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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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억류' 케네스 배씨, 다시 노동수용소로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북한당국이 억류된 케네스 배씨를 병원에서 다시 노동수용소로 보냈다고 미국무부가 공개했다. 케네스 배씨는 2012년 11월 여행객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려던 순간 체포돼 15년 감옥형을 선고받았다. 체포 원인은 국가 반역죄로 밝혀졌다. 2013년 5월 특별교화소에 수감됐던 배씨는 건강악화로 작년 8월 5일부터 외국인 전용병원인 평양친선병원에서 지난달 20일까지 5개월 남짓 입원치료를 받았다. 소식에 따르면 북한은 9일 미국에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의 방북 허용 결정을 철회한다는 사실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미국무부의 배씨 석방 조치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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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14-02-09
  • “중국 해마다 새로 암병환자 300만명 발생, 세계 1위”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간암, 식도암, 위암, 페암 이 4가지 악성종양을 놓고 보면 중국에서 새로 발생하는 암병 사례와 사망사례는 역시 세계적으로 가장 많다. 일전 발표된 《세계암증보고》에서 아프리카, 아시아와 중남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이 암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적으로 보면 2012년 전 세계적으로 새로 암병환자가 1400만명이 발생했고 암사망인수가 820만명에 달했다. 보고는 중국에서 새로 진단한 암병사례가 307만명으로 전 세계 총수의 21.8%를 차지하고 암 사망인수는 220만명 가량으로 전 세계 암 사망인수의 26.9%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수치들은 중국 본국 2012년의 통계수치보다 약간 낮다. 중국매체의 보고에 따르면 전국 종양등기센터가 기록한 해마다 새로 증가하는 암병사례는 350만명이고 암으로 인한 사망인수는 250만명이다. 한편 2012년을 놓고 보면 세계적으로 발암률이 가장 높은 5개 나라로는 덴마크, 프랑스, 오스트랄리아, 벨기에와 노르웨이이다. 국제암연구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암사망률이 가장 높은 5개 나라로는 몽골, 헝가리, 아르메니아, 세르비아와 우루과이이다. 보고는 높은 암 발병과 사망을 초래하는 원인에 대해 저개발국들의 암 진료수단 부족 및 치료능력 제한을 들었다. 전 세계 범위에서 보면 현재 발병률이 가장 높은 암은 페암으로 2012년 새로 발생한 페암 사례가 180만명이고 사망인수가 159만명이며 그중 1/3이상이 중국에서 나타났다. 북경수도의과대학 페암진료센터주임 지수익은 흡연과 장기적인 공기오염 노출이 페암위험 증가의 주요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기타 암증 가운데서 전 세계적으로 새로 증가하는 간암과 식도암 사례의 50%가 중국에서 나타났다. 간암과 식도암의 사망사례중 중국이 각각 약 51%와 49%를 차지했다. 2012년 중국에서 새로 진단한 위암사례와 위암사망인수가 역시 전 세계의 40%이상을 차지했다. 페암, 식도암과 위암이 중국인들이 가장 걸리기 쉬운 3가지 암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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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2014-02-09
  • 중국 올 6월 말 전으로 큰 병 의료보험 시점 전면 추진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올해 중국에서 도시와 농촌 주민 큰 병 의료보험 시점을 전면 진행한다. 중국 국무원 의료개혁판공실은 8일, 도시와 농촌 주민 큰 병 의료보험을 가속 추진할데 대한 통지를 발부, 올 6월 말 전으로 각 성에서 도시와 농촌 주민 큰 병 의료보험 시점을 전면 가동하거나 확대해 주민들의 큰 병 의료비용 부담을 줄이고 병으로 인한 빈곤이 다시 빈곤을 낳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국무원 의료개혁판공실은 상업보험기구에서 전국 네트워크 우세를 이용해 보험참가자들에게 즉시결산, 타지역결산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격려했다. 이에 앞서 2012년 8월,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등 6개 부문에서는 “도시와 농촌 주민 큰 병 의료보험 지도의견”을 발표, 큰 병 의료보험 보상정책을 합리하게 책정하고 실제 보험 결산비례를 50%보다 낮지 않게 하며 의료비용의 높낮음에 따라 단계를 나누어 결산비례를 책정하되 원칙상에서 의료비용이 높을수록 보험 결산비례를 높게 책정할 것을 요구했다. 상술한 요구에 따라 도시주민 의료보험이든 신농촌 합작의료보험이든 제도범위 내에서 보편적으로 입원치료비 결산표준이 70% 좌우에 달하고 그 70% 이상 부분의 의료비용에 대해서는 재차 적어도 50%를 결산해 주고 있다. 국가인력사회보장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이미 23개 성에서 큰 병 의료보험 실시방안을 내왔고 120개 시점도시를 확정해 실시하고 있다. 국무원 의료개혁판공실은 8일 발표한 통지에서 이미 도시와 농촌 주민 큰 병 의료보험 시점을 실시하고 있는 성에서는 경험을 총화하고 점차 시점범위를 확대하며 아직 시점을 실시하지 않은 성에서는 2014년 6월 말 전으로 시점을 가동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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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9
  • [수기] 망각과 화해를 위한 “악수”
    ■ 김철균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이 노래은 일찍 어린 시절 내가 아버지한테서 배운 노래였고 또한 크면서 남몰래 추억속에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조용히 불러보군 했던 노래이기도 했다. 그제 날 전 박정희 한국대통령의 “18번지”었다던 이 노래ㅡ 나는 지금 이 노래를 다시 불러 보면서 이내 인생의 한토막을 정리해본다. × × ×연길시 모 호텔 예식장ㅡ 30대 고개에 갓 들어선 젊은 부부가 아기의 돌생일 파티를 열고 있었다. 사회자의 웅글진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된 50대 중반의 남녀가 춤을 추며 젊은 부부와 아기가 앉은 상앞으로 다가가더니 축의금이 든 붉은 봉투를 생일상 위에 놓는다. 이 50대 중반의 남녀ㅡ 그 남자가 바로 나였고 중년여인은 바로 나의 옛 마누라였던 임××씨었다. 임××ㅡ 나한테 있어서 그녀는 애증이 몹시 엇갈리던 여인이었다. 일찍 20대였던 낭만의 그 시절 가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치도록, 아니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가정을 이룬 뒤에는 티격태격 다투었었고 이내 주먹에 맞아 얻어터지기를 반복했던 여인이었으며 그 때의 세월에는 그닥 흔치도 않은 이혼이란 비극을 나한테 안겨준 여인이기도 했다. 이혼 뒤 나는 그녀를 두고 나의 모든 것을 망치게 한 죽일 년이라며 두고 두고 저주해 왔다. 나는 가정의 파열로 창피스러운 나머지 당시 “철밥통”이라는 직장에서 사표를 냈고 집도 없이 형제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죽자고 “디디우이(敌敌畏)” 한병을 사 놓고 자살을 시도, 3살짜리 어린 아들을 두고 차마 실행에 옮길 수 없어 포기한 적까지 있었다. 후에 나의 인생은 다시 반전이 됐다. 형제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형 화물선에서 근무하는 해외의 마도로스가 되어 세계 여러개 나라를 항행하며 안계를 넓히는 행운을 가지었으며 돈도 어느 정도 벌었다. 또한 돌아온 뒤에는 다시 “상경(연길)”해 내가 좋아하던 직업을 찾게 되었고 이어서 자식이 딸리지 않은 여인과 결혼(남들은 내가 처녀한테 장가를 들었다고 부러워 했음)해 귀여운 딸까지 보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한창 공부할 나이었던 나의 아들은 나와 임×× 여인 사이로 오가며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절강성 의오시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나중에야 한국회사에 취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나는 남의 자식들이 대학을 나와 하나 둘씩 국가 공무원 혹은 기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첫 마누라 임××씨에 대한 증오감으로 이빨을 갈군 했다. 몇년 뒤 나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그처럼 고생하던 나의 아들도 어느 정도 인생반전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됐고 1년 후 자식을 보았으며 이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첫 아기의 돌생일 파티도 하게 됐던 것이다. 얘기는 다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10월 6일에 있은 아들의 결혼식 때 나와 아들 사이에는 약간의 분쟁이 있었다. 아들의 주장인즉 자신의 결혼식에 친어머니가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지금의 마누라는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상황, 아들의 결혼을 두고 마누라와 나는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본처의 결혼식 참가여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언급이 없다는 건 마누라가 본처의 참가를 묵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었다. “여보, 내가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아들의 결혼식을 어수선하게 하지 마세요.”이 말은 본처가 참가해도 된다는 암시었고 또 이 때문에 자기가 한국에서 온지 않는다는 뜻이 다분히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들의 주장도 마누라의 귀뜸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유란 없었다. 그저 자존심이었다. 아들의 결혼식은 바로 내가 주최한다는 뜻에서 오는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지만 가령 그 때 아들의 결혼식을 그 애의 어머니인 임××씨가 주최한다고 한다면 역시 자존심 때문에 긍정코 참가하지 않을 심산이기도 했다. 그 이후 나는 아주 커다란 자아모순속에 빠졌다. 아무리 자존심이라지만 어딘가 너무했다는 자책도 없지 않았다. 썩 후에야 알았지만 아들의 결혼식이 되자 임××씨 여인은 한국에서 돌아 왔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 장소에는 들어 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몰래 혼례식을 올리는 아들과 며늘 아기의 모습을 훔쳐 보면서 그저 울기만 했다고 한다. 후에 아들은 울면서 이 얘기를 나한테 들려 주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 놓고 말하면 평생을 두고 가슴에 못이 박히는 일이예요.”아들은 별로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마디마디가 채찍이 되여 나의 가슴을 후려 치는 것 같았다. 기실 임×× 여인과의 이별내면에는 나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살고 있던 단층집에 비가 새도 문학을 한답시고 책만 붙잡고 있은 골방샌님, 거기에 초겨울 석탄을 실어 올 때마다 그 것을 창고에 퍼들이는 일은 그냥 아내의 일로만 여겼던 나였으며 그렇다고 문학으로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나의 과실이 더 크다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손자의 첫돌생일이 되었다. 나는 이번에만은 아들의 친어머니가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로 했다. 아니, 이번의 행사는 아들네 내외가 주최하니 그들한테 권리가 있다는 것이 더 적절했다. 헌데 손자의 첫돌생일이 되자 어느날 아들의 계모 즉 나 현재의 마누라가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 일을 어쩐담?…아들의 생모가 손자생일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면 아들을 키워준 계모한테는 손자생일에 참가할 권리가 없단 말인가?! 이러한 나의 고민을 풀어준 것은 그래도 마누라였다. “여보, 애들의 결혼에 임×× 언니를 참가시키지 않은 것이 썩 잘된 일은 같지 않아요. 제가 양보할테니 이번엔 임××언니가 당당하게 애엄마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합시다. 전 그냥 참가해 지켜만 보면 돼요.”나는 마누라가 눈물 겹도록 고마왔다. 아들 며느리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와락 끌어 안고 키스 세례라도 퍼붓고 싶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손자의 첫 돌 생일날 이전의 마누라와 함께 춤을 추며 손자한테로 다가가던 중 나는 얼핏 지금의 마누라가 앉아 있는 좌석을 뒤돌아 봤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기뻐하는 기색도, 그렇다고 억울해 하거나 분통해 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마누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장면, 이는 분명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여인인들 남편이 본처와 함께 춤추는 모습을 좋아하겠는가! 다만 그 심정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나는 옛 마누라 임××씨와 손을 잡았다. “오늘 합작을 잘해 줘 고맙소. 그리고 건강하고 부디 행복하길 바라오.”나는 불쾌했던 그녀와의 과거를 깡그리 잊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잘 지내기로 했다. 그냥 잘 알고 사이가 좋은 여인처럼, 또한 내 아들의 엄마로, 며느리의 시어머니로, 손자의 친할머니처럼 대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기까지었다. 도를 넘는 일, 그 것만은 분명 삼가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것은 필경 우리는 한솥 밥을 먹는 한가족도,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가 아니기 때문이다.이런 생각을 굴리며 나는 뒤에서 지켜 보는 이내 현재의 마누라를 돌아 보았다. 마누라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봄이라/ 오늘도 가는 곳이 꿈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주소: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 延边日报 综合周报 金哲均(김철균)电话:138-443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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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4-02-09
  • 한국어민 몸길이 175㎝짜리 초대형 돗돔 포획, 한화 170만원에 팔려
    현지시간으로 2014년 2월 6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 부산공동어시장에 길이 175㎝의 초대형 돗돔이 위탁판매장에 올라 경매를 통해 한화 170만원(인민페 약 1만원)에 판매되였다. 돗돔은 심해어이지만 몸길이 175㎝의 돗돔은 아주 보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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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2014-02-09
  • 연변구단, 연변 장백산 축구구락부로 명칭 변경
    [동포투데이 스포츠]밝혀진데 따르면 원 연변 장백호랑이 축구구락부가 최근 연변 장백산 축구구락부로 명칭을 변경했고 이미 중국축구협회에도 등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해에 따르면 연변 장백산 축구구락부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최근 연변구단을 후원하는 새로운 스폰서(赞助商)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연변구단의 새로운 스폰서는 장춘에 본부가 있으며 도합 4년간을 계약으로 잠시 매년 1000만 위안씩 연변구단을 후원하기로 협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철균
    • 스포츠
    2014-02-09
  • 소치올림픽 첫 금메달 주인공, 코첸버그 미국 스노보더
    [동포투데이 스포츠]스노보더 세이지 코첸버그 미국 선수가 2014 소치동계올림픽에서 93.50점을 획득하며 첫 금메달리스트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노르웨이의 스탈레 샌드베크 선수와 캐나다 마크 맥모리스 선수가 각각 91.75, 88.75점을 기록하며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2관왕인 미국의 숀 화이트 선수는 슬로프 경기 시작전 탈락됐으며 러시아 알렉세이 소볼레프 선수는 결승에 진입하지 못했다.
    • 스포츠
    2014-02-09
  • 광저우 헝다, 이탈리아 현역 국가대표 디아만티 영입
    [사진=광저우 헝다 FC] [동포투데이 스포츠]지난해 아시아 챔피언 중국 광저우 헝다(广州恒大)가 이탈리아 현역 국가대표 디아만티(Alessandro Diamanti)를 영입했다고 홈페지를 통해 발표했다 광저우 헝다는 최근 몇 년 동안 막대한 자금을 들여 콘카, 무리퀴, 엘케손, 바리오스 등을 영입해 아시아판 맨체스터 시티로 불렸다. 광저우는 지난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우승의 주역인 다리오 콘카가 팀을 떠난 뒤 그의 대체자를 찾기에 나섰다. 그 동안 조나단 비아비아니, 더글라스 코스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등이 광저우와 이적설이 났었지만 결국 디아만티와 계약했다. 디아만티는 광저우와 3년 계약을 맺었으며, 이적료로는 690만 유로로 알려졌다. 디아만티는 광저우에서 23번의 등번호를 받아 뛰게 된다. 왼발 킥이 뛰어난 디아만티는 201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와 2013년 국제축구연맹(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출전했다. 꾸준히 이탈리아대표팀에 발탁됐으며,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뛸 가능성도 높다. 한편, 광저우 헝다는 AFC 챔피언스리그 2연패를 도전하는데 전북 현대, 요코하마 F마리노스 등과 함께 G조에 속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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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9
  • 한국인 14.9% "재중동포에 호감을 느껴"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재외동포재단이 지난해 8월 27일부터 9월 27일까지 ㈜ 한국리서치와 명지대(청소년활동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실시한 "2013년도 재외동포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거주 지역에 따라 재외동포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도는 재미동포(55.0%), 재호주‧뉴질랜드동포(53.7%), 재유럽동포(46.5%), 재일동포(29.8%), 재중동포(14.9%), 재러시아‧CIS(13.3%), 재동남아동포(13.5%) 순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는 SPSS 12.0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빈도분석, 교차분석 등을 실시하였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은 ±3.46%이다. 한국인 67.2%가 재외동포(Overseas Korean)에 대해 한국민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으며, 65.6%가 재외동포에 대해 「한민족으로서의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구체적으로 한국민으로서의 동질감 측면에서는 긍정적 응답이 부정적 응답보다 4배 이상 높았고, 「한민족으로서의 소속감」 측면에서도 긍정적 응답이 부정적 응답보다 5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재외동포의 범주에 대해서는 ①‘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외국에 거주하는 국민(영주권자 포함)’(77.0%), ②‘중국, 구소련, 일본 등 일제강점기 때 자의 또는 타의로 이주한 사람 및 그 후손’(67.0%), ③‘대한민국 국민이었다가 외국국적을 취득한 이민자(시민권자 포함)’(58.6%) ④‘외국에서 태어나 자라서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재외동포 2, 3세’(48.9%), ⑤‘어릴 때 외국으로 입양돼 한국어는 물론 한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한인입양인’(48.5%)으로 조사되어 한국어와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2, 3세 재외동포와 한인입양인을 ‘재외동포’로 생각하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외동포재단은 앞으로도 "재외동포에 대한 국민인식조사"를 계속 실시하여 국민과 재외동포 간의 공감대 형성에 노력할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우리 국민들이 보다 편리하게 재외동포와 소통·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들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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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8
  • 어머니와 인생살이 그리고…
    ■ 김철균 인생살이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질문하면 당신은 과연 어떤 답안을 써 넣을지? 당신은 가능하게“여기에는 공식적인 답안은 없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 여기에 공식적인 답안을 써넣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인생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획분할 방법이 없다. 단, 나의 인생여정을 돌이켜 보노라면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도 컸다. 그냥 60%요, 70%요 하고 획분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한테 많이 주어서가 절대 아니다. 아니, 나한테 뭔가를 많이 주기는커녕 나의 곁을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린 어머니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10살때와 11살 때 각각 돌아갔다. 모두 그 동난세월이었던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되고 어머니 또한 매를 이기지 못해 훈춘강에 몸을 날리며 자결을 선택했었다. 헌데 당시 아버지의 죽음은 막을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얼마든지 말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1968년 8월의 어느 비오는 날 오전, 전날 밤 “독재소조”에서 매맞고 돌아온 어머니는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면서 나한테 함께 가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에 내가 비가 내리기에 안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나를 이윽토록 내려다보더니 그냥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집을 나간 어머니, 어머니는 그 길로 훈춘강가로 향했고 그 다음은 2일 만에 경신향의 두만강 나루터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 어머니ㅡ 그때 가령 내가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던 어머니를 따라갔더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돌릴 수 있었을 것이고 내가 수십년이 지나도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었다. 그 때로부터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란 그리움과 후회 사이로 오가는 무형의 존재였다. 형수님의 슬하에서의 4년, 집체호 생활의 3년 그리고 7년간의 기나긴 숙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어머니를 머리속에 떠 올렸고 간혹 지나 가는 40-50대 여인만 보아도 “저 분이라도 나의 어머니로 돼 줬으면”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기대를 해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편 나는 원래의 아내와 이혼을 하고 외토리로 생활해 본 적도 있었다. 아내가 없는 생활, 힘들고 외롭기는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생활이 어머니가 없는 생활에는 비길 수가 없었다. 막말로 “아내는 다시 찾아 맞아 들이면 될 수 있으나 한 번 간 어머니는 영영 돌아 올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비중ㅡ 이를 저울로 뜰 수는 없지만 또한 사람마다 가늠하는 척도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마음속에서만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내가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어머니를 비롯해 부모님이 돌아가면 늘 평소에 잘해주지 못했다면서 후회한다. 특히 여인들이 그렇다. 사위도 “반자식”이라고 나 또한 장모님을 몇 년간 모셔 본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아내는 장모님과 어짢은 일 갖고도 자주 다투고 언성을 높이군 했다. 노인이 되면 다시 아이처럼 된다고 80세 고령인 장모님이 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없지는 않았다. 헌데 이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고 돌아가기 전의 2 – 3년간 치매 비슷한 현상이 오면서 그런거였다. 후에 장모님이 사망하자 아내는 평소에 장모님과 싸우던 일을 외우면서 자주 울군 했다. 아내의 사례를 보아도 세상에 후회 약이란 없는 모양이다. 주지하다 시피 우리 세대는 이제 오래잖아 60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그러면 우리도 자식으로부터 노인취급을 받을 것이고 어짢은 일에도 자식한테 서운하고 더 나아가 노여운 일도 생길 것이다. 그럼 바꿔놓고 내가 부모한테 잘 했는가를 딱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보자. 부모한테 잘 해주는 것 그것은 결국 자식한테 효도를 바라는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作者地址:延吉市光明街89号延边日报综合周报金哲均电话:0433-2512568(办公室),138-4433-1207(手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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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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