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개석 일본과 손잡고 공산당 제거하려는 염석산에 경고

1941년 여름, 중국의 항일전쟁이 가장 간고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염석산이 담당구역인 중원지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염석산의 병력이 약해서보다는 이 전구장관인 염석산이 항일에 대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 염석산의 꿍꿍이를 미리 보아낸 장개석은 자신의 특사 서영창을 제2 전구 즉 염석산이 맡은 전구를 시찰하게 하였다.
이 해 8월 25일, 중경으로 돌아온 서영창은 장개석한테 몇가지 중요한 것을 회보하였다.
첫째, 염석산이 일본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둘째, 산서의 염석산이 중앙과 오해가 생겨 다른 정권을 세울 우려가 있다.
셋째, 공산당에 대한 염석산이 증오가 극도로 달해 일본군과 함께 공산당을 제거할 가능성이 크다.
8월 29일,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존경과 위안의 뜻”이 내포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서영창이 염석산의 방위지역인 산서성 길현지구를 방문할 때 염석산은 일본과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 얼마 후 과연 일본과 염석산은 모종의 협의를 달성했는데 당시 협의내용에는 일본측에 기울여지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또한 염석산은 한편으로는 장개석의 동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일본과 연합해 공산당을 토벌하려고 시도했다. 이 해 9~10월 기간 염석산은 연속 3차례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 “오직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본인은 그 어떤 희생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위원장께서 공산당을 토벌하려면 공산당 소련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기에 일본의 힘을 빌어 공산당을 제거하면 위원장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다르게 생각했다. 즉 염석산이 일본과 연합해 중공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이며 가짜로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으로 자기의 진정한 목적을 가리려는데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당시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분석은 매우 적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대해 염석산은 기본상 저항을 포기하려는 태도였다. 당시 국군이 여러 전선에 거쳐 전면 패하고 있을 때 상당 부분의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염석산의 음모는 장개석의 중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26일, 장개석은 일기를 통해 염석산을 호되게 질책했다.
“비열하고 교활한 한간, 왕정위 역도보다 다를바 없도다.” 하지만 장개석은 그냥 혼자서 이빨만 갈뿐 공개적으로 염석산을 질책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염석산의 수십만 대군이 일제한테로 넘어가는 날이면 더욱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황하 동안 용문산에 있는 국군을 향해 공격을 발동, 호종남은 한개 사의 병력을 도하시켜 지원하려고 하였다가 염석산의 거절을 당했다. 이유는 중앙군이 도하해오면 후방질서가 혼란스럽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실 당시 중앙군이 황하를 도하하여 협력하면 염석산과 일본과의 협의가 무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보아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판단은 적중했다. 1월 6일, 장개석은 염석산에게 명령하여 “중앙군 61사를 반드시 도하시키며 상론한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이날 장개석은 또 자기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최종 이 한간이 적에게 투항할 경우 나 이 중정은 극단의 조치로 한간을 처단하겠노라
한편 장개석은 중앙군 61사를 기어코 도하시킬 결심을 굳히었다. 그 중요한 목적은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막부득한 경우 공산당의 팔로군과 협력하여 염석산을 토벌하려는데 있었다.
이어 장개석은 재차 가경덕을 염석산이 맡은 전구에 파견하여 섬서 혹은 감숙 등지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경우 염석산의 책임을 추궁할 것이며 만약 염석산이 일본과 손잡고 공산당을 토벌할 경우 자신이 더욱 큰 토벌대상으로 될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그 때는 장개석이 직접 공산당을 거느리고 염석산 토벌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당시 장개석은 민족의 운명아에서 추호의 여지도 없이 중공과 함께 한간을 토벌할 것이며 적아사이에는 그 어떤 투기적인 수작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 염석산이 문무관원 중에는 일본과 결탁하려는 극소수의 투항주의파 외 대다수 장병들은 모두 항전으로 출로를 찾고 태원을 수복하여 산서군벌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결의로 충만되어 있었다.
거기에 1941년 말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염석산은 자기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식, 1942년 1월 초,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서는 “위원장과 함께 공산당과 손잡고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겠노라”고 표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염석산의 큰 태도변화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장개석한테 완전히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이해 3월 하순,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서안에서 한번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전방이 긴장하여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이해 8월 14일에도 장개석이 서안에서 재차 염석산과 만나자고 제의했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각종 이유로 조승수와 왕정국 두사람을 서안에 보내어 장개석과 만나도록 했을뿐이었다.
1943년 12월 29일, 산서성 주석 조대문이 타계하자 이듬해 1월 6일, 장개석은 자기의 일기에서 반간첩 전략에서 큰 기여를 한 조대문을 추모하는 글을 적어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대문은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당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 시도를 파괴시겼을 뿐만 아니라 한편 염석산을 설득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염석산과 일본의 관계는 점차 냉담해지기 시작하였고 장개석도 더는 특별조치를 취하자던 결심을 포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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