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조기 쏘련공산당의 민주분위기는 비교적 농후했다. 레닌이 살았을 때 당내논쟁은 대역무도한 일이 아니었다. 트로쯔끼(托洛茨基), 스베르들로브(斯维尔德诺夫), 카메네프(加米涅夫), 부하린(布哈林), 류꼬브(李可夫) 등은 늘 레닌의 노선을 반대했다. 레닌이 그들을 비판할 때에도 이런저런 비무산계급세계관의 “감투”를 씌워 여지없이 반격했다. 그러나 논쟁이 끝난 후 레닌과 그들의 혁명 우정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나의 이상한 현상은 레닌이 종래로 쓰딸린을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지 않은 것이다. 레닌은 만년에 그루지야사건, 대외무역롱단권, 로농검찰원제안 등등으로 쓰딸린과 몇차례 충돌이 있었지만 한번도 문제를 세계관의 높이까지 끌어올려 비판하지 않았다. 왜서 레닌은 쓰딸린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는가? 만약 그가 지적했더라면 쓰딸린이 그의 후계자로 되지 못하여 세계상 첫 사회주의국가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 2014년 3월 크림 반도의 러시아 강제 병합을 환영하는 주민이 거리에서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쓰딸린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을 들고 있다.쏘련의 저명한 역사학가이며 다른 정치견해를 가지고 있는 메드베데프(麦德维杰夫)는 “우리 당과 우리 혁명을 반대하는 어떠한 적들도 우리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쟁취하는 사업에 쓰딸린보다 더 큰 손해를 끼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쏘련공산당 역대 중앙위원, 후보중앙위원은 모두 284명인데 대숙청(1936~1939년)전에 자연 사망한 45명을 제외하고 남은 239명 중에서 총살당했거나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188명, 자살한 사람이 8명, 중앙위원에서 제명당한 사람이 22명이었다. 다만 21명밖에 무사하게 “중년”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무사하게 “중년”을 보냈다고 해서 무사하게 만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쓰딸린이 1952년에 또 새로운 숙청을 긴박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주곡인 “크레물리궁 사사건”이 이미 연주되기 시작했다. 베리야(贝利亚), 클리멘트 보로실로프(克利缅特•伏罗希洛夫), 몰로토프(莫洛托夫), 아나스타스 미꼬얀(阿纳斯塔斯•米高扬), 카가노비치(卡冈诺维奇)는 모두 이미 쓰딸린이 이름을 불러 비판했기에 그들은 극도의 공포 중에 있었다. 당시 후르쑈브만은 당황해하지 않았다. 제19차 대표대회에서 비판한 명단 중에 그의 이름은 지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쓰딸린이 1953년에 갑자기 사망되지 않았더라면 소련에 또 어떤 피바람이 불어칠지 알 수 없었다.
쓰딸린은 숙청기구에 명령해 우크라이나의 몇백명 민간연예인을 처형했다. 이 민간연예인들은 민족문화의 살아있는 화석이었다. 음악가 쇼스타코비치(肖斯塔科维奇)는 “그들이 민간연예인을 총살할 때마다 몇백 수의 위대한 음악작품이 그들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민간가수들은 모두 맹인이여서 그들의 가곡은 문자기록이 없었다. 이런 음악작품은 제자들을 통해 세세 대대로 전해졌다. 매 하나의 맹인가수들은 모두 자신의 독특한 가곡이 있었다. 쓰딸린은 무슨 병태적인 의심으로 이런 맹인예술인들을 소멸했는가? 맹인예술인들이 쓰딸린에게 무슨 위협이 되었는가? 당시 농촌에서 한창 집체화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농은 한 계급으로 이미 소멸되었다. 쓰딸린은 이런 맹인가수들이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부르는 노래가 매우 슬픈 곡조인데 그들이 부농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할지 누가 아는가? 맹인에 대해 무슨 심사제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고쳐서 비준한 가사를 맹인들에게 주어 부르게 할 수도 없고 서면 지시를 하달할 수 없었다. 맹인들은 무엇이나 모두 입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맹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그들을 총살하는 것이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쓰딸린은 맹인연예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쓰딸린은 명령을 내려 1만 5,000명의 뽈스까군관을 총살한 적이 있다. 독일군이 뽈스까를 침략했을 때 뽈스까군은 서부전선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적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쏘련군이 동쪽에서 뽈스까영토를 공격했다. 독일군의 공격도 막아내기 힘든 판에 쏘련군이 뒤에서 공격해오니 뽈스까군은 투항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어도 독일군에 투항할 수 없었던 뽈스까군은 결국 쏘련군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쏘련 내무부는 쓰딸린의 명령에 따라 뽈스까군의 포로를 “정치감별”한 후 병사들을 하나하나 석방하고 군관 1,500명만 남겨놓았다. 뽈스까인들의 심목중에이 1,500명의 군관들은 모두 민족영웅이었다. 그러나 쓰딸린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뽈스까군의 군관들은 입대 전에 모두 전업 지식분자(이는 뽈스까군의 매우 특별한 점)였다. 1만 5,000명의 군관은 공정사, 교사, 기술원, 농예사, 의사, 회계사, 작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쓰딸린은 이 사람들을 석방한다면 앞으로 꼭 뽈스까 자산계급 정권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여겼다.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운 뽈스까 자산계급정부가 그들에 의거해 또 군대를 조직한다면 이는 쓰딸린이 앞으로 세우게 될 쏘련 괴뢰정부인 뽈스까인민정부에 얼마나 큰 우환이 되겠는가? 모두 총살해 버리는 것이 우환거리를 제거하는 속 시원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쓰딸린은 내무부에 “뽈스까의 1만 5,000명 군관을 모두 카틴삼림(卡廷森林)에 끌고 가서 비밀리에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사람마다 모두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리고 큰 구덩이를 파서 그들을 매장했다. 이것이 바로 카틴삼림 학살사건이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 고르바쵸브와 에리친은 쏘련정부를 대표하여 과거 쏘련이 카틴삼림 학살사건을 저지른데 대해 뽈스까인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깊은 참회를 표시했다.
1990년 1월 30일에 구쏘련의 국가안전부 부주석은 “현존하는 서류자료의 통계의 의하면 1930년부터 1953년까지 쏘련 전국에 377만 8,234명이 정치 핍박을 받았고 78만 6,098명이 극형(총살)을 당했다”고 말했다.
쓰딸린은 집정 20여 년 동안 78만여 명을 사형에 처했는데 이 숫자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쏘련 내무부에 남은 서류는 전부의 사망자 수를 반영하지 못한다. 서류가 소각된 정황도 있기 때문이다. 1934년에 쏘련공산당 대표 1966명 중에서 1108명이 반혁명죄로 체포되어 대부분이 집중영과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 당대표들은 직접 사형판결을 받아 죽은 것이 아니기때문에 그들은 78만 6098명의 수치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정황은 매우 많다.
기록보관소의 모든 서류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쏘련국방부 군사연구소 소장은 “1937과 1938년의 그 비참했던 2년 동안에 약 350만~450만명이 진압당했고 그중 60만~80만명이 사형판결을 받고 죽었다. 그외 또 매우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지 않았지만 후에 노동개조영과 감옥에서 애매하게 죽었다”고 말했다.
숫자에는 소리가 없다. 450만 명이든 350만 명이든 누가 “옷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생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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