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 김철균

일전 중앙CCTV를 통해 중남미의 쿠바를 소개하는 뉴스를 시청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쿠바도 이제는 대외로 개방하고 있으며 미국을 포함한 서방나라들에서 각종 제재를 취소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의 뇌리에는 한국상선 “코리안스타(KOREAN STAR)”호를 타고 쿠바의 항구도시 산타아고데쿠바(圣地亚哥)에 입항해 있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1991년 9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그때 중남미의 알루바도섬(阿鲁巴岛)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본선이 그리스(希腊) 나비니아 대리점으로부터 쿠바에 가서 밀감 3000톤을 적재하라는 팩스를 받은 것은 9월18일 오후였다. 그러자 뒤따라 선내방송은 쿠바 입항시의 유의할 점과 선원마다 갖고 있는 일체의 소지품과 달러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신고할데 관한 지시를 하달했다. 그만큼 그 때까지도 꾸바입항절차가 까다로왔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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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입항절차 

한편 쿠바에 대한 주변국가의 감시와 봉쇄도 강화되는 실정, 그날 밤 본선이 쿠바를 향해 닻을 올리고 3 ~ 4시간쯤 향행했을 무렵 갑자기 선박상공에서 헬리꼽터의 동음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더니 선박기관실의 엔징이 문뜩 멈춰서는 것이었다. 이어서 미국경찰의 헬리꼽터 한대가 거센 선풍을 일으키며 뎃기(갑판)에 내려 앉더니 전신무장한 경찰 5명이 뛰어내렸다. 그들은 내리자 바람으로 선원마다 침실의 문을 열게 하고는 측정의기로 한바퀴 검사하였으며 나중에는 기관실과 냉동창고까지 낱낱이 수색하고야 손을 뗐다. 듣는 말에 의하면 미국경찰의 이런 검사는 명목이 마약밀매를 사출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쿠바에 무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뜻도 포함된다고 했다. 하긴 남의 나라로 입항하는 선박까지 수색하는 걸 보면 미국은 경찰마저 세계패권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코리안스타”호가 산따아고데꾸바항에 입항한 것은 이튿날 점심무렵이었다. 아니나다를가 쿠바의 세관경찰 역시 지나치게 까근할 정도로 우리들의 신분을 남김없이 확인하고는 일체 소지품과 돈까지 체크하였는데 그 것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엄한 입항절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 때 본선에는 무협지를 비롯한 많은 한국 도서와 잡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인쇄물까지도 차봉하고는 출항 후에야 개봉할 수 있게 했다. 
 
중국산 자전거천국 
 
그날 저녁 우리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외출했다. 우리가 항구입구에서 외출등녹을 하고 밖에 나서자 곧바로 시내로 통하는 공공버스가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세관경찰들과는 달리 버스의 승객들은 우리한테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우리들속에 나를 포함한 몇몇 중국선원이 있음을 알자 “닌호우?(您好)”하고 중국말로 인사하며 악수를 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자리를 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헌데 이상한것은 우리가 버스표를 떼려고 달러를 내밀자 승무원은 한사코 받지 않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 같으면 외국인들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상투적 수단이겠는데 그들은 왜 그러는지? 후에 볼라니 승객들은 모두 작은 카드 하나만 보이고 내렸는데 우리에게 그런 카드가 없고 하니 그대로 내버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스페인어로 (쿠바는 스레인어가 통용됨)술마실 곳이 어디인가를 물은 뒤 버스가 제일 호화로운 섭외호텔인 하와호텔에 도착하자 그 곳에서 곧바로 내렸다.

아무리 봉페정책을 실행한 쿠바였지만 하와호텔만은 디스코바, 커피점, 슈퍼마켓, 전자유희청 등 있을 것이 다 있어 이른바 “자본주의 세계”였으며 이를 이용하는 이들 또한 거개가 외국인들이었고 국내손님은 특수카드에 의해서만 출입이 허용됐다.

우리는 그 곳에서 거의 세시간이나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 곳의 양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값도 싸고 또한 가짜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땅콩과 건포도로 안주해서 마시는 술맛은 각별히 좋은듯 했다.

밤 10시가 좀 지나자 우리는 소풍하러 밖으로 나왔다. 중국같으면 그 시간에는 행인이 적으련만 열대국가인 그 곳은 그 때가 제일 흥성할 때였다. 특히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그 곳도 중국처럼 자전거행렬이 물결쳤는데 자세히 볼라니 그 자전거의 절반 이상이 우리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영구(永久)”, “비둘기(飞鸽)”, “봉황(凤凰)” 등 명표들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과 쿠바사이도 무역래왕이 잦음을 알 수 있었다. 후에 볼라니 본선선원들이 하와호텔 슈퍼마켓에서 산 침대카바와 운동화 등도 모두 중국제품임이 확인되자 우리는 또 한번 놀랐다. 쿠바의 자전거타기열은 경제위기로 석유가 긴장하여 많은 기동차들이 뛰지 못하자 일기 시작했고 자전거수입 파트너도 중국으로 됐다고 한다.

한편 우리가 호텔을 나와 얼마 안되어 불현듯 본선의 제3기관 조리수인 박치국씨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저 담장밑에 아가씨들이 줄쳐 앉아 있어요”라고 흥분되어 부르짖었다. 그러자 모두들 그 쪽으로 쓸어갔는데 아니나 다를가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남미계의 세뇨리따(아가씨) 5~6명이 얌전히 앉아서 뭔가 기다리는 듯 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그토록 이쁠수가 없었다. 선원들은 대뜸 아가씨들한테 달라붙어 찧고 박고 했다. 여자를 되게 밝히는 한국의 “배놈”들, 어쩔 수 없었다.

헌데 이튿날 오전에 들을라니 그들 모두가 단속 때문에 호텔행을 하지 못하고 바다가나 길가의 잔디밭속에서 뒹글었다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값이 싸고 순진해서 좋았어”, “여기선 에이즈는 근심할 필요가 없어”라고들 하는 것이었다.

밀감 상역작업은 9월 20일부터 시작됐다. 헌데 수송시설이 낙후하여 차량속에 마차까지 동원되다 보니 작업효율이 빠를리 만무했다. 그런즉 작업양 체크만 하는 본선 선원들도 팔자가 늘어져 교대로 낮잠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저녁엔 뭘하랴. 또 외출해야지. 술 처먹고. 아가씨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그날 저녁 우리는 길도 익숙하기에 버스를 타지 않고 구경삼아 걷기로 했다. 그래서 전날에 스쳐지났던 거리풍경들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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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바에 따르면 쿠바는 물산이 매우 풍부한 나라이다. 지하에는 철, 동, 아연 등이 풍부하여 중공업발전에 유리했고 지상은 커피, 사탕수수, 여송연, 코카인 등을 대량 재배할 수 있는 산지이다. 헌데 이렇듯 경제발전의 우세를 갖고 있는 나라였으나 수백년에 달하는 스페인사람들의 통지와 그 후에 있는 전쟁의 세례 또한 사회주의에 진입하여서도 오래동안의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그 때의 쿠바현실은 그닥 낙관할 바가 못되었다. 하긴 구소련이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을 때만도 구소련의 보호밑에 그닥 어려움이 없었다 한다. 대외무역의 80% 이상이 구소련을 상대로 했다니까. 하지만 냉전이 결속된 후 구소련의 세계적 패권이 약화되면서 쿠바경제도 위기를 겪게 되였는바 이를 두고 한국인들은 사회주의국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허나 사회주의국가라고 낙후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개혁개방을 실시하는 우리 중국만 봐도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가.

한편 거리를 도보로 걸으면서 느낀 인상을 적어 본다면 야자수가 늘어선 거리의 양켠에 일떠선 건물들은 대부분 지난 세기 60~70년대에 지은듯 했는데 그 때는 중국에 비해 꽤 번영한듯 했고 거리의 도처에 쿠바수령 카스트로의 초상화가 있어 중국의 문화혁명시기를 방불케 했으며 달리는 차량도 적지만 택시는 더욱 적어 대부분 등불을 달고 깜찍하게 만든 마차가 택시대용으로 쓰이었다. 그외 빵점이나 야채가게마다 늘어선 행열과 어린이들이 맨 붉은넥타이를 볼 때마다 우리의 1970년대를 더욱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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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따뜻이 대하는 쿠바인 
 
하와호텔밖은 그 전날보다 확연히 달랐다. 해가 지기도 전부터 어디로부터 모여들었는지 수많은 아가씨들이 향해 눈을 깜빡여 보였는데 여하튼 그 곳의 미녀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한편 아가씨를 전문 소개하는 거간군이 나타 났는가 하면 이를 감시하는 경찰들도 출동했다. 보아하니 “배놈”들의 외출은 거리구경이나 답사도 아닌 아가씨사냥에 불과했고 그 아가씨들 역시 여자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한국선원들의 돈주머니를 노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쿠바사회의 한측면일뿐 외국인들을 위해 성실하게 봉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산따아고데쿠바항에 입항해 있던 중 10월 3일(음력 8월 26일)은 바로 나의 생일이었다. 그날밤 따라 바깥날씨가 하도 청신했기에 우리는 호텔밖 잔디밭에서 나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내가 호텔에서 산 “JB”표 위스키 네병과 배에서 갖고간 말린 오징어 따위의 안주를 내놓고 한순배 돌렸는데 불현듯 멋진 옷차림을 한 단체가 다가와 공연요청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우리가 일제히 좋다고 박수를 쳐주자 그들은 곧바로 야외공연을 시작했다.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바이올린독주, 벨칸토창법의 여중음독창 그리고 스페인군무 비슷한 남녀쌍쌍의 민속춤…거기에서 알만한 음악은 녀중음가수의 “모스크바교외의 밤”뿐이었지만 음악이란 국경이 없다고 해외에 가있는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흥분시켰다. 특히 여중음가수의 매력은 이성에서가 아니라 예술이란 이 미적매력으로 우리가 감화되게 했다. 그날 본선의 정유식 선장이 그들한테 수고비로 200달러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딱 잘라 100달러만 받고 영수증까지 남겼는데 그것 또한 인상 깊었다. 

그밖에 우리가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기간 구소련선박 네척과 중국선박 두척, 그리고 조선의 선박 한척이 선후로 입항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구소련배는 목재와 기름을 하역하는 잡화선과 기름배였고 중국배 두척은 다 목화를 하역하는 컨터이너선이었으며 조선배는 시멘트를 하역하는 밀봉선이었다. 이로 보아 그 때까지도 쿠바의 대 무역국가가 몹시 제한되어 있는듯 했다. 
 
※                   ※                    ※
 
사람은 모든 것이 지난 뒤에야 이전의 유치함과 아둔했던 것을 깨닫는 법이다. 마치 우리가 30년전 강냉이죽을 먹으면서도 제일 잘 산다고 으시대던 것처럼 20여년전의 쿠바 현실도 마찬가지었다. 저로동효율에 단조로운 인민의 물질문화생활, 세계가 점점 하나의 지구촌으로 둥글어 가고 있다. 하다면 쿠바 역시 자본주의국가를 포함한 모든 나라들을 상대로 바다와 하늘 그리고 모든 시장까지 풀어 놓아야 한다고 느껴진다. 

나의 일생에서 어쩌다 인연을 맺게 된 쿠바와 그 곳의 후더운 사람들, 후에 다시 가볼 수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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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2) 쿠바에서의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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