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8(화)
 


■ 허길성

1

 

거듭 언급했지만 나는 1960년대 중기 어느 한 지인의 소개로 당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의 처녀인 송금자씨를 만나 약혼한 뒤 1966년의 결혼에까지 이어지게 되였다.


결혼초기 우리는 연길과 개산툰 이렇게 두곳에 떨어져 생활하게 되였다.


결혼 1년뒤 안해가 출산하게 되였다. 당시 안해는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나한테 곧 출산하게 된다는 전보문을 보내왔다. 그런데 부대에서는 내가 개산툰으로 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혁명의 무단투쟁으로 개산툰의 형세가 몹시 혼란한 상황이였다. 파벌싸움은 물론 총소리가 나는 류혈싸움으로까지 번져졌기에 부대에서는 나의 안전 때문에 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안해한테서 두번째 전보가 왔다. 난산이 되여 복부절개수술로 겨우 아기를 출산했다는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재차 부대에 청시, 안해의 출산 5일만에야 겨우 허락을 받게 되였다.


내가 개산툰에 도착하여 안해가 들어있는 작으마한 세방에 들어서자 얼굴이 퉁퉁 부은 안해가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안고 있었다. 당시 안해는 수술자리의 실도 뽑지 않은 상황, 녀동생들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모든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안해를 보는 순간, 나는 강한 자책감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해가 불쌍했다. 안해한테 미안했다. 그때 그 당시의 안해에 대한 죄책감ㅡ 나는 두고 두고 잊을수가 없었다.


나의 첫 자식, 영혜는 바로 이렇게 태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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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태여난 딸 영혜는 자라면서 이쁘고도 대단히 총명했다. 이는 나의 딸이라고 해서 자랑하는것이 아니라 남들도 모두 그렇게 평가했다.


우리는 딸을 곱게 잘 키우기로 했다.


딸 영혜는 우리 부부의 기대처럼 별로 탈없이 잘 컸다. 특히 2살이 되자 영혜는 라지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고사리같은 손을 하느작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고 3살을 넘기자 제법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하면서 노래 한수를 몇번만 들어도 그것을 그 곡과 가사까지 외우면서 소화하군 했다.


“여보게 애기엄마, 애가 어쩌면 이렇게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한다우?! 앞으로 이 집에서 예술가 한명이 나올 모양이구만.”


“녀자애들은 예술이나 교원으로 일하게 하는것이 아주 제격이라오. 깨끗하고 힘도 들지 않고 말이요.”


우리 역시 딸 영혜를 음악가로 키울 계획이였다.


안해 또한 나의 결정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헌데 인생이란 한치 앞날도 내다보지 못한다고나 할가? 1972년부터 내가 군복을 벗기운 뒤 연변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게 되면서 가정생활도 급작스레 내리막질을 하기 시작하였고 게다가 그해에 아들 영동이까지 태여나면서 딸 영혜한테 피아노를 사준다던 계획은 그저 나무아미타불에그친듯 싶었다. 또한 그저 아주 먼 앞날의 “신기루”같은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해는 결코 그것을 포기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안해는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했다. 말그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까운 곳이건 아주 먼곳이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군 했다. 그리고 병원의 밤당직을 서고 퇴근한 뒤 낮에 잠을 잘념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일거리를 찾아다니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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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후에 딸 영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사범학교 음악학부에 입학, 그때로부터 우리는 진짜 딸 영혜한테 피아노를 사주기로 결정지었다. 그렇게 약 2년이 지나자 안해는 다시 친정집에 손을 내밀고 또 여러 친구들한테 사정사정해서는 드디여 피아노를 살만한 돈을 마련했다.


피아노를 사오던 날, 나는 안해의 손을 잡았지만 그만 할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저 코등이 시큰해나며 눈물이 앞을 가리기만 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그 피아노가격은 적으만치 인민페로 6800원이였다. 그 6800원 ㅡ 이는 당시 우리 부부 둘의 로임으로 놓고 볼 때 말그대로 천문수치였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그 피아노를 작으마한 웃방 벽쪽에 놓으니 헐망한 집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피아노가 집안에 어울리건 말건 나는 피아노를 딸애한테 선물했다고 생각되니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산다고 큰소리 치며 장담한건 나였지만 실제적으로 노력하며 행동에 옮긴건 안해였다. 나는 그런 안해가 고맙기 그지 없었고 절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였다.


그때 나는 아무리 역경속에 처하더라도 노력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철리를 안해를 통해 알게 되였다.

딸 영혜는 크면서 예술적 재질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인정스러웠으며 그리고 밖에 나가서도 례의가 밝아 동네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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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영혜는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전당인 연변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한동안 음악을 전공했고 졸업후에는 재차 연변예술학원에 입학, 연변예술학원을 마친 후에는 연길시소년궁전에서 음악교원으로 몇년간 근무했다. 그러다가 다시 일본류학길에 올라 계속 자신의 꿈을 키워갔다.


현재 딸 영혜는 수도 북경의 모 일본회사에서 중견으로 사업하고있는 상황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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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영혜와 3년 터불로 태여난 아들 영동이는 누나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남자답게 듬직하고도 말수도 적었다. 그리고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도 별 반응이 없었으며 그러한것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았다. 이러한 성격을 보면 아들애는 나를 많이 닮은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애가 이 애비를 닮은것 같다고 말하면 안해는 점잖고 말수가 적은 아들애가 자기를 더 닮았다고 우기기도 하여나중에는 그저 웃음으로 끝나기가 일쑤였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롱작을 잘 쓰군 했다.


대신 그애는 5살쯤 되자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놀음감같은것이 생기면 그냥 갖고 노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주 뜯고 맞추고 하면서 원가를 궁리하는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놀음감을 망가뜨릴 때도 있었지만 나는 물론 안해도 이를 나무람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장차 커서 애가 뭔가 크게 연구하고 발명할것 같아서였다.


아들 영동이는 비교적 사색을 즐기는 그런 류형의 아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영동이는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 학급내에서 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학습성적이 우수하였는데 특히 그중 수학성적이 돌출하였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도 했지만 머리가 남달리 총명한것 같았다.


그애는 외형적으로 성격이 강하고 말없이 남을 도와주는 일을 곧 잘하군 했다. 책읽기도 어느 정도 좋아했고  운동에도 퍼그나 취미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애의 성격으로 보아 그가 공부로 출세할것을 바랐다.  


아들 영동이는 소학교때부터 초중에 이르기까지 늘 우수생 혹은 최우등생으로 성적파동이란 거의 없이 공부하다가 아무런 하자도 없이 연변1중에 붙었고 고중을 졸업한 후에는 역시 대학입시 첫해에 연변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한편 아들까지 대학에 붙자 남들은 모두 우리 부부를 극찬하며 부러워했지만 기실 자식들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하는 일이란 무던히도 힘든 노릇이였다. 우리 내외간의 로임으로는 그애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이어댈수가 없었다. 뭐든지 해야 했다.


바로 그럴쯤인 1993년에 안해는 오랜 생활고로 얻은 지병때문에 퇴직휴양하게 됐다. 하지만 안해는 자녀 둘의 공부뒤바라지때문에 시름놓고 병치료에 전념할수 없었다.


퇴직후 안해는 병치료를 하다말고 아픈 몸을 질질 끌며 자녀 둘을 위한 새로운 일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안해는 연길시 어느 대형복장점에 찾아가서 일거리를 맡아왔다. 복장점 재단한 옷감을 가져다가 집에 있는 재봉침으로 2차 가공을 하는것이였는데 삯값은 매 견지당 겨우 2전이였다. 삯일치고는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보수였으며 1년간 아글타글 해봤자 1000원 수입도 되나마나했다. 그러나 아픈 몸으로 다른 힘든 일은 할수 없고 신체에 알맞는 부업거리란 오직 그것뿐이였다. 


한낱 눈에 차지도 않는 돈벌이였지만 안해는 그 일을 열심히 했다. 저녁마다 밥술이 떨어지면 재봉침앞에 앉았고 일단 앉았다 하면 늘 자정을 넘기군 했다. 그래서 그냥 보다 못해 나도 거들어줄 때가 가끔씩 있었지만 저녁 10시만 되면 안해가 이튿날 출근하는 나를 념려해 떠밀었으며 나또한 부득불 안해 먼저 잠자리에 들 때가 많았다.


우리는 2년간 그 삯일을 했다. 그동안 안해는 반품이 없도록 하기 위해 꼼꼼히 살피며 질을 보장했고 정한 날자에 가공품을 공장에 바치느라고 밤을 샐 때도 자주 있었다. 그 사이 오래동안 재봉침앞에서 정신을 집중해 일한 탓이랄가. 안해의 시력은 형편없이 망가졌다.


이렇게 악전고투하며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한 보람으로 딸 영혜는 일본류학을 마치고 귀국해 북경에 정착했고 아들 영동이 역시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본교의 교원으로 배치받게 되였다.


그뒤를 이어 선후로 딸과 아들 모두 취직해 우리 내외간은 어느 정도 시름을 놓게 됐다. 뜻인즉 예전처럼 아글타글하지 않아도 나의 로임과 안해의 퇴직금으로 유족한 생활을 할수 있었고 어느 정도 결혼한 자식들을 도울수도 있게 됐다.


헌데 아들 영동이가 연변대학 교원직이 퍽 맘에 들어하지 않아했다. 그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더 하여 박사학위까지 따낼 뜻을 내비치였다. 물론 영동이는 더는 부모한테 기대지 않고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겠다고 했으며 나 역시 “공부를 더 하는건 네뜻이지만 부모한테도 부모로서의 인생이 있으니 더 이상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할수 없다”고 못박아 뜻을 밝혔으나 부모로 생겨 공부를 더해 박사학위를 취득하겠다는 아들의 일에 그저 수수방관할수 없는일이였다.


그러자 우리 부부한테는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를 밀어줘야 할 또 다른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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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앞에서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결국 그의 박사공부를 도와주기로 하였다. 자식이 장래를 위해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는데 부모로서 그것을 막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나서자고 보니 우리한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것도 국내에서의 박사공부도 아니였다. 당시만도 우리 중국에 비해 물가가 엄청 비싼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를 받쳐준다는건 복장공장의 옷감을 가져다 2차 가공을 하는것 같은 삯일을 해서 되는것이 아니였다. 아니 턱도 없었다. 옛날에는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킨다고 했지만 지금은 소뿐이 나니라 집을 팔아도 자식의 뒤받침을 한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것도 외국에서 류학하는 자식을 돕자면 더욱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 뭔가를 하긴 해야 했다. 그렇다면 뭘 해야 된단 말인가? 큰 자금이 없으니 내지를 드다들며 통 큰 장사는 할수 없는거고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재직이였기에 그럴만한 정력과 시간도 없었다.


바로 그 시기 연변에서는 해리서를 사육하는 바람이 일었다. 즉 해리서새끼를 가져다가 키워서는 나중에 원 주인한테 바쳐 계약대로 주인한테서 돈을 받는것인데 아무리 해도 그것이 다른 장사나 삯일보다는 헐씬 쉽게 할수 있는 부업거리로 해볼만한것 같았다. 그런데 관건은 관리였다. 해리서에 대한 사료공급도 잘해야 하거니와 질병예방조치도적시적으로 잘해야 했으며 모든것은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여야 했다.


큰 실패를 피하기 위해 나는 해리서 새끼를 사들이기전에 서점에 가 해리서사육에 관련한 책 몇권을 사다가는 읽으며 중요한 부분들은 수첩에 적으면서 학습하였다. 그러고는 철근과 철판으로 집안 객실에 해리서우리를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해리서 새끼들을 사들였다.


정식으로 해리서에 대한 사육이 가동되자 나와 안해는 비교적 분공이 분명했다. 안해는 주로 사료를 배합하고 끓이고 하여 먹이를 만들어서는 해리서한테 규정된 시간마다 공급하는 한편 해리서우리를 청소하는것 등이였고 나는 또한 해리서사료를 구입하고 2-3일에 한번씩 해리서우리를 소독하는것 등 작업을 맡았다. 왜냐하면 낮에는 내가 주로 출근해야 하기에 매일 해리서한테 먹이를 주면서 보살필수는 없었기 때문이였다. 하긴 그렇게 분공이 명확했지만 휴식일에는 나 역시 해리서우리를 떠나지 않고 안해의 일을 거들어주군 하였다. 


이렇게 우리 부부가 빈틈없이 먹이를 공급하고 질병예방조치를 강구하면서 정성을 넣자 해리서들은 거의 아무런 탈도 없이 살도 찌고 무럭무럭 빨리 자라주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요구하는 체중에 도달하였기에 가져다 바칠수도 있게 됐다.


어느날 우리 부부가 규정된 체중에 도달한 해리서들을철근으로 만든 초롱안에 넣어갖고 자동차에 실어 갖다바치니 주인은 그 자리에서 계약대로 돈을 지불하는것이였다. 주인의 돈을 받고 집에 돌아와 핵산해보니 원가와 인건비 등 각종 지출을 제하고도 꽤나 많은 수입이였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알심들여 잘 키워서인지 우리는 남들보다 퍽 날자를 앞당겨 바쳤기에 많은 지출을 줄일수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 부부는 대단히 큰 재미를 느꼈다. 복장공장의 반제품을 가져다 재가공하는것 즉 한견지에 2전씩 하는 삯일에 비해서는 엄청 큰 수입이였다. 그때 나는 뭘 좀 하려면 통이 크게 벌여야 한다는 도리도 알게 되였다.


그뒤 두번째로 해리서 새끼를 가지러 갔을 때 우리는 계획적으로 구입마리수를 몇배 더 늘여갖고 가져왔다. 아니나 다를가 두번째의 사육에서도 우리는 대성공이였다.


이렇게 몇번 해리서 새끼를 가져다 키워서 바치니 돈은 눈덩이처럼 구르고굴러 나중에는 해리서사육에 투자하고 남은 돈과 합쳐갖고 다시 새집을 마련했고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 영동이한테도 달마다 정기적으로 지원할수 있었다.


하긴 해리서를 사육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본적도 있었다. 글쎄 한번은 집을 비운 사이에 누군가 집의 문을 부시고 들어와 다 큰 해리서 12마리나 훔쳐갔다. 그속에는 새끼를 가진 해리서도 몇마리 잘 되였는데 새끼를 가진 해리서 한마리가 그때의 시세로 수천원씩 하였으니 그 손실이야말로 어느 정도였겠는가 하는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수 있었을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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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해리서사육에 큰 재미를 붙였을 무렵, 어느날 누군가 나한테 귀뜸해주는 말이 이제 곧 해리서시장이포화상태에 진입할것이므로 실패로 끝을 보기전에 일찍감치 이 산업을 정리하고 다른 업을 벌여보라는것이였다.


처음에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헛소문을 얻어듣거나 아니면 “4촌이 기와집 지으면 배가 아프다”고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인줄 알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아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리수를 점점 늘여갔다. 더 통이 크게 벌여 한몫 잘 마련해 나이 든 후 여유작작한 로후를 보내기 위한 욕심도 없지 못해 있었다.


헌데 그의 말은 진실했고 “매를 맞아도 첫매를 맞아야 한다”, “뭐나 잘된다 할 때는 이미 그것이 기울기 시작한 때이다” 등 말이 그냥 귀등으로 지나칠 말이 아니였다. 과연 우리가 해리서사육업을 시작해 약 1년반 남짓이 됐을 때부터 “합격품” 해리서들을 바치러 갈 때마다 주인의 얼굴에 비낀 그늘을 보아낼수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주인은 계약대로 지불해야 할 돈을 제때에 결제하지 못하고 일주일 혹은 10여일씩 미룰 때가 자주 있었다. 그리고 갈 때마다 빚독촉을 하러 온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기도 했으며 철남의 한 해리서대리점 주인은 빚독촉에 못이겨 야밤도주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자 나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내색을 내지 않고 평소대로 열심히 해리서들을 사양하다가 갖고 있던 해리서들을 다 키운 뒤에야 그 산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키우던 해리서들을 싣고 주인을 찾아갔을 때 아니나다를가 주인은 우리앞에 이미 새로 수개하여 작성한 계약서를 내놓으며 “이제 더는 해리서를 수매할수 없으니 계속 해리서새끼를 가져갈 용호들에서는 자체로 판로망을 찾으라”는것이였다.


나는 이미 미리 짐작했던 일이라 그 주인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헌데 그럼에도 적지 않은 용호들에서는 행여나 하는 기대를 가지거나 시장개척에 자신이 있었던지 해리서사육업을 계속할 타산으로 계약서에 싸인하는것이였다. 이에 나는 그들한테 충고 한마디 할려다가 그만두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알수 없었고 남의 생각을 무시할수도 없었기 때문이였다.


과연 그뒤 약 반년이 지나자 우리한테 해리서 새끼들을 공급하던 그 대리점 주인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 재계약에 응했던 용호들 거개가 망해도 아주 재기할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망한 모양이였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나한테 귀뜸해주던 친구의 말이 천만지당한것이였다.

(연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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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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