 검사를 진행하였다. 이 시각 비록 바이러스에 대해 많은 것이 미지수로 복잡하게 뒤섞여 겉모양으로는 암수를 구별하기 힘들었지만 중국은 제 1의 시간대에 세계에 향해 경고를 보냈다. 2020년 1월 3일을 계기로 중국 측은 정기적으로 세계위생조직(WHO), 미국을 포함한 해당 국가와 지역 조직 및 중국의 홍콩, 마카오, 타이완 지구에 적 시적으로 코로나 19의 해당 정보를 통보하군 하였다. 그리고 1월 4일을 계기로 중국 질병통제 센터의 책임자와 미국 질병통제 센터 책임자는 여러 차례 전화로 코로나 19의 해당 정보를 소개하고 기술합작 교류를 진행할 데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1월 5일, 세계위생조직에서는 처음으로 중국 우한에서 나타난 원인불명의 폐렴에 대해 정식으로 전 세계에 통보했다. 전 지구적으로 유행성 감기에 대해 공유하는 데이터베이스(数据库)와 미국 국가 생물기술 정보센터가 건립한 DNA 서열 데이터베이스에도 중국 과학가들이 제 1의 시간대에 바이러스 유전자 서열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 뒤 1주 내 중국은 또 지속적으로 바이러스 핵산검사 인화물탐침, 바이러스 유전자 조 서열정보를 세계위생조직에 통보해주었다. 이는 전 세계가 모두 이런 기술정보 원천을 공유하고 이로부터 시약제품을 개발 검사하고 백신을 연구 제작하는 등 바이러스와 정면에서 중국이 선두에서 ‘충돌’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월 7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범’을 가려내는 중요한 실험증거가 쇄정(锁定)되어 출범했다. 중국 질병통제 센터가 전자현미경으로 전형적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과립형태(颗粒形态)를 관찰하여 성공적으로 첫 코로나 바이러스의 바이러스 주(毒株)를 분리해냈던 것이다. 8일 만에 병원체의 확정, 바로 17년 전 전 세계가 수개월에 거쳐 SARS가 비 전형적인 폐렴의 병원체라는 것을 추적해낸 것에 비하면 이는 그야말로 초상상적이었다. 1월 9일, 중국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 전문가 평가 팀은 우한(武汉)에서 발생한 원인불명의 바이러스 폐렴의 병원체 정보를 대외에 공포, 병원체의 초보판단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밝혔다.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초보적으로 바이러스를 감정해 낸 것은 일종 현저한 성과이다.” 당시 세계위생조직에서는 이렇게 중국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란 생소한 단어는 수많은 생명을 석권하면서 휩쓸었다. 우한 퉁지병원(同济医院) 발열진찰 부에서는 일평균 40-50명의 환자를 접수, 최고봉에 달할 때는 하루에 수 천 명에 달하기까지 했다. 일선의 전염병 만연 상황은 부단히 심입하여 과학적 인식 등 정보로 되어 최고 결책자의 탁상 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전염병이 발생한 후 시진핑(习近平) 총 서기는 시시각각으로 코로나 19의 확산상황을 주목, 코로나 19에 대한 예방 통제 사업을 으뜸가는 대사로 틀어쥐었고 직접 지휘 포치하였으며 아울러 많은 중요한 지시와 비준을 하였다. 1월 7일, 시진핑 총 서기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직접 주최, 코로나 19의 예방 통제 사업에 여러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다. 1월 8일,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 제 2진의 전문가 팀이 우한에 도착, 코로나 19의 치료, 감측, 유행병학 조사처치와 샘플 검사 등 방법을 수정 개선하였다. 숨겨져 있는 바이러스, 기나긴 잠복기와 무증상 감염자… ‘교활한 바이러스’는 그 예방과 통제에 매우 어려움을 조성시켰다. 1월 13일, 세계위생조직은 성명을 발표하여 태국에서 1명의 중국관광객이 코로나 19로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현유의 우한의 사회관리통제 조치로는 코로나 19의 만연을 막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하루 속히 전염병 만연 상황을 판단하여 결책에 참고로 제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월 18일, 84세 고령인 중난산(钟南山) 원사가 광저우(广州)에서 우한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우한에 도착한 중난산 원사는 국가 의료 및 예방 통제 고급별 전문가 팀 팀장이었으며 기타 성원들로는 국가 전염병 중점학과 리드 전문가인 리란줸(李兰娟) 원사 등 6명이었다. 이 6명의 원사는 위급한 관두에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으며 이들의 임무는 먼저 우한으로 달려온 사업 팀과 공동으로 전염병 상황을 분석하고 당 중앙의 결책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1월 19일, 고급별 전문가 팀은 오전에 코로나 19 세미나에 참가한 후 인차 우한 진인탄 병원(武汉金银潭医院)과 우한 질병통제 센터에 가서 실지 조사를 진행했으며 정오 시간에는 휴식할 겨를도 없이 회의를 시작하여 오후 5시에야 회의를 마무리하고는 또 베이징(北京)으로 향발하는 항공편에 올랐다. 베이징에 도착한 후 이들은 인차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에 달려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다음 날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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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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