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중국과 북한은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 국경에서는 군대가 대치했고, 북한은 20만 병력을 장백산 일대로 집결시켰다. 당시 분위기는 언제 포성이 울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벌했다. 그러나 1년 남짓한 외교적 줄다리기 끝에 두 나라는 극적으로 화해에 성공했다. 무엇이 이 위기를 막아낸 것일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중·조 관계는 혈맹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이 참전하며 ‘피로 맺은 우의’를 강조했고, 1961년에는 "중조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며 군사·경제 협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중·소 갈등이 격화되고, 1969년 진보도(珍宝岛) 무력 충돌로 중·소 간 전면전 우려가 높아지자, 북한은 균형자 외교에서 소련 쪽으로 기울었다.
중국 내부의 ‘문화대혁명’도 양국 관계 악화를 부추겼다. 홍위병들은 북한을 ‘수정주의’라 비난했고, 연변 조선족 지역에서의 혼란으로 민간인 피해까지 발생했다. 북한은 주중 대사를 소환하고 사실상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1968년 이후 국경에서 잦은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1969년 들어 북한은 장백산 천지 일대를 자국 영토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전개했다. 북한군은 도하 훈련과 포병 실전훈련을 반복했고, 중국군도 동북 국경에 대규모 증원을 실시했다. 언론 공방도 격화돼 북한 매체는 ‘항미원조’ 역사를 지우고 소련산 장비를 앞세웠다. 전쟁 기류가 고조된 것은 분명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1969년 9월 중국의 로프노르 핵실험이었다. ‘핵 보유국’의 무게를 과시한 중국 앞에서 김일성은 무력 행동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같은 해 10월, 북한의 최용건 부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해 첫 접촉이 이뤄졌다. 이듬해 4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우호 복원을 선언하면서 긴장은 풀리기 시작했다.
양국은 경제 원조를 재개했고, 곡물과 석유 공급이 복원됐다. 군사적으로는 국경 부대가 수 킬로미터 철수했고, 장백산 문제는 사실상 ‘현상 유지’로 합의됐다.
1970년대 초반 미·중 관계 개선도 변수였다. 1972년 닉슨의 방중은 북한에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다시 확인시켰고, 소련도 더 이상 북한을 앞세워 중국을 압박하지 않았다. 북한은 결국 중국과의 혈맹 노선을 다시 강화했다.
1971년 양국은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했고, 1972년 중국은 북한의 자주적 통일 방안을 국제무대에서 지지했다. 1981년에는 상호 원조 조약을 연장하며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1969년 위기는 혈맹도 전쟁 직전까지 갈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은 누구에게도 이익이 없다는 현실적 판단이 대화를 이끌었다. 당시 고조된 군사 긴장 속에서도 고위급 외교가 살아나며 파국을 막아낸 것이다. 동북아의 평화는 언제나 불안정했지만, 이 위기 봉합은 협상과 현실 정치가 전쟁을 대신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을 돌아보면, 1969년 국경 위기의 경험은 동맹과 적대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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