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올해 1월 20일은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 상해에서 “영화황후(电影皇后)”로 불리었던 호접(胡蝶)이 태어 난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 된다. 이 날을 기념하면서 최근 상해시 촬영예술센터에서는 “접몽백년(蝶梦百年)”으로 명명된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1월 20일-3월 18일)가 막이 올랐다.
전람에는 수십 년간 호접의 영화배우생애와 사생활 및 해외여행 중의 순간순간을 기록한 진귀한 사진 근 200점이 진열되었다. 그만큼 지난 세기 20-30연대 호접은 상해영화계의 유명스타였다. 당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金焰)이 상해에서 “영화황제(电影皇帝)”로 떠올랐다면 호접은 “영화황후”로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상해에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20원 정도였다면 호접의 월급은 2000여원으로 일반 노동자 월급의 100배에 달했는바 이는 그녀의 몸값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영화황후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의 포스터
▲ 소녀시절의 호접(왼쪽 두 번째)1949년 호접은 영화 “금수천당(锦绣天堂)”에 출연하여 여주인공역을 담당, 이 영화는 중국의 첫 칼라영화였다.
1928년 호접은 다부작 영화 “불타는 홍련사(火烧红莲寺)”에 출연, 도합 18집으로 된 이 영화는 무협영화로서 당시 무협영화의 조류를 일으켰으며 티켓판매수입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뒤 호접은 계속해 영화 “부자의 생활(富人的生活), “도화호(桃花湖”, “자유의 꽃(自由之花), “가수 홍모란(歌女红牡丹)” 등에 출연하면서 보다 실생활과 접근하는 인물로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 영화배우 시절의 호접(촬영시기 미상)1935년 호접의 혼례는 당시의 중대한 문화적 대사였다. 친우들의 축복 외 영화계의 많은 인사들은 그녀가 앞으로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계속 나라와 영화계에서 기여하며 활약하는 “여대장부”가 되기를 기대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전신인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인 전한(田汉)은 한수의 시로서 호접으로 하여금 주방과 작별하고 영화에 매진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호접은 이러한 안목의 제약에서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영화배우로는 전성기의 나이었지만 그녀는 점차 가정에 많은 정력을 쏟는 삶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즉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조류였던 소위 진보여성 및 현대여성과는 다른 선택이었으며 그렇다고 남권사회에 얽매인 봉건여성의 선택인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시 소위 가정을 버리고 “진보”만을 외쳐대는 극단적인 여성조류에 대한 일종의 반항었다.
ⓒ 동포투데이 & www.dspdaily.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
‘조선족 혐오’… 한국 사회가 외면한 불편한 진실
글|허훈 한국 사회에서 ‘조선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감정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다. 공식적 표현은 ‘동포’지만, 현실의 시선은 종종 거리감과 불신을 포함한다. 일부 미디어와 온라인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된 이미지가 편견을 고정시키고, 그 결과 조선족 혐오가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아 왔... -
역사 속 첫 여성 첩자 ‘여애(女艾)’… 고대의 권력 판도를 뒤집은 지략과 용기의 주인공
[동포투데이] 중국 고대사에는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시대를 앞서간 활약으로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여애(女艾)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하(夏) 왕조 시기 소강(少康)을 보좌한 장수이자,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첩자로 꼽힌다. ‘첩보전... -
반중 장사에 막장으로 치닫는 정치… 그 피해는 국민 몫
글|허훈 한국 사회의 반중 정서는 이제 하나의 ‘정치 산업’이 돼가고 있다. 중국과의 외교·경제 환경을 냉정하게 평가하기보다, 특정 세력이 반중 감정을 증폭시키고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특히 극우 성향의 세력들은 중국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사실관계조차 ... -
“홍콩 반환, 무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동포투데이] 영국 정치사의 상징적 인물로 거론되는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 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1997년 홍콩 반환을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 그는 일시적으로 홍콩을 무력으로 유지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검토는 오래 가지 않았다. 영국 국방부가 작...
실시간뉴스
-
“홍콩 반환, 무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
역사 속 첫 여성 첩자 ‘여애(女艾)’… 고대의 권력 판도를 뒤집은 지략과 용기의 주인공
-
백두산 현장르포④ | 용정의 새벽, 백두산 아래에서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
-
[기획연재③]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북간도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항일운동
-
백두산 현장르포③ | 지하삼림, 천지의 그늘 아래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세계
-
백두산 현장르포② | 폭포 앞에서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
-
[기획연재②]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교육·신앙·항일의 불씨
-
[기획연재①]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문학, 민족, 그리고 기억의 장소
-
백두산 현장르포① | 민족의 성산에서 천지를 마주하다
-
“해방군인가, 약탈군인가”…1945년 소련군의 만주 진출과 동북 산업 약탈의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