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과 세파속의 민국 여성들 [시리즈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7년, 그의 나이 102세를 맞으며 사람들 앞에서 선보인 옛 상해의 절색미인이었던 엄인미(严仁美) 여사는 여전히 숱이 많은 머리칼로 세월이 무색케 하였다. 비록 흰 머리칼이 조금씩 보이긴 했으나 윤기가 흐르고 잘 정리된 엄인미의 머리칼을 보고 모발분야의 연구일군들은 분분히 그녀한테 머리칼 보호비법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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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홍구클럽에서 친구들과 함께 남긴 엄인미의 사진(제일 가운데 여인이 엄인미임)
엄인미가 결혼한 뒤 과연 마씨네 마님의 병세가 나아졌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엄인미는 임신했고 더 이상 서당으로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러자 마씨 가정에서는 한 영국인 목사를 청해 집에서 엄인미한테 영어와 사회교제 등을 배우주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서당으로 다닐 수 없는 엄인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었다.
그 시기 그래도 엄인미의 지인으로 돼 준 것은 <조씨네 넷째 딸>로 불리는 남편의 형수였다. 그녀는 늘 엄인미와 함께 상해 교외로 나가 산책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도 하면서 동반해주었다. 둘은 비록 동서 사이었지만 친자매마냥 아주 자별했으며 그들이 몰고 다니는 승용차 역시 멋지고도 고급스런 무개차로서 한 대는 <조씨네 넷째 딸>이 운전했고 다른 한 대는 엄인미가 운전했다.
이렇듯 결혼 뒤 엄인미는 <조씨네 넷째 딸>한테 많은 것을 의지하며 마음의 평형을 잡으려 했지만 기타의 여건은 여전히 많은 실망을 가져왔다. 마씨네 가문은 비록 부유하였지만 전형적인 봉건식의 가정이었으며, 이는 서양의 문명에 눈을 뜬 엄씨네 가문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 부부 또한 한명은 봉건전통가정의 <나으리>였다면 다른 한명은 발랄하고도 개방적인 신 여성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유와 관념도 제각각이었고 음식습관마저도 도무지 융합될 수 없었다.
엄인미의 낭군 마령랑(马令郎)은 비교적 소탈하게 생겼지만 성격상 봉건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편으로 개인생활상 여자들과의 관계가 난잡했으며 그의 주위에는 생활습성이 나쁜 친구들이 늘 붙어다녔다. 그러한 그의 생활습성은 엄인미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될수록 점점 드러났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엄인미가 주장하는 신문화 및 개방형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엄인미는 결연히 신랑 마령랑과의 이혼을 결심했다. 이 역시 그 때의 시대로서는 흔치 않게 봉건적 혼인에 대한 현대여성의 대담한 도전이었다.
바로 이 시기, 엄인미는 송애령(宋霭龄)의 큰 딸 공녕의(孔令仪)와 각별히 가깝게 지낸다. 명문가족끼리는 세세대대로 교제한다고 공녕의가 비록 엄인미보다 한 살 어렸지만 두 자매는 늘 가슴을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공녕의는 엄인미의 불행한 혼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더러 자주 공씨네 집에 와서 놀도록 하였으며 또한 공씨네 윤선(轮船)에 승선해 홍콩 등지에 가서 유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선에서 엄인미는 서양요리사한테서 제빵 기술을 습득, 자신이 직접 만든 빵을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여사한테도 드렸는데 송미령 여사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평소 엄인미는 송애령 여사한테 <부인> 하고 깎듯이 불렀지만 그럴 때마다 옹애령 여사는“너도 녕의처럼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 이는 송애령 여사가 엄인미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했을뿐만 아니라 엄씨 가문과 공씨 가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주기도 했다. 또한 송씨 가문과 공씨 가문 모두가 엄인미의 이혼결심을 지지했으며 그녀가 다시 분발하여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고무 격려했다.
태평양전쟁 전야, 엄인미의 수양어머니 성관이(盛关颐)가 상해를 떠나게 되어 신강화원 15번지(新康花园15号)의 주택이 비어있게 되었다. 상해를 떠나면서 성관이는 엄인미가 이 주택에 기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인부들을 청해 이 주택을 새롭게 수건하게 하였다.
이 시기, 조계지내에서의 일본의 세력은 날로 팽창하였다. 아울러 엄인미가 들려고 했던 신강화원 15번지의 이 주택 역시 일본관원들이 사무실로 쓰려고 노리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 이 주택을 보러왔던 일본인 야마모토는 엄인미의 미모를 보고는 더욱 끈질기게 <주택임대>를 명목으로 치근덕거렸으며 그날부터 매일 이 주택으로 들락거렸다. 이에 엄인미는 재삼 주택을 임대해주지 않는다고 밀막아 버렸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모 친일주구 한명은 엄인미를 찾아와 “야먀모토는 관직이 높은데다 미혼이기에 그와 결혼하면 낭패될 것이 없다”고 구슬리기도 했다……
그 뒤 엄인미는 화를 피하려고 더 이상 신강화원 15번지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러 있었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친정을 찾아와 치근덕거렸다. 이어 엄인미가 숙부의 집에 가 피신해 있자 야마모토는 또 숙부 집 주위에 감시망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엄인미는 다시 몰래 작은 고모가 출가해 있는 주씨 가정에서 몰래 숨어있어야 했다.
엄인미가 주씨 가문에 숨어있던 그 나날, 주씨 가문의 모든 이들이 가슴을 움켜잡고 숨 죽이며 긴장해하던 나날들이었다.
한편, 송애령의 딸 공녕의는 엄인미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을 시켜 엄인미를 중경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떠날 날자가 다가오자 뜻밖으로 엄인미의 원 시가인 마씨 가정에서는 그녀가 자식을 데리고 떠나지 못하게 했고 엄인미 역시 아들애와 떨어지기 싫었다.
결국 엄인미는 계속 상해에 남기로 했다.
일본인 야마모토가 계속 치근덕거리는 상황에서 상해에 홀로 남아 있는다는 것 역시 장구지책이 못되었다. 이러자 엄인미의 가까운 친척들은 상론한 끝에 유일한 방법은 하루 속히 훌륭한 신랑감을 찾아 엄인미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그 3개월 뒤, 과연 엄인미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신랑감이 나타났다. 바로 엄씨 가문과 세세대대로 가깝게 지내왔으며 역시 상해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이씨 가문의 공자- 이조민(李祖敏)이었다. 광화대학 경제학부(光华大学经济科)를 나온 이조민은 학식이 연박하고도 본분을 잘 지키었으며 대중성냥공장(大中火柴厂)의 보스이자 미혼의 몸이기도 했다.
혼례식 날, 만일의 경우 일본인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울 것이 염려되어 이씨 가문에서는 10명의 경호원을 배치했으며 혼례도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그 일례로 엄인미의 결혼사진 중 신랑와 신부가 나란히 등장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마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는 오늘까지 엄인미가 가장 유감스러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결혼 뒤, 엄인미의 결혼생활은 아주 행복했다고 한다. 둘은 서로 극진히 상대를 사랑했으며 일본인들도 더 이상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않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엄인미는 애국운동에 적극 가담, 나라건설을 위해 자신이 솔선적으로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공상업계의 모금계획도 적극 추진했다. 그러면서 이런 애국운동중 공상계의 유념의(刘念义), 영의인(荣毅仁), 성가년(盛康年) 등 거물들의 믿음직한 동반자로 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 하와이에 가서 당시 그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장학량과 조일획(조우쓰 쇼제-赵四小姐)를 탐방했는가 하면 또 워싱턴에 가서 채문치 장군(蔡文治将军)을 만나뵙기도 했다. 미국방문시 엄인미는 그 시기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도 만나 뵐 계획을 하였으나 송미령이 대륙에서 온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송미령은 공녕의한테 부탁하여 엄인미한테 고급옷 한 상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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