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패전을 맞은 지 81년이 지났다. 그러나 침략전쟁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책임질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올해 8월 15일에는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찾는 대신 신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요배하면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일본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총리는 이날 전국전몰자추도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행사장인 도쿄 일본무도관 주차장에서 야스쿠니 신사 방향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두 번 박수 친 뒤 한 번 절하는’ 신사 참배 방식으로 요배했다. 측근도 이를 “야스쿠니 신사를 향한 요배”라고 설명했다.
직접 참배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적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총리는 이날 집권 자민당 총재 명의로 야스쿠니 신사에 다마구시료도 봉납했다. 현직 총리가 공개적으로 야스쿠니를 향해 이 같은 방식으로 요배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일본 언론에서 나왔다.
야스쿠니 신사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곳에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이끌었던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 있다. 이들은 1978년 비밀리에 합사됐고, 이후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참배는 단순한 전몰자 추모를 넘어 일본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정치·외교적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일본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야당에서는 총리의 행동을 지지층을 의식한 정치적 행위라고 지적했고, 공명당과 공산당 관계자들도 요배가 사실상 참배와 다르지 않다는 취지로 비판했다.
시민사회에서도 반발이 이어졌다. 패전일인 15일 도쿄에서는 시민들이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와 공물 봉납 등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일부 학계와 평화단체에서도 침략전쟁의 책임을 흐리거나 과거를 미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행동을 정치 지도자들이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일본 사회가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그 추모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분리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를 국가 지도자가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는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이 일본의 역사인식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역사인식 논란이 일본의 방위력 확대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최근 방위비를 크게 늘리고 장거리 미사일과 무인체계 등 새로운 전력을 확충하며 안보정책의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방위력을 강화한다는 사실만으로 일본을 다시 군국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중국의 군사력 확대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등 변화한 안보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일본의 안보적 판단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역사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흐리는 듯한 정치적 행동이 반복된다면 주변국의 불신과 경계심을 키울 수밖에 없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더 큰 안보 역할을 맡으려 한다면 그에 걸맞은 역사인식과 주변국에 대한 신뢰 구축도 함께 보여줘야 한다.
패전 81년은 과거를 잊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 아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점차 사라지는 지금, 무엇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가 오히려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야스쿠니를 향한 총리의 요배가 국내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인지는 일본 정치권이 스스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 지도자의 야스쿠니를 둘러싼 행동은 더 이상 일본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결국 일본이 앞으로 아시아의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BEST 뉴스
-
하영에게 증조부의 죄까지 물을 것인가
배우 하영이 증조부 안상호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의혹과 관련해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영은 12일 자필 사과문을 통해 “과오를 무겁게 받아들이며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가족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논란 이후 관련 자료를 직접 ... -
[연변 기행 ⑨] 별을 헤던 청년의 고향… 용정에 살아 있는 윤동주의 시와 민족의 혼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 입구.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문학정신을 기리는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적이다. /사진=인터내셔널포커스 [인터내셔널포커스] 화룡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함성을 뒤로한 채 북쪽으로 차를 달리자 풍경은 다시 부드러워졌다. 첩... -
천년의 '해동성국'…훈춘 발해고진, 역사와 야경이 빚어낸 여름 명소
[인터내셔널포커스] 천년의 역사를 품은 발해 문화와 현대 관광 콘텐츠가 만난 중국 지린성 국경도시 훈춘의 발해고진이 여름 관광 성수기를 맞아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당나라 양식의 건축미와 다양한 역사문화 체험, 화려한 야간 콘텐츠가 어우러지며 중국 각지뿐 아니라 러시아 등 해외 관광객... -
[민국의 그림자 ⑦] 패망을 감지한 밀정들…‘76호’의 붕괴와 특무들의 마지막 선택
1943년 후반, 상하이의 공기는 달라지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흐름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서도 동요가 시작됐다. 겉으로는 여전히 일본과의 협력을 외쳤지만, 일부 고위 인사들은 이미 일본이 패전할 경우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계산하고 있... -
중국을 깎아내리면 한국이 강해지는가
한국 사회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유난히 차갑다. 온라인에서는 중국 제품의 품질을 조롱하는 표현이 어렵지 않게 등장하고, 중국인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혐오성 발언도 적지 않다. 일부 전문가와 유튜버들은 중국 경제의 위기나 기술적 한계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중국의 성장을 평가절하하기도 한... -
[연변 기행 ⑧] 홍범도의 함성이 울려 퍼진 봉오동… 화룡에 새겨진 독립전쟁의 기억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봉오동 전투기념비.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봉오동 전투를 기리는 역사 현장이다. [인터내셔널포커스] 도문을 떠나 남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달리자 두만강을 따라 이어지던 국경 풍경은 어느새 깊은 산세로 바뀌기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