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 (재외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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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그 남자의 진실' 편이 방송되었다.
영화에 빠진 한
젊은 청년이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일본 첩자에 의해 암살되자 왜경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넘어간 후 40여편의 항일 영화에 출연한 영화 같은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이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홍콩, 베이징, 대만이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하이 영화에 두고있다. 1930년대의 상하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바로 그 당시 상하이 영화계에 혜성 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다. 바로 김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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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염(金焰)의 본명은 김덕린이다. 김염은 상하이에서 영화에 출연할 때 바꾼 예명(藝名)으로서 불꽃 ‘염(焰)’자는
루쉰의 산문시 “사화(死火)”
혹은 볼셰비키 기관지 “이스크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김염은 1910년 4월 7일 서울의 명문 의사집안에서 태여났다.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아버지 김필순은 중국 치치하얼로 망명했고 이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김염은 고모의 집에 의탁되었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운동과 예술 분야에서 감출수없는 끼를 보였던 김염은 1927년 열일곱 살 때 친구들이 마련해준 차비로 단돈 7위안을 갖고 상하이로 향했다.
당시 세계에서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가장 번화한 금융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상하이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김염은 1929년 손유 감독의 과감한 기용으로 드디어 꿈을 펼치게 되였다.
손유감독은 콧날이 오뚝하고 눈매가 시원시원한 발군(拔郡)의 풍모를 금세 알아 보고는 그를 무성영화 “풍류검객”에 주연으로 내세웠다. 영화 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그후로 김염은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년) 등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내용은 대부분 중국 봉건시대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로 그의 뛰여난 연기력과 용모를 연거번거 확인해 주었다.
1932년 김염은 서생과 건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을 그려낸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에서 열연을 보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후 김염은 손유감독과 손잡고 대표적 항일영화경전인 “대로(大路1934년)”를 제작했다. 영화, 특히 영화의 주제곡은 관중들 속에서 강렬한 반응과 공명을 일으켰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작곡가로 된 저명한 음악가인 섭이(聶耳)가 영화의
주제곡인 <대로가(大路歌)>를 작곡했고 김염이 직접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인민들
속에서 가장 즐겨 부르는 애국가곡으로 되었으며 많은 청년들을 항일열조를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되었다. 이렇듯
김염의 항일영화들은 사람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김염은 또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을 다룬 “애국혼'과 항일영화 “장공만리' 등에 출연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반일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항일 영화인 “장지릉운'(1936년)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필림을 찾아 없애버린 영화이기도 하다. 김염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싸인을 담은 브로마이드(肖像)를 판매 해 항일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영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김염이었다. 중일 전쟁이 터졌고 상하이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곧 “영화황제”에게 눈독을 들였다. 군부인사가
직접 나서서 김염더러 일본군국주의를 선양하는 영화에 출연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김염은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향항으로 피신했다.
1947년 여배우 진이(秦怡)와 재혼했다. 주은래 총리가 “중국의
공주”라 격찬할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진 진이는 “여자농구선수” 등 영화에 출연하며 “일급 배우”의
칭호를 받았다.
몇해전 중국정부가 중국영화
90주년을 기념하여 선정했던 역대 10대 남녀배우에 두 사람은 모두 포함됐다. 현재 구순(九旬)의 고령에도 간간히 스크린에 얼굴을 뵈이고 영화감독까지 맡아 해 “중국영화계의
산증인, 기적”으로 불리는 그는 "남편은 주로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고
회고했다.
1962년 은퇴 할 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신중국이 성립된후 김염은 상하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하이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여느 거장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혼의 아픔에다 재혼한 진이와의 사이에 태여난 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되는 불행을 겪었으며 문화대혁명때는 농촌으로 하방되고 안해와 함께 수용소에 갖히는 비운을 경험했다. 장기간의 고역에서 얻은 폐기종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73세로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현재 상하이시내 용화열사능원 기념관에 그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베이징영화박물관에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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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차기 장편소설은 “영화황제”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 한 “수은등의 황제”이다. 작품의 기획은 지난 해 전국소수민족문학중점작품지지항목에 선정됐다.
이 항목은 중국작가협회가 소수민족작가들의 작품창작을 지지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으로, 선정된 작품에는 창작기금을 지원하고 출판, 중문번역, 영화,드라마로의 개편등 혜택을 제공한다.
집필을 다그치면서 필자는 장편의 제목을 “무성시대”로 바꾸었다. 김염의 영화작품
중 대부분은 흑백영화이고, 무성영화이다. 당시 색채도 소리도
없는 어딘가 툽상스러운 영상기술이었지만 한 조선인의 끼끗한 외모와 불타는 열연은 걸음마를 타기 시작 한 무성영화에 소리와 색채을 압도하는 이채로움을
보태 주었다.
수난많은 민족사와 중국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우리민족의 걸출한 인걸- 김염, 그의 모습은 퇴색하지않는 한 컷의 필름으로 지금도 스크린을 수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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