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 곽영회는 귀국하자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의 직접적인 접견을 받았다. 접견 장소에서 주은래가 곽영회에게 “무슨 요구가 있는냐”고 묻자 곽영회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하룻 빨리 업무에 임하고 싶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조국이 수요하는 사업에 투신
1956년 말, 중국역학연구센터가 설립되자 전학삼이 소장을 맡았고 곽영회가 상무부소장이 됐다. 그 이듬해에는 역학연구센터와 청화대학이 공동으로 공학역학 연구반을 운영하였으며 곽영회가 담임교원과 강사를 맡았다. 1958년 중국 과학기술대학에서 화학물리학과를 설치했으며 초대 학과장에는 곽영회가 부임했다. 그러는 동안 곽영회는 ‘역학보’와 ‘역학번역총서’를 창간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역학학술 명작을 번역 출판하였다.
이렇게 곽영회는 전학삼과 더불어 중국 근대 역학사업의 창시자로 되었다.
이후 곽영회가 참여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교수나 연구보다 어렵고 간고하였으며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인 즉 중국이 자체로 핵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중국과의 관계 파탄으로 관련 전문가와 기술 장비 및 관련 자료를 모두 철수해 중국의 ‘양탄 프로젝트(원자폭탄과 수소탄 프로젝트)’는 심한 난항을 겪었다. 당시 곽영회는 도면과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 위기 앞에서 왕감창(王淦昌), 팽항무(彭桓武) 등과 함께 중국 핵무기 연구의 최초 3대 기둥을 형성, 당시 중국과학원 제9연구원(현재의 중국공정물리연구원)에는 4개의 첨단기술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중 곽영회가 장외 실험위원회를 이끌면서 핵무기 개발의 실험과 무기화를 담당했다.
원자폭탄 연구 과정에서 곽영회는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을 위해 폭발역학과 탄두설계의 기본 이론을 전수시킴과 아울러 신속하게 실험실을 건립하여서는 구조의 강도와 진동과 충격 등의 데이터를 연구했다. 특히 대잠 핵무기의 수중폭발역학과 수역학 등에 관한 연구도 담당, 거기에 폭발 물리 실험에서 곽영회는 연구팀을 이끌고 실험을 거듭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해 최종 우열을 가리는 것’으로 중국의 첫 원자폭탄 폭발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 결정됐고 이후 이는 중국의 1세대 핵무기에 사용됐다.
1963년, 곽영회는 핵무기 개발 연구진과 함께 핵무기 연구 기지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이미 반백이 넘은 곽영회는 중국의 1세대 핵무기 연구자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다. 영하 40도의 혹한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대지 그리고 고지대 반응으로 인한 두근거림과 가슴의 답답함, 부종을 견뎌야 하고 밤낮없이 계산하고 연구, 실험과 폭파를 반복하면서 곽영회는 중국의 원폭 실험을 성공에로 몰고 갔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 신강의 뤄푸버(罗布泊) 상공에는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중국의 첫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던 것이다. 순간, 환호하는 인파 속에서 곽영회는 격정의 눈물을 쏟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뒤에도 곽영회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수소폭탄과 미사일 개발에 관한 작업 외 1965년 9월부터 곽영회는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개발 중 위성 본체가 지구로 귀환하게 하는 연구팀을 지휘하게 됐다.
고강도, 고밀도 작업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곽영회한테는 여가시간이란 전혀 없었다. 그는 워낙 음악 감상을 좋아했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 음반 두 상자를 가져왔지만 오랫동안 봉투도 뜯지 않고 있다가 결국에는 몽땅 중앙인민방송에 보냈다. 그리고 그는 우표 수집을 좋아했으며 그한테는 수집해 놓은 우표만도 책 세 개에 달했다. 그러나 이 역시 국가 우정총국에 몽땅 보내졌다. 그는 또 촬영도 좋아했으나 결국에는 렌즈를 만질 틈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당시 곽영회는 실험기지와 북경을 자주 오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늘 비행기를 탔다. 당시 중공중앙은 그의 안전을 위해 늘 걱정했으며 주은래 총리 역시 곽영회 같은 과학자들의 비행기 탑승을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쫓기 위해 늘 비행기에 탑승했다.
1968년 12월 4일, 그날도 곽영회는 야간항공편을 이용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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