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1) 끊을수 없는 모녀의 정
■김철균
결혼한 뒤 문영이는 극력 “친정 어머니”인 순자한테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무리 순자어머니가 무던하고 둘 사이가 극진하다지만 필경은 생모가 아닌 “양어머니”었고 거기에 민족도 다른 조선족 어머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외국에서는 만 18세만 되면 친 자식들도 부모의 도움에서 벗어나 자립한다는데 결혼할 때까지 “친정어머니”의 신세를 크게 지고 보니 심리적 부담과 압력이 생겼던 것이다. 하물며 순자어머니도 이젠 년로하기 시작한 몸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순자가 문영이의 효도를 어느 정도 받아들었더라면 그녀의 이러한 심리적 부담도 좀 가벼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영이가 간혹 용돈이라도 드리면 순자는 도리어 크게 성을 내기가 일쑤였고 돈 대신 부식품이나 보건품을 사갈 때면 마지 못해 그것을 받더라도 돌아올 때에는 그 가치보다 몇배에 달하는 돈을 억지로 넣어주는 순자였다.
문영이는 심정이 착잡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이어온 “모녀의 정”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양심이 도무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채찍질했다.
결혼 뒤 얼마 안되어 문영이는 임신하게 되었다. 임신 역시 여인한테 있어서는 결혼에 못지 않는 희사로서 자신이 드디어 어머니로 된다는 자부심으로 들뜨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영이는 임신사실을 일부러 순자한테 알리지 않았다. 알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알리면 또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올 “친정어머니”였겠으니 말이었다. 이렇듯 기쁜 일을 순자어머니한테 알릴 수 없는 문영이는 자주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문영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갔다. 이와 더불어 누가 돈화로 다녀오거나 편지를 쓸 때마다 순자는 “넌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손주를 안아 보고 싶구나” 하며 독촉이 불같았다. 또한 “너 어릴 때 고생하며 자라 혹시 냉병에라도 걸린거 아니냐? 의사인 네가 알아서 잘 처사하겠지만 그래도 이 엄마는 시름을 놓을 수 없단다”하고 염려하며 여러 모로 문영이한테 탐문하는 순자였다.
알리지 않으면 불효 같았고 알리면 어머니한테 부담을 끼치는 것 같아 문영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문영이가 이렇게 모순속에서 모대기고 있을 때 한 단위에서 근무하는 창범이가 일보러 연길로 갔다가 “문영이가 임신이고 벌써 몇 개월째 잡고 있다”고 순자한테 전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자는 그 말을 들은 이튿날로 돈화로 올라왔다.
문영이를 만나자 순자는 제법 크게 성을 냈다.
“내가 널 낳지 않았다고 네가 그러는 게 아니다. 이런 일을 알리지 않은 것도 역시 불효란다. 그리고 딸자식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을 보는 것도 부모로서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단다.”
문영이는 한동안 대답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저 쿨적거리며 울뿐이었다.
그러자 순자는 다시 문영이를 끌어 안으며 위안했다.
“문영아, 네 맘을 몰라서가 아니다. 네가 나한테 부담을 준다고 그러겠지. 하지만 이제 너도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 알겠지만 부모란 자식이 결혼해도 여전히 어린애처럼 여겨지기 마련이고 늘 걱정하기 마련이란다.”
“알겠어요. 어머니, 다신 안그 럴게요.”
순자는 문영이를 이끌고 임신부와 태아의 건강상태를 병원검진을 통해 확실하게 알아 보고서야 시름을 놓으며 연길로 돌아갔다.
이듬해 1월말 문영이의 출산날자가 다가오자 순자는 갓난아기의 기저귀, 아기이불, 아기옷과 닭, 토마트 같은 영양식품 그리고 문영의 옷들을 사들고 재차 돈화행을 하였다. 그 당시에도 순자네 가정생활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여의치 않아 순자는 서시장매대에 친구가 있는 셋째딸 영애의 담보로 이러한 물건들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출산을 앞둔 문영이는 몸이 몹시 부어 있었다. 그리고 남편외 옆에서 크게 돌봐주는 이도 없었다. 그것 역시 순자로서는 무척 가슴아픈 일이었다. 문영이가 가슴이 저려 나도록 불쌍했다.
“문영아, 몸이 무거울수록 가벼운 운동을 하여야 몸을 풀 때 힘들지 않고 순리롭단다.”
순자는 매일 아침마다 문영이를 데리고 보행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살다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을 다 겪어보게 된다. 순자가 바로 그랬다.
어느 하루였다. 그날도 순자가 문영이와 함께 돈화역 부근에서 산보삼아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짠지와 김치를 팔던 몇몇 조선족 아낙네들이 순자네 “모녀”를 보고 중얼대는 것이 순자의 귀에 들려왔다.
“저 로친네가 딸이 쉽게 해산하라고 저렇게 매일 걷게 한다우다.”
“글쎄, 딸이라지만 좀 이상한 것 아니우? 딸은 한족이고 저 할머니는 조선말을 하는데 혹시 저 할머니가 한족 영감한테 재가해 사는 거나 아이우?”
“그러게 말이웨다. 그래서 나도 별로 이상스럽다 여겼다니까.”
그 아낙네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순자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순자는 못들은걸로 그냥 지나치려다가 다리쉼도 할겸 그 아낙네들한테 돌아서며 한마디 했다.
“왜, 저 애가 한족이니 내가 한족영감을 해서 함께 살림을 하는 것 같수?”
“글쎄 그럼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저 애가 한족이고 내 딸인건 맞지만 내가 한족영감한테 재가한건 아니우다. 몇년전 저 애가 연변위생학교에 다닐 때부터 내가 양딸로 삼았던 애 올시다.”
그러면서 순자는 그들한테 문영이가 자라온 이왕지사와 자기의 양딸로 된 자초지종 등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장사군아낙네들은 “그랬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한족양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연길에서 돈화로 찾아온 순자의 소행에 못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문영이한테는 또 “너 정말 복이 있는 아이니 앞으로 이 조선족 어머니한테 잘해주라”고 부탁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문영이네 부부와 함께 붕곤이를 안고서
며칠 후 문영이는 돈화시 부유보건원에서 출산했다. 순산으로 아들을 낳았다. 너부죽한 얼굴에 아주 건실한 아들애었다.
문영이가 출산했다고 하자 그 이튿날로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도 너무도 기뻐 어쩔바를 몰라하며 한달음에 돈화로 찾아왔다.
장인어른이 오자 문영의 남편은 이 때라 하고 아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아니, 자네 교원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애 이름을 지을줄 몰라서 나한테 지어 달라고 하나?”
“아닙니다. 애들의 이름은 한대를 거슬어 올라가 할아버지가 지으면 좋다고 해서요.”
“어허, 이 사람아! 그러면 친 할아버지가 지어야지 나 이 외할아버지가 무슨 자격이 있는가?!”
“그래도 일자무식인 저의 부친보다도 학식이 높은 장인어른이 지으면 더 멋지게 지을 것이 아닙니까?”
이 말에 용환 영감은 슬며시 흐뭇해하며 아주 흥미가 동해하였다.
하지만 이에 순자가 견결히 반대였다.
“영감 무슨 망녕이시우? 멀쩡한 바깥사돈을 두고 왜 령감이 외손군의 이름을 짓는다구 그러우?!”
그렇게 되여 결국 후날 문영이의 시아버지가 아기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 아기의 이름은 바로 심붕곤(沈鹏坤)으로 지어졌다.
한편 실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일이 생겼다. 해산한 이튿날 진통이 어느 정도 가셔지고 혼자서 변소출입도 하게 된 문영이가 아기를 누워서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아기를 보면서 머리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더니 불현듯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이리 와봐요.”
“왜 그러느냐?”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아기를 와봐요. 이 애가 어쩐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뭐라구?! 아기가 나를 닮다니. 소웃다 꾸러기가 터지겠다.”
하지만 아기의 얼굴을 뜯어보니 이마와 눈부위며가 어쩐지 순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용환 영감도 아기를 뜯어보더니 “하하하”하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게 웬일이요? 아기는 분명 문영가 낳았는데 당신을 닮다니?! 이상한 일이 아니요?” 이에 문영이네 부부와 순자네 내외는 물론 사돈내외까지 이상하다는듯 어안이 벙벙하던 중 불현듯 문영이가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맞아요. 임산부가 누구를 생각하면 아기는 흔히 그를 닮는다고 했거든요. 제가 임신 때 내내 어머니를 생각했기에 아기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어 보니 이는 아주 그럴듯했다.
이 때 문영의 신랑 심엽군도 맞장구를 치면서 “그리고 임산부가 누구를 미워하면 또 그를 닮을 확률이 크다”면서 한마디 참견했다. 이어 문영의 신랑은 언젠가 돈화의 한집에서 며느리가 임신 중에 벌름코인 시동생을 몹시 미워했는데 후에 아기를 낳고보니 아기가 글쎄 벌름코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시동생은 남자여서 벌름코래도 괜찮았으나 그 아기는 여자애여서 참 꼴불견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말에 일동은 재차 폭소를 터뜨렸다.
↑온 가족이 문영의 아들 붕곤이를 놓고 담소하고 있다
다른 한편 문영이가 아들을 낳자 영순이를 비롯한 딸들은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딸을 낳았더면 더 좋았을텐데”하고 좀 서운해하였다. 그러자 순자는 딸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너희들이 뭘 알아서 그러느냐?! 만약 외래 침략자들이 쳐들어 오면 그래도 남자들이 나가서 그걸 막지 치마를 두른 너희들이 막겠느냐? 지금 젊은이들은 진짜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른단 말이다. 그래 집안에 남자가 없어봐라. 집안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집도 너희들 아버지가 계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오늘같은 날이 없다 없어. 난 문영이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주 자랑스럽다.”
이는 결코 문영이가 낳은 아들애가 순자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해서 하는 유치스러운 항변이 아니었다.
순자가 남자를 잘 받들어야 가정과 사회가 안정하고 태평하다는 것도 결코 봉건사상에서 나오는 이론은 아니었다.
“남자가 밖에서 잘 벌어들이고 여자가 집안일을 하는 가정은 말썽이 없이 화목하지만 여자가 밖에서 벌고 남자가 집에서 노는 가정은 하루 건너 말썽과 싸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누라가 남정을 존경하지 않으면 자식들도 따라서 예의범절이 엉망이 되기 쉬우며 그런 가정은 망나니 가정이다”, “우리 집도 아버지란 든든한 존재가 있으니 이 어미도 시름을 놓고 가정운영과 사회봉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등 논법은 어디까지나 생활이치에 맞는 언사였지 봉건사상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면서 순자는 항일전쟁시기 여자 유격대장이 출현하고 문화혁명 때 “무쇠처녀”가 등장해 메를 휘두르는 등 모습은 중국여성이 강하다는 것을 설명할뿐이지 결코 정상적인 인륜법칙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반대로 남자가 해해거리며 상점이나 식당의 접대원을 한다면 그보다 더 이상의 꼴불견은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순자한테 남존녀비사상이 농후한 것도 아니었다. 3명의 되는 아들들한테는 여자들이란 남편을 믿고 사는만큼 항상 색시한테 잘해주고 색시들이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웬간해서는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당부하던 순자였다.
다만 요즘 세월처럼 여자애들을 더 이뻐하고 또 어딘가 모르게 여자애들이 더 우쭐렁거리는 기풍에 어딘가 못마땅해하는 순자였지 여자를 하대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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