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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교인물 열전 ⑱] 주은래…냉전의 장벽을 넘어 중국 외교의 문을 열다

  • 김준하 기자
  • 입력 2026.10.2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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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네바회의·반둥회의에서 닉슨 방중까지…적대국과도 협상 이어간 중국 초대 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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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초대 외교부장을 지낸 주은래(周恩来·1898~1976). 자료사진.

 

[인터내셔널포커스] 1972년 2월 21일,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주은래(周恩来·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국전쟁에서 맞섰던 두 나라의 지도자가 20여 년의 적대 관계를 뒤로하고 마주한 순간이었다.


주은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정무원 총리와 외교부장에 취임했다. 1958년까지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중국의 초기 외교체제 구축과 주요 대외 협상을 이끌었다. 미국과의 대립, 소련과의 동맹과 갈등,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의 등장까지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난 그는 톈진 난카이학교를 거쳐 일본과 유럽에서 공부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국민당과의 협상,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등을 경험했다. 전쟁과 혁명의 현장에서 쌓은 정치적 경험은 1949년 이후 외교 협상에도 이어졌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초기 중국의 외교적 입지는 좁았다. 미국은 중국공산당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중국은 소련과의 동맹에 크게 의존했다. 주은래는 상대국의 태도에 따라 정식 수교와 제한적 외교 관계, 민간 교역을 구분해 접근했다. 당장 국교를 맺기 어려운 국가와도 교류할 여지를 남겨두려 했다.


1953년 12월 인도 대표단과의 회담에서는 평화공존 5원칙을 제시했다. 주권과 영토 보전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평등과 호혜, 평화공존이 핵심이었다. 이 원칙은 이듬해 중국과 인도의 협정에 반영됐으며, 인도·미얀마 정상들과의 공동성명을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1954년 4월 주은래는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제네바회의에 참석했다. 중국이 주요 국제회의에서 서방 국가들과 직접 협상하는 중요한 기회였다. 회의에서는 한반도 문제와 인도차이나 전쟁이 논의됐다. 한반도 문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인도차이나에서는 휴전과 군사적 재편에 관한 협정이 마련됐다. 주은래는 이 과정에서 프랑스 등 관계국과 접촉하며 협상에 참여했다.


이듬해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서는 또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참석국들은 식민지 지배의 경험을 공유했지만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다.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는 국가들도 있었고,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정부도 있었다.


주은래는 이념 논쟁보다 공통의 관심사에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구동존이(求同存異)’, 곧 공통점을 찾되 차이는 남겨두자는 접근이었다. 반둥회의 이후 중국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과 잇달아 외교 접촉을 확대했다.


미국과의 접촉도 닉슨 방중 이전부터 이어졌다. 1955년 제네바에서 시작된 중미 대사급 회담은 이후 바르샤바로 장소를 옮겨 진행됐다. 양국은 대만 문제 등을 놓고 대립했지만, 공식적인 의사소통 통로를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는 상황에 따라 접근 방식을 달리했다. 일본과는 민간 교류를 확대했고, 1964년 프랑스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소련과는 이념 갈등에 국경 분쟁까지 겹치며 관계가 악화됐다. 1969년 주은래는 베이징 공항에서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총리와 만나 긴장 완화를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중미 관계에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71년이었다.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고, 주은래는 중국 측 협상을 주도했다. 이듬해 닉슨 대통령의 방중으로 양국은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은 양국의 견해 차이를 감추지 않았다. 특히 대만 문제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명시하면서도 관계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합의할 수 없는 문제를 남겨둔 채 협력을 모색한 사례였다.


이러한 변화에는 마오쩌둥의 전략적 판단과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중소 갈등이 함께 작용했다. 주은래는 정상 간 결정을 실제 협상으로 옮기고 양측이 수용할 수 있는 문구와 절차를 조율했다.


그의 외교 활동을 당시 중국의 국내 정치와 분리해 평가하기는 어렵다. 문화대혁명으로 외교 조직과 대외 관계가 흔들렸고, 주은래 역시 최고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일부 외교 인사들을 보호하려 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문화대혁명 체제에서 수행한 정치적 역할도 역사적 검토의 대상이다.


1976년 1월 8일 주은래는 베이징에서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관여했던 중미 관계 개선은 사후인 1979년 정식 수교로 이어졌다.


1954년 제네바에서 중국은 서방과 직접 협상했고, 1955년 반둥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과 공통의 의제를 찾았다. 1972년 베이징에서는 미국 대통령을 맞았다. 주은래는 이 과정에서 중국의 입장을 지키면서도 상대와 합의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려 했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시작된 그 협상들은 중국이 국제무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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