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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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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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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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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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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3-09-04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프로보커터’와 ‘조선족코인’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자고 깨면 신조어가 생겨나는 요즘 세월에 글깨나 쓴다는 나도 신조어 하나 만들어봤다. ‘조선족코인’ 어쩌다 신조어를 하나 만들어냈다 하여 이순 나이에 창의성이 뛰어난 아이큐 덕분이 아니다.『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저자 김정운 교수는 창의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창의성이란 본래 없던 것을 새로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널려 있는 정보들을 편집하여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창의성이다.” 백 프로 공감한다. 요즘 나는『프로보커터』라는 책을 읽었다. 지난 달 초에 빛을 본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저자는 연세대학교 박사 과정 재학 중인 1992년 출생인 20대 열혈 청년 김내훈이다. 책의 편폭은 가벼운 편이나 내용이 참신하고 술술 잘 읽힌다. 저녁 밥 먹고 하룻밤 사이 다 읽었다.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프로보커터’라는 어휘는 자극적인 도발 언행으로 ‘우리 편’을 결집하여 이익을 챙기는 행위를 일컫는 말인데 외래 수입품으로서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낯선 용어이다. 비록 낯선 용어이긴 하나 한국사회 곳곳에도 이미 ‘프로보커’들이 활개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이론적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았고 라벨을 달리 붙여주지 않았을 뿐이다. ‘프로보커터’를 잘 이해하려면 먼저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일개 장사꾼이었던 트럼프는 자극적인 도발언행으로 지지층을 확보하여 대통령이 된 사람이고 백악관에 입주한 후에도 대통령답지 않게 체신 머리 없이 쩍하면 허위정보와 가짜뉴스를 터뜨려 자기를 추종하는 지지 세력을 만들어왔으며 가장 큰 재미를 톡톡히 본 장본인이다. 실로 트럼프야말로 ‘프로보커터’의 모범적인 인물이다. 미국에는 트럼프뿐만 아니라 수많은 ‘프로보커터’들이 민주주의 꽃으로 인정받아온 미국사회를 흙탕물로 만들고 있다. 미국만을 웃을 일이 아니다. 아세아에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프로보커터’가 있었다. 희한한 것은 이 주인공은 10대 소년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아모스 이이며 싱가포르 태생이다. 아모스 이는 자신의 유튜브에 싱가포르 국부인 이콴유(李光耀)를 파렴치한 독재자로 비난하고 예수처럼 숭배 받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라고 공격했다. 이 일은 아모스 이가 기독교를 모독하는 사건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철없는 10대 소년의 행위이겠거니 할 수 있었는데 유튜브 조회수가 급증하자 더 자극적인 스토리를 조작해 세인의 주목을 받는 사건을 터뜨린다. 이콴유와 마가렛 태처 부인의 불륜 동영상을 아주 어설프게 허위 합성 제작하여 올렸는데 생각 밖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조작하여 유포하는 행위를 정부가 눈감고 가만히 둘리가 없다. 법적 조치에 의해 구금당했다. 그런데 소위 자유주의를 외치는 인권수호자들이 나서 아모스 이 구출 작전에 돌입하여 보석석방을 이뤄냈다. 이 일을 계기로 아모스 이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위한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실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들이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영웅이 된 아모스 이는 자유주의 본산지인 미국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점점 더 자극적인 소재를 조작해내야 더 크게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궁리 끝에 이슬람교를 건드렸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의 성경인 ‘코란’을 사타구니에 끼고 섹스 하는 행위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퍼뜨렸다. 아무리 살해 위협까지 받고 있었으나 세인의 주목을 받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아모스 이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사건을 또 저지르고 만다. 소아성애와 아동 성착취 영상 옹호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미국당국은 결국 아모스 이의 유트뷰, 워드프레스, 페이스북, 트위터 등 모든 소셜미디어 계정을 강제 폐쇄해버렸다. 한국의 ‘프로보커터’ 상황의 현주소는 어떨까? 진보정권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4년 동안 이른바 ‘우파코인’이 점점 판을 치고 있고 박원순, 오거돈, 안희정 사건 이후 ‘폐미코인’이 ‘인기상품’으로 떠올랐다. ‘우파코인’이란 무릇 현정부를 비판하는 우파유튜브들이 경제적인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허위사실 유포와 가짜뉴스를 생산하여 퍼뜨리는 것으로 조회 수를 늘리고 있고 따라서 경제적인 수익도 창출하고 있다. 이렇게 하려면 자극적인 소재를 조작하여 도발하는 것으로 목적을 이룰 수밖에 없다. 우파유튜브 ‘프로보커터’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가로세로 연구소, 이하 가세연으로 지칭함)’ 이름으로 된 유튜브를 들 수 있다. 가세연의 대표 강용석은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 뺏지를 단 이력이 있고 성희롱 사건에 의해 국회를 떠난 이후 정치평론가 겸 예능방송출연으로 얼굴을 크게 알렸는데 한 때는 화려한 입담으로 인기 인물이었다. 잘 나가다가 불륜사건으로 모든 방송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되었고 사문서위조 사건으로 구속수감 되기까지 했다. 실로 바닥까지 추락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플러스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얼굴에 철판 깔고 돈 벌이에 맘만 먹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강용석이 택한 것은 유튜브였다. 가세연은 연예계 소식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악랄한 수법으로 연예인들의 신상을 털어 조회 수를 대폭 늘렸다. 가세연의 가장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사건은 박원순 자결 이튿날 이른바 ‘코스 답사’를 영상으로 찍어 올리는 수법으로 고인의 얼굴에 먹칠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저급적인 영상을 누가 볼까 싶겠지만 이 콘텐츠는 단 며칠 만에 수백 만원의 슈퍼챗 수입을 가세연에 안겼다. 한 통계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슈퍼챗 수익을 기록한 유튜브 채널은 가세연이란다. 아무리 자본주의사회라지만 이렇듯 저질스럽고 악랄한 수법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사회주의에서 살다 온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국 프로보커터는 보수만의 일이 아니다. 진보논객으로 인정받아온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현정부 비판에 가장 열과 성을 다 바치는 지식인이다. 어쩌다 이 분은 자극적인 도발언행으로 현정부를 비판하고 또 이것저것 분야를 가리지 않고 까대는데 보수언론 수장격인 조선일보가 지난 한해 인용한 건수가 1000건이고 중앙일보가 인용한 건수가 900건이라고 하니 하루 평균 3건인 셈이다. 조선일보의 영향력과 진중권의 하청업이 서로서로 윈윈이 된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역사에 남을 일이다.『프로보커터』저자는 진중권을 대한민국의 ‘프로보커터’의 전형(典型)으로 꼽았다. 김내훈의『프로보커터』에는 ‘주목경제’와 ‘주목경쟁’이란 말이 등장한다. ‘프로보커터’가 되어 돈을 벌고 명성을 얻으려면 주목을 끌어야 수익이 생기고 이득이 따른다. 그런데 평범한 인성과 착한 실력으로만은 절대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주목을 끌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도발을 일삼아야 한다. 이것이 ‘주목경제’이다. 물론 정당한 수법에 의해 주목을 받아 명성을 얻고 부를 쌓는 사람이 있겠지만 극히 소수일 것이다. 『프로보커터』에 등장하는 ‘우파 코인’ ‘폐미 코인’ ‘주목경제’ 등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접하고 나서 이를 힌트로 나는 ‘조선족코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족코인’이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가상화폐 코인에 투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조선족을 키워드로 혹은 조선족을 소재로 영화나 드라마작품 혹은 방송프로그램을 만들거나 기사를 작성하면 사회적인 주목을 받고 따라서 수익성이 생기는 현상을 지칭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해하기 바란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방송, 신문, 연구소, 다큐창작소, 연극창작소, 석·박사 수료 과정 대학원생들 등 수많은 기관과 개인의 인터뷰에 응할 때면 ‘왜 한국인은 조선족 동포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있는지?’ 다시 말하자면 ‘한국인이 조선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부정책제도의 문제도 있고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깔보는 이유도 있겠고, 전통적인 양반과 상놈의 차별문화 이유도 있을 것이고 등등의 이유가 수두룩하다. 나는 처음 몇 년 동안에는 마이너리티란 어느 나라에서든 차별과 무시 받기 마련이고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흐르면, 조선족사회 경제수준과 문화수준이 상승하면 자연적으로 해결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생각은 유치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최근 몇 년 동안 심심히 느끼고 있다. 그렇다며 한국인이 조선족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문제는 조만간 해결이 안 되고 장기적인 현상으로 흘러 갈 것인데 여기서 한 가지 이유만 중점적으로 논의해보겠다. 인간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하는 성향이 짙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도 마찬가지다. 영국이 지구촌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설 때 앵글로 색슨 민족의 우월성을 ‘무기’로 삼았다. 앵글로 색슨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면 자기네보다 못한 민족 혹은 국가 집단을 타자로 설정해야 한다. 그 타자의 타깃이 처음에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였다. 일본도 한반도 침략과 대륙침략에 나서면서 한반도와 중국을 타자의 타깃으로 삼았다. 반도 사람을 낙후하고 가난하다는 뉘앙스가 내포된 조센징이라 부르고 중국인을 동아병부(東亞病夫)부르면서 야마토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작업을 벌렸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타깃으로 삼았고.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남의 침략을 받아만 왔을 뿐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래서 남을 타자화하는 타깃으로 삼아본 적이 없다. 타자화하는 타깃을 외부에 돌릴 수 없었으니 내부에서 타깃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즉 내부에서 자기보다 신분이 낮거나 혹은 자기보다 가난하고 못 사는 개인 혹은 집단을 타깃으로 삼아 타자화하여 혐오하고 차별하고 기시하고 무시하고 괴롭혔던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특히 남북분단 이후 남한은 북한을 타깃으로 타자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남이 북을 타자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즉 나라적인 타깃은 될 수 있으나 개개인의 생활 정서상의 타깃은 될 수가 없었다. 왜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형제간에도 만날 수 없으니 당연히 차별하고 무시하고 말 것 없었다. 이런 와중에 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인이 한국에 정착하고 결혼이민자가 늘어나고 게다가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대량으로 밀려온 조선족집단을 가장 좋은 타깃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2010년 이후 재한조선족사회가 한국에서 장기적인 체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자 한국인은 이들을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이방인으로 취급하면서 비난과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있는 그대로 비난하고 공격하면 모를까, 자극적인 도발로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데 앞장 선 것이 바로 한국 언론이다. 기자들은 팩트와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생산한 것은 물론이고 공영방송인 KBS마저 조선족을 범죄 집단으로 비방하는 보이스피싱을 주제로 한 ‘황해’라는 개그프로그램을 일 년 넘게 지겹도록 방송하여 한국인의 심리에 조선족은 범죄 집단이라는 인상을 뼛속까지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웃나라인 일본의 NHK나 중국의 CCTV는 자민족 약소 집단을 KBS처럼 범죄 집단으로 비방하지 않는다. 영화계는 스토리 소재 찾기 쉬운 것이 바로 조선족을 타깃으로 삼는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영화 <청년경찰>의 김주환 감독은 조선족을 타깃으로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냉전시대에 미국 할리우드에서 소련을 적으로 소재로 한 영화가 많았다. 조선족을 영화 소재로 한 이유를 이런 맥락으로 이해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양대 적국이었다. 이런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조선족은 한국인의 최대 적이 된다는 것인가? 영화 ‘청년경찰’을 비롯해 ‘범죄도시’라든가 그 외에 수많은 조선족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드라마들도 경쟁하다시피 조선족을 소재로 하는 바람이 불었는데 대체적으로 조선족을 살인, 청부살인, 장기밀매, 보이스피싱, 폭력 등 강력범죄 조직으로 매도하는 것이 주 내용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러한 자극적인 도발행위를 다룸으로써 이를 통해 경제적인 수익을 챙기는 것이 바로 ‘프로보커터’들이다. 즉 ‘조선족 코인’을 이용하는 ‘프로보커터’들이다. 2020년 4.15총선을 눈앞에 두고 터진 이른바 ‘조선족게이트’와 ‘중국게이트’ 사건도 역시 ‘프로보커터’의 소행이고 정치판도 뒤질세라 ‘조선족 코인’을 이용하는 ‘프로보커터’들이 속출하고 있다. ‘조선족 코인’을 이용하는 ‘프로보커터’들이 당분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이들이 혐오와 차별을 선도하고 조장함에 따라 조선족사회는 앞으로 일정기간 계속 혐오와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암울하고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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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4
  • 작별하며 뒤돌아 본 천안누리요양병원①
    ● 민 수 장맛비가 막 내리기 직전인 지난 7월 31일 오전 10시 경, 나는 보따리 싸들고 그 곳을 나와 버렸다. 바로 천안누리요양병원(가명)이다. 배웅을 나온 간병팀장(여)과 다른 두 남성 간병인과 간단한 작별을 나눈 나는 요양병원 바로 앞 쌍용역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냥 전철에 올라타려고 보니 어쩐지 어딘가 희비가 엇갈리면서 밖을 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안누리요양병원ㅡ 필경 지난 11개월 간 머물러 있으면서 정이 들었던 곳이기도 했다. 내가 보따리를 싸들고 이 요양병원을 찾아온 것은 2019년 8월 29일이었다. 일자리가 없어서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냥 하던 일자리를 때려치우고 보따리를 둘러멨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천안누리요양병원에 도착하고 보니 강씨의 말과는 어딘가 달랐다. 아니, 달랐다기보다는 체중 57킬로그램밖에 가지 않는 나의 체질과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 100킬로그램 쯤 돼 보이는 환자 김씨가 있었는데 나는 그를 돌봐줄 자신이 없었다. 주말을 빼고는 매일 휠체어에 앉혀 재활치료를 해야 하고 또한 매주 목요일이면 목욕도 시켜야 하니 더욱 자신이 없었다. “환자 김씨가 재활치료를 갈 때는 내가 도와서 휠체어에 앉힐 테니 그런대로 해보라구…” 그러면서 강씨는 만약 무거운 환자가 있다고 하면 내가 오지 않을까봐 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마음을 싹 비우고 일해 보려고 했는데…그렇게 매일 강씨의 도움을 받아 김씨를 휠체어에 앉혀 재활치료에 보내고 매 주 한 번씩 목욕을 시키다보니 미안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도움을 받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워낙 강씨와 둘이서 함께 하던 일, 즉 매일 기저귀를 옥상에 올리는 일을 아침과 저녁으로 혼자 도맡아 했다. 그렇게 상부상조하면서 일하노라니 점차 그 곳에 적응이 제법 잘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간병팀장도 아주 사리가 밝았고 기타 간병인들과 대부분의 간호사들도 아주 친절했다. 특히 언급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한국인들인 행정 국장, 간호사, 간병인 그리고 입원 환자의 보호자들과는 스스럼없이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또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어쩐지 그랬다. 여 간호 과장이었다. 느낌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병실에 들어올 적마다 찬 기운이 쌩쌩 - 감돌아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제나 턱을 쳐들고 다녔고 남한테 거의 눈길 한번 주지 않았으며 어쩌다 한번 입을 열면 그건 거의 100%가 꾸중이 아니면 잔소리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중환자실로부터 임씨성을 가진 환자가 내가 근무하는 병실로 넘어오게 되었다. 심한 치매증인데다 거동도 매우 불편하여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었고 식사도 간병인이 먹여줘야 했다. 바로 그 날 저녁 임씨한테 식사를 대접하자고 보니 앞치마가 없었다. 그래서 간호과에 가서 앞치마가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문의했더니 그 간호과장이 하는 말이 “그건 보호자한테 요구해야 하는 거예요”라는 것이었다. 말투가 예쁘지 않았다. 더 심각하게 말하면 그 따위 자질구레한 일을 왜 이 내 과장한테 말하느냐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 때는 내가 그 곳으로 간지 얼마 되지 않는지라 그냥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후에 소모품을 신청하면서 볼 라니 환자의 앞치마는 신청만 하면 후근실에서 공급해 주는 것이었다. 과장이란 여자 참, 그걸 알려주면 뭐 덧 난다더냐?! 이어 이와 엇비슷한 일이 또 발생했다. 아까 말했지만 중환자실에서 건너온 임씨는 당 수치가 자주 떨어지기에 평소 늘 두유를 먹여야 했다. 특히 아침 전에 그랬다. 어떤 날에는 70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그 환자한테는 항상 두유나 초코파이 같은 간식거리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먹는 두유가 2개 밖에 남지 않아 보호자가 맡긴 돈을 보관하고 있는 그 과장인지 허풍인지 하는 여자한테 “임씨의 두유를 사야 하니 돈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대뜸 짜증을 부리며 “나 지금 바빠요. 왜 자꾸 나한테만 이걸 달라 저걸 달라고 해요!”라고 내뱉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하마터면 “당신이 돈을 보관하고 있기에 당신하고 달라고 하지 누구하고 달라고 해?”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참았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아까 소릴 질러 미안해요.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라고 하며 사과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사과를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었지만 어쩐지 난 속으로 잘 내려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일반 간호사가 아닌 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나는 이 사람들한테 이렇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 싶어 한국 모 인터넷신문사에서 나한테 발급한 기자증을 내가 근무하는 병실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국장한테는 내가 2015년 4월 한국에서 거행된 제 14회 세계한인언론인대회 개막식 때 찍은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러자 아니까 다를까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었고 김과장 역시 마찬가지었다. 그것을 계기로 김과장은 내 앞에서는 뭔가 좀 삼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꿍꿍이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기자여서 마구 다스리기 힘드니 잘라버리려는 속궁리가 역력했으며 그러자면 나의 치명적인 잘못을 잡아야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찰나, 일은 터지고 말았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302호 병실에는 피부병이 좀 심한 80여세가 되는 환자 손씨가 있었다. 그는 꽤나 점잖은 환자 같았지만 많이 게으르고 간병사의 손이 많이 가야 했다. 그러던 그 손씨한테서 일이 생겼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 환자는 피부가 좋지 않은데다 몹시 게을렀다. 예하면 거동이 불편하여 늘 침대에 누운 채로 소변을 보다 보니 첫 번째는 괜찮았으나 두 번째부터는 소변이 소변 통에 들어가는 것보다 침대 시트위에 흐르는 것이 더 많았으며 그렇게 되면 시트, 바지와 몸 하체가 소변에 흠뻑 젖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되니 남들은 그 환자가 지나가면 지린내가 코를 찌른다고 나한테 말하기가 일쑤였고 그 자신 또한 피부병이 점점 악화되기 마련이었다. 손씨는 점점 몸이 가렵다고 몸부림치던 중 하루는 아들과 함께 외진을 갔다가 오더니 옴일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부약을 처방받아 와서는 매일 목욕을 하고 난 뒤 약을 발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일 한 차례의 목욕? 환자 자신이 거동이 불편하니 간병인인 내가 시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나는 나의 환자이니 목욕을 시켜줘야겠으나 그냥은 못한다고 거절했다. 즉 병원의 규칙에 따르면 환자한테 일주일에 한 번씩만 목욕을 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목욕을 시키고 약까지 발라줘야 한다니?! 추가 보수가 없으면 못하겠다고 버티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요양병원의 간병인 중 나의 월급이 제일 적었다. 환자 수는 9명이었으나 이 중 3명은 간병인이 필요없는 환자였다. 그러니 실제로 돌보는 환자는 7명, 일당은 8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 한편 나에 비해 다른 병실은 간병인의 일당은 8만 5000원 이상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병실이 편하다는 건 아니지만 나의 병실은 다른 병실에 비해 너무도 힘들었다. 100 킬로그램 정도가 되는 환자 김씨가 있었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소리 지르는 환자 2명 있었고 또 걸어 다니며 대변을 보는 환자 2명, 밥을 먹여 줘야 하는 임씨, 성질머리가 까다로우면서도 저녁에 취침 약을 먹은 뒤에도 돌아다니다 머리가 다치지 않으면 바닥에 주저 앉군 하는 한씨 ㅡ 진짜 ‘골칫거리 환자’가 많이 모인 병실이었다. 간병이란 환자 수보다는 어떤 환자를 만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 요양병원에서 아주 철저하게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맡은 병실의 김씨와 손씨는 다른 환자 2-3명을 돌보기보다 더 힘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당은 제일 적고 … 이는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화제는 다시 손씨한테 돌아와 내가 손씨를 매일 목욕시키고 약을 발라주는 일은 그냥은 못한다고 하니 손씨는 “아들한테 이미 말했으니 돈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돈을 얼마씩 주고 어떻게 주는가 하는 것은 한마디도 없이 일단은 그 일을 시작했다. 요양병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손씨를 매일 목욕시킨다는 것도 아주 힘든 일이었다. 병원에는 목욕실이 단 하나뿐이었는데 70여명에 달하는 환자들 남녀가 모두 그 목욕실을 사용했으며 거기에 10여명 되는 간병인들 또한 그 목욕실을 이용하군 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각 병실이 나뉘어 환자들한테 목욕을 시켜주 군 했으며 저녁에는 일반적으로 간병인들이 목욕하군 했다. 그런데 내가 매일 손씨를 목욕시키자고 보니 시간이 없는 것보다 힘이 든다기보다는 목욕실을 한번 씩 사용한다는 것이 여간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침 전이나 아침 후, 점심시간의 오침기회 혹은 저녁에 간병인들이 목욕실을 이용하지 않는 틈을 타야 했다… 이렇게 지난 1월 말부터 2월 한 달이 지나 3월에 들어섰지만 덤으로 준다던 돈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래서 손씨더러 들으라고 “난 돈 벌러 왔지 봉사하러 온 것이 아니다”, “노동이란 등가교환이 아닌가” 등으로 투덜댔다. 이러자 어느 날 손씨는 손녀가 돈을 가져왔다면서 봉투를 내미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돈 액수보다는 얼마간이라도 성의를 보여주면 된다는 식으로 “감사합니다”하고는 봉투를 그대로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조용한 곳에 가서 봉투를 열어보니 아이고 맙소사! 그게 빈 봉투가 아니겠는가! 나는 악이 났다. 나는 그 자리로 돌아서 방에 들어와 손씨와 따졌다. “어르신을 그렇게 안 봤는데 영 형편없는 노인네구만,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 어르신인 것은 아니라구요.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빈 봉투를 내미는 거예요. 자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 돈도 싫으니 이젠 매일 목욕을 시켜달라고 요구를 하지 마세요. 나한테 어르신을 매일 목욕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구요” 등으로 이렇게 저렇게 책망을 하였다. 그러자 그제야 손씨는 “호주머니에서 빠진 모양이군” 라고 하면서 다시 호주머니에서 5만 원 권 한 장을 꺼내 내미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5만 원을 받은 것이 “화근”의 발단이었다. 그 때가 3월 말인가 4월 초였던가. 어느 날 손씨의 큰 아들이 병원을 찾아와 나를 찾더니 “아버지한테 돈을 요구한 적이 있는가?”, “이 일을 병원에 반영해 되는가?” 등으로 따지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워낙 일주일 한 번씩 환자를 목욕시키는 것이 규칙이지만 나는 매일 시켰으니 추가 작업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추가 돈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 “병원 측에 반영해도 괜찮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바로 그날 저녁, 김과장이 나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손씨를 목욕시키면서 돈을 요구 했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사실대로 말하면서 매일 목욕을 시키고 약을 발라주는 건 간병인의 책임범위 밖의 일이며 또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환자와 병원 측의 요구에 의해서 한 것이라고 하면서 “돈 벌러 왔지 무료봉사하러 왔는가. 그것도 며칠이 아니고 이미 한 달 이상 해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하는 말에 역점을 찍었다. 그랬더니 김과장은 별로 말이 없었으며 나 또한 일이 그쯤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헌데 이튿날 아침 간병팀장이 찾는 것이었다. “김과장이 하는 말이 302호 병실 간병사가 손씨를 협박해서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면서 나더러 단단히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낮이 되자 간병협회 대표가 왔는데 국장실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김과장이 간병협회에 전화로 나를 고자질해 바친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할 말을 미리 준비했다. 병원규정은 매 환자를 일주일 한 번씩 목욕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환자 1명만 돌보는 1대1 간병도 일주일에 두 번 목욕시켜 주더라. 내가 한 환자를 매일 목욕시켜 주면서 추가노동의 대가를 요구한 것이 뭐가 잘못 됐는가 라는 등등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보따리를 쌀 각오도 했다. 물론 김과장과는 한바탕 붙고 말이다. 헌데 생각 밖으로 일이 쉽게 끝나고 간병협회 대표는 나를 찾지도 않고 돌아갔다. 바로 국장이 간병협회 대표한테 사실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환자한테 매일 목욕시키고 약을 발라주는 건 한 달에 10만원의 추가지급을 해도 적다고 하면서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했다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 역시 마음을 비웠다. 생각 같아서는 고자질한 김과장을 볼기라도 한 짝 때려주고 싶었지만 나의 손을 들어준 국장의 성의를 봐서라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나는 속으로 그 여자를 벼르기 시작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5-13
  • 조국은 문재인 정권의 주공?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민주당과 청와대는 4.7보궐선거 참패의 데미지가 치명적이다. 순간 된 매를 맞아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있을 때 순발력이 있는 80여 명의 여당 초선의원들이 데미지를 안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조목조목 짚어서 반성문을 냈다. 그런데 바닥까지 추락한 당을 추슬러보려는 순수한 동기로 출발한 초선의원들의 반성이 외려 자신들이 큰 데미지를 입게 생겼다. 조국사태 때문이다. 문재인 열렬 지지자, 이른바 강성 문파들이 조국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초선의원들을 향해 막말에 상욕까지 해가며 당을 떠나라고 협박하고 심지어 적을 대하듯 다섯 명을 지칭하여 ‘오적(五賊)’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고 있다. 하루 수백 통에 달하는 메시지 발신자와 내용을 일일이 확인할 순 없지만 육두문자나 성희롱은 부지기수고, 심한 경우 가정사나 가족의 장애까지 들먹이며 악담을 퍼붓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진 의원은 “역사적으로 강성 지지자들이 이렇게까지 한 경우는 없었다."며 "꼬리가, 아니 깃털이 몸통을 흔들게 되면서 당이 선거 이후에도 반성할 기회를 잃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하여 여당 내에서 쓴 소리 잘하는 조응천 의원이 4월 13일 의미심장하고 심사숙고할 만한 발언을 했다. “조국사태는 보수 탄핵 같이 장기적으로 진보의 발목 잡을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다.” 진보진영의 이러한 혼란스런 ‘추태’를 지켜보던 2030젊은이들이 ‘왜 조국이 그토록 중요한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왜 조국이 문재인 정권에게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인물인지? 이에 관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답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흘러온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에서 문제점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진영의 강성지지자들의 종교가 아닌 종교적인 신앙 심리에서 찾으려 한다.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란 선비 중에서 뛰어난 자를 고위관료로 등용하는 인재중용시스템이다. 동양역사에서 언제부터 유교적인 현인정치시스템이 시작되었나? 주나라 때 선비가 하나의 계급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함에 따라 시작되었고, 주공 이후 특히 춘추시대에 이르러 각 제후국들은 선비를 중용하는 바람이 불었고 이때부터 선비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했다. 선비를 ‘사(士)’라고 하는데 ‘사’는 주나라 천자, 제후, 대부, 사, 서민 등 다섯 계급 중에서 아래로 두 번째에 속했다. 서민은 백성이니 ‘사’는 엘리트층에서 말단 계급이었다. ‘사’는 비록 계급은 낮은 편이지만 취직에 있어서 유동성이 강해 대부에게 중용되거나 제후국에서 각 부처의 장·차관은 물론 재상자리까지 쉽게 오르는 등 하루아침에 벼락출세할 수 있었다. 유가의 이상인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선비가 공부를 통해 수양을 닦아서 대부를 도와 제가를 하고, 제후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를 도와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뜻이다. 『한비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강대한 초나라 한 선비가 쇠약한연(燕)나라가 걱정되어 연의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한참 편지를 진지하게 쓰고 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하인에게 촛불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선비는 잠시 집중을 잃었는지 그만 편지에 ‘거촉(擧燭)’이란 두 글자를 써넣었다. 편지를 받아 본 연나라 재상은 ‘거촉’의 의미를 진지하게 연구한 끝에 자기 나름대로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고 현인을 등용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이를 왕에게 보고했다. 연나라 왕은 과연 현인을 등용했고 그 결과는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한비자는 이 이야기를 본래의 뜻을 떠난 오해의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당시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로 생겨났고 전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각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려고 선비를 애지중지 받들었으며 선비 중 뛰어난 현인들은 왕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높은 대우와 예우를 받았다. 전국시대에는 이런 기류가 더욱 농후해졌다. 유가는 명사, 도가는 은사, 법가는 모사라고 정리한다면 전국시대 말기, 유가의 명사인 현인들과 도가의 은사들은 찬밥신세였고 간혹 그들을 중용한 나라들은 실패하여 법가의 모사들을 중용한 진나라에게 모두 먹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법가를 중용하여 천하통일이라는 위대한 대업을 이뤄냈고 천년만년 영원하리라던 진나라는 2세를 넘기지 못하고 15년 만에 홀딱 망해버렸다. 중국 23개 왕조역사에서 가장 단명이었다. 진의 뒤를 이은 한고조 유방은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법가의 설계도에 따라 군·현제를 실시하자니 단명인 진나라 전철을 밟을 것 같고, 그렇다고 유가의 패턴으로 이뤄졌던 주나라 봉건제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 않느냐? 결국 수도권인 경기지역은 군·현제를, 각 지방은 제후를 세우는 봉건제를 실시하였고 통치무기는 유가도 아니고 법가도 아닌 속박이 없이 스스로 그렇게 맡겨서 돌아가게 하는 도가의 무위자연론이었다. 백성들이 자유로운 세상을 만나 신나게 일한 덕분에 곡식이 곳간에 넘쳐났고 서로 다툼이 없는 태평성세를 맞았던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더니 한나라 초기 좋았던 세상이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너무 느슨한 통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느슨해져 기강이 문란하고 국가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전반 사회기강이 바로 서고 나라가 힘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이때 눈치 구단인 동중서(董仲舒)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 무제를 찾아가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흥정을 한다. “유가를 다시 살리고 선비(유생)들을 관료로 전면 등용하십시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고 유씨 왕조는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OK!” 한 무제는 동중서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유생을 관료사회에 전면 배치한다. 선비들이 살판났다. 한 무제는 관료로 써먹을 유생을 배출하는 태학을 세운다.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를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 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에 1,850개의 교실을 갖게 되었다. 아마 요즘 지구촌의 지식분야의 최대 상징인 하버드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 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동중서와 한 무제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흥정에 의해 선비를 관료로 전면 등용하는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때에 중앙 귀족 자제에게 경학, 문학 따위를 가르치던 국립 교육 기관을 설치하였다. 고려 인종 때에 국자감을 설치하여 고급 벼슬아치의 자제들에게 유가 경전인 사서오경을 가르쳤다. 1308년에 성균감을 성균관으로 바꾼 최고 국립교육기관에서 역시 유학교육이 중점이었고 고려 말기에 이르러 정몽주와 정도전 같은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여 정계를 흔드는 거목으로 역할 한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있어서 선비 현인정치 모델이었고 중국 주나라 주공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 후 조선조 500년 동안 선비가 관료사회에 등용되는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같은 유교문화권에 속한다. 유교적인 현인정치가 똑 같이 근대시기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폐지한데 비해 한국은 아직도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을 그대로 시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교수와 변호사가 고위관료로 직행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시대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현재도 진행형인 조국사태의 논란에 대해 말하자면 조국의 정체성은 문재인의 뒤를 이어 노무현의 유업을 계승하는 사명을 지닌 인물이다. 노무현의 숙원사업이었던 검찰개혁을 문재인이 바통을 이어받아 역시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로 추진하려고 했는데 이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할 인물로서 바로 조국이 선택받았던 것이다. ‘검찰개혁의 대명사’ 이것이 조국에게 붙여진 ‘오사모(烏紗帽)’이다. 조국의 이 ‘오사모’는 조국이 선비 중 으뜸의 현인이라는 의미를 강력하게 지니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게 그렇고 강성 문파들에게도 그렇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재인 정권과 강성 문파들은 조국을 주나라의 치국시스템을 창안해낸 주공처럼 대한민국 검찰역사를 바꿀 인물로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굳게 믿었던 ‘현인 조국’이 가족이 탈탈 털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문재인 정권과 강성 문파들은 도무지 견뎌 낼 수가 없어 분노에 가득 차 펄쩍 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성 문파들은 서초거리에서 데모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장장 1년이란 시간을 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국사태는 문재인 정권에게 있어서 현인 중 현인으로서 마치 주공에 버금가는 조국이 아니면 검찰개혁을 완수할 수 없을 것처럼 국민에게 비쳐졌기 때문에 오늘 날까지도 여전히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현대사에서 ‘두 대통령 종교’가 생겨났는데 하나는 ‘박정희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노무현 종교’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은 ‘박정희 종교’ 덕분이고 박근혜가 탄핵되자 광화문에 나선 이른바 태극기 부대가 바로 ‘박정희 종교’ 독실한 신도들이다. ‘박정희 종교’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바로 ‘노무현 종교’인데 그 신도들이 현재 강성문파들이다. 이들은 노무현이 사라지고 문재인은 곧 5년 임기를 마치면 정계를 은퇴할 것이니 조국을 정신지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누구든 조국을 건드리면 마치 자기네 조상을 욕보이는 것처럼 간주하고 도저히 용납 못하고 곧 공격적인 행동에 나선다.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조국사태 같은 정치파문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을 폐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제2, 제3의 조국사태가 벌어질 것이며 사회는 내편 네편 가르기로 크게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한편 조국과 같은 선비를 고위관료로 중용하는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대한민국 발전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는 폐단에 관해서 다음호에 논의를 이어가려고 한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05-04
  • '삼국지' 재해석⑱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Ⅲ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조조의 이중성격 조조가 원소와 생사결단의 전투를 벌이기 전에 먼저 여포를 사로잡았고 원술을 격파하였고 장수를 항복시켰다. 여포는 이각과 곽사한테 궁에서 쫓겨난 후 원술에게 의탁했다가 여의치 않아 이리저리 유랑신세가 되어 마지막에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다가 조조에게 잡혔다. 원술은 손견에게서 한 왕조의 전국옥새를 얻고 천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인하며 건안 2년(197)에 공공연히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금기를 어긴 원술은 천하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손책마저 등을 돌렸다. 한때 그의 부하로 있었던 여포마저 원술이 보낸 사자를 허도로 압송했다. 조조는 아예 군사를 일으켜 원술을 격파했다. 물러설 곳조차 없었던 원술은 2년 동안 허덕이다가 죽었다. 원술이 죽고 난 다섯 달 뒤 장수가 투항했고 죽기 반 년 전에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혔다. 건안 5년(200) 관도대전을 통해 북방지역을 통일하는 쾌거를 맛본 조조는 남방으로 눈길을 돌렸고 결국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세력에 밀려 천하가 삼분되는 태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조조는 이 남정북전(南征北戰) 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한 없이 넓은 대인의 도량을 보여주기도 했고 때로는 소인의 옹졸한 모습을 보여 주어 그에 대한 평가는 정말 복잡하고 다양하다. 필심(畢諶)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그의 모친과 동생 및 처자식이 장막에게 억류되자 조조가 그에게 말한다. “자당 어른이 장막에게 있으니 그대는 거기로 가는 편이 좋겠소.” 필심이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은 딴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하자 조조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필심은 인사도 않은 채 몸을 돌려 조조를 배반하고 장막에게 몸을 맡긴다. 후일 필심이 포로가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번에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조는 너무나 뜻밖에도 “효도를 다하는 사람이 어찌 충성을 다 할 수 없겠는가?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필심의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가서 노국상(魯國相)을 맡게 한다. 필심은 효심 덕분에 조조가 살려주었다면 자신을 배반했던 사람조차 다시 기용했다. 위종(魏種)은 원래 조조가 신임했던 사람이다. 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버리고 장막을 따라갔지만 조조는 자신 있게 말한다. “위종만은 나를 배반할 리가 없다.” 하지만 위종마저 장막을 따라서 달아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화가 난 조조는 이를 간다. “좋아! 위종! 하늘 끝까지 도망쳐 봐라. 내가 널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나 막상 위종이 포로가 되자 조조는 의외로 크게 한숨을 쉬며 “위종은 인재로다!”라고 하고는 그를 하내태수로 임명한다. 진림(陳琳)이란 사람은 문장력이 뛰어난 대가였다. 진림은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부하로 있으면서 원소를 대신해 격문(檄文)을 지어 조조에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심한 역설을 퍼부었다. 나중에 원소가 전쟁에서 패하자 진림은 포로가 되었다. 조조는 괘씸해서 진림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욕을 할 때 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어떻게 나의 조상 삼대까지 욕을 하는가?” 진림은 사죄하면서 “시위를 화살에 얹으면 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그를 사공군모좨주(司空軍謀祭酒)로 임명했다. 조조는 또 어릴 적 친구이자 자신을 주목으로 만든 진궁과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았다. 진궁은 조조와 어릴 적 친구였고 성인이 된 후에도 사이가 좋았다. 조조가 연주목이 되었던 것도 진궁의 공로가 컸다. 그런데 조조가 명사 변양(邊讓)을 죽이자 장막, 진궁 등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번 돌아선 진궁은 끝까지 여포를 도와 조조를 치다가 포로가 된 다음에도 투항하려 들지 않았다. 조조가 말했다. “공대(公臺, 진궁의 자)! 자네가 죽는 것은 괜찮지만 자네의 노모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진궁이 길게 탄식하면서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는 효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노모가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그대에게 달렸소.” 조조가 다시 물었다. “자네의 처자식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진궁이 다시 대답했다. “듣기에 인정(仁政)을 베푸는 자는 남의 후손을 끊지 않는다고 하니 처자식이 죽고 사는 문제도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세.” 진궁은 말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들고 형장으로 향했다. 조조는 눈물로 그를 배웅하였고 그의 노모와 처자식을 돌보았다. 조조는 이렇듯 넓은 도량으로 ‘죄인’들을 관대하게 대했던데 비해 때로는 짜개바지 친구이자 자신의 패업에 공이 컸던 책사마저 죽인 일도 있었다. 허유는 원소의 핵심참모로 역할 하다가 관도대전을 눈앞에 두고 조조에게 의탁해서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이다. 그런데 허유는 늘 조조를 공경하지도 공손한 태도로 대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려 조조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려 죽임을 당했다. 조조의 아명은 아만(阿瞞)이다. 허유는 조조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만, 내가 없었다면 그대는 기주를 얻지도 못했을 걸.”라고 말하는데도 조조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그래, 그대 말이 맞소.”라고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후일 조조가 업성을 함락하자 허유는 사람들 앞에서 “이 녀석은 내가 아니었다면 이 문을 들어 가 보지도 못했을 걸.”라고 떠벌렸다. 화가 난 조조는 더는 참지 못하고 허유를 죽였다. 허유의 죽음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명사들이 조조를 높이 대하지 않고 심지어 하찮게 보았다는 이유로 죽인 결과 그 파장이 컸고 후폭풍이 심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변양의 죽음이 바로 그랬다. 변양은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으로서 세상이 알아주는 명사였다. 전반 선비사회도 그랬거니와 더욱이 명사들은 환관가문 출신인 조조를 마뜩찮게 여겼다. 변양도 같은 입장을 갖고 조조를 함부로 대했다. 변양의 생각은 내가 이렇게 해도 조조가 감히 유지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당시 도량이 넓은 정치가가 아니었다. 개인의 희로애락 감정에 휘둘리는 한 인간이었다. 당연히 변양의 불손한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패국상이던 원충(袁忠), 패국 사람 환소(桓邵)도 조조를 경멸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조조가 이 세 사람을 죽인 것은 속 좁은 처사였고 이로 인하여 인격이 크게 손상되었다. 조조의 이와 같은 이중성격에 대해 이중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조조였다. 그는 역사상 성격이 가장 복잡하고 이미지가 가장 다양한 사람일 것이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간사하고 교활하면서도 솔직하고 진실하며 활달하고 큰 아량을 지녔으면서도 이런저런 의심이 너무나 많고 도량이 넓고 크면서도 한 없이 좁았다. 그야말로 대인의 풍모와 소인의 얼굴을 가졌으며 영웅의 기개와 아녀자의 감정을 가졌고 염라대왕의 성깔과 부처님의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다.” 조조의 유재시거(唯才是擧) 건안 5년(200)년까지 조조의 최대 라이벌은 원소였으며 세력으로 따지면 원소가 조조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 왜 조조가 승리하고 원소가 실패하였을까?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용인술이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원소의 용인술을 살펴보자. 원소의 부하로 있다가 조조에게 의탁하여 핵심참모로 역할 한 순욱이 원소를 이렇게 평가했다. “평범한 호걸이라서 사람을 모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른다. 겉으로는 관대하고 고상하며 도량이 있어서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남을 시기하여 해치는 경우가 많았다.”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된 대목이니 믿어도 좋을듯하다. 순욱이 이렇게 말한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원소의 수하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안량과 문추는 용맹하였고 전풍과 허유는 지모가 있었으며 저수와 곽도는 꾀가 많았고 심배와 봉기(逢紀)는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조를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공융은 조조가 원소의 적수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순욱은 공융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풍은 고집이 세서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며 심배는 독단적이어서 계획성이 없고 봉기는 무모하여 자신의 판단만으로 행동한다.”고 순욱은 말했다. 순욱의 지적이 맞을 수는 있지만 이것이 원소의 패배의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결정적인 이유는 원소가 이들의 갖고 있는 장단점을 적당히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사람이라면 누구든 결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리더가 이들을 잘 관리하고 등용하여 각자의 장점을 잘 발휘하게끔 한다면 패배할 리가 없다. 그러나 원소는 부하를 부리는 기준이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호오(好惡)였다. 원소의 호오 기준은 아주 간단했다. 아첨을 하거나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을 중용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곧 배척했다. 전풍이 이의를 제기하자 그를 감옥에 처넣었고 저수가 이의를 제기하자 그를 배척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리더인 원소가 능력 있는 부하를 시기하고 질투하니 부하들 간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결국 그 조직이 망할 수밖에 없다. 관건은 리더가 나서 적당히 이쪽저쪽 모두 보살피며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데 원소 자체가 그런 인간이니 수습이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원소는 형제 원술과 철전지 원수가 되었고 원소의 DNA를 물려받은 그의 두 아들도 철전지 원수가 되어 치고 박고 난리도 아니었다. 조조는 원소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조조와 원소의 생사결전인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의 부하들이 은근히 걱정이 심각했다. 원소의 군사가 조조의 군사 10배나 되니 그들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 조조가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그자는 야심은 크지만 지혜가 적고 화는 잘 내지만 담력은 작으며 질투가 심하고 각박하며 인간미가 없소. 그의 집단은 병사의 수는 많으나 지휘부서가 명확하지 않고 장수들은 거만하고 정치적인 명령이 일관적이지 못하오. 따라서 원소는 지역적 기반이 넓고 양식이 많으나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물자를 제공해줄 사람에 불과하오.” 원소에 비해 조조의 용인술은 어떻게 달랐을까? 원소는 사람을 잘 모으지만 쓸 줄 모르는데 비해 조조는 사람도 잘 모으고 잘 쓰기로 유명했다. 조조가 인재를 모으는 원칙은 모두 아시다시피 그 유명한 문구인 ‘유재시거(唯才是擧, 무릇 인재라면 모두 받아들이고 등용한다는 뜻)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유능한 인재라면 반드시 흠결 없이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흠결이 있더라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등용한다. 과거 원수라도 오늘날 나의 대업에 보탬이 된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받아들이고 등용한다. 얼마나 도량이 넓은 용인술인가! 조조의 이와 같은 포용력이 강한 용인술 덕분에 심지어 적지에서조차 조조에게 의탁한 인재가 많았다. 실로 해납백천(海納百川)과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중텐 교수는 조조의 해납백천 기적에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첫째 명분과 실리의 관계 명분도 있고 실리도 챙기게 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세상에는 명분도 좋고 실리도 챙길 수 있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경치도 좋고 그늘도 좋고 방석도 좋은 명당이 어디 있으랴! 조조는 출신의 비천(환관가문 자제) 때문에 정치자본이 매우 부족하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어 자신에게 도움만 된다면 누구든지 수용했다. 그 사람이 사기꾼이든 협잡꾼이든 명성이 있든 허영만 있든 따지지 않았다. 조조는 총명하게도 모든 사람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히 넘어가 준다면 문제 삼지 않았다. 조조가 천자를 맞이하여 허도에 돌아오자 선비들이 몰려왔다. 그 중에 공융이란 명사가 있었는데 그는 노골적으로 조국과 황제 폐하가 걱정되어 왔을 뿐이지 당신(조조)이 좋아서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조조는 개의치 않고 받아주었다. 한편 조조는 명성이 높은 사람이 반드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명성보다 능력을 우선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조의 정실부인을 맞이하는데 있어서 명분보다 실리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유부인이 일찍 죽고 정부인이 정실로 있다가 친정에 돌아간 후 다시는 귀가하지 않아 이혼했다. 정실부인 자리가 비게 되자 변부인을 정실로 맞았다. 그런데 변부인은 기생출신이다. 당시는 송∙명∙청 시대처럼 정조를 강구하지는 않았지만 기생출신 여인을 첩으로 삼는 일만해도 시빗거리가 될 수 있는 일인데 더욱이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히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하물며 조조가 변부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할 때 이미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명분보다 실리를 챙겼다. 결과 변부인은 훌륭한 부인 역할을 담당해 내어 조조의 창업에 기여했다. 둘째 덕성과 재주의 관계 건안 15년(201), 건안 19년(214), 건안 22년(217)에 차례로 <구현령(求賢令)을 반포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재가 시급한 때이므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할 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이 따질 수는 없소. 만약 도덕적인 품성이 나무랄 데 없고 모든 면이 완전무결한 사람만을 요구한다면 제환공이 어떻게 패업을 이룩할 수 있었겠소. 또 한고조가 어떻게 대한(大漢)을 세울 수 있었겠소.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고 병법을 사용하는 재주를 가진 인재라면 설령 좋지 않은 명성이 있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행동을 한다 해도 심지어 어질지 못하고 불효자라 하더라도 추천만 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쓰겠노라.” 이 <구현령>에 대해 선비들은 조조가 유교의 이념을 위배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고 심지어 조조를 망나니 나쁜 놈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으며 후세 선비들도 조조를 공격할 때 이 <구현령>을 들고 나와 공격무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당시는 난세이다. 난세에는 즉각적인 효과가 매우 필요했다. 즉각적인 효과를 얻으려면 명성이요, 도덕이요 다 따진다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중국말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오이냉채도 식는다.’ 모르긴 몰라도 조조가 아마 이 속담을 진리로 삼았지 않았을까! 셋째 청렴과 탐욕의 관계 조조는 청렴한 관리를 중용하되 사소한 욕심은 눈감아 주기도 했다. 조조의 동향인인 정배(丁裵)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작은 이익을 탐내기 좋아했다. 어느 날 직권을 남용하여 자기 집의 야윈 소를 관아의 살진 소와 바꿨다가 파직됐다. 조조가 그를 보고 물었다. “문후! 그대의 관인(官印)은 어디로 간 것이오?” 정배도 슬쩍 웃으며 말했다. “가져다가 떡을 바꿔 먹었소이다.” 조조는 파안대소하고 고개를 돌려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모개가 여러 차례 정배를 중벌로 다스리라고 했지만 나는 정배가 쥐도 잘 잡고 물건도 곧잘 훔치는 고양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놔두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중텐 교수는 “이 일이 과연 사실이라면 아마 중국 최초의 ‘고양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넷째 항복과 배신의 관계 조조의 밑에 다섯 명의 대장이 있었는데 세 사람이 적진 출신이었다. 장료는 여포의 부장이었고 장합은 원소의 부장이었고 서황은 양봉의 부장이었다. 여포를 두고 쓰려고 했지만 유비가 죽이라고 해서 죽였다. 모신들 중 허유는 원소의 진영에서, 괴월은 유포의 진영에서, 진림도 원소의 진영에서, 투항해왔다. 왕수는 원소의 장남 원담의 모신이었다. 원담이 죽자 왕수는 대성통곡하며 원담의 시신을 거두게 해달라고 청했다. 조조는 허락하였고 왕수는 돌아와서 계속 조조의 모신으로 활약했다. 다섯째 대소의 관계 장수는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인 원수인데도 흔쾌히 받아주었고 필심은 거짓으로 조조를 속였으나 조는 개의치 않고 효심이 충심으로 변할 것이라 믿고 관용을 베푼다. 진군이 곽가를 여러 차례 고발하지만 조조는 눈감아주고 더욱 신임하고 중용했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는 전략이다. 조조의 생애에 핵심 모사와 중요한 모사 및 조조를 받들어 모신 신하가 102명이나 된다고 한다. 여섯 명만 더 많았더라면 ‘양산박’을 이룰 뻔했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 통계수치로 조조의 용인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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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05-04
  • 中, 2020 GDP 백강도시 랭킹 출범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근 중국은 2020년 GDP 백강도시 랭킹을 출범했다. 보도에 따르면 2020년 중국 국내 생산총액(GDP)은 101조 5986억 위안으로 전년 대비 2.3% 증가, 아울러 2020년 생산총액(GDP) 30강 도시 랭킹도 이미 공개됐다. 집계에 따르면 2020년 중국 국내에서 GDP가 3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 2개였고 GDP가 2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상하이와 베이징 외 선전(深圳), 광저우(广州), 충칭(重庆)과 수저우(苏州) 등 6개였으며 GDP가 1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23개였다. 2020년 중국 GDP 총량 30강 도시 랭킹에서 보면 랭킹 앞 10위에 오른 도시는 각각 상하이, 베이징, 선전, 광저우, 충칭, 수저우, 청두(成都), 항저우, 우한(武汉)과 난징(南京)이었으며 이 중 베이징, 상하이, 선전과 광저우는 랭킹 4위에 올랐다. ● GDP 총량 30강 도시 중에는 1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가 23개, 수저우는 여섯 번째로 2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로 되었고 둥관(东莞)은 1만억 위안, 둥관에 이어 산둥 옌타이(山东烟台)와 장수 창저우(江苏常州)는 지난해 GDP가 7800여 억 위안이다. ● 2020년 랭킹 10위권 도시 중 난징이 텐진을 제치고 처음으로 10위 안에 들었고 항저우는 우한(武汉)을 제치고 한 단계 올라섰다. 여기서 우한은 2020년에 코로나19로부터 강타를 크게 당한 도시였지만 이런 성과는 진짜 쉽지 않은 것이다. ● 2020년 들어 6개 도시가 1만억 위안 행렬에 새로 가담, 총 수는 23개로 증가했으며 이 중 6개 도시의 GDP가 2만억 위안을 초과했다. 증가속도를 보면 시안(西安)이 30개 도시 중 1순위에 올랐으며 그 성적이 매우 돌출했다. ● 100강 명단 중 도시 변화는 별로 크지 않았다. 윈난의 취징(云南曲靖), 푸젠의 룽옌(福建龙岩), 쓰촨의 이빈(四川宜宾) 등 3개 도시가 신규 진입했고 이 중 취징이 100대 도시 중 가장 빠른 6.6%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 100위권 밖으로 밀려난 도시로는 허난의 자오쭤(河南焦作), 네이멍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와 바오터우(包头)였다. 이 중 자오쭤의 GDP는 전년 동기 대비 20.6% 하락, 2019년의 96위에서 2020년의 135위로 밀려났으며 하락 순위 폭은 39개 단계였다. ● 난징(南京), 허페이(合肥), 청두(成都), 창사(长沙) 등 몇몇 성 수부도시는 GDP 성장률이 4%에 달했거나 넘었다. ● 최근 몇 년간 중국에서는 지역경제가 갈수록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23개 GDP ‘1만억 위안’ 도시 중 8개 도시가 장강 삼각주 에 있으며 주강 삼각 주 9개 도시 중 8개 도시가 100강 내에 들어갔다. ● 다른 각도에서 보면 중서부 도시의 경제 회복세가 비교적 뚜렷했고 연해 지역은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19 영향 때문에 대외무역 방면에서 심각한 영향를 받았다. 2019년과 비교해 보면 구이저우(贵州)와 윈난(云南)은 도시 순위가 내려가지 않은 반면, 후난의 장자제(湖南张家界)는 한 단계 하락하는 데 그쳤다. ● 30강 도시 중 상하이, 베이징, 충칭(重庆), 텐진(天津) 등 4대 직할시를 포함됐고 광저우, 청두, 항저우(杭州), 우한(武汉), 난징, 창사, 정저우(郑州), 제난(济南), 허페이, 시안(西安)과 푸저우(福州) 등 11개 성 수부도시가 들어갔으며 이외 선전(深圳), 닝바오(宁波), 칭다오(青岛)와 다롄(大连) 등 4개 도시 및 쑤저우(苏州), 우시(无锡), 푸산(佛山), 취안저우(泉州), 난퉁(南通), 둥관(东莞), 옌타이(烟台), 창저우(常州), 쉬저우(徐州), 탕산(唐山)과 원저우(温州) 등 11개의 일반 도시도 들어 있다. ● 100강 도시 중 90% 이상의 도시가 경제성장이 플러스로 돌아섰고 저장 저우산(浙江舟山)의 성장속도는 전국을 선도해 2020년 GDP 성장률은 12.0%로 나타났으며 2019년에도 성장속도 상위 20대 도시 중 절반가량이 광시(广西)와 윈난(雲南)에서 나왔다. ‘14.5’ 계획요강 '14.5' 계획요강을 통해 보면 국가 경제발전의 중점은 도시군(城市群)과 도시권(都市圈)을 발전시키는 것, 집적적인 효과가 있는 도시 군과 도시권을 경제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GDP 100강 도시 중 앞자리 도시권 GDP가 1만억 위안이 되는 도시의 경제 총량은 전국 GDP 총량의 38%를 차지했다. 그리고 핵심 도시군 중 장강 삼각주 지대는 100대 도시 중 20석을 차지했고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지구는 주강 삼각주였다. 그러니 국가 급 도시군이 경제지형의 한 축으로 떠오르고 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4.5’ 계획 요강에서 제시된 도시군과 도시권의 발전은 도시군을 일체화로 발전시켜 전면적인 횡(横)과 종(纵) 2개 부류의 도시화 전략구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중 베이징(北京) 텐진(天津)과 허베이, 장강 삼각주, 주강 삼각주, 청두(成都)와 충칭(重庆) 등의 도시군을 최적화하여 더욱 승격시키고 산둥반도(山东半岛), 광둥(广东), 푸젠(福建)과 저장(浙江)의 연해, 중원, 관중평원, 북부만 등 도시군을 발전 장대시키며 또한 하얼빈(哈尔滨)과 창춘(长春), 랴오중남(辽中南), 산시 중부(山西中部), 구이저우 중부(黔中), 윈난 중부(滇中), 네이멍구의 훅호트(呼和浩特), 바오터우(包头), 어얼둬쓰(鄂尔多斯)와 산시의 위린(陕西榆林) 그리고 란저우(兰州), 시닝(西宁) 및 닝샤의 연황성(宁夏沿黄城) 도시군 또한 텐산(天山) 북쪽의 도시군 등을 부축하여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도시경제의 회복이 가속화되면 중국 경제의 빠른 성장에 중요한 활력소로 될 것은 사실이다. 21개의 실험실 데이터 통계에 따르면 지난 3월 31일까지 2020년 경제성장 상황을 밝힌 319개 도시 중 292개 도시의 GDP는 플러스 성장이었고 225개 도시의 성장 속도는 전국 평균의 증가속도(2.3%)를 추월하였다. 지구급 도시 경제실력 아주 막강하게 발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1선 도시와 각 성 수부도시 외 적지 않은 지구급 도시의 경제실력이 아주 막강하게 발전하였다. 최근 출범한 2020년 지구급 GDP 10강 도시를 보면 그 전부가 동부 연해지구에서 출현, 이 중 북방지구에서는 옌타이(烟台), 쉬저우(徐州)와 탕산(唐山)이었고 남방지구에서는 각각 수저우(苏州), 우시(无锡), 푸산(佛山), 췐저우(泉州), 난퉁(南通), 둥관(东莞)과 창저우(常州)였다. 그리고 이 앞자리 10위까지의 지구급 도시 중 장수성(江苏省) 내의 도시가 절반을 차지했다. 다음 2020년 수저우의 전 시 과학기술 진보기여율은 66.5%, 고신기술 기업 신청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였고 고신기술기업은 9772개소에 이르러 4대 1선 도시 수준에 접근, 전국의 5위에 올라 많은 1선 도시보다 월등하게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수저우에서 실현한 일반 공공 예산수입은 2303억 위안으로 전년보다 3.7% 증가하면서 처음으로 전국 대중도시 중 4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은 것은 수저우 산하의 몇 개 현급 시의 기여와 갈라 놓을 수 없다. 2020년 쿤산(昆山), 장자강(张家港)과 창수(常熟) 등은 모두 전국 100강 현의 앞자리를 차지, 이 중 쿤산시는 중국의 종합실력 100강 현 순위 중 연속 10여 년간 앞자리에 올라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발전 중 서로 부동한 도시는 반드시 산업 구조와 방향에서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확정한 필요가 있겠다. 그러자면 발달 도시군을 바싹 따라잡을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자신의 자원과 지역 특성 그리고 원래의 산업기틀에 근거해야 하며 보다 우세한 분야를 적극 선택하여 그 발전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강성 성 수부도시의 부상에 대하여 보면 중국 경제가 구조전환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후 성 수부도시들의 과학기술, 의료와 문화 등 방면에서의 우세가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한편 최근 몇 년 동안 궤도 교통건설을 통해 성 수부도시 중심의 도시권을 적극 건설하였으며 성 수부 도시 또한 자원요소를 결집하여 주변지역을 발전시키는 능력도 극대화됐다. 다른 한편 경제증장 외 인구의 증장 또한 도시 발전에 영향을 주는 활력의 중요한 인소의 하나로 되고 있다. 목전 중국에서 GDP 10강 도시 중 유독 난징만이 인구가 1000만 명이 안되고 있다. 만약 도시구역의 장기거주 인구로 계산해보면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선전, 충칭은 슈퍼 대도시에 속하고 청두, 항저우, 우한, 난징 등은 특대 도시에 속했으며수저우 도시구역만이 장기거주 인구가 500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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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0
  • 중·미 경쟁 속 한국 외교의 헤지(对冲) 노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2일, 중국 신화통신은 중미 경쟁 속 한국 외교의 헤지 노선(履冰外交:韩国在中美竞争之下的对冲路线)’란 제목으로 된 다롄 외국어학원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이며 동북아 연구센터 연구원인 루핑(吕平)의 기고문을 실었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이다. '달걀 세 개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은 미묘한 구도에서 재롱을 부릴 수 있는 춤꾼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는 현재 한반도의 지도자들을 놓고 볼 때 해당 지역의 권력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해야 힘의 여유도 생긴다는 말로 되고 있다. 근대 한반도 역사상 강대국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자국의 기본권을 유지한 사람은 아마도 민비가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된다. 민비는 먼저 일본에 달라붙었다가 후에는 청 왕조에 의거했으며 청일 전쟁 후에는 또 러시아와 비밀리에 접촉했다. 결국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는 길을 선택해 비참하게 죽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각국과 모두 사이좋게 보내려면 그만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100여 년래 한반도는 줄곧 대국 경쟁 사이에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고 전쟁 후에는 각자의 점령군에 의해 민족이 분열되었으며 후에는 한국이 일본과 수교하며 ‘화해’는 했었지만 일본한테 당한 민족의 쓰라림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냉전 결속 전후를 계기로 한국의 국제 활무대는 전례 없는 진전을 가져왔다. 구소련과 중국과의 수교를 통하여 한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가교’ 역할을 하면서 무역 왕래로 영토가 협소하고 인구 규모가 제한적인 불리한 조건을 돌려세웠다. 또한 유럽연합, 미국과 중국 등 글로벌 3대 경제체계와 선후로 자유무역 협정를 맺으면서 일약 세계 10대 경제 체 반열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뒤 중국과 미국 간의 경제구도가 형성되면서 한국이 갖고 있던 기존의 활무대가 크게 위축 받게 되었고 그만큼 국제 환경도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2020년의 미국 대선은 한국 각계로 하여금 한숨 돌리게 만들었고 바이든의 당선은 ‘트럼프 드림’의 종말을 의미했다. 지난 4년래 트럼프는 선후로 한미 자유무역 협정를 수정했고 주한미군의 방위비 비율을 크게 높이려고 시도하는 등 의제로 한국으로 하여금 난감하게 하였으며 북한과 대화하는 것 외에는 미국과 한국이 호흡을 함께 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정부와 마주할 때의 난감 정도는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현재 한국 국내는 바이든의 집정에 대해 아주 정면적인 태도이다. 대체적으로 오바마 정부 때의 동맹과 규칙을 중시하고 다자주의로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외교 노선을 실행하던 과거로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가 집권 후 신속하게 동맹관계를 수복하는 목적은 급속도로 굴기하는 중국을 겨냥하는 것이 틀림없으며 이는 한국 외교에 새로운 난 제 거리로 되고 있다. 일찍 미국 대선 기간 바이든은 의도적으로 많은 전 오바마 행정부 성원들을 선거인단에 가입시켰으며 아울러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파트너를 쥐어짜는 것에 대한 비난을 통해 미국 내 건제파 엘리트(建制派精英)들과 연대함으로써 집권 후 대중 포위망을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전략적 포석을 마련했다. 국무장관 브린켄, 국방부 장관 오스틴, 국가안보보좌관 설리번은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미국, 일본, 인도와 호주 등 4개국 체제를 구축하여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에 압력을 가하기로 했으며 유럽연합(EU)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추진하여 EU에 대한 투자협정 발효를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5안(眼)연맹'의 활동을 활발히 벌여 눈길을 끌었다. 아울러 이 활동의 진척 중 한국은 미국의 전략포치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선 미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과 선진국 사이의 연계를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통신기술 협력 분야에서 그랬다. 한국은 세계에서 5G 통신, 조선 등 산업에서 중국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공업화 실체로써 미국에 얼마든지 중국제 ‘대체’ 상품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중국의 제조업과 큰 연관을 맺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동맹이기도 한 한국은 미국의 엘리트들이 보기에 중국과 한국의 산업협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기량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동북아 대륙에서 미국의 유일한 동맹으로 황해 일대에서 미군과 필요한 협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이 중국과 북한을 근접 압박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존재이다. 이를 위해 한국의 전략적 역할이 바이든 정부를 위해 ‘재발견’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외교 및 국방장관의 ‘2+2’ 회담을 계기로 미국의 새 정부가 한국과의 고위급 접촉이 급물살을 타면서 표류하던 한·미·일 3각 협력체제 복원까지 전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한편 한국으로 놓고 말하면 ‘사드 사건’의 충격은 완전히 가셔지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해 주변국과 대국(大國) 사이의 게임 카드를 늘려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한국이 완전히 미국 편에 기운다면 중한 간 금방 회복되기 시작한 신뢰 회복에 영향을 미쳐 양국 경제협력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도 불 보듯 뻔한 것이다. 한 시기 한국은 미국을 위해 ‘화중 취편(火中取栗)’를 시도했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사드 추가 배치 비용 및 기타 방위비 인상 등 ‘협박’을 해온 것이다. 이를 감안해 현재 문재인 정부는 중국, 미국과의 공조를 동시에 강화하는 ‘헤지(对冲)’ 노선으로 중미의 전략 경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얼마 전 정의용 한국 외교장관이 샤먼(厦门)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양국의 코로나19 시대의 전방위 협력을 모색했고 이에 앞서 서훈 한국 국가안보실장이 워싱턴에서 설리번 미 국가 안보보좌관을 만나 한미일 공조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한국 스스로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보면 중미와의 관계를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하는 것은 양강(兩强)의 경쟁 불확실성을 피할 수 있는 기본 전제이겠으나 이는 마치 살얼음 위에서 안전 통로를 찾는 것처럼 난이도가 크다. 첫째로 ‘헤지’ 노선의 외교는 관련 당사국들이 오랫동안 중립에 가까운 외교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방관하겠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고 또 과연 한국 국내에서 이 노선이 장기적으로 관철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외교의 흐름은 일관되게 여야 간 논란의 대상이었고 특히 ‘이데올로기(意识形态)’에 대한 한국 보수 세력의 편견과 중국에 대한 불신감으로 이는 사드 사태 이후 한국 민간이 중국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것과도 서로 결합된 것이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대중국 우호적 입장을 이끌어낼 민심의 기반은 아직 더 다져져야 한다. 이번에 여권이 서울과 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패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이른바 ‘사대주의’, ‘종북 외교’에 대한 보수 세력의 비난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이 높아져 한국 정부의 대중국 우호 유지가 보다 어려워진 상황이다. 둘째로 한국에 대한 바이든 정부의 ‘우호적’ 자세가 장기적으로 유지될지도 불확실한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부가 동맹 시스템을 재가동한 것은 중국에 대한 규제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동맹의 역량을 총동원하려는 의도로도 보이며 한국이 대중국 정책에 있어서 미국과 ‘상향적’ 입장을 보이지 않으면 미국 선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 집권 기간에도 강제의 방식으로 한국에 향해 무조건 미국과 가까이 다가오기를 촉구하고 한일 정보 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협정을 타결시켰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은 각종 협력 체제를 재개하면서 시종 동맹국의 대중국 규제 참여가 제공될 수 있는 ‘자원 지원’을 명확히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미국에 유익한 일만 해주고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행운스러운 것은 중국은 한국 정부의 기본 외교노선을 총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 집권 기간 중한 관계 회복을 추진하였고 한반도 평화구축에 기여한 점도 고무적이다. 중국은 한국을 비롯한 중소국가들이 대국의 경쟁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심리도 이해하며 각국의 독자적 외교노선을 인정하고 있다. 하다면 한국 측도 중한 양국의 우호의 토대를 다지고 이해와 신뢰를 증진해 코로나19 시대에 양국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힘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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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7
  • 문재인 정부에 ‘주공’이 없다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 서울과 부산 두 곳 시장 자리가 불미스럽게 성추행 사건에 의해 공백이 되어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여당이 당헌·당규까지 바꿔가면서 후보를 내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4.7보궐선거가 끝났다. 선거결과는 보수당의 압승, 진보당의 참패였다. ‘한 집은 환락, 다른 한 집은 울상(一家歡樂, 一家愁)이다. 환락을 맞은 야당은 잔칫집이고 울상에 빠진 여당은 초상집 분위기이다. 선거활동 막바지에 이르러 여당이 질 것이라는 짐작은 있었지만 미세한 표차가 아닌 격차가 너무 큰 패배여서 천만의 촛불로 탄생된 정권, 180석 국회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여당이 받아든 성적표라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매번 선거가 끝나면 다음번의 선거를 위해 승리와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기 마련이다. 야당이 자기네가 잘해서라기보다 문재인 정권이 하도 잘못해서 어부지리를 얻은 결과라는 견해에는 일치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문재인 장권이 뭘 잘못했나? 1년 내내 지루하게 질질 끌어온 조국 사태와 추·윤 갈등, 시장경제와 엇박자 소지가 다분한 잘못된 부동산 정책,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호칭된 공무원 LH직원들의 투기사태에 플러스 이 정권의 특유한 내로남불 등등이 여당 참패 원인 메뉴에 등장한다. 십분 맞는 얘기다. 그런데 ‘치표불치본(治表不治本)’란 말이 있듯이 이러한 참패 원인 메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지나지 않아 정녕 환골탈태하려면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모든 병은 병인(病因)을 치료하지 않고 증상만 치료한다면 그때그때 증상 억제 효과만 있을 뿐 완치가 안 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초기부터 첫 단추를 잘못 꿰서 삐걱하기 시작했고 4년을 맞은 현재 이 시점에 이르러 바닥까지 추락하게 된 그 병원인 ‘첫 단추’에 대한 분석은 이번 선거 참패 메뉴에 오르지 않고 있어 아무리 반성하고 머리를 조아려도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대저 그 병인인 ‘첫 단추’가 무엇이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재인 정부에 ‘주공’이 없었다는 것이 그 병인으로 지목하는 ‘첫 단추’이다. 주공은 강태공, 소공 석(奭)과 함께 주나라를 창건한 공신이다. 주나라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주공(周公), 혹은 주공단(周公旦)으로 일컬어진다. 주 문공(文公)으로도 불리며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봉해져 제후국 노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무왕을 도와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를 멸망시키고, 동이(東夷)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무왕이 죽은 뒤에는 어린 조카 성왕(희송)을 도와 주 왕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여기서 잠깐 주(周)가 어떻게 상(商)을 멸망시켰는지? 그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상나라는 하나라에 이어 600여 년을 지속한 두 번째 왕조였다. 중국문자 갑골문이 그 시기에 생겨났고, 제례문화가 발달했으며, 수공업이 발달했고, 따라서 장사가 활성화 되어 나라 이름을 상업이란 ‘상(商)’으로 불렀고, 지금도 중국에서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이라 하는 것은 상나라 국호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토록 잘나가던 상나라가 3천 년 전 마지막 왕인 주(紂)에 이르러 몰락했다. 주왕(紂王)에게는 달기(妲己)라는 미녀 애첩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은 애첩 달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술이 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지었다고 한다. 제사 철이 되면 수일동안 밤낮 없이 연이어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발가벗고 쫓고 쫓기는 춤을 연출하면서 질펀하게 놀았다. 장야의 음(長夜之飮)이 하도 즐거워서 상나라 관료들이 날이 가는 줄 몰라 오늘이 몇 월 며칠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주왕이 주지육림에 나라 재정을 거덜 내는 바람에 강대했던 상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전설은 믿을 바가 못 된다. 중국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도 왕비 말희(妺姬)한테 빠져 주지육림 때문에 망했다고 하고, 서주(西周)는 유왕(幽王)이 좀처럼 웃지 않는 애첩 포사(褒姒)를 웃기려고 거짓 봉화와 봉수를 올려 군사와 제후들을 놀라게 하여 웃겼다고 한다. 결국 서주가 망한 것은 포사 때문이었다고 하니 중국역사는 나라가 망하면 여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주는 본래 상에 속하는 하나의 작은 ‘제후국’이었다. 상나라 주왕(紂王)의 신하였던 주무왕(周武王)이 상나라 토벌에 나설 때 군사들에게 달기를 겨냥하여 ‘암탉이 울면 천하가 망하는데 지금 상이 그렇다.’라고 호소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크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이것은 주무왕이 상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명분(사실상 핑계)일 뿐 상나라는 이미 기울어 구제 못할 지경에 이르러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주왕이 하도 민심을 잃어 주왕의 장수들이 주무왕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두 손 들어 열렬하게 맞이하면서 칼을 자기네 주군을 향해 겨누었기 때문에 소국이 대국을 무너뜨리는데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주나라는 너무 쉽게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식은 죽 먹기로 정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너무 쉽게 얻으면 너무 쉽게 잃는다.’는 속담이 있다. 무엇이든 너무 쉽게 얻었으면 너무 쉽게 잃지 않을까, 마땅히 걱정해야 한다. 『주역』에 64괘가 있는데 마지막 괘가 끝났다는 의미인 기결(旣決)인 것이 아니라 제 63괘가 기결이고 마지막 제64괘를 미결(未決)로 남겨두었다.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주공은 이『주역』의 원리를 빠삭하게 터득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상나라를 뒤엎고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는 승리의 과실에 기쁨으로 도취되어 정신없이 축배를 들 때 주공만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 쉬면서 천하를 걱정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주공의 근심을 기우(杞憂, 이 말은 주공 이후에 생겨난 것이지만 여기서 문맥상 사용했다는 점 밝혀둔다)라 비웃었으나 주공만은 아주 진지했다. 무슨 일에 부딪히면 앉아서 한숨만 쉬면 해결되나? 행동에 나서야 한다. 주공은 팔을 걷어 부치고 행동에 나섰다. “천하를 다스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자.” 이것이 주공의 마인드였다. 정치적으로 왕실 친인척과 나라 창건에 공이 큰, 예를 들어 강태공 같은 사람 및 전쟁에 공이 큰 장수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제후를 세우는 이른바 ‘봉토건국’인 봉건제(封建制)를 시행하였고, 경제적으로 공유지와 사유지를 분명하게 나눠 경작하는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하였으며, 사회적으로 예악제(禮樂制)를 마련하여 전반 사회 질서를 바로 잡았고 문화를 활성화시켰다. 그는 또 상나라가 수공업을 비롯한 상업중심이었다면 주나라를 농업중심 사회로 바꿔놓았고, 상나라가 귀신숭배문화가 중심이었다면 주나라를 성인숭배문화로 전환시켰다. 공자가 가장 숭배해마지않던 주공이 창안한 이러한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이 무려 3천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으니 중국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나에게 가끔 ‘중국국가는 왜 싸움에 돌격하는 멜로디인 전투곡인가?’ 묻는다. 나는 앞서 말한『주역』제63괘와 제64괘의 원리로 설명한다. 1949년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의 투쟁이 끝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모택동 주석께서 지나치게 과거와의 투쟁을 강조한 탓에 무리하게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등 부작용도 있긴 했지만 정권초기에는 반드시 주공처럼 심각한 걱정과 근심에 빠져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가 있다. 이쯤해서 눈치 빠른 독자께서는 아래에 무슨 얘기를 이어가려고 하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나는 주나라가 떠올랐고 주공이 떠올랐다. 왜냐? 문재인 정권은 주나라가 너무 쉽게 정권을 잡은 것과 아주 흡사하게 촛불혁명에 의해 너무 쉽게 얻었다는 것이 양자가 심통하게 닮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어수선한 분위기에 탄생된 문재인 정부에 주공 같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안해내는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을 혹시나 해서 바랐건만 역시나 이 정부에는 ‘주공’이 없었고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도 없었다. 이 정부에는 ‘주공’ 같은 인물도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은 고사하고 모두 승리에 도취되어 축배를 드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문재인 정권 초기 여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20년 장기 집권설’은 ‘주공’이 없는 풍토에서 이젠 자신들의 천하가 된 세상이 ‘영원하리라’는 한심한 착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 00역사학자가 유시민의 ‘알릴레오’ 유튜브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탄핵으로 보수가 완전히 괴멸된 줄 알았다.” 이런 인식은 당시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였으니 정권 일선에 앞장선 ‘어르신들’이야 더 승리에 도취되어 앉아 죽을 써도 20년은 쉽게 가지 않겠느냐는 착각에 빠질 만도 했을 것이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 민초들도 다 아는 아주 간단한 도리이자 기본 상식이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쉽게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는 이 간단한 도리이자 기본 상식마저 유념하지 않았다. 기나긴 역사흐름에서 4년이란 시간은 별이 반짝거리는 순간보다 더 짧다. 진보당은 먼 미래를 지향하려면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주공’이 나오고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을 창안해낸다면 앞으로 정권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도움, 아니 결정적인 요소로 될 것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보여주었던 상대방을 쓰레기 취급이나 하고 자신들을 정의의 천사로 여기는 망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마인드로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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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4
  • 미녀라면 사족 못쓰는 난세의 영웅 ‘조조’
    ●김수희 조조(155~220년)는 미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출신성분도 가리지 않았다. 창기든 유부녀든 눈에 들기만 하면 방법을 대여 손에 넣고야 말았다. 후일 조비를 낳아 황후가 된 변부인은 창기출신이였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조조는 그녀의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꺼리지 않고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두부인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그녀는 남편이 멀쩡히 두 눈을 편히 뜨고 살아있는 유부녀였다. 류비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였다.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조조는 느닷없이 찾아온 관우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우는 조조를 보고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여포의 부장 중에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제 우리가 이겨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나에게 주십시오.” “허허, 이제보니 운장도 어지간히 여색을 밝히는구려. 그러지요.”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성이 곧 함락되려고 하자 관우가 몇 번 더 찾아와서 “진의록의 처를 꼭 나한테 줘야 합니다”라고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진의록의 처가 어떤 미인이기에 저 관우라는 사내를 이토록 애태우게 했을까? 여포가 항복하고 성이 함락되자 조조는 장난삼아 먼저 진의록의 처를 데려오게 했다. 보니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처였고 관우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반한 조조는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진의록의 처라고 하지만 미인은 전리품이니까 승자가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 비록 관우가 먼저 탐내서 달라고 했지만 내 마음을 설례이게 한 미인을 어찌 그에게 내줄 수 있겠는가? 먼저 차지한게 임자지! 그래서 조조는 그녀를 첩으로 삼았다. 후일 조조의 비빈이 된 두부인이 바로 그녀였다. 조조는 두부인을 꽤나 사랑했었던 것 같다. 두 씨가 조조의 첩이 되였을 때 이미 진의록과의 사이에서 낳은 진랑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조조는 진랑을 아들처럼 궁에서 키우며 심히 예뻐했다. 매번 손님들을 맞을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에 나처럼 의붓자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한편 연모했던 여인을 빼앗긴 관우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일 관우가 조조의 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에게 심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상에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아간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관우는 간적 조조를 도모해 중원을 되찾고 한나라 황실을 회복하겠다고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는 미녀를 좋아한 덕분에 무려 25명이나 되는 아들과 6명의 딸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평생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번하기도 했다. 진의록의 처 두부인을 빼앗았다가 관우에게 한을 품게 했던 일도 조조에게 교훈이 되지 않았다. 장제가 죽자 과부된 추 씨를 슬쩍 취했다가 거의 죽을 번했던 적도 있었다. 표기장군 장제는 홍농에 주둔하고 있을 때 사졸들이 굶주려서 남쪽의 성을 공격하던 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장제의 부인 추 씨는 장제의 조카인 장수에게 의지했다. 조조가 남정할 때에 군대가 육수에 이르자 장수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때 과부 추 씨를 본 조조는 첫눈에 반하여 그날 밤으로 그녀를 품었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를 건드린 것을 알게 된 장수는 치욕을 느끼고 조조에게 원한을 품었다. 조조는 그것을 알고 몰래 장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책이 새어나가 장수가 조조를 엄습하였다. 장수는 조조가 추 씨에게 빠져 음탕한 놀이를 하는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싸움에서 전위가 조조를 지키다가 죽고 조조는 뒷문으로 달아났다. 도망칠 때 조조의 조카 조안민이 란도질 당해 죽었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도 조조를 구하자마자 장수의 군사들의 손에 죽고말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유부인의 소생 이였다. 그러나 유부인이 일찍 죽었기에 정실부인인 정부인이 조앙을 맡아 키웠다. 자식이 없었던 정부인은 조앙을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다. 정부인은 조조가 장수의 숙모와 염문을 뿌렸다가 조앙을 죽게 하고 홀로 살아 돌아온 것에 몹시 분개했다. 그녀는 조조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바가지를 긁곤 했다. “내 아들을 데려가 죽이고는 혼자 살아 돌아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조조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그런 잔소리에 견딜 수 없었던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정부인이 기가 좀 꺾이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었다. 정부인은 조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정부인의 친정집으로 찾아갔을 때 정부인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다. 조조는 정부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달랬다. “나를 좀 보아서 함께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발길을 돌려 나가다가 문지방에 서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로 헤여지자는것이요?” 아무 대답이 없자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관계를 끊었다. 정부인은 여생을 길쌈을 해서 자급했다. 조조는 정부인을 쫓은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병이 깊어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였을 때 조조는 깊이 탄식했다. “내가 평생에 뜻대로 살았지만 크게 마음에 빚진 일이 없었다. 다만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맏아들 조앙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저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장차 뭐라 대답해야 할까?!” 조조는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자신이 죽었을 때 묘비명에 “한나라 고 정서장군(征西将军)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이기를 소망했다. 단지 시대가 그를 한나라를 빼앗은 역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미 큰 공을 이뤘으니 이제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고…그동안 조조의 위력과 업적에 눌려 잠잠하던 한나라황실과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의 합작품 이였다. 헌제는 조조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3개의 현을 식읍으로 내려주었고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은 패전으로 한 날개가 꺾인 조조에게 이제 할만큼 했으니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황제를 칭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할지 모른다.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것이 두렵기때문이다.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할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차라리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조조의 입장이 잘 표현되어있다. 조조가 주공과 같은 성현처럼 후세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를 원했었더라면 이때 조정의 의론에 따라 군국의 대권을 반납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조가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 자신과 가족의 생명안전을 결코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조조가 아니더라도 다른 실력자가 결국은 한나라를 패망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빼앗았을 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스스로 멸망한 상태였기 때문이였다. 한나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국가안정보장과 질서유지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존자체를 위협에 빠뜨렸다. 조조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것은 이러한 혼란상황을 극복하려고 동분서주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가 어떻게 권력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갈 수 있단말인가? 이런 이유로 조조는 희대의 “악당”이요 “역적”이 되였다. 그러나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한나라의 황실을 부흥하겠다고 해야만 정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을가? “삼국연의”에서는 조조를 역적이라고 욕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조조를 영웅이라고 재평가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4-08
  • 한국인도 친중(親中)하면 조선족?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지난 22일 SBS가 ‘조선구마사’라는 드라마(사극)를 방송하자 대한민국이 한바탕 떠들썩하게 비판에 들끓었다. 드라마 속에서 조선 기생집이라고 설정된 배경이 있는데 전형적인 중국식 가옥의 형태를 띄고 있고 식탁에는 중국 음식인 월병, 피단, 양갈비, 중국식 만두, 중국술이 올라 있었다. 그리고 OST(드라마 주제곡) 월아고-고쟁독주, 고산류수-고금독주에 사용되는 현악기가 고쟁, 고금 등 중국전통 악기로 연주된 장면을 문제 삼아 드라마 작가를 친중작가로 낙인찍고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조선구마사’ 작가 박계옥 씨(이하 박 작가로 칭함)가 친중혐한 작가로 공격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 작가의 전작 tvn에서 방송된 ‘철인왕후(2021.2.14. 종영)에 대해서 시청자들의 비판이 있었다. '철인왕후'는 중국에서 소설로 먼저 출간된 뒤 제작된 웹드라마 '태자비승직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이 드라마를 쓴 작가의 전작 '화친공주'에서 고려인을 비하하는 '빵즈' 표현이 쓰인 사례가 있고 박 작가는 실존인물인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두고 '지라시네'라는 표현 등으로 논란이 되었다. '철인왕후'의 각본을 맡은 박 작가와 중국 콘텐츠 제작사 쟈핑픽처스가 집필 계약을 체결한 것도 친중작가로 공격하는데 큰 빌미를 제공한 것 같다. 박 작가가 친중하든지, 혐한하든지 나의 입장에서 왈가왈부 할 일 아니다. 다만 요즘 한국 온라인에서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떠돌아다니고 이를 근거로 일부 언론들이 나서 기사화하고 있는데 왜 한국인들(일부이긴 하지만)은 한국인이 친중혐한해도 조선족이라고 낙인찍는지? 의문스럽다. “충신? 하이고 충신이 다 얼어죽어 자빠졌다니? 그 고려 개갈라 새끼들이 부처님 읊어대면서 우리한테 소, 돼지 잡게 해놓고서리...개 백정새끼라고 했지비아니?!!” “그 목사 충신 최영장군의 먼 일가친척인데.. 그래도 됩니까?” “충신이 다 얼어죽었다니? 우래보고 소돼지 잡게 해놓고 개 백정새끼라고 했지비아니? 드라마 ‘조선구마사’에 등장하는 대사인데 일부 한국인들은 이 대사가 연변조선족 사투리 극형이라면서 이를 근거로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단정한다. 진짜 유치하고 어처구니없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어느 지방의 사투리든지 무릇 사투리란 억양과 어휘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연변사투리는 진짜가 아니라 99% 짝퉁이다. 아마 10여 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고 최진실 씨가 주연한 연변여자(옥화) 역에서 그녀의 말투는 평양말에 플러스 평안도, 황해도 말이지 연변사투리와는 거리가 10만 8천리나 된 것을 연변사투리랍시고 연출한 것이다. 그 후 조선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연변사투리는 진짜 연변사투리가 아니라 이북말을 흉내 내는 짝퉁일 뿐이다. 진짜 연변사투리가 등장한 영화가 딱 한 편 있다. 위안부를 소재로 다룬 영화 ‘소리굽쇠’에서 조안 씨가 한 대사는 진짜 연변사투리가 맞다. 왜 그 많고 많았던 드라마나 영화중에서 조안 씨만이 연변사투리를 구사할 수가 있었을까? 그 영화 조안 씨와 함께 주연을 맡은 위안부 역 이옥희 씨가 연변 유명 코미디 배우이기 때문에 조안 씨에게 정확한 연변사투리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근거로 삼고 있는 드라마 ‘조선구마사’ 대사에서 ‘했지비아니?’ 라는 말은 연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는 말이다. ‘했지비’ ‘먹었지비’ ‘갔지비’ 등등 동사 뒤에 ‘지비’를 붙이는 것은 함경남도에서 사용하는 방언인데 연변사람 절대다수는 함경북도 출신이고 소수 함경남도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이 ‘지비’란 말을 유행시키지 못해 연변에는 ‘지비’란 말이 없다. 게다가 뒤에 ‘아니’를 붙여 ‘했지비아니?’는 연변사람에겐 생소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우리보고’를 ‘우래보고’라고 한 것 같은데 이 말도 연변에는 전혀 없는 말이다. 혹시나 해서 연변출신 지식인들에게 여러모로 알아보았으나 전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는 똑 같은 대답이다. 문제는 드라마나 영화에 이북 말씨가 등장하면 그것을 연변사투리라고 단정하고 심지어 작가를 ‘조선족’이라고까지 왜곡하여 공격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모하고 유치한 ‘씹어 치기’인가? 박 작가는 분명 한국인이다. 그가 조선족일 수가 없는 것이 1970년에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1995년 캐치원 시나리오 공모에 ‘돈을 갖고 튀어라’로 입선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그 후 현재까지 영화 12편, 드라마 10편을 발표했다. 만약 그가 조선족이라면 25세 나이에 데뷔하여 그 많은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수가 없다. 한국영하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려면 한국사회 온갖 문화, 한국인의 생활정서에 이르기까지 전부 마스터해야 하는데 일부 유치한 한국인들의 주장처럼 그가 조선족이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필자도 한국에서 15년 동안 글을 써왔지만 영화와 드라마 작가 데뷔는 엄두도 못 내고 아예 꿈도 못 꾸고 있다. 여느 한국인은 박 작가가 드라마 ‘댄스의 순정’에서 주연을 연변처녀(문근영)로 설정한 것을 겨냥해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식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조선족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 작가들이 전부 조선족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삼단논법’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전혀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온라인에서 박 작가를 중국인, 화교, 연변인, 귀화한 조선족 등 온갖 의혹, 그 가운데서 박 작가가 ‘조선족’이 아니냐는 의혹이 가장 거세지자 23일 SBS ‘조선구마사’ 측 관계자는 이데일리에 “박 작가는 조선족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에 한 누리꾼은 “박 작가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의 비해 텀이 너무 짧다. 철인왕후 끝난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조선구마사까지. 박 작가의 팀이 조직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것 같다”라며 “박 작가가 중국, 조선족과 관련 없다면 박계옥 작가 팀 또는 서브작가들의 국적이 의심된다.”라며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문제는 왜 한국인이 친중혐한해도 조선족이라고 공격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조선족은 의례 한국을 싫어한다는 전제를 바탕 깊숙이 깔고 색안경을 끼고 평소에도 삐뚤어진 시선으로 조선족을 바라보고 있는 결과가 아닌지? 이쯤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요즘 미국에서 아세아계 출신들을 마구 혐오하는 것과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조선족을 혐오하는 바람이 거세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일부 한국인이 조선족을 혐오하는 이유 중에 피해의식의 작동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한반도는 수천 년 동안 지리적인 원인에 의해 중국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아왔다. 이 과정에 피해의식이 뼈가 저리게 각인되어왔다.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박 작가를 혐한한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 고려인을 ‘빵즈’라고 한 대목을 두고 ‘한국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일 놈’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작가를 혐한한다고 비판한다. ‘빵즈’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몽둥이를 뜻하는 ‘빵즈(棒子)’의 유래에 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 고구려를 수차례 침략했을 당시 고구려인들이 몽둥이를 잘 휘둘러 혼난 기억 때문에 ‘까오리빵즈(고려몽둥이)’라 불렀다는 것. 둘째 만주에 거주한 조선여인들이 하도 방치질을 열심히 해서 ‘까오리빵즈’라는 별명을 붙였다는 것. 셋째 어느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서 우리말 그냥 ‘놈’에 해당된다는 것. 예를 들어 중국 드라마 ‘관동진출’에서 동북에 온 산동사람들은 하남사람들을 ‘허난빵즈’라 부르고 하남사람들은 산동사람들을 ‘쌍둥빵즈’라 부르는 대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따라서 후에 조선인들이 만주에 오게 되자 산동사람들은 ‘까오리빵즈’라 부르고 조선인도 따라서 산동사람들을 ‘싼둥빵즈’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고로 ‘빵즈’란 그냥 민간에서 하나의 비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유행어로 치부할 뿐 굳이 서로 몽둥이로 때려죽일 만큼 적개심에 차서 하는 말이 아니다. ‘까오리빵즈’와 ‘싼뚱빵즈’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연변에서 가끔씩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까오리빵즈’를 ‘몽둥이로 때려죽일 한국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터무니없는 상상의 확대적 산물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은 ‘빵즈’란 말을 견강부회해가면서 또 굳이 살의(殺意)가 내포된 의미로까지 해석할까? 역시 답은 수천 년 쌓여온 피해의식 때문이 아닐까? 판단된다. 10위 안에 드는 세계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하지만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중국이란 대국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크게 남아 있어 사소한 일도 확대해석하여 크게 만들고 말도 안 되는 선제공격으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의도가 훤히 보여 안타깝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해보자.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민속문화는 한반도 남북한뿐만 아니라 해외 750만 동포의 공동문화유산이다. 조선족의 경우 해외 750만 동포 중에서 고국의 민속문화를 가장 잘 계승 발전시켜왔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족 민속문화가 중국국가급과 성급 무형문화재로 등재되고 심지어 조선족의 농악무는 세계유네스코에 등재되기까지 한 상황이다. 이를 두고 한국에서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우리 한국문화를 중국에 빼앗기게 생겼다.’고 난리다. 정인갑 전 청화대 교수에 의하면 농악무의 경우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재로 등재될 때 그 발원지를 한반도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의 출처를 밝힌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 않는가?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반발이 일고 있는 것은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민속문화를 남한만이 소유해야 하는, 즉 다시 말하자면 해외동포는 소유와 계승 발전의 자격이 없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갑자기『택리지』가 떠올랐다. 1751년에 출간된 이중환이 지은『택리지』란 책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반도는 삼면이 바다인데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사람들의 세상을 보는 식견이 좁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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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1-04-07
  • '삼국지' 재해석⑱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Ⅱ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의심의 대명사가 된 조조 조조가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는 시국이 굉장히 어수선했고 나라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황제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고 정권은 서부 군벌인 동탁에게로 넘어갔다. 그런데 동탁의 무리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망나니들이었다. 이중텐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동탁은 호랑이었고 여포는 이리였으며 그들의 부하들은 들개였다. 동탁은 일 저지르기 너무 좋아했다. 그는 군신들과의 연회 석상에서 후궁의 여인들을 데려다 쾌락과 향락을 즐겼으며 연회에 참석한 관리 한 사람을 끌어내어 멋대로 때려죽이기도 했고 가장 잔혹한 형벌로 그에게 체포된 반대파를 학대했다. 결국 동탁은 황제를 폐위하고 백관들을 도살했으며 후궁들을 욕보여 더럽혔다. 그의 병사들은 낙양성 안에서 방화와 살인, 약탈을 자행하고 부녀자들을 강제로 욕보였다. 한나라의 수도는 전대미문의 참상을 겪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동탁의 이런 행위는 민심은 물론이고 지방의 지지 또한 얻지 못했다. 오히려 동탁은 전국 각지의 공동 성토의 대상이 되었고 그도 지방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는 한편 사방에서 전란이 일어났다. 한나라는 사실상 멸망했고 천하는 대란에 휩싸였다. 본래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은 군벌로 변해 할거하는 후왕(侯王)으로 바뀌었다. 난세라 여기저기서 영웅들이 용솟음쳐 나올 판이었다. 동탁은 조조를 인재로 보고 효기교위로 임명하고 함께 일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이 나라를 이끌 재목이 아니고 더욱이 동탁을 위해 일한다면 세상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판단하고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야밤에 도망쳤는데 동탁이 알고 추살령을 내렸는데 낙양을 간신이 벗어나 중모현(中牟縣, 지금의 정주시)에 이르렀을 때 탈주범으로 의심 받아 체포된다. 재판 받기위해 관아에 연행되어 갔는데 지방 관리들이 조조가 인재라는 것을 알고 풀어준다. 조조는 운이 좋은 사나이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조조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망설이다가 아버지의 친구였던 여백사를 찾아간다. 여벽사는 조조를 반갑게 맞이하고 술잔치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방 쪽에서 컬을 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조조는 자기를 죽이려고 그런 줄 알고 먼저 선손을 써 여백사의 일가족을 몰살한다. 다 죽일 무렵 조조는 아차 싶었다. 본래 자기를 위해 돼지도 잡고 양도 잡고 하려고 칼을 갈았는데 그만 자신이 그 칼에 죽는다는 의심을 품고 만회할 수 없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사람을 잘못 죽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조조는 몹시 후회한다. 사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처창(凄愴)하게 말하기를 차라리 내가 남을 배신할망정 남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 않겠다.” 조조가 실수를 깨달고 처참하고 슬픈 심정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이 대목에서 조조를 천하의 나쁜 놈으로 몰아간다. “차라리 내가 천하 사람을 배신할망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는 않겠다.”로 확대 수정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조조에 대한 최대의 나쁜 편견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관중은 왜 조조의 실수를 이토록 확대 수정하였을까? 조조가 대범하지 못해 의심이 많은 나머지, 아니 의심이 많을 정도가 아니라 의심이 지나쳐 이런 끔찍한 일까지 저질렀다는 것을 인상 깊게 남김으로써 조조를 진짜 악인으로 각인시켜 버리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삼국연의>가 탄생한 이후로 중국 관료사회는 물론이고 민간에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을 조조에 비유하는 것이 관습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조조의 성공적인 전략 네 가지 도망 다니던 조조는 진류(陳留, 지금의 개봉시 동남쪽)에서 멈췄다. 더는 도망 안가도 되는 계기를 맞았던 것이다. 투자자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 노릇하려면 투자를 받아야 한다. 하물며 정치는 정치자금을 후원받지 못하면 정치를 할 수가 없다. 조조를 미래 영웅으로 알아본 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위자(衛玆)라는 사람이다. 조조는 위자의 투자를 받아 그 일대의 병사를 불러 모으고 말을 사서 의거를 일으키자 군사가 5천을 넘었다. 이때가 중평 6년(189년) 12월이다. 이 일은 조조가 군사조직으로서 세상에 도전장을 내민 첫 스타트였다. <삼국연의>에서는 조조가 반동탁연합군인 관동연합군 설립을 발기한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역사사실과 다르다. 조조는 당시에 그 거대한 조직을 발기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왜냐면 조조는 그때 관직도 없었고 근거지도 굳건하지 못했고 군사력도 미약했기 때문에 관동연합군 조직에 조조의 호소력이 있을 만큼의 지분은 없었다. 다만 조조가 반동탁 의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관동연합군 맹주 원소를 비롯해 기타 지방 할거세력들이 한가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본 조조는 실망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맘을 굳혔다. 조조의 전략은 우선 근거지를 마련하는 점령, 군대를 모으는 모병, 군량을 해결하는 둔전, 인재를 널리 초빙하고 등용하는 초현(招賢)이었다. 조조는 둥군을 먼저 차지하여 태수가 되고 다음에는 연주를 점령하여 주목(州牧)이 되었다. 그런데 이 관직은 조정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 지방호족들의 추천으로 임시대행이었다. 말이 임시이지 잘만 하면 중앙정부가 제대로 굴러가기 전까지는 맡을 수 있었다. 변수는 다른 군벌에게 빼앗기는 일만 없도록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당시 연주의 땅 많은 곳을 황건적이 차지하고 있어 그들과 싸워야 했다. 이 싸움에서 조조는 가장 아끼던 부하 포신을 잃었다. 땅을 빼앗는 대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긴 대가가 없는 결실은 없으니까, 조조도 일정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조는 이렇게 해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황건적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조조는 이들을 정복한 후 정예부대를 편성해 ‘청주병’으로 만들어 군사를 확보했다. 땅이 있고 군사가 있는데 먹을거리가 문제였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의 먹을거리는 단순히 음식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 사회가 돌아가는 경제를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속담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만큼 중히 여긴다는 뜻)이란 말이 있다. ‘식(食)’이 보장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조조의 아이디어는 둔전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조조의 부하 원환(袁渙)이 입안한 것이고 국연(國淵)이 발전시켰다. 조조 조직에서 가장 먼저 백성을 어루만져주고 폐해를 없애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마 원환이었을 것이다. 둔전 초기에 백성을 모아 둔전을 열었지만 백성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대다수가 도망쳤다. 원환이 조조에게 말했다. “백성은 예로부터 향토에 안주하고 이주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런 습속은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뜻에 따라서 행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거슬러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의 의견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자는 즉시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조조가 그의 의견에 따르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다. 원환은 매번 모든 현에 칙령을 내려 말했다. “홀아비나 과부들의 안부를 챙기고 효도한 아들과 정절을 지킨 며느리를 표창하라.” 조조의 성공에는 백성을 살피는 원환과 같은 훌륭한 선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둔전의 맛을 본 조조는 넓은 지역에서 둔전을 실시하고자 생각하고 국연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국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조조에게 이 제도의 손실과 이익을 진언하고 토지를 헤아려 백성을 살게 하며 인구를 헤아려 관리를 두고 일과 세금에 대한 법령을 밝히니 5년 만에 창고는 풍부해지고 백성은 다투어 노력하고 즐겁게 일했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중텐 교수는 조조의 둔전에 대해 이렇게 개괄하여 말했다. “둔전은 거주의 군사화, 경작의 집단화, 농업생산의 국영화를 이룬 제도였다.” 둔전 발전에 공이 컸던 국연은 조조의 전투에 군량미를 보급하는 직책을 맡아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항상 그래왔듯이 후방에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빛을 못 보기 마련이다. 그 사람의 공이 아무리 컸어도 말이다. 국연도 이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조조의 둔전 사업에 기여가 큰 신하가 또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임준(任峻)이다. 조조가 정벌에 나설 때마다 임준은 항상 나아서 성을 지키며 군수품을 공급해주었다. 어느 해에 기근과 가뭄이 있어서 군대의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우림감(羽林監)인 영천의 조지(棗祉)가 둔전을 설치하자고 건의하니 조조는 임준을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으로 임명하고 백성을 허현 교외에서 둔전을 하게 하여 1백만 섬의 곡식을 거두었으며 군(郡)과 국(國)에 전관(田官)을 두었다. 여러 해 뒤 곳곳에 곡식이 쌓여 창고마다 가득 찼다. 조조가 둔전으로 창고를 늘릴 때 원소의 군대는 뽕나무 열매나 따먹었고 그것도 없으면 약탈해 먹었다. 원술의 군대는 민물조개를 먹었다. 원씨 형제의 상황을 조조에 비교하면 누가 미래 영웅이 될 것인지의 결과는 이미 그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조에게 근거지가 마련되었고 병사도 모였고 먹을거리도 확보되었으니 이제 부족한 것은 인재 모집이었다. 조조의 인재 모집 전략은 ‘무릇 인재라면 등용한다(唯才是擧).’는 것이었다. 무슨 뜻이냐면 유교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밝아도 도덕이나 윤리에 흠집이 있으면 인재라고 할 수가 없다. 조조는 도덕과 윤리에 흠집이 있을지라도 능력만 있으면 등용한다는 것이 바로 인재모집 전량이었다. 또 과거에 원수였어도 오늘 날의 조조의 창업에 도움이 된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등용한 것이 조조의 또 다른 인재등용 성공 전략이었다. 조조가 이런 넓은 도량으로 인재를 모집했기 때문에 천하의 인재들이 절대다수가 제 발로 찾아왔던 것이다. 가장 먼저 조조를 찾아온 인재는 순욱이었다. 순욱은 본래 원소의 사람이었다. 그는 원소는 천하를 통치할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고 일개 동군태수인 조조에게 귀의했다. 순욱은 21년 동안이나 조조의 핵심 참모로 역할 했다. 곽가(郭嘉), 순유(荀攸), 종요(鍾繇) 모두 순욱이 추천했다. 정욱(程昱)은 연주자사 유대가 기도위를 맡아달라고 불렀을 때 병을 핑계대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조가 연주에 와서 부르자마자 달려갔다. 조조가 이 네 가지 일을 완성시킨 것은 191~196년 사이였다. 이때 다른 군벌과 호족들은 아무런 성과가 없이 허송세월을 보냈다. 쉽게 말하자면 조조는 차근차근 영웅이 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자들은 준비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준비 된 자만이 성공한다는 말이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준비 된 자만이 성공한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 동탁이 죽고 난 후 조정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각과 곽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가려고 할 때 가후의 계책에 의해 다시 구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또 패권을 다투는 싸움을 벌여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 황제는 의지할 곳이 없어 매일 밤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조조였다. 조조에게는 모개라는 책사가 있었다. 조조의 정치, 경제, 군사 여러 면에서의 그림을 모개가 그려냈다. 모개가 조조에게 말했다. “동탁의 난 이후 사회가 불안하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며 경제가 무너지고 재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는 위태롭고 백성은 불안해서 확실히 큰 재능과 지략을 가진 사람이 이 국면을 수습하고 패왕의 위업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원소와 유표 등은 강해 보이긴 하지만 안목이 얕으며 근본을 모릅니다.” 이어서 구체적인 지적을 했다. “그러면 무엇이 근본일까요? 첫째는 정의, 둘째는 실력입니다. 실력 중에서도 또 경제적 실력이 으뜸이지요. 정의의 기치를 세우면 정당한 명분으로 출병을 하고 적을 이겨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력이 생기면 위세가 생겨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이 자유로워집니다. 결국 두 가지 길이 생기지요. 나아가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서면 방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개는 세 가지를 건의했다. 정치 전략으로 천자를 받드는 것과 경제 전략으로 경작지를 늘리는 것과 군사전략으로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것이었다. 조조는 모개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사자를 장안에 보냈다. 그러나 하내태수 장양이 가로막아 갈 수가 없었다. 이때 동소(董昭)라는 사람이 나서 도움을 주었다. 동소도 원래 원소의 부하였다. 원소의 진영을 이탈해 장양 밑으로 들어갔다. 동소의 눈에는 조조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장양을 설득해 조조와 손을 잡게 했다. 심지어 사비를 털어 조조의 명의로 이각과 곽사에게 뇌물을 보냈다. 조조는 동소의 덕분에 조정과의 왕래가 트였고 정식으로 연주의 주목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조조가 천자를 알현하기까지의 길은 험난했다. 이번에는 동승과 원술이 반대했다. 또 동소가 나섰다. 동소가 양봉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거래를 했다. 양봉은 황제 곁에 있는 군벌 중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아직 기반이 부족해서 바깥의 도움이 필요했다. 양봉이 군대를 움직이면 조조가 군량을 대고 양봉이 국정을 주도하면 조조가 바깥에서 돕는 것이었다. 양봉은 동소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조조를 진동장군으로 추천하는 한편 부친의 작위였던 비정후를 물려받게 했다. 마침 동승도 시끄러운 일이 생겨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어 가로막혀 있던 벽들이 모두 허물어져 조조는 뜻대로 황제를 알현하고 수도를 허창에 옮겨 황제를 받들게 되었다. 조조의 본래 뜻은 황제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었는데 밖에서의 여론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원소와 조조는 어릴 적 짜개바지 친구였고 성인이 된 후에도 한때 조정에서 함께 일했다. 반동탁연대인 관동연합군에서도 호흡을 같이 한 때가 있었다. 그러던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는 조조가 황제를 받들어 모신 것이었다. 원소의 입장에서는 조조가 과거 자기 수하였는데 황제를 받들게 되면 거꾸로 나를 호령하는 것 아니냐는 심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한다.’는 말이 이렇게 세상에 널리 전해지면서 조조는 정권을 탈취한 역적모의의 주범이 되었다. 조조는 이 명의롭지 못한 누명을 벗으려고 원소를 대장군으로 임명했지만 원소가 조조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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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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