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7(금)
 
■ 김철균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 노래은 일찍 어린 시절 내가 아버지한테서 배운 노래였고 또한 크면서 남몰래 추억속에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조용히 불러보군 했던 노래이기도 했다.
그제 날 전 박정희 한국대통령의 “18번지”었다던 이 노래ㅡ 나는 지금 이 노래를 다시 불러 보면서 이내 인생의 한토막을 정리해본다.

× × ×

연길시 모 호텔 예식장ㅡ

30대 고개에 갓 들어선 젊은 부부가 아기의 돌생일 파티를 열고 있었다. 사회자의 웅글진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된 50대 중반의 남녀가 춤을 추며 젊은 부부와 아기가 앉은 상앞으로 다가가더니 축의금이 든 붉은 봉투를 생일상 위에 놓는다. 이 50대 중반의 남녀ㅡ 그 남자가 바로 나였고 중년여인은 바로 나의 옛 마누라였던 임××씨었다.

임××ㅡ 나한테 있어서 그녀는 애증이 몹시 엇갈리던 여인이었다. 일찍 20대였던 낭만의 그 시절 가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치도록, 아니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가정을 이룬 뒤에는 티격태격 다투었었고 이내 주먹에 맞아 얻어터지기를 반복했던 여인이었으며 그 때의 세월에는 그닥 흔치도 않은 이혼이란 비극을 나한테 안겨준 여인이기도 했다.

이혼 뒤 나는 그녀를 두고 나의 모든 것을 망치게 한 죽일 년이라며 두고 두고 저주해 왔다. 나는 가정의 파열로 창피스러운 나머지 당시 “철밥통”이라는 직장에서 사표를 냈고 집도 없이 형제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죽자고 “디디우이(敌敌畏)” 한병을 사 놓고 자살을 시도, 3살짜리 어린 아들을 두고 차마 실행에 옮길 수 없어 포기한 적까지 있었다.

후에 나의 인생은 다시 반전이 됐다. 형제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형 화물선에서 근무하는 해외의 마도로스가 되어 세계 여러개 나라를 항행하며 안계를 넓히는 행운을 가지었으며 돈도 어느 정도 벌었다. 또한 돌아온 뒤에는 다시 “상경(연길)”해 내가 좋아하던 직업을 찾게 되었고 이어서 자식이 딸리지 않은 여인과 결혼(남들은 내가 처녀한테 장가를 들었다고 부러워 했음)해 귀여운 딸까지 보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한창 공부할 나이었던 나의 아들은 나와 임×× 여인 사이로 오가며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절강성 의오시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나중에야 한국회사에 취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나는 남의 자식들이 대학을 나와 하나 둘씩 국가 공무원 혹은 기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첫 마누라 임××씨에 대한 증오감으로 이빨을 갈군 했다.

몇년 뒤 나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그처럼 고생하던 나의 아들도 어느 정도 인생반전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됐고 1년 후 자식을 보았으며 이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첫 아기의 돌생일 파티도 하게 됐던 것이다.

얘기는 다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10월 6일에 있은 아들의 결혼식 때 나와 아들 사이에는 약간의 분쟁이 있었다. 아들의 주장인즉 자신의 결혼식에 친어머니가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지금의 마누라는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상황, 아들의 결혼을 두고 마누라와 나는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본처의 결혼식 참가여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언급이 없다는 건 마누라가 본처의 참가를 묵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었다.

“여보, 내가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아들의 결혼식을 어수선하게 하지 마세요.”

이 말은 본처가 참가해도 된다는 암시었고 또 이 때문에 자기가 한국에서 온지 않는다는 뜻이 다분히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들의 주장도 마누라의 귀뜸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유란 없었다. 그저 자존심이었다. 아들의 결혼식은 바로 내가 주최한다는 뜻에서 오는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지만 가령 그 때 아들의 결혼식을 그 애의 어머니인 임××씨가 주최한다고 한다면 역시 자존심 때문에 긍정코 참가하지 않을 심산이기도 했다.

그 이후 나는 아주 커다란 자아모순속에 빠졌다. 아무리 자존심이라지만 어딘가 너무했다는 자책도 없지 않았다. 썩 후에야 알았지만 아들의 결혼식이 되자 임××씨 여인은 한국에서 돌아 왔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 장소에는 들어 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몰래 혼례식을 올리는 아들과 며늘 아기의 모습을 훔쳐 보면서 그저 울기만 했다고 한다.

후에 아들은 울면서 이 얘기를 나한테 들려 주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 놓고 말하면 평생을 두고 가슴에 못이 박히는 일이예요.”

아들은 별로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마디마디가 채찍이 되여 나의 가슴을 후려 치는 것 같았다.

기실 임×× 여인과의 이별내면에는 나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살고 있던 단층집에 비가 새도 문학을 한답시고 책만 붙잡고 있은 골방샌님, 거기에 초겨울 석탄을 실어 올 때마다 그 것을 창고에 퍼들이는 일은 그냥 아내의 일로만 여겼던 나였으며 그렇다고 문학으로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나의 과실이 더 크다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손자의 첫돌생일이 되었다. 나는 이번에만은 아들의 친어머니가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로 했다. 아니, 이번의 행사는 아들네 내외가 주최하니 그들한테 권리가 있다는 것이 더 적절했다. 헌데 손자의 첫돌생일이 되자 어느날 아들의 계모 즉 나 현재의 마누라가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 일을 어쩐담?…아들의 생모가 손자생일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면 아들을 키워준 계모한테는 손자생일에 참가할 권리가 없단 말인가?!

이러한 나의 고민을 풀어준 것은 그래도 마누라였다.

“여보, 애들의 결혼에 임×× 언니를 참가시키지 않은 것이 썩 잘된 일은 같지 않아요. 제가 양보할테니 이번엔 임××언니가 당당하게 애엄마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합시다. 전 그냥 참가해 지켜만 보면 돼요.”

나는 마누라가 눈물 겹도록 고마왔다. 아들 며느리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와락 끌어 안고 키스 세례라도 퍼붓고 싶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손자의 첫 돌 생일날 이전의 마누라와 함께 춤을 추며 손자한테로 다가가던 중 나는 얼핏 지금의 마누라가 앉아 있는 좌석을 뒤돌아 봤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기뻐하는 기색도, 그렇다고 억울해 하거나 분통해 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마누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장면, 이는 분명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여인인들 남편이 본처와 함께 춤추는 모습을 좋아하겠는가! 다만 그 심정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나는 옛 마누라 임××씨와 손을 잡았다.

“오늘 합작을 잘해 줘 고맙소. 그리고 건강하고 부디 행복하길 바라오.”

나는 불쾌했던 그녀와의 과거를 깡그리 잊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잘 지내기로 했다. 그냥 잘 알고 사이가 좋은 여인처럼, 또한 내 아들의 엄마로, 며느리의 시어머니로, 손자의 친할머니처럼 대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기까지었다. 도를 넘는 일, 그 것만은 분명 삼가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것은 필경 우리는 한솥 밥을 먹는 한가족도,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굴리며 나는 뒤에서 지켜 보는 이내 현재의 마누라를 돌아 보았다.

마누라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봄이라/ 오늘도 가는 곳이 꿈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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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망각과 화해를 위한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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