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칼럼 시리즈(6) 연변축구의 공로자들 - 감독편(2)
옌볜 지역에서 축구는 100여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 중국에서 옌볜은 ‘축구의 고향’이라고 불릴 만큼 오랜 시간 축구가 성행했다. 또한 축구는 하나의 문화로서 중국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에 따라 연변 FC는 중국축구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중요한 존재다. 또한 지린성을 대표하며 중국축구무대를 주름 잡은 팀이다. 좌절, 곡절과 진통 그리고 억울함도 많이 당했으며 서기 1965년엔 전반 중국축구리그를 평정한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그렇기에 옌볜 FC는 중국 조선족의 가장 큰 자랑이다.“동포투데이”는 민함 선생을 모시고 “연변축구 잘 될 수 있는 일종 무형산업”이란 제목으로 연변축구 특별기획으로 된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연재기간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갑급리그에서의 연변팀 현황 분석도 하게 됨을 알리는 바이다.- 편집자

연변프로축구는 크게 두개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1994년부터 2001년까지의 갑A 단계이고 다시 2001년부터 현재까지의 갑급단계라 할 수 있다. 모두가 알다싶이 2001년 원 갑A권 구단이던 길림오동팀이 갑B로 강급되면서 절강에 매각, 그 뒤 연변에서는 82-83 연령단계 선수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연변팀을 구성해 중국축구을급리그에 참전했는데 그 때부터 연변축구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2000년 길림오동팀이 갑A에서 분전하고 있을 때 2선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팀은 조선 평양에서 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연변 주 체육국에서는 프로축구초창기 연변삼성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이호은 감독한테 이 팀을 맏겨 팀구성을 완성하게 했다.
이 팀은 2001년부터 중국축구 을급리그(3부 리그)에 참가했다. 그 때는 원 연변 현대자동차팀에서 활약하던 방근섭, 이찬걸, 이시봉 등 선수들이 주축으로 되었지만 첫해의 전적은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노장선수들의 경험과 신진들의 활약이 유기적으로 잘 배합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1993년 전국운동회에서 “전면 진공 전면 방어”의 축구로 “흑마”로 부상했던 이호은 감독의 축구운영사상도 어딘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역시 노장과 신진들과의 배합의 미숙으로 역시 갑급진출이 무산됐다. 다음 세번째 해인 2003년 연변팀은 방근섭, 이시봉과 이찬걸 등 노장들이 퇴역하고 순 신진들로 구성돼 을급리그에 뛰어들었지만 성적이 이상적이었다. 그만큼 정림국, 한송봉, 문호일, 배육문, 윤광, 한광화 등 신진들의 기량이 제고됐다고 할 수 있었다. 그해 연변팀은 을급 8강까지 진출했다. 8강전 제1라운드의 2회전에 달하는 경기에서 연변팀은 상대방을 물리치고 4강에 합류했다. 4강전에서 연변팀은 광동일지천과 상대했다. 1회전에서 연변팀은 광동일지천과 2 : 2로 비겼다. 2회전에서 이기면 연변팀의 갑급진출이 성공되는 판이었다. 2회전 전반 연변팀은 1 : 0으로 앞섰다. 당시 연변팬들은 축하파티를 마련할 준비를 했고 스포츠기자인 필자는 연변팀 갑급진출을 축하하는 언론을 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후반들어 연변팀이 상대한테 연속 2골을 허락하며 패할줄이야. 갑급진출 무산 뉴스에 팬들은 낙심했다. 축구파티상에 오른 요리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 축하 언론을 쓴 원고지는 구겨진 채 파지통에 들어갔다.
그 뒤 이호은 감독은 사표를 냈다. 3년동안 애를 쓰며 연변축구의 갑급진출을 위해 노력했으나 역시 자신의 한계를 감안한 모양이었고 또 지치고 서글픈 모양이었다.
그 이듬해 연변 주 체육국에서는 당시 상해에서 상해천나팀의 감독을 맡고 있던 고훈 감독한테 러브콜, 이에 고훈 감독은 상해에서의 모든 우월한 조건도 송두리채 버리고 고향축구를 위해 연변으로 달려왔다.
그 이듬해 즉 2004년의 을급리그 연변홈장은 화끈한 분위기었다. 매 경기마다 수만명의 관중들이 동원, 당시 길림신문의 최승호 기자는 연변홈장을 “을급리그의 슈퍼리그 분위기”라고 표현했다.
그 해 10월 말, 연변세기팀은 을급리그 북방구의 우승(무패행진)으로 하남성 정주에서 있은 8강전에 참가했다. 당시 연변팀은 제1라운드의 2경기를 거쳐 산동구거룡팀을 격파하고 제2라운드의 2경기를 거쳐 운남 여강팀을 완승하여 갑급진출에 성공하여 연변축구의 비장한 한페지를 기록했다.
그 이듬해 즉 2005년부터 연변팀은 전국축구 갑급리그에 참전하게 됐다. 사령탑은 자연스럽게 고훈 감독이 맡게 됐다.
고훈 감독이 연변팀을 맡고 갑급리그에서 올린 성적은 다음과 같다. 2005년 갑급 5위, 2006년 갑급 6위, 2007년 갑급 6위었다. 그 시기 연변축구구락부는 선후로 3명의 주인이 교체되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또한 일련의 혼란과 손실을 보았지만 구단성적은 갑급리그 참전 이래의 가장 양호했고 구단도 가장 안정되던 시기었다.
헌데 갑급리그가 결속된 뒤인 그해 11월 20일, 연변축구사상에 전례없던 변고가 생겼다. 이른바 축구계의 사업일군과 축구원로, 심지어 축구선수들까지 참여하에 “투표의 방식”으로 감독을 선거했다. 후에는 다 밝혀졌지만 이는 주체육국 골간층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당시 이호은, 조영원, 고훈 등 3명이 경쟁발언을 한 가운데 조영원씨가 가장 많은 투표수로 감독지휘봉을 받아안게 됐고 연변축구의 공로자인 고훈한테 준 투표수는 고작 3표에 불과했다.
고훈감독을 놓고 말하면 주견이 있는 축구인이었다.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면 상급 지도일군의 권고 등은 듣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정치와 개인적용망 및 그것을 둘러싼 “외교” 등이 참여하는 중국축구계ㅡ 당시 고훈은 최은택, 이장수와 더불어 이런 현상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 해 연변에서는 조영원 감독을 내세워 이듬해 즉 2008년에 슈퍼리그 진출성공과 전국운동회 우승을 쟁취하여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하지만 그것은 근근히 욕망뿐이었다.
그 이듬해 연변팀은 시즌 초반 연속되는 부진으로 조영원 감독이 조기하차했고 전국운동회 리그도 중도에서 탈락되었으며 감독 지휘봉은 황용한테 넘어갔다가 성적부진으로 현춘호한테 다시 넘어갔으며 최종 김광주가 감독직을 대행했다. 당시 김광주는 구단의 “급시우”였다. 마지막 몇경기를 악전고투하여 갑급잔류에 성공했다.
2009년 연변팀은 김광주의 지휘하에 갑급 6위를 기록했고 그 이듬해인 2010년에는 12승 4무 8패 41점으로 갑급 제3위 차지, 갑급시즌 참여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을 따냈다.
2011년, 연변팀의 박성, 김경도, 한청송 등 많은 주력선수들이 이적해갔다. 그해 김광주감독이 아무리 애를 썼지만 연변팀은 부진을 거듭한 끝에 갑급 11위에 머울었다.
그 이듬해 2012년 연변팀은 또 감독풍파가 많은 해로 됐다. 초기 정상용이 사령탑을 잡았다가 그것이 한국인 조긍연한테로 넘어갔고 마지막 그래도 또 김광주가 동산재기하여 갑급잔류에 성공했다. 그해 연변팀의 성적은 8승 5무 13패었다.
그리고 지난해인 2013년 연변장백호랑이축구구락부에서는 재차 조긍연 감독을 초빙해 뭔가 시도했으나 여전히 실패, 나중에 이광호가 뒤수습을 하여 갑급잔류에 성공했다.
그 다음은 올해 2014년의 일이다. 이호은에 이어 이광호가 재차 사령탑을 잡게 됐다. <축구논평 민함>
당시 연변 주 체육국에서는 프로축구초창기 연변삼성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이호은 감독한테 이 팀을 맏겨 팀구성을 완성하게 했다.
이 팀은 2001년부터 중국축구 을급리그(3부 리그)에 참가했다. 그 때는 원 연변 현대자동차팀에서 활약하던 방근섭, 이찬걸, 이시봉 등 선수들이 주축으로 되었지만 첫해의 전적은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노장선수들의 경험과 신진들의 활약이 유기적으로 잘 배합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1993년 전국운동회에서 “전면 진공 전면 방어”의 축구로 “흑마”로 부상했던 이호은 감독의 축구운영사상도 어딘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역시 노장과 신진들과의 배합의 미숙으로 역시 갑급진출이 무산됐다. 다음 세번째 해인 2003년 연변팀은 방근섭, 이시봉과 이찬걸 등 노장들이 퇴역하고 순 신진들로 구성돼 을급리그에 뛰어들었지만 성적이 이상적이었다. 그만큼 정림국, 한송봉, 문호일, 배육문, 윤광, 한광화 등 신진들의 기량이 제고됐다고 할 수 있었다. 그해 연변팀은 을급 8강까지 진출했다. 8강전 제1라운드의 2회전에 달하는 경기에서 연변팀은 상대방을 물리치고 4강에 합류했다. 4강전에서 연변팀은 광동일지천과 상대했다. 1회전에서 연변팀은 광동일지천과 2 : 2로 비겼다. 2회전에서 이기면 연변팀의 갑급진출이 성공되는 판이었다. 2회전 전반 연변팀은 1 : 0으로 앞섰다. 당시 연변팬들은 축하파티를 마련할 준비를 했고 스포츠기자인 필자는 연변팀 갑급진출을 축하하는 언론을 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후반들어 연변팀이 상대한테 연속 2골을 허락하며 패할줄이야. 갑급진출 무산 뉴스에 팬들은 낙심했다. 축구파티상에 오른 요리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 축하 언론을 쓴 원고지는 구겨진 채 파지통에 들어갔다.
그 뒤 이호은 감독은 사표를 냈다. 3년동안 애를 쓰며 연변축구의 갑급진출을 위해 노력했으나 역시 자신의 한계를 감안한 모양이었고 또 지치고 서글픈 모양이었다.
그 이듬해 연변 주 체육국에서는 당시 상해에서 상해천나팀의 감독을 맡고 있던 고훈 감독한테 러브콜, 이에 고훈 감독은 상해에서의 모든 우월한 조건도 송두리채 버리고 고향축구를 위해 연변으로 달려왔다.
그 이듬해 즉 2004년의 을급리그 연변홈장은 화끈한 분위기었다. 매 경기마다 수만명의 관중들이 동원, 당시 길림신문의 최승호 기자는 연변홈장을 “을급리그의 슈퍼리그 분위기”라고 표현했다.
그 해 10월 말, 연변세기팀은 을급리그 북방구의 우승(무패행진)으로 하남성 정주에서 있은 8강전에 참가했다. 당시 연변팀은 제1라운드의 2경기를 거쳐 산동구거룡팀을 격파하고 제2라운드의 2경기를 거쳐 운남 여강팀을 완승하여 갑급진출에 성공하여 연변축구의 비장한 한페지를 기록했다.
그 이듬해 즉 2005년부터 연변팀은 전국축구 갑급리그에 참전하게 됐다. 사령탑은 자연스럽게 고훈 감독이 맡게 됐다.
고훈 감독이 연변팀을 맡고 갑급리그에서 올린 성적은 다음과 같다. 2005년 갑급 5위, 2006년 갑급 6위, 2007년 갑급 6위었다. 그 시기 연변축구구락부는 선후로 3명의 주인이 교체되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또한 일련의 혼란과 손실을 보았지만 구단성적은 갑급리그 참전 이래의 가장 양호했고 구단도 가장 안정되던 시기었다.
헌데 갑급리그가 결속된 뒤인 그해 11월 20일, 연변축구사상에 전례없던 변고가 생겼다. 이른바 축구계의 사업일군과 축구원로, 심지어 축구선수들까지 참여하에 “투표의 방식”으로 감독을 선거했다. 후에는 다 밝혀졌지만 이는 주체육국 골간층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당시 이호은, 조영원, 고훈 등 3명이 경쟁발언을 한 가운데 조영원씨가 가장 많은 투표수로 감독지휘봉을 받아안게 됐고 연변축구의 공로자인 고훈한테 준 투표수는 고작 3표에 불과했다.
고훈감독을 놓고 말하면 주견이 있는 축구인이었다.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면 상급 지도일군의 권고 등은 듣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정치와 개인적용망 및 그것을 둘러싼 “외교” 등이 참여하는 중국축구계ㅡ 당시 고훈은 최은택, 이장수와 더불어 이런 현상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 해 연변에서는 조영원 감독을 내세워 이듬해 즉 2008년에 슈퍼리그 진출성공과 전국운동회 우승을 쟁취하여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하지만 그것은 근근히 욕망뿐이었다.
그 이듬해 연변팀은 시즌 초반 연속되는 부진으로 조영원 감독이 조기하차했고 전국운동회 리그도 중도에서 탈락되었으며 감독 지휘봉은 황용한테 넘어갔다가 성적부진으로 현춘호한테 다시 넘어갔으며 최종 김광주가 감독직을 대행했다. 당시 김광주는 구단의 “급시우”였다. 마지막 몇경기를 악전고투하여 갑급잔류에 성공했다.
2009년 연변팀은 김광주의 지휘하에 갑급 6위를 기록했고 그 이듬해인 2010년에는 12승 4무 8패 41점으로 갑급 제3위 차지, 갑급시즌 참여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을 따냈다.
2011년, 연변팀의 박성, 김경도, 한청송 등 많은 주력선수들이 이적해갔다. 그해 김광주감독이 아무리 애를 썼지만 연변팀은 부진을 거듭한 끝에 갑급 11위에 머울었다.
그 이듬해 2012년 연변팀은 또 감독풍파가 많은 해로 됐다. 초기 정상용이 사령탑을 잡았다가 그것이 한국인 조긍연한테로 넘어갔고 마지막 그래도 또 김광주가 동산재기하여 갑급잔류에 성공했다. 그해 연변팀의 성적은 8승 5무 13패었다.
그리고 지난해인 2013년 연변장백호랑이축구구락부에서는 재차 조긍연 감독을 초빙해 뭔가 시도했으나 여전히 실패, 나중에 이광호가 뒤수습을 하여 갑급잔류에 성공했다.
그 다음은 올해 2014년의 일이다. 이호은에 이어 이광호가 재차 사령탑을 잡게 됐다. <축구논평 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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