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자고로 인간 세상에는 배신하는 자가 있는가하면 의리를 지키는 자도 있기 마련이다. 삼국시대(정확하게 말하자면 후한 말기)에는 천하가 대혼란에 빠져 난세의 영웅들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오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적군도 아군도 없는 이합집산이 대세를 이뤘다. 하지만 언제나 그럴 듯 난세에도 이익보다 의리를 우선하는, 우선할 뿐만 아니라 목숨처럼 여기는 강호의 사내도 있었다.
“소인은 이(利)를 쫓지만 군자는 의(義)를 추구한다.”
위대한 공자님의 말씀이다.
삼국시대 강호의 장수 중에 무예가 가장 뛰어난 여포는 이(利)를 지나치게 쫓는 바람에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고, 이와 반대로 관우는 의리를 지켜 조조마저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소설 <삼국연의>는 있지도 않은 유비 삼형제의 ‘도원결의’를 지어냈고 이 삼형제의 충과 의를 영웅화 하는데 중점을 둔 결과 수많은 진짜 영웅들의 진실이 묻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 <삼국연의>를 읽어 본 독자들께서는 아마 장홍(臧洪)이란 인물이 기억 속에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는 장홍이 관우보다 훨씬 100배 더 의리를 지킨 강호의 사나이였지만 나관중은 유비 삼형제를 내세우기 위해 장홍을 물밑으로 밀어낸 결과 후세 사람들은 장홍이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장홍에게 눈길을 돌린 이유는 진수의 <삼국지> 때문이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여포와 장홍을 한 챕터에 묶어놓았다. 여포와 장홍의 이 챕터는 <삼국지> 위서(1) 앞부분에 위치해 있어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한 챕터에 묶어 다뤄진 여포와 장홍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즉 여포는 배신의 아이콘인데 비해 장홍은 의리의 아이콘이다. 이 극과 극에 있는 두 인물을 한데 묶어 기록한 것은 아마 비교를 위함이었을 것이다.
장홍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나?
장홍의 아버지 장민(臧旻)은 흉노중랑장, 중산과 태원(지금의 山西省 太原)의 태수를 지냈는데 부임지마다 명성을 떨쳤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장홍은 체격과 용모가 위풍당당했다고 한다. 그는 예의에 밝아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어 낭(郎, 요즘 말로 하면 공무원 시험 합격자))이 되었고 성과가 뛰어나 얼마 후 즉구현(卽丘縣)의 장이 되었다. 영제 말년에 세상이 어지러워 장홍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광릉 태수 장초가 그를 불러 공조로 삼았다.
장홍은 대가 바르고 아주 정의적인 사내였다. 동탁이 황제를 살해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획책하니 장홍은 장초에게 말했다.
“명공은 대대로 천자의 은혜를 입었고 형제도 큰 군(郡)을 다스리는 관리입니다. 현재 황실은 위기에 처했는데 적신(賊臣)은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천하에서 정의롭고 열렬한 선비들이 목숨을 바쳐 황은에 보답해야 할 시기입니다. 지금 경계가 아직 온전하고 관리와 백성도 풍족하니 만일 징을 치고 북을 울려 병사를 모으면 2만 명은 소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이용해 국가의 적을 주살하고 천하를 위하여 바른 행동을 선도한다면 이는 정의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장초는 장홍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여겨 함께 서쪽으로 향하여 형 장막이 있는 진류에 도착했다. 장막은 의협기질이 있어 일찍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는 집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위급한 사람을 구해 주어 많은 재사들이 그에게 의탁했으며, 한때 조조·원소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이렇듯 장막과 장홍은 기질적으로 통하는 것이 많았다.
장막은 즉시 장홍을 불러 만나 대화를 나누어보고는 매우 특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를 연주 자사 유대와 예주 자사 공서(孔緖)에게 소개하니 모두 장홍과 친하게 지냈다.
독자들은 아마 소설 <삼국연의>에서 유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을 때 소를 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나눠 마시는 것으로 맹세를 다짐하는 의식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대사회에서 여럿이 모여 일을 도모할 때 변치 말자는 맹세를 이런 식으로 거행했다. 장홍과 친하게 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일을 도모하려고 장홍을 맹주로 추대하였고 추대 받은 장홍은 곧 제단에 올라 쟁반에 부어놓은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속설에 의하면 맹약의식 때 마시는 피는 얼룩소의 피였다고 한다.
장홍의 맹세는 거창하고 굳셌다.
“한나라 황실은 불행하게도 기강이 법통을 잃었으며 역적 같은 신하 동탁이 이 기회를 틈 타 나라를 어지럽혀 그 화가 제왕에게까지 미쳤고 그 잔혹함은 백성에게까지 흘렀으니 국가가 파괴되고 천하가 전복될까 크게 두렵습니다. 연주 자사 유대, 예주자사 공주, 진류 태수 장막, 동군 태수 교모, 광릉 태수 장초 등은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 모두 국가의 어려움을 구할 것입니다. 무릇 우리는 함께 맹세하고 마음을 일치시켜 협력함으로써 신하로서 충성과 절개를 바칠 것이며 목을 베일지라도 절대로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맹약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목숨을 빼앗고 자손도 모두 없앨 것입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여! 황실과 선조의 신령이여! 모두 함께 이들을 살펴주십시오!”
장홍의 말에는 격정의 기운이 흘렀고 눈물이 좌우로 흘러내렸다. 그의 말을 들은 자라면 비록 일개 병졸이나 잡부라 할지라도 감정이 격앙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다들 목숨을 바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오는 전진하지 못하고 식량이 다 떨어지자 다들 해산했다. <성경>에 이르기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 창대하리라!” 장홍과 의기투합했던 이 대오는 시작은 거창했으나 나중에 너무 미약해서 흩어지고 말았다.
장초는 발이 넓었다. 장홍을 원소에게 보내 유우를 천자로 옹립하는 일을 도모하게 했다. 그러나 공손찬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원소는 장홍을 인재로 보고 활용하기로 했다. 청주 자사 초화(焦和)가 죽자 장홍을 청주에 남아 다스리게 했다. 장홍은 원소의 믿음에 보답했다. 청주 재임 2년간 도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원소는 그의 재능에 감탄하여 동군 태수로 옮기고 동무양을 다스리게 했다.
장홍과 원소 사이의 ‘밀월’ 관계에 금이 가게 한 것은 조조였다.
조조가 옹구에서 장초를 포위하자 장초가 말했다.
“오직 장홍을 믿을 뿐이니 분명 그가 와서 나를 구해줄 것이다.”
당시 조조와 원소의 관계는 한창 좋을 때어서 주변 사람들이 장홍이 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자 장초가 말했다.
“자원(장홍의 자)은 천하의 정의로운 선비이므로 끝까지 근본을 배반하지 않겠지만 단지 원소가 막아서 이곳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렵네요.”
장초의 소식을 들은 장홍은 과연 맨발로 뛰쳐나와 통곡했고 군대를 이끌고 원소에게 가서 장초를 구하러 가기를 원했지만 원소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장초는 결국 조조한테 멸족 당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장홍은 원소에게 원한을 품고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원소는 군대를 일으켜 장홍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해를 넘기도록 함락에 실패하여 원소는 장홍과 같은 고향 친구인 진림으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저항과 항복 경우의 이해득실을 알려주었으며 은덕과 도의로 장홍을 꾸짖었다.
서신을 받은 장홍은 죽을지언정 투항할 의사가 꼬물만치도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 장홍의 태도가 완강하게 나오자 원소는 병력을 증가하여 거센 공격을 감행했다.
시간이 하도 많이 흘러 성안의 양식이 다 떨어졌고 바깥의 구원도 받지 못하자 장홍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알고 관리와 병사들을 불러 모으고 솔직하게 말했다.
“원씨(원소)는 도의가 없고 알을 도모할 때 원칙도 없으며 또 군장(장초)을 구하지도 않았소. 나 장홍은 대의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죽으나 여러 분은 아무 관련도 없이 공연히 이런 화를 만나게 되었음을 유념하시오! 성이 함락되기 전에 처자를 데리고 탈출하시오.”
장군, 관리, 병사,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명공께서는 원소와 본래 원한이 없었으며 지금은 우리 군수와의 인연 때문에 스스로 이런 파멸과 곤궁에 이르렀는데 저희가 어떻게 차마 명공을 버리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처음에는 다들 쥐를 잡아 죽순을 삶아서 먹었으나 나중에는 더는 먹을 게 없었다. 주부(主簿)가 내주(內廚)를 열어 쌀 서 말을 꺼내 와서 절반을 나눠 죽을 끓이고 장홍에게 조금씩 먹이려 하니 장홍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것을 나 혼자 먹으면 어찌하겠는가?”
장홍은 죽을 모두에게 나눠 먹이고 그의 애첩까지 죽여 장사(將士)들을 먹였다. 장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쳐들고 바라볼 수도 없었다. 결국 남녀 모두 7천~8천 명이 서로 베고 죽었으며 성을 떠나거나 배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당시는 애첩을 잡아 부하들에게 먹인 것이 살인죄는 고사하고 미담으로 찬사를 받을 일이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성이 함락되자 원소는 장홍을 사로잡았는데 워낙 장홍을 좋아하다보니 살려주기로 하고 사면하여 활용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장홍은 기어코 항복하지 않자 결국 죽이고 말았다.
이 때 장홍의 고향사람이자 열렬 팬인 진용(陳容)이 나서 말했다.“장군은 큰일을 일으켜 천하를 위하여 포악한 사람을 제거하려 한다면서 오히려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사람을 먼저 죽이니 어찌 하늘의 뜻에 부합하겠소? 장홍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군장(장초)을 위한 것인데 어째서 그를 죽이는 것이오?”
원소는 결국 진용도 죽이고 말았다.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탄식했다.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충성스런 선비를 둘씩이나 죽이는가?”
원소는 그릇이 작기 때문에 결국 큰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조조에게 패해 생을 마감했다.
후세 사람들은 장홍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렸을까?
중국 고사성어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능굴능신(能屈能申)’ 할 줄 알아야 한다. 뜻인즉 굽혀야 할 때는 굽히고 펴야 할 때는 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감당할 줄도 알아야 하고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拿得起, 放得下).’
아무리 의리를 중히 여기는 관우도 조조에게 잡혀 있을 때 공을 세우는 조건으로 떠나는 길을 선택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런 행위를 두고 ‘능굴능신’이라 하고 감당할 줄도 내려놓을 줄도 아는 군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장홍은 굳이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애첩까지 죽이고 그를 따르던 7~8천 명의 목숨까지 잃게 한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인가,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장홍은 의리의 사내임에는 틀림없지만 앞에 ‘바보스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바보스런 의인의 아이콘’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싶다.
BEST 뉴스
-
“이게 한국의 환영 방식인가”…이태원 식당의 ‘금뇨(禁尿)’ 표지판이 던진 질문
[동포투데이] 서울 이태원 한 식당 앞. 영어와 한국어, 중국어로 적힌 안내문이 서 있다. “길을 막지 마세요, 조용히 해주세요, 금연.” 얼핏 보면 평범한 문구지만, 중국어 문장에는 다른 언어에는 없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禁尿(소변금지)’. 그 한 단어는 마치 중국인만 따로 주의가 필요하다는 듯... -
“터무니없는 괴담, 정치 선동의 불쏘시개 될라”
글 | 허훈 최근 온라인 공간에 떠도는 ‘중국인 괴담’은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내년까지 중국인 2천만 명이 무비자로 들어온다”, “아이들이 납치돼 장기 적출을 당한다”는 식의 주장들이 버젓이 퍼지고 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임에도 수백 명이 ‘좋아요’를 누르고 수십 차례 공유하... -
백두산 현장르포① | 민족의 성산, 천지를 마주하다
[동포투데이] 2025년 9월 26일 아침, 백두산 자락은 맑은 하늘 아래 싸늘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정상에 오르는 길목에는 이른 시간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 카메라를 든 한국인 청년들, 러시아와 몽골에서 온 관광객들까지, 백두산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긴 오르막을 지... -
[기획연재②]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교육·신앙·항일의 불씨
[동포투데이] 백두산 자락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서면 용정시 명동촌이 나온다. 소박한 기와집과 푸른 담장이 맞아주는 이 마을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 시인의 생가를 넘어선다. 근대 조선 민족운동의 요람이자, 교육·종교·문화가 교차한 북간도의 심장부였다. 1906년 서전서... -
[기획연재①]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문학, 민족, 그리고 기억의 장소
[동포투데이] 2025년 9월 25일, 기자는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을 찾았다. 이곳은 애국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다. 복원된 생가는 소박하게 서 있고, 그 앞마당에는 여전히 들판에서 불어온 가을 바람이 머문다. 마을 입구의 표지석은 단순히 한 시인의 흔적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명동촌... -
백두산 현장르포② | 폭포 앞에서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
[동포투데이] 백두산 천지를 마주한 뒤, 발걸음을 옮겨 백두폭포(중국명 장백산폭포)로 향했다.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길은 가파른 절벽을 타고 떨어지며 웅장한 포효를 만들어냈다. 높이 68미터, 너비 30미터에 달하는 폭포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치 대자연의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굉음을 쏟아냈다. ...
NEWS TOP 5
실시간뉴스
-
백두산 현장르포④ | 용정의 새벽, 백두산 아래에서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
-
[기획연재③]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북간도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항일운동
-
백두산 현장르포③ | 지하삼림, 천지의 그늘 아래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세계
-
백두산 현장르포② | 폭포 앞에서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
-
[기획연재②]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교육·신앙·항일의 불씨
-
[기획연재①]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문학, 민족, 그리고 기억의 장소
-
백두산 현장르포① | 민족의 성산, 천지를 마주하다
-
“해방군인가, 약탈군인가”…1945년 소련군의 만주 진출과 동북 산업 약탈의 기록
-
“고층에 살면 수명이 짧아진다?”…연구가 밝힌 생활 속 건강 변수
-
여성 우주인, 왜 우주비행 전 피임약을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