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두 누나 시집가던 그해의 봄
■ 김철균
꽃이 핍니다. 봄이 왔습니다. 연길시 거리마다에는 연분홍 살구꽃이 만발해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오늘은 일요일, 연길시 인민공원과 청년공원 등 유원지에서는 10여살 푼한 어린이들이 흩날리는 꽃보라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이 봄을 즐기고 있습니다.
봄, 세상만물이 소생하는 봄 – 얼마나 좋은 계절입니까. 하지만 봄이라고 해서 해마다 낭만적이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동년시절 나의 두 누나가 시집가던 그 해의 봄만 해도 괴롭고 울적하고 슬픈 봄이었습니다.
1
지금으로부터 40여 년전, 그러니까 1971년의 봄이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따르던 누나 둘이 한꺼번에 시집을 갔던 것입니다. 결혼이란 싱글로 살던 시절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에 들어선다는 것으로,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당시 우리 가정의 상황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는 19살, 하나는 18살 연연생으로 된 누나 둘이 너무나도 일찍 시집가게 된 것은 일종 생활의 핍박에 의해서였기도 했습니다.
1967년에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매맞아 사망됐고, 그 이듬해인 1968년 여름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반란파들한테 끌려 다니다 못해 서슬 푸른 훈춘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던 그 시절,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살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집에 있는 식구라고는 15살인 셋째누나와 14살인 넷째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셋뿐이었는데 숨이 붙어 있었으니 살았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고행이였습니다. 덮쳐드는 생활고도 그러했고 정치적으로 받는 정신적 타격도 그랬으며 거기에 여자인 두 누나의 인신보장도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친척들도 남의 감시가 무서워 우리 집으로 다니기를 꺼려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독재대상”의 자녀라고 기시를 받고 집에 들어오면 서럽고 적막하기만 하던 그 세월, 그래도 나의 6촌인 김정일형이 담이 크게도 우리 밤마다 우리 집에 와서는 지켜주군 했습니다. 그만큼 특등영예군인의 아들이였던 6촌형님은 가정토대의 덕분에 그래도 마음대로 우리 집으로 드나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중학교 홍위병들이 셋째누나를 붙잡아 가려고 했습니다.
말로는 어머니의 “죄장”을 고발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누나를 끌고가서 어떤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6촌형님이 나섰습니다.
“이놈들아,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라. 열다섯살밖에 되지 않은 애가 알면 뭘 안다고 그러냐!”
6촌형님의 호령에 홍위병들은 물러갔지만 그 뒤일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간혹 6촌형님이 일이 있어 오지 않는 날 밤이면 우리 세남매는 무서운 나머지 집안 한구석에 몰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번개가 치며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 저녁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령이 창밖에서 맴도는 것 같아 그러한 공포는 더하군 했습니다.
2
한편 정치적 박해와 더불어 힘든 생활난도 련속 들이닥쳤습니다. 생산대에서 “독재대상집”이라고 식량을 적게 주어 배를 곯는데다 겨울마다 화목을 해결하지 못해 집이 춥기를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시골인 우리 동네는 대부분 땔나무를 해다가 밥을 하고 집도 덥히군 했는데 남성일군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산에 흔해버린 그 나무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밥을 하는 땔거리란 누나 둘이서 들에 나가 마른 풀을 베오거나 밭에 가끔씩 서있는 옥수수대 등을 갖다가는 하루하루를 겨우 이어갔는데 당시 저의 어린 생각에도 그 것은 장구지책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누나들 몰래 도끼와 낫을 가지고는 나무하러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헌데 당시 12살이었던 나는 여느 남정들처럼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임업정책이란 것도 몰랐기에 산기슭에 이르자 마자 어른들 팔뚝만큼씩 굵은 가둑나무들을 찍어댔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찍어 넘겼을가? 겨우 한수레가량 되게 나무를 찍으니 가뜩이나 짧은 겨울해는 어느덧 서산기슭에서 넘어가려 했고 어린 나도 기진맥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좀 높은 곳의 나무를 끌어내릴 때 끝내 나무를 끌어 안은채로 경사진 곳에서 굴러 낭떨어지로 내려왔습니다. 팔과 얼굴이 긁히고 여기 저기가 아파났습니다. 헌데 아픈고 아린 것보다 너무나도 기진맥진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누워 자고만 싶었습니다.
“엄마야, 엄마 왜 날 두고 저 세상에 갔어?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해?…”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철균아, 너 어디 있어? 철균아!”
셋째 누나였습니다. 누나가 끝내 수소문하다가 산까지 찾아왔던 것입니다.
나를 발견하는 순간 누나는 나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러고는 울었습니다.
“너 이 나이에 어떻게 나무를 한다고 그래?! 이 불쌍한것아…”
누나는 내가 불쌍해 울고 나 또한 우는 누나가 가여워서 울었습니다.
난리가 날 일은 그 뒤에 있었습니다. 내가 한 그 나무가 또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6촌형님의 손을 빌어 나무를 수레에 싣고 집에다 부리웠더니 대대의 임업위원이 찾아와 임업정책을 어기고 굵은 나무를 찍었으며 이 역시 사회주의 담벽을 허무는 행동으로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 대신 누나가 생산대대에 불리워가 비판을 받고 자아검토서까지 쓰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나무 한수레 또한 한가치도 아궁이에 넣어보지 못하고 생산대 우사로 싣겨갔고 말입니다.
3
험악한 세상, 각박해진 인심 - 우리 세 남매는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몇년이 지나 셋째 누나가 19살이 되자 현 성에서 사업하는 형님이 대책을 댔습니다. 그 대책이란 것이 뭐겠습니까? 바로 여동생들이 어린대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은 연길에 사는 큰 매형과 토의해서는 고향사람들 몰래 두 누나를 연길의 총각들한테 마주세웠던 것입니다. 고향의 반란파들이 알고 연길로 찾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날이면 겨우내 만들어낸 혼사가 파탄될 수도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해 우리 세 오누이는 현 성에 있는 형님네 집에 얹혀사는걸로 가장하고는 고향을 떠나 우선 형님네 집에서 얼마간 있다가는 그 해의 5월 1일은 셋째 누나의 결혼날로, 5월 2일은 넷째누나의 결혼날로 정했습니다.
1971년 5월 1일, 셋째 누나가 시집가던 날은 가뜩이나 흐리터분한 날에 궂은비가 구질구질 내렸습니다. 비가 오면 신부가 울면서 산다는데 셋째 누나의 결혼운명이 어떻게 될런지? 당시 그 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연길시 교외농촌의 4대가정이 사는 대가정으로 동생을 시집보내며 한숨을 쉬는 형님의 얼굴에서 어린 나도 다소 얼마간이라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넷째 누나가 시집을 갔는데 역시 연길시 교외의 그 농촌마을은 한공에 10여전밖에 되지 않는다는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진탕속을 빠져나와 다시 먼지구덩이로 들어간다고나 할가?
여하튼 시집이라고 갔지만 나의 두 누나는 몇년간 많은 고생을 한 걸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살림살이를 야무지게 잘하고 어른들은 잘 모셔 칭찬도 자주 받는다는 소문도 들었고요.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핍박에 못이겨 양산에 오르는 격으로 부랴부랴 시집간 우리 두 누나의 신세, 그것이 그닥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나의 두 누나는 모두 자녀들을 출세시키고 아주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같은 연길 시가지에서 살면서 서로 오가며 즐겁고 기쁜 사연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와 누나들은 어쨌든 이젠 한집식구가 아닌 서로 다른 가정을 꾸리고사는 현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같이 살던 형제가 왜 갈라져 다른 가정을 만들고 살아야 하는지? 아니 그 것도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로 헤여져야 했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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