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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약해도 여권만큼은 당당했다…청나라 여권의 뜻밖의 역사

  • 화영 기자
  • 입력 2026.10.2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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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대신 외모를 적고 외국에 자국민 보호 요청…19세기 청나라 여권에 담긴 국가의 체면과 냉혹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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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청나라 말기 발급된 여권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과 책자 형태가 일반화되기 전의 대형 종이 여권에는 소지자의 신원과 통행 관련 내용이 한자로 기록돼 있다.

 

[인터내셔널포커스] 188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광둥성 출신 중국인 노동자 황화요(黄华饶)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청나라 여권을 발급받았다. 오늘날처럼 손바닥만 한 책자가 아니었다. 가로 27.3㎝, 세로 42.6㎝에 이르는 커다란 종이 문서였다.


여권에는 사진도 없었다. 대신 키와 얼굴빛 등 신체적 특징을 글로 적어 신분을 확인했다. 사진 기술은 이미 존재했지만 당시 여권에는 아직 사진 부착이 일반화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부분은 여권에 담긴 외국 관리들을 향한 요청이다. 소지자의 신분을 확인해 통행을 허용하고, 조약에 따라 보호하며, 부당하게 방해하거나 지체시키지 말라는 취지였다.


당시 청나라의 처지를 생각하면 제법 당당한 요구였다.


19세기 후반 청나라는 두 차례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뒤 서구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 항구와 무역에서 외국의 영향력이 커졌고, 외교적 입지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국민이 외국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여권에 담았다.


청나라의 해외 통행문서 역사는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89년 러시아와 체결한 네르친스크조약 이후 양국을 오가는 사람들의 통행을 증명하는 문서가 활용됐다. 다만 이를 오늘날의 개인 여권과 같은 제도로 보기는 어렵다.


19세기 중반 이후 해외로 떠나는 중국인이 늘면서 개인별 신분증명서의 필요성도 커졌다. 상인과 노동자, 유학생들이 국경을 넘었고 해외 공관을 통한 여권 발급도 확대됐다.


당시 여권은 크기도 남달랐다. 1899년 청나라 외교관 우팅팡(伍廷芳)이 발급한 여권 가운데 가로 87㎝, 세로 56㎝에 이르는 사례도 전해진다. 펼쳐 놓으면 작은 탁자만 한 크기다.


하지만 종이가 크다고 국가의 힘까지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1882년 미국은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해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제한했다. 철도 건설과 광산 개발에 참여했던 중국인들은 차별과 폭력에 시달렸다. 청나라 여권을 지녔다고 해서 미국의 이민 규제를 피하거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권에 적힌 보호 요청과 해외 중국인들이 마주한 현실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었다. 청나라 정부가 외국에 자국민 보호를 요구할 수는 있었지만, 그 요구를 관철할 외교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1912년 청나라가 무너진 뒤에도 중국의 여권 제도는 이어졌다. 사진과 표준화된 서식이 점차 도입되면서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다.


백여 년 전 청나라 여권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투박하고 불편한 종이 문서다. 그러나 그 안에는 국력이 약했던 시절에도 자국민의 통행과 보호를 요구하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권에 얼마나 당당한 문구를 적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구가 국경 밖에서도 얼마나 힘을 발휘하느냐다. 청나라 여권의 역사는 국가의 체면과 국민 보호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던 시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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