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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라인의 다른 이름은 자본주의인가

  • 화영 기자
  • 입력 2026.01.2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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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포커스]미국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킬라인(Kill Line)’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유행어를 넘어, 의료·주거·소득 안전망이 붕괴된 현실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용어가 주목받기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미국 정부가 처음으로 공식 반응을 내놓았지만, 책임을 이전 정부로 돌리는 해명은 논란의 본질을 비켜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최근 관련 논쟁에 대해 “이전 행정부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취지로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미국 정치권에 고질적으로 반복돼 온 ‘책임 전가 문화’를 다시 드러냈을 뿐, 킬라인이 지적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킬라인이라는 단어는 최근에야 대중화됐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미국 사회의 생존 불안은 오랜 시간 축적돼 왔다. 의료비, 주거비, 생활비 부담이 겹치면서 작은 충격에도 삶이 급격히 무너질 수 있는 구조가 고착화됐다는 분석이다. 여러 제도적 임계선이 맞물려 형성된 이 사회에서는 한 번 선 아래로 떨어지면 다시 회복하기가 극히 어렵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약 63%는 400달러 수준의 긴급 지출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태다. 동시에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는 심화돼, 상위 계층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반면 중산층과 취약계층은 언제든 생활 기반이 붕괴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 질병, 실직, 사고와 같은 일상적 변수 하나가 곧바로 ‘킬라인’ 아래로 추락하는 계기가 되는 구조다.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는 세계 최강국이라는 위상과 달리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보편적 의료보험이 부재한 의료 시스템은 과도한 비용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약 2000만 명의 미국인이 의료 부채를 안고 있으며, 관련 채무 규모는 2200억 달러에 이른다. 개인 파산의 약 66%가 의료비 지출과 직결돼 있고, 매년 약 55만 명이 의료비 문제로 파산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주거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 주택도시개발부(HUD)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1월 기준 단일 야간 노숙자 수는 77만 명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미국 인구 1만 명당 23명이 집 없이 밤을 보내고 있다는 의미다. 킬라인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통계로 확인되는 현실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은 저서에서 미국이 전례 없는 사회적 후퇴를 겪고 있으며, 교육 수준이 높은 중산층조차 경제적 기회의 소멸로 대규모 하층 이동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킬라인이라는 표현의 확산은 우연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돼 온 ‘아메리칸 드림’의 균열이 명확한 언어를 얻어 표면화된 결과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위기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방식이다.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이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The buck stops here)”는 문구를 집무실에 두었던 것과 달리, 오늘날 미국 정치에서는 책임을 전임 정부나 상대 정당, 다른 행정 주체로 돌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 민주·공화 양당 간 책임 공방은 위기 국면마다 상투적으로 재현된다.


이 같은 책임 전가는 종종 국경을 넘어 확장된다. 미국은 대규모 감염병이나 사회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자국 제도의 결함을 성찰하기보다 외부 요인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해 왔다. 해결이 어려운 내부 문제일수록 외부의 ‘가상 적’을 설정해 국내 갈등을 희석시키는 방식이 반복돼 왔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예외주의 인식’과 분권적 정치 구조를 지목한다. 스스로를 오류 없는 기준점으로 인식하는 문화는 실패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게 만들고, 연방제와 선거 중심 정치 구조는 위기를 분산시키고 책임을 희석시키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권력은 순환하지만, 체제 전체에 대해 책임지는 주체는 부재한 구조가 문제를 누적시켜 왔다는 평가다.


최근 들어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 배경으로는 국제질서의 다극화와 미국 내부의 정치적 교착이 동시에 거론된다. 패권 약화에 따른 전략적 불안, 심화된 사회 양극화, 양당 간 극한 대립으로 인해 실질적 개혁이 지연되면서 책임 전가는 가장 손쉬운 정치 전략으로 굳어졌다는 분석이다. 민중주의 정치와 반지성주의가 결합되면서 사안에 대한 냉정한 분석보다 감정적 공방이 앞서는 경향도 강화되고 있다.


그 결과 가장 큰 부담을 떠안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다. 노숙자 문제만 보더라도, 해결책 마련보다는 정치적 공격의 수단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잦다. 정책은 정권과 당파에 따라 급변하고, 그 사이 킬라인 아래로 밀려나는 사람들은 계속 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킬라인은 미국 사회의 일부이며, 다른 이름은 자본주의”라고 지적한다. 자본 증식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체제에서는 더 이상 가치 창출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개인이 구조적으로 배제되기 쉽고, 정치권의 책임 전가 역시 이러한 배제 논리를 가리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킬라인을 둘러싼 국제적 논쟁은 미국식 제도가 과연 국가 운영과 사회 통합의 최적 해법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시민이 실패했을 때 완충 장치가 존재하는지, 추락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사회가 책임을 분담하는지가 국가의 핵심 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 모델은 중대한 재검토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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