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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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고대책본부 “기상 나빠져도 수색·구조활동 총력”
    [동포투데이 화영기자] 범정부 사고대책본부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사고 발생 11일째인 26일 잠수요원 104명을 수중에 투입해 3층과 4층 중앙부분 집중 수색에 나선다. 아울러 함정 207척, 항공기 36대를 동원해 해상 수색활동을 실시할 예정이다. 고명석 범정부 사고대책본부 대변인은 이날 오전 상황브리핑을 통해 “오후부터 기상이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나 정부는 변함없이 수색구조에 총력을 다하겠다”며 이 같이 말했다. 고 대변인은 “다이빙벨을 실은 바지선이 어제 오후 현장에 도착했으나 바지선 고정작업이 원활치 않아 다이빙벨을 이용한 수색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다이빙벨을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만큼 언제든지 수색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연일 계속되는 수중수색에 민관군 합동구조팀 2명이 잠수병 증상을 호소해 치료 및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25일 수색작업에는 어선 24척을 포함해 함정 208척, 항공기 45대가 참여하고 77명의 잠수요원이 입수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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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中 선양 조선족동포들 "세월호" 조난자 애도
    [동포투데이] <세월호> 침몰사고 조난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데 조선족동포들도 한마음으로 나섰다. 지난 4월 25일 오전, 요녕성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회장 장현환),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집행회장 표성룡), 요녕성조선족애심기금회(회장 박성관), 요 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 박해천)에서 합동으로 주심양한국총영사관을 찾아가 세월호수난자들에 대한 조선족들의 조문과 수난자 가족들에 대해 위문을 표하였다고 현지 언론 요녕조선문보가 보도했다. 새로 부임한 주심양한국총영사관 신봉섭총영사, 채진원부총영사, 최종석동포담당영사가 조선족단체장 일행을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장현환 회장은 "재중동포들이 비록 몸은 중국에 있지만, 한국에서 벌어진 이번 참사에 한결같이 비통해하고 있다"면서 "사고를 수습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데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기 위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앞다퉈 모금에 동참했다"고 말했다. 신봉섭총영사는 여러 현지 동포단체장들이 고국동포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자는 취지로 당관을 찾아준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자신은 처음으로 심양에 부임했지만 다년간 북경에서 근무하며 심양을 자주 찾아 이곳 동포들의 사정을 잘 안다며 여러 동포단체들에서 다년간 한-중 양국간의 경제교류와 문화교류 및 인문교류확대를 위해 교량역할을 충실하게 해온데 대해 높이 평가하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주심양한국총영사관 방문을 마친후 조선족단체장들은 재심양한인회사무소에 마련된 합동분양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으며 성금으로 한화 1천만원을 전달하였다. 재심양한인회관계자에 따르면 선양 한국상회가 지난 23일 설치한 현지 분향소에는 우리 교민과 유학생, 기업 관계자들 이외에도 재중동포 학생과 단체 회원들의 자발적인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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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中 수영스타 쑨양, 처벌서 전면 해탈... 훈련에 투신
    [동포투데이] 중국 관영 언론 런민(人民)망에 따르면 지난 4월 24일, 중국 절강 체육직업기술학원은 정식으로 수영선수 쑨양에 대한 “세가지 정지”처벌을 해제했다. 그날로부터 쑨양은 정식으로 훈련에 투신, 원 코치였던 주지근이 국가수영팀에서 사직하였기에 저장성 체육직업기술학원 부원장 장아동이 쑨양의 일상훈련을 책임지게 되었다. 쑨양은 제30회 런던올림픽 남자수영 중국 국가대표이며 제9회 아시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획득, 같은해 중국 스포츠스타시상식 남자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6살 연상인 항공사 승무원 여친과 열애중이던 쑨양은 훈련 불참, 코치진과의 마찰, 숙소 미복귀 등 규정위반,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저장성 체육직업기술학원으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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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함께 죽자” 임신 녀친과 동반 자살 시도
    [동포투데이] 중국 펑황(凤凰)넷에 따르면 지난 24일 오전 중국 광둥성 후이주우시 후이청구의 한 거리에서 남성이 임신 6개월 되는 여성과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하였다. 휘발유통과 작은 액화가스통을 같이 묶은 채로 승용차에서 자살시도를 하였다. 승용차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의 신고로 재빨리 화재진압에 성공하였다. 승용차는 폭발하지 않았지만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여성은 경상을, 남성은 중상을 입었다. 두 남녀는 연인관계로 남성은 리모는 36살이고 여성은 쉬모(徐某)는 21살이며 승용차 차주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정분규로 벌어진 사건으로 정확한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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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2014 세계한민족축전, 10월 15일부터 개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국민생활체육회는 전 세계 33개국에서 300명의 동포가 참가하는 2014 세계한민족축전이 10월 15일부터 10월 21일까지 서울 및 대구에서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세계한민족축전은,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고 그 성과를 확산하기 위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89년 창설한 이래 올해 24회째를 맞는 행사. 지금까지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에서 1만5,000여 명의 재외동포가 모국을 방문하였다. 그동안 세계한민족축전은, 세계 각국의 재외동포들에게 생활체육 참여 기회를 제공해 주고, 생활체육 활동 교류를 통해 한민족의 자긍심 고양과 해외 동포사회의 결속력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가자들은 10월 15일 등록 완료한 후, 16일 서울 경복궁 탐방을 시작으로 공식 일정에 들어간다. 저녁에는 정부관계자, 생활체육 임원, 체육유관단체장 등 내‧외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연(올림픽파크텔, 오후 7시) 행사를 갖는다. 동포들은 17일, 호국간성의 요람 육군3사관학교(경북 영천) 방문 후 대구로 이동한다. 18일에는 낙동강길 걷기, 세계 최첨단기업 ‘대구텍’ 견학, 섬유유통의 메카 ‘서문시장’탐방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소화하게 된다. 19일 열리는 한민족토론회에서는 동포들의 생활체육 활성화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오후에는 체육행사도 열린다. 계명대학교에서 한민족 전통무예인 태권도를 배우며, 학교시절 운동회의 기억을 되살리는 세계한민족명랑운동회가 펼쳐진다. 공식적인 행사의 마지막 날인 20일에는 팔공산 동화사 방짜유기박물관 방문, 대구 ‘근대골목’ 탐방 후 환송연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 할 예정이다. 한편, 국민생활체육회는 5월 28일부터 세계한민족축전 참가자 접수를 시작한다. 참가를 희망하는 재외동포와 동반 현지인은 6월 29일까지 국민생활체육회 웹사이트(www.wkf.or.kr)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참가비는 한화 3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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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1)
    ■ 허길성 연길시라지오방송국 방송중계소에서 근무하면서부터 나는 점차 나의 가치에 대하여 스스로 다시 평가해보기 시작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세우면서 나는 방송중계소의 설계로부터 설비구입 그리고 건물구축과 기계가설에 이르기까지 몽땅 참여해야만 했고 나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만큼 당시 이 방면으로 전공한 인재는 너무나도 적었다. 그렇게 일하면서 볼라니 내가 연변뻐스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한 인생이 아깝고도 허무하기만 했다. 이는 이내 인생의 랑비일뿐만 아니라 전반 사회적인 손실이기도 했다. 이는 결코 용접공이나 기타 공장로동자들의 직종을 무시하는것은 아니였다. 그저 비뚤어진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소유해가지고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또 자기가 하고 싶은 직종을 선택하지 못하고 용접공으로 썩은 몇년간의 인생이 억울해서였다. 한편 자신이 하고 싶고 또 잘할수 있는 직종이 차례졌다고 해서 고생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특히 고생스러운것은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잦은 출장이였고 그 다음에는 일군을 많았지만 인재는 너무나도 적어 거의 모든 시스템에 대해 모두 내가 신경써야 하는 바로 그것이였다. 그중 출장을 자주 하다 보면 외출하는 본인이 고생스러운건 물론 남아있는 가정성원들의 고생도 여간치 않았다. 당시는 아파트가 많지 못하고 많은 가정들이 단층집에서 살다 보니 필경 남정들이 할일이 따로 있었다. 례하면 석탄을 사드리고 그것을 헛간에 퍼들이고 부엌에 불을 지피고 석탄재를 파내고 … 그외 온돌을 고치고 문풍질을 하고 하는 등으로 여하튼 녀성들이 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으며 자식들이 성장중인 우리 가정을 놓고 볼 때 더욱 그랬다. 그뿐이 아니였다. 매번 나의 출장때마다 자녀 둘의 뒤바라지는 안해 혼자서 전담당했다. 그리고 출장때마다 출장비와 실제로 쓴 돈이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며 모자란 부분은로임을 발급할 때 재무과에서 잘라내다보니 로임봉투가 항상 가벼워져 안해한테 내놓기가 송구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찮아도 결혼뒤 얼마 안되여 군복을 벗기우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안해를 싫컷 고생시켰는데 명예를 회복한 뒤에도 여전히 안해를 계속 고생시키다니 나같은 사람은 진짜 가정생활에서는 빵점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했다. 한편 나는 단위의 일만은 열심히 했다. 사람이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노라면 그만큼 적극성이 커지는 모양이였다. 당년에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는 하루가 지루하고도 고달프게만 느껴지던것이 연길시라지오방송국 방송중계소에 출근하면서부터는 온몸에 새힘이 솟구치면서 늘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48시간으로 되지 않는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만큼 보람있고도 원하는 일을 하노라니 세월은 빨리도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가정도 자녀 2명이 모두 성장하면서 가정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하였으며 나 자신도 어느덧 귀밑머리가 적지 않게 희여가는 중로년이 됐다. 이렇게 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또한 단위에도 기술분야의 일군들이 많이 보강되였기에 나는 스스로 은퇴준비를 하게 되였다. …… 그러던 1995년초의 어느날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그때는 우리 단위가 이미 연길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으로 됐음) 국장으로부터 자기의 사무실로 왔다가라는 호출이 왔다. 내가 국장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상상외로 반가워하며 악수까지 청하더니 쏘파를 가르키며 앉으라고 해다. 뭔가 눈가에 웃음부터 짓는 품이 례사롭지를 아니했다. 그는 한참 본 화제와는 달리 나의 개인생활과 관련해 이것저것 묻더니 드디여 기침을 깇으며 본화제로 넘어갔다. “허서기를 오라고 한것은 다름 아니라 전번에 허서기가 퇴직신청을 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퇴직신청이 수락되지 않았습니다. 딱히 퇴직년령이 되지 않아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단위에서 허서기는 아직도 가치가 큰 일군입니다. 내놓기 아깝다 이 말입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기실 우리 국에서 올해에 유선TV부문을 새로 내오게 되는데 아마도 적합한 책임자가 없어 또 허서기가 그 부문을 책임지고 수고해야 할것 같습니다. 어떻게 젊은 기술일군들을 거느리고 몇년간만 더 일해주십시오.” 국장의 제의를 거절할수가 없었다. 이전처럼 그냥 출근하라는것도 아니고 새로운 일거리를 맡아달라는것을 거절한다는것은 어딘가 비겁한 노릇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가치가 크다는 말은 나를 인정하는것으로 들렸으며 사실 그때까지 나 역시 얼마든지 일할수 있는 년령대인것만은 분명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국장의 제의를 받아들이였다. 4 유선TV부문을 새롭게 세우는것 또한 라지오방송중계소를 세우는것처럼 출장이 잦을수밖에 없었다. 그중 그래도 제일 잦게 다닌 도시는 북경이였다. 북경은 우리 나라 수도이기도 했지만 유선TV보급이 가장 잘된 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도시들의 유선TV보급망을 종합분석해본 결과 북경시를 모델로 삼고 학습하면서그 경험을 연길시에도 적용시키기로 했다. 한편 북경출장이 있을 때마다 나는 외교부에서 관원으로 근무하던 동창생친구ㅡ 량희원이를 머리에 떠올리군 했다. 그만큼 좋은 친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한테로 더는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더는 그한테 페를 끼칠수가 없었던것이다. 하긴 내가 그한테로 이곳의 특산물같은것을 선물로 가져갈수도 있었지만 내가 그만큼 주면 그는 그 몇배로 나한테 안겨줄 그런 후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한테로 찾아가 페를 끼치는 사람이 나 한명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찾아갈수가 없었다. 그외 그가 그때까지도 외교부에서 근무하겠는가 하는것도 미지수였다. 연길시의 유선TV보급망 구축공사는 두개의 구역으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그것은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안에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유선TV방송은 유료서비스 시스템이였기에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도 추진하는것이였으며 우리는 자체의 욕심만 부릴수가 없어 주에 부분적 지역을 양도해야 했다. 그것을 협상할 초기 량측은 약간의 분규가 있은것도 사실이였다. 서로 지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량측이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각측의 실제적 경제리득과 직접 관계되는 사항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끝에 결국 연길시에서 한발 더 양보하기로했다.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은 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의 상급부문이자 모두 서로 익숙한 얼굴들이라 어느 정도 협상이 잘 풀린 모양이였다. 결국 연길시의 애단로 북측의 지역은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 맡게 되고 애단로 남측의 모든 지역을 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 맡게 되는것으로 아퀴를 지었다. 연길시에 유선TV보급망설치공사가 시작되자 계획과는 달리 진척이 늦어졌다. 하긴 당시 국에서는 두개 팀으로 조직되여 이 공사를 시작했지만 도합 20여명의 일군중에서 이 시설공사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전문일군은 한명도 없었다. 당시 내가 총지휘와 총기술감독을 맡았지만 나 역시 이 시설에 대해 계통적으로 배우지 못했으며 외지견학을 통해 좀 상식적으로 알고있을뿐이였다. 모든것은 공사를 진행하는 한편 배우고 익히고 해야 했다. 당시 우리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에서 맡은 유선TV보급망 설치범위는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연길시 애단로 이남으로 도합 5만여세대가 되는 가정주택들이 있였는데 하루에 많이 설치해야 40-50세대 정도였다. 왜냐하면 사람이 빈몸으로 층계를 오르내리는것도 아니였고 또한 어떤 가정은 집에 사람이 없어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집 건너뛰여 그 다음의 집에 설치할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파트 한개 동이면 서로 련결이 돼야 했기 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집과 집 사이 그리고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신호가 합격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신호를 확장하는 부분품을 가설해야 하기에 무작정 밀고 나가는 공사도 아니였다. 한편 상급에서는 이를 일종 거대한 문화공정으로 간주하고 틀어쥐였으며 몇년간의 시일을 정하고는 기한내에 반드시 완수하여 연길시민들의 문화생활을 보다 풍부히 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조하였다. 우리는 기한내에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휴식일이란 별로 없이 공사를 다그쳤으며 때로는 밤대거리를 할 때도 있었다. 나중에 우리는 룡정시라지오TV방송국 시공대와 화룡시라지오TV방송국 시공대의 협조에 의해 약 3년간의 악전고투끝에 1998년 연길시안의 유선TV보급망의 가설임무를 성과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때로부터 연길시민들은 바깥 안테나가 없이 집안에 앉아 수십개 채널의 국내TV프로를 시청할수 있게 되였다. 이는 연길라지오TV방송사상의 일대 변혁사로 하나의 리정비로 되기도 했다. 한편 연길시유선TV보급망의 서비스시스템이 가동되고 한동안의 시운행을 거쳐 정상화가 되자 나는 재차 단위 인사과에 퇴직신청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것이 수락되리라 믿어마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때는 이미 나의 나이도 61세라 정기퇴직년령이 다된 셈이였다. 그리고 아무리 올리 훓고 내리훓고 해도 더는 내가 책임지고 할만한 일은 있을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국장은 이전에 나의 첫 퇴직신청을 수락하지 않던 때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나는 맞아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단위 종업원가족 아파트를 짓게 되는데 한번만 더 일해달라고 설득하는것이였다. 국장 역시 자기 개인을 위한것이 아니고 전반 국의 리익을 위해 나한테 재청을 드는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마음이 약한 나는 더 이상 국장과 따지지 못하고 그저 “이번만입니다”라고 력점을 찍고 말았다. 단위의 종업원가족 아파트를 짓는 동안 나는 현장의 지휘자로 일하면서 모든 질관리도 책임졌다. 왜냐하면 종업원가족 아파트였기에 질관리를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례하면 구입해들여오는 벽돌의 질이라든가 또는 모래와 세멘트를 섞는 비례 그리고 건물에 들어가는 철근의 비례 등에 대해 철저히 감독해야 했다. 약 2년뒤 종업원가족 아파트가 완공되자 국에서 더는 나란 사람에 대한 리용가치가 없어서일가 아니면 새로운 건설항목이 없어서일가 여하튼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종업원가족 아파트건설을 마지막으로 나는 비로소 퇴직하게 됐으며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것이 바로 2000년 8월이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6
  • 한류 드라마 활용 ‘저작권 보호’ 캠페인
    [동포투데이 연예] 문화체육관광부는 26일 한국과 중국 온라인을 통해 양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한류 드라마 10편의 명장면을 모아 제작한 ‘저작권은 사랑입니다 - 著作權是愛情’ 홍보영상물을 동시에 공개한다. 이번 캠페인은 문체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유엔 산하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지정한 제14회 ‘세계지식재산권의 날’(4월 26일)을 맞아 저작권 보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마련했다 . 문체부, 한국저작권위원회, 방송 3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저작권은 사랑입니다’라는 제목의 홍보영상물은 총 4편으로 오는 4월 26일 첫 번째 편 ‘고마워요, 저작권’(80초)이 먼저 공개된다. 1편에는 KBS ‘성균관스캔들’, MBC ‘해를 품은 달’, SBS ‘별에서 온 그대’ 등 방송 3사에서 방영한 인기 드라마 10편의 하이라이트 영상과 촬영현장 영상 등을 담았다. 이어 6월 초에 공개될 나머지 3편의 홍보 영상물은 방송 3사별 대표 드라마 1편씩을 주제로 제작될 예정이다. 이 영상물은 중국어로도 번역돼 중국의 주요 온라인 사이트인 ‘바이두’, ‘투도우’, ‘요우쿠’, ‘러스왕’ 등에서도 동시에 서비스된다. 중국 최대 포털인 ‘바이두’는 동 홍보영상물을 4월 25일, 26일 이틀간 동영상 페이지(http://v.baidu.com)의 메인 동영상으로 소개한다. 이외에도 이 영상물은 북경 문화예술특구 내의 옥외 광고판에도 송출할 예정이다. 문체부는 이번 캠페인을 토대로 올 하반기에는 한중 공동 저작권 캠페인을 추진할 계획이다. 문체부는 이를 위해 오는 7월 부산에서 개최하는 ‘한중 저작권 포럼’ 기간 중에 중국 국가판권국과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번 홍보 영상은 문체부 홈페이지(www.mcst.g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연예·방송
    • 드라마
    2014-04-25
  • 박 대통령-오바마, 회담 직전 ‘세월호 참사’ 30초간 묵념
    [동포투데이]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5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갖기 직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회담장에 들어선 뒤 인사말을 통해 “오늘 우리의 만남을 사고의 희생자, 그리고 실종자와 사망자들을 기리는 그런 시간으로 먼저 시작했으면 한다”며 “이들을 위해 잠깐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오늘 나의 방문이 한국민들이 깊은 비탄에 빠져있는 시기에 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또 박 대통령님과 한국 정부가 세월호 침몰사고 대응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며 “미국민을 대표해서 이런 사고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한국의 동맹국으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나는 이런 큰 희생자와 사망자를 잃은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양국 정상을 비롯한 회담 참석자들은 30초간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한 뒤 자리에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렇게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을 제안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를 드린다”며 “사고가 난 후에 대통령께서 직접 위로의 뜻을 전해주시고, 또 구조함 파견 등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셔서 우리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고 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면서 “지난 9.11 테러 후에 미국 국민들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힘든 과정을 극복해냈듯이 한국 국민들도 이 위기를 반드시 극복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와 함께 세월호 참사를 겪은 한국민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담은 징표로서 사고 당일 미국 백악관에 게양됐던 성조기를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삼각 나무 케이스에 담긴 성조기를 보여준 뒤 “미국에는 군인이나 참전용사가 목숨을 잃었을 때 그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국 국기를 증정하는 전통이 있다”며 “제가 가져온 이 미국 국기는 세월호가 침몰한 바로 그날 백악관에 게양됐던 그 국기다. 미국의 전통과 그 정신으로 이 국기를 대통령님과 또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미국민을 대표해서 드리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국기는 우리의 깊은 애도의 뜻과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는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한국을 동맹국이자 우방으로 부르는 미국의 자긍심을 나타내는 그런 국기”라고 덧붙였다. 이에 박 대통령은 “그렇게 슬픔에 빠진 국민들, 희생자 가족들하고 슬픔을 같이해 주시고 세심하게 마음을 써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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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뉴스
    • 정치
    2014-04-25
  • 해외견문 시리즈 (5) 아프리카 인상기
    <첫부분>1992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내가 승선한 선박 “코리안스타”호는 “연탄동네”로 불리우는 아프리카7개국에 대한 항행코스를 밟게 되었다. 스켓쥴은 모로코,모리타니, 코트디바르(상아해안), 카메룬, 가봉, 나이지리아이렇게 쭉 잡혀 있었는데 남미주의 포클랜드 해상에서 싣고온 냉동 물고기들을 이런 나라들에서 하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본선이 스페인의 라스팔마스항을 출항하자 선내 방송은 다음과같은 유의사항들을 전달하였다. “선내에 알려드리겠습니다.선내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싶이 본선이 향하는 아프리카입니다. 각 부서들마다 자기의 관할구역 내의 물건들을 잘 간수하기 바랍니다. 그외 매 선원마다 해상경찰 및 세무관원들과의 충돌을 될수록 피면해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겠습니다…” 라스팔마스에서부터 아프리카 모로코까지의 항행시간은 하루밖에걸리지 않는다 했다. 선내는 삽시에 분주해졌다. 뎃기(갑판)에서는 사처에 널려있는 각종 공구들과 바줄, 심지어 도람통까지 다 창고에 챙겨 넣고는 큼직한 자물통을 잠그었으며 엔징룸(기관실)에서는 출입문 하나만 남겨 놓고는 다른 문들은 몽땅 봉해버리는 것이었다. 그외 내가 근무하는 주방은 일거리가 곱절 많았다. 당시 주방에는 쌀, 기름, 양념과 그릇 등이 가득했는데 예전에는 그 어떠 나라와 항구에 들어갔어도 시시껄렁한 그것들이 잃어질까봐 신경써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헌데 아프리카 사정만은 달랐다. 일단아프리카만 들어서면 정부관원으로부터 빈민굴의 아낙네들에 이르기까지 줄을 쳐서 선박에 오르군 했는데 그네들은 눈에 보이는 물건만 있으면 그것이 자기들한테쓸모가 있건 없건 간에 훔친다는 것이었다. 옷가지, 야채와쌀, 그릇은 물론 자기들이 쓸 줄도 모르는 숟가락, 저가락과먹지도 않는 고추가루까지 닥치는대로 훔치다기에 모든 것을 잘 보관하고 지켜야 했다. 주방장인 나와 싸롱뽀이(주방조리수)는 주방에서 임시로 쓰는 약간의 부식과 그릇만 남겨 놓고는다 창고안에 집어 넣었으며 하루 세끼 식사시간 외에는 주방과 식당에 자물통을 꽁꽁 잠그기로 했다. 이렇듯 한심한 아프리카였기에 한국선원들은 흑인들의 속과 몸뚱아리가모두 연탄처럼 검다 해서 아프리카 동네를 “연탄동네”라고 불렀다. 모로코에서의 첫 인상 본선이 모로코의 시디스얼크항에 입항하자 확실히 다른 세상이라는감이 확 들었다. 부두에서 작업하는 인부들은 일색으로 새까만 흑인들이었는데 어쩐지 그곳 하늘까지도 거멓고흐리터분해 보였다. 입항작업이 완료되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흑인들이 본선에 올랐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바람으로 “마이프랜드(나의 친구)”라고 부르면서 시가렛(담배)부터빌었다. 그들한테 담배 한가치씩 나누어 주노라니 말보로 담배 한곽이 삽시에 거덜이 났다. 그리고 담배 한가치라도 주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베리굿, 베리굿”하다가도 일단 주지 않으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흉한 상팜대기를 드러내 보이군 했다. 나는 그런 새까만인종들과 처음 상종하는지라 어쩐지 슬그머니 무서워났다. 그래서 그네들을 달래느라고 담배와 먹을 것을나누어주었지만 우르르 몰켜드는 그들의 수요를 도무지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가진 놈은 그래도 인사나마하고 가지만 못가진 놈은 그 모두가 눈알을 굴리면서 주먹까지 내흔들어 보이는것이었다. 바로 그럴 즈음통신장 이덕수씨가 다가오더니 “이 깜둥이 씨팔놈들아, 턱도 없이 지껄이지 말고 썩썩 물러가라”하고 꽥꽥소리치며 그것들을 쫓아 버리고는 나한테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었다. “주방장 김형은 잘 몰라요.저 깜둥이 놈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털끝만치도 없다구요. 불쌍하다고 아무리 줘봤자 거것들은그걸 모르는 놈들이고 아무리 떼부자라 해도 저 놈들을 구제하노라면 자신이 망해요. 알겠습니까?”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였다. 후일 볼라니 나한테서 빵이나 얻어먹은 놈들도 그 때뿐이지 이튿날이면 그 상이 장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밥이나 음식찌꺼기 같은것을 버리면 버렸지 깜둥이들한테는 주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래서 매일 세끼의 식사가 끝나면 나와 싸롱뽀이는 음식 찌꺼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바다에 처넣어 고기먹이로되게 했다. 헌데 그것도 깜둥이 놈들이 눈치챘다. 그들은곧잘 바다에 뛰어 들어 그것을 건져가군 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내가 뭔가 바다물에 던지는 걸 본 깜둥이들은몇놈이나 물에 뛰어들어 서로 헤염치면서 그걸 빼앗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누구도 그걸 챙기지못하고 산산히 흩어져 버리자 자기네끼리 싸우더니 나중에는 육지에까지 올라 치고 박고 했다. 퉁퉁 붓고얻어터지고 하면서 말이다. 참, 준다는 것에 인색한 내가나쁜 인간인지? 하지만 고까짓남이 던지는 먹을 것을 두고 싸우거나 기회를 보아 훔치는 그만한 노력이면 일거리나 찾아하면 더 나을 것이 아닌가?… 한편 입항한 그날밤, 우리는각각 택시에 나누어 앉아 시내로 향했다. “연탄동네”라고는 하나 시내는 부두와는 달리 퍼그나 깨끗했다. 야자수들이 길옆에 줄지어 늘어섰고 우리 나라 신강에서나 볼 수 있는 아랍식 건물들이 잘 조화된 정원과 함께들어섰는데 고층건물은 별반 없고 그 거개가 3층 좌우로 무척 아담져 보였다. 그리고 도로 양켠에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음식을 차려놓은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정경을 가끔씩 볼 수있었는데 시내에 들어 갈수록 아랍인종 같기도 하고 스페인 인종 같기도 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아무리흑인들이 모여사는 “연탄동네”인 아프리카라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로코,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등 부분적 나라들은 확실히 백인 인종비례가 적지 않음이 분명했다. 달리던 택시는 어느 한 차이나레스토랑(중국식당)앞에서 칙ㅡ하고 멈춰섰는데 이는 대리점의 에이젠트가 미리예약해놓은 것이었다. 들어거며 볼라니 이상한 것은 출입문에서 경비를 서는 수위가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고는 우리가 흑인이 아님을 확인하고야 출입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통신장 이덕수씨의 설명에 따르면 아프리카의많은 고급요리청들에서는 고위급 관원외의 지방인들은 언행이 난잡하기에 될수록 그들의 출입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매출을올리기는커녕 뭐 이미지가 손상 받는다나?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1920년대 상해의 어느 한 공원 문어구에 “중국사람과 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패쪽을 걸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참, 흑인들이 모여사는 제나라 땅에서 이런 식당에도 출입할 수 없다니. 이건 순전히 스스로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진작 대기하고 있던 접대원 아가씨들이 반겨맞아주는것이었다. 말이 중국인 요리청이지 주인외 요리사와 시중군, 접대원은몽땅 흑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새우튀김, 튀긴 물만두, 닭고기완자 등 음식들은 진짜 중식으로서 생각과는 달리 그 맛이 별맛이었다. 중국인 요리청에서 한끼 만포식을 하고 나온 우리는 그 곳에서멀지 않는 디스코클럽으로 향했다. 디스코클럽에서도 흑인남자들을 들여놓지 않기는 마찬가지었다. 입장권은 미화 20불, 꽤비싸다는 감이 들었고 그 입장권 외에도 경비원들은 담배나 선글라스 등을 줘야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때는 한창 한밤중이라 클럽안은 술 마시거나 춤을 춰대는 남녀들로북적됐다. 그럼에도 우리 코리아맨들이 들어서자 아가씨들이 확 몰켜 들었다. 하긴 유럽이나 북미의 선진국들에 가면 반야만인 취급을 받는 한국인들이었건만 동남아나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 등 곳에서는 꽤나 인기가 높은 한국선원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밖에 모로코도 원래는 이집트이나 리비아처럼 이슬람교를 신앙하는나라로서 술집과 창녀가 범람하는 것을 엄하게 단속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헌데 나라경제가 계속부진상태에 있는데다 많은 소녀들이 스페인이나 프랑스쪽으로 몸팔러 가는 통에 남녀사이의 성비율이 크게 파손되어 혼란을 조성하고 있기에 부득불 나라경제와무작정한 소녀출국을 제한하기 위해서도 술집과 창녀가 들어서는 것을 방관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처럼 드러내놓고 아가씨를 꼬시는 것까지는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가씨와 오입 한번 하자면 반드시 경찰한테와 아가씨들의보스한테 돈을 찔러줘야 했는데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찰과 범죄자는 한 형제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날밤 많은 선원들이 아가씨 보스한테 돈을찔러준 뒤 경찰과 아가씨 한명씩 차고서 호텔행을 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볼라니 그 모두가 안전한 몸으로 귀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일행 거의 모두가 하루밤 사이에 적으만치 200불 이상씩 썼다고 하니 무슨 놈의 오입값 그다지도 비싸단 말인가! 참좆나게 번 돈 좇나게 쓴다더니 아깝지들 않는 모양이지? 좀 참으면 될 걸 갖고서. 도적개 코가 센 나라 모로코에서 출발한 본선은 선수를 모리타니쪽으로 돌렸다. 모리타니ㅡ 본선이 그 나라 해안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저 멀리 사하라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모래바람(일명 황사)으로 하여 그 곳의 하늘은 새뽀얗고, 깨끗하던 갑판과 선교는 뽀얀 먼지로 한벌 뒤덮였다. 모리타니 노와디브항에 입항하니 역시 아프리카 땅인지라 대체상모로코와 엇비슷했지만 험한 쪽으로 말하면 다른 점도 많았다. 우선 그 나라의 부두를 놓고 말하면 위생환경이불결하기가 말이 아니어서 입항한 그 시각부터 숱한 쉬파리 떼들이 선박의 주방과 식당에 몰켜들었고 밤만 되면 쥐들이 바줄을 타고 선박으로 기여 드는것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했던 특별약으로 연기를 피워야 했고 주방과 식당 및 부식창고의곳곳에 쥐약을 놓았는데 파리를 잡을라치면 한번에 수천마리씩 잡을 지경이었으며 쥐도 매일 수십마리씩 잡아 쓰레기더미속에 던져넣을 정도였다. 특히 약을 먹은 쥐들은 제자리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지랄을 하다가 죽다보니 물독에 빠져죽은 놈으로, 냉장고 뒤 구석에서 죽은 놈으로 벼의별 것들이 다 있었는대 물독 같은 곳에서 죽은 것은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구석에서 죽은 놈은 제때에 찾지 못했기에 며칠 뒤면 그것이 썩어서 악취를 풍겼기에 그것을 찾노라고 냉장고나 테이블같은 것을 뒤집느라 진땀을 빼군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주방조리수가 식당안을 청소하다가 새된 소리를지르기에 뛰어 들어가 봤더니 글쎄 적으만치 고양이만큼 큰 쥐 한마리가 술에 취한것처럼 이리 비틀, 저리비틀 하며 다니는 것이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급기야 주방에서 삽 한자루씩 갖고는 쥐한테로 다가갔다. 헌데 내가 면바로 대갈통을 겨누고 친다는 것이 빗치자 그 놈의 쥐가 어정어정할 때와는 달리 감때 사납게 달려드는것이 한메터씩 길이 길이 높이 뛰었다. 그 이빨, 끝이뽀족하고 길이가 큰 마늘쪽 만큼이나 될 듯한 그 이빨에 물린다면 손목도 뭉청 뭉청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우리둘은 쥐를 한가운데 놓고 소리를 치며 혼전을 벌였는데 나중에 다른 선원들이 달려와서 협조해 주어서야 겨우 그 놈을 때려 잡을 수가 있었다. 또한 삽이나 쇠몽둥이 같은 무기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빈손으로는 그 누구도 그놈한테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놈을 때려잡고 나니 긴장이 확 풀리면서 식은 땀이 쫙흘렀고 온 몸이 해나른해져 일할 힘도 나지 않았다. 그외 모리타니는 철두철미한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로서술집과 창녀같은 건 보고 죽자해도 없었고 음식점 같은 것도 극상해서 음료수와 콜라같은 것을 경영할뿐이었다. 또한봉쇄정책이 어찌도 심한지 달러같은 건 일률로 에이젠트한테 가서 본국화페와 교환하고서야 외출할 수 있었는데 그 환률은 너무도 보잘 것 없어 100불을 바꾸어 봤자 두셋이서 술도 없이 한끼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일단 달러를 감춰갖고 시내로 들어가면 그 수요자가 엄청나게 많아 암달러 거래가 몹시 성행했고 그 환율은 은행보다 몇배나 더 높다고들 했다. 노와디브에 입항한 이튿날 저녁, 어디서나 외출하지 못하면 몸살이 날 것만 같아하던 통신장 이덕수씨, 냉동사한경오씨, 그리고 갑판원 양일선씨 이렇게 3명 선원이 캪틴(선장)이 그토록 주의를 주며 제지시킴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출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얼마 있지를 아니하여 냉동사와 양일선씨가 어깨가 축 처지여 귀선했는데 물어보자 마나 몸에 지녔던달러와 선원수첩 및 여권을 몽땅 빼앗겼던 것이다. 그쯤하면 그래도 괜찮았지만 글쎄 이덕수씨가 경찰에구속당했다고 하니 난리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네들의 말에 의하면 미화1000불을 벌금해야 통신장이 풀려 나올 수 있다 하는데 아프리카, 특히 모리타니 사람들한테서는시비고 일리고 일절 통하지 않았다. 그네들이 “야!” 하는일은 괜찮았으나 일단 “NO”란 말 한마디면 하느님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결국 본선에서는 억울한대로 벌금 1000불을 내고서야 통신장과 그일행이 빼앗긴 수첩과 여권을 빼내올 수가 있었다. 빼앗긴 달러는 그냥 빼앗긴채로였고 그 사건으로 하여후일 중국선원인 양일선씨는 검토서를 쓰고도 하마트면 강제귀국조치에 걸려들면 했는데 그 곳이 아프리카가 아니라 유럽이나 동남아쪽으로 중국과의 항공선이가능한 곳이였다면 낙자없이 실행될 것이 분명했다. 모리타니 사람들이 안하무인격이라는 말은 그들이 배에 올라와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표현되었다. 본선에 오른 세관 경찰들은 그 때까지도 우리 중국서 30~40연대에나 썼을까 하는 싸창을 차고노끈이 달린 보총을 메고서도 자기네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막강한바 아메리카(미국)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우쭐렁거렸다. 그러면서도 늘 크나큰 배낭같은걸 갖고 다녔는데 쌀, 음료수, 과일 같은 것이 보이면 아무런꺼리낌도 없이 집어넣군 하였다. 이에 우리가 나서서 좀 제지시킬가 하면 그들은 다짜고짜로 경찰국으로가자고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아침에 썼던 밥그릇들이 점심에 밥상을 차리자고 보니 엄청나게 모자랐다. 그날 본선에 오른외인이라고는 세관원 한명뿐이었는데 그래 그 자식외 또 누구를 의심하겠는가 나는 누구도 몰래 그 자식이 보꾸레미를 둔 방에 가서 그 것을 헤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그 안에는 잃어진 그릇들이 그래로 있었다. 하지만나는 그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어 통신장한테 그 사실을 반영했다. 그러자 통신장 이덕수씨는 즉시선장방에 있는 그 자식을 불러내서는 따지고 들었다. 헌데 뻔뻔스럽기를 글쎄 실물이 드러났음에도 자식은한사코 부정하면서 다른 한국선박에서 선물받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 아침에 올 때만 해도 빈꾸레미던것이그 안에 꼴똑 들어찬 쌀, 식용유, 과일과 그릇 모두가 본선의 물건임에 번연함에도 우기다니도적개 코가 세다는 말이 조금도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나중에는 그놈이 도리여 우리를 훈계하면서 또 경찰국으로가자는데야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다. 쌀과 식용유 같은 건 아껴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밥그릇이 모자라면진짜 야단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연변의 농촌들처럼 큰 대야같은 그릇에 밥을 떠준다면이내 주방장 얼굴이 열개라도 그 까다로운 한국선원들한테서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는도무지 그런 밥그릇을 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별 수 없이 우리가 굽어들어 돈 100불을 주면서 그 자식한테 사과해서야 그 그릇들을 도로 찾을 수가 있었다. 한편 항구측에서는 모든 하역작업이 완료됐음에도 불구하고 질질시간을 끌면서 출할수속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 위생보완을 해준다면서 방역일군들이 와서분무기로 파리약을 몇번 쳐주고는 밥 얻어먹고 돈을 받아 갔으며 갑판의 난간이 조금만 파손돼도 자기네 나라에 들어온 선박은 자기네가 책임져 준다면서대충 용접해주고는 또 돈을 챙겨갔다. 또한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이 적기에 그들은 그 어떤 선박이든오래동안 붙잡고 있어야 그만큼 세금액도 올리고 다른 풋돈 벌이도 할 수 있겠으니 말이었다. 그러자 본선은그들이 출항수속을 해주건 말건 무작정 부두에서 배를 떼고는 외항에다 앵카(닻)을 내리우고 출항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외항에 나와 이틀이 지나자 과연 더는 부두세를 받을수 없게 된 항구측에서는그제야 출항수속을 하러 오라는 텔렉스(전보)를보내왔다. 헌데 방정맞게도 날씨가 그닥 좋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모든 것이 시간을 재촉하는지라 선장은 단정뽀트를 타고서라도 기어코 뭍으로 가자고 했다. 그날 뭍으로 떠난 이는 선장, 통신장, 2항사, 2기사이렇게 4명이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점점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치면서 오후가 늦도록 그들이 돌아오지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것은 본선에 남아있는 기관장과 1항사였다. 본선은 앵카를 올리고 선장일행이 앉은 단정뽀트를 찾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동안 바다를 헤매고 다녀서야 본선은 한바다에서 부평초처럼 표류하고 있는 단정뽀트를 겨우 발견할 수가 있었다. 단정뽀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없는 원인은 파도가 치면서 단정뽀트의 기관계통에 물이 차서 더는 엔징을 돌릴 수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체의 동력을 잃은 단정뽀트는 큰 배를 향해 앞으로전진할 수도, 뒤로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큰 배가 단정뽀트한테 정확히 접근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길이 160메터나 되는 육중한 본선이 그 작디작은 단정뽀트한테로 면바로 갖다 대인다는 것이 그토록 쉽지 않았다. 또한 간혹 엇비슷하게 접근했다가도큰 배가 헤가르는 물결에 단정뽀트는 또 다시 200~300미터씩 밀려가기가 일쑤였다. 급해난 1항사는연속 당지 해상경비대에 무전과 텔렐스를 날리면서 구원을 청했고 선원들마다 쉴새 없이 SOS구조용폭죽을하늘로 쏘아올렸지만 모리타니라는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인지 구조조치는커녕 아무런 답복조차도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새까맣게흐린데다 비까지 내리어 100미터밖도 분간하기 힘든 해상에서 선원들은 브릿치(조타실)에서 내비추는 탐조등 불빛을 빌어 바다를 주시하면서 단정뽀트의행방을 찾아내군 했다. 허나 그것도 잠간뿐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가끔씩 나타나군 하던 단정뽀트는 끝내우리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선장일행이 모두 나이프쟈크(구명조끼)를 입었기에 생명위험까지야 일으랴만은 그래도 우리는 가슴이 죄여들며 몹시 불안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배는완전히 외항에서 벗어나 한바다에 들어서서 정신없이 표류했다. 바로 이럴즈음 통신실에는 다음과 같은 무선신호가날아왔다. “여기는 러시아 선박 ‘×××’호이다. 여기는 러시아 선박 ‘×××’호이다. 귀선의 캪틴(선장)일행 4명이 본선뽀트에의해 구조되어 본선에 올랐다. 속히 귀선위치를 알려주기 바란다. 속히귀선위치를 알려주기 바란다.” 러시아 선박이 어쩌다가 그들을 발견했을까? 진짜 하늘이 도운 모양이었다. 우리가 본선 위치를 알려준 뒤 약반시간쯤 지나자 아니나 다를가 러시아 국적의 트롤선 한척이 다가오더니 세번 고동을 울리는 것이었다. 이에본선도 세번 고동을 울리여 화답해 주었다… 선장일행은 구원되었다. 다른 나라의 해상같으면 일단 SOS구조신호만 오르면 부두에서 멀지 않은 외항이라 진작 헬리꼽터나 구조선 같은 것이 들이닥칠 것이었으나 아프이카만은특히했는바 남한테 구걸하고 빼앗고 훔치는데는 신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남한테 뭔가 좀 주고 손길을 뻗쳐 자선을 베푸는데는 그렇게도 인색했다. 그것이 곧바로 아프리카였다. 코트디바르에서의 이모저모 아프리카를 놓고 말하면 누구나 다 대체로 흑인들이 많이 모여사는동네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그중 모로코와 모리타니, 남아공화국 등 나라의 흑인들은 장시기 동안 다른 인종과 혼혈배종이 되다 보니 잡종으로서, 얼굴이 그닥 검지 않고 머리가 길게 자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다면 진짜오리지날(토종)흑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는 그래도 코트디바르, 가봉, 나이지리아, 콩고, 가봉, 카메룬 등 나라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적도 부근의 나라들에 가보니 그 곳 흑인들은 확실히 새까맣다 못해 해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가죽구두를방불케 했고 머리가 좀처럼 자라지 않아 꼬실꼬실한 것을 보면 진짜 아이들은 남녀를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또한듣는 바에 따르면 그 동네에서는 검을수록 미인선발이나 좋은 직업에 뽑히울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본선이 코트디바르 수도 아비쟝항에 입항한 것은 그해의 7월 중순쯤이라고 기억된다. 적도 가까이에 있는 나라인데다 가뜩이나여름철이 되다 보니 찌는듯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며 낮기온이 자주 40도 이상으로 올랐다. 또한 자연온도도 높지만 그 열기에 선박의 갑판이 달아올라 그 위에서 작업하기란 그야말로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었다. 뭐, 한국선원들의 우스개 말을 빈다면 그 곳 사람들은 더위에 타서피부가 그토록 새까맣게 됐다나? 아비쟝에는 기이한 현상도 많았다. 시내안의 길가는 물론 부두에까지 도마뱀(우리 이 곳의 도마뱀과는조금씩 달랐음)들이 욱실거렸는데 심지어 바줄을 타고 선박으로 오르는 도마뱀들도 있었다. 그 곳 사람들은 그 도마뱀들을 근본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것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을해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부두로 몰켜드는 까닭은 선박들에서 하역할 때 떨어지는 물고기 부스레기같은 것을 주어먹기 위해서라 했다. 한편 신경써야 할 것은 1년치고춘하추동이란 계절변화가 거의 없이 찌는듯한 더위가 계속되는 고장이었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열병이라고 하는 말라리아란 병이 몹시 성행했다. 그 병에 걸리는 환자수가 많은데다 예방 및 치료조치가 따라가지 못한데서 10일안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기수부지였다. 우리 나라의 동북과 서북지구에서 성행하는 류행성 출혈열이란 병이사망율이 높은 것처럼 말이다. 하기에 본선에서는 아프리카행을 시작해서부터 매일 점심시간마다 말라리아예방약을 선원들한테 공급했다. 헌데 그 예방약이라는 것도 효과가 없었던지 아비쟝에 도착하자끝내 2기사 서춘철씨, 2항사 정명복 그리고 용정서 간 기관원김영림군 이 3명 선원이 덜컥 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증상으로 놓고 말하면 장질부사나 학질로 앓는 환자처럼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우나 이불 두채씩 뒤집어쓰고도 덜덜 잇빨을 맞쪼으면서 춥다고 하는 것이특징이었다. 그외 죽물도 넘기기 힘겨울 정도로 목안의 편도선이 부어 환자의생명은 포도당 점적주사로 겨우 지탱하군 했다. 그래도 대리점에서 각종 경로를 통해 그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고는좋다는 약을 아낌없이 들이대여 치료했기에 그들 모두가 며칠 뒤에 몸이 완쾌되어 귀선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 전반 아프리카가 거의 다 그러하듯이 특히 아비쟝은동남아의 태국이나 필리핀, 남미주의 컬럼비아, 브라질,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와 더부러 색정업에는 아주 이름난 동네였다. 여기서주목을 끄는 것은 발달한 유럽나라들과 미국, 일본 등 지역보다도 제3세계나라들에 기생들이 더 많다는 그 점이며 그 발달국에 있는 기생들도 그 거개가 제3세계에서 왔다는 그점이다. 대체 웬일인지? 아비쟝에 입항한 그날 저녁, 우리는 거의 습관화된 것처럼 한국선원들과 어울려 “입항신고(아가씨들과 오입하는 걸 말함)”하고 시내로 향했다. 가닿은 곳은 가라오케 비슷하게 차린 술집이었다. 우리가 택시에서내리자 마치도 정글(열대수림)속의 성성이들을 방불케 하는깜둥이 아가씨들이 줄쳐 나와서는 “무쵸아밍고(스페인어-가장가까운 친구)” 라고 하며 서로 빼앗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어깨에 매달렸다. 또한 “오빠, 내가 이뻐?”, “아저씨, 나 술 좀 사줘” 하고 지껄이는 년들도 있었는데 그런년들이 한국남자들을 얼마나 품어봤겠는가 하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하지만 뭐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가알린다더냐, 억수로 굶은 선원들은 그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술집안에 들어서자 아가씨를 옆에 끼고 술을 마시는 선원, 가라오케 오디오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선원들로 무드(분위기)는 제법 짙어갔다. 그야말로 바다에서 지치고 짜증난 스트레스를 풀길없던 마도로스 ㅡ “배놈”들한테는 이 순간들이야말로 천국생활이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헌데 그넓디 넓은 홀안을 아무리 휘둘러봐도 흑인남자와 코가 큰 서양사내는 한명도 없고 일색으로 동양계의 한국선원외 필리핀선원들뿐이었다. 이상한 것은 서양사내들 거개가 흑인들에 대해 거들어보지도 않는데 반대로 우리 동양인은 흔히 흑인남자들과는 떵떵큰 소리치다가도 왜 계집에 한해서만은 양년이고 깜둥이년이고 가르지 않고 깔아 뭉개는지? 하기에 동남아나남미, 심지어 이 “연탄동네”의 계집년들마저 기분좋을 때면 “아저씨,오빠” 하다가도 일단 기분만 잡치면 “이 씨팔놈아, 하나 빨아라”하는 등의 한국말을 청산유수처럼하는 것 역시 결코 이상하다고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주흥이 도도해지자 선원들 거개가 그 술집 뒷울안에 있는 창녀촌으로 향했는데 저마다 아가씨 2~3명씩 끼고 나갔다.참 그 화염같은 욕구를 분출한다 해도 아가씨 한명이면 족하겠는데 왜 저러지? 돈깨나 있다는걸 시사하는걸까?! 나는 창녀촌이라고 하니 중국의 여느 시골처럼 농촌마을인 걸로알았는데 그것과는 달리 그 곳의 창녀촌이란 7~8층쯤 되는 빌딩같은 건물이었다. 실내구조를 보면 방마다 침실, 주방과 화장실까지 곁딸렸는데 이로보아 건물주인이 그것을 창녀들한테 세주어서는 그녀들이 거기서 손님도 맞고 살림도 하게 하는 모양, 그것을아가씨들의 방마다 쌓여 있는 한국산 라면 “안성탕면”이 그걸 충분히 말해줬다. 한국선박이 들이 닥쳤다는 소문이 어느새 흘렀는지 그 이튿날저녁부터는 선원들이 미처 샤와를 마치고 외출을 하기도 전에 숱한 창녀들이 본선으로 몰켜들었다. 그래야돈나무인 한국선원들을 중도에서 채낼 수 있으니 말이었다. 항구규칙을 놓고 말하면 아비쟝항 역시 자유항이아니기에 외출하는 선원들은 쏘페스(임시통행증)가 있어야 했고다른 인원 역시 특별출입증에 의해서만이 그 출입이 가능했기에 창녀들의 출입은 근본 불허라 했다. 허나시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기 마련이라 창녀들은 방법도 많았다. 아니 그 방법이란 정문의 수위경찰한테 돈만찔러주면 그저 무사통과였다. 그러니 이런 나라일수록 경찰과 도적은 한형제라는 말이 더 적절했다. 헌데 그날 밤에 사달이 생겼다. 글쎄 깜둥이년 5~6명씩이나 자기 방에 불러 들인 뒤 권커니 작커니하며 술을 굽내던 갑판장 김복야씨가 끝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대에서 코를 골자 계집년들은 이 때라 하고 김복야씨의 호주머니에서 열쇠구레미를꺼내서는 옷장이고 서랍이고 침대밑이고 몽땅 뒤번져 놓았다. 그 뒤 돈,담배와 술이며 지어는 옷과 휴지와 비누까지 몽땅 털어간데서 김복야씨는 하루 밤새에 알거지로 되고 말았다. 그외 그 곳의 창녀들 거개가 자작한 만능열쇠를 갖고 있었는바 그것을 이용해서 선원들이 자는 침실로 침범하기가일쑤였다. 그 절차를 보면 우선 만능열쇠로 문을 연 뒤 가만히 기여 들어서는 잠자는 선원들의 몸을 감빨거나 쓰다듬으며 성적충동을 일으키게한다. 그러다 선원이 깨여나서 이에 응하면 몸을 팔고 깨여나지 못할 경우 즉 김복야씨처럼 술취해 일어나지못할 때엔 소탕전을 벌려 돈이고 벽에 걸린 옷이고 박치는대로 걷어 가기가 일쑤였는데 나도 그렇게 당한 적이 몇번 잘되었다. 참, 웬 거동에 침대머리맡의 전등을 켜고 보면 성성이처럼 시커먼물건짝이 흰눈자위와 흰잇빨을 드러내 보이며 헤헤 하고 웃으며 다가드는 것이 어찌도 놀랍고도 무서워나던지… 후진국의 낮은 인간자질, 같은신분의 창녀들이었지만 동남아나 남미의 창녀들은 그 정도로까지는 음특하고 속이 검으며 절라라 하지도 않았다.1991년 6월, 본선이 태국의 방콕에 입항했을때였다. 그 때 역시 수십명에 달하는 창녀들이 본선에 올랐는데 2기사서춘철씨의 파트너였던 그 아가씨의 거동은 진짜 사람을 감동시킬만도 했다. 원체 술마시기를 즐기는 서춘철씨인지라오래간만에 이성을 만나 흥분했던지 술을 과음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가씨가 샤와하는 사이에 침대에서 그만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선창이 희붐히 밝아오고… 하느님 맙소사 그때까지 그 아가씨가 소파에 앉아 턱을 고이고 그가 깨여나기를 기다리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말을 빈다면 창녀도 인간이고 양심도 있는바 믿음직한 신용과 최선의 봉사로 손님한테즐거움을 주고 그 중에서 자기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하다면 그런 기대가 아프리카같은 곳에서는 실현될 수나 있을까? 아니 아프리카뿐 아니라 우리 중국 역시 여자를 내세우고 사기협잡, 살인강탈을일삼는 현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외 한국신문들을 보노라면 ×××씨 중국교포 여인이 한국사내와위장결혼을 한 뒤 한국국적을 얻고는 도망을 쳤고 ×××씨 중국교포 여인은 일본손님과 한침대에 올랐는데 손님이 잠든 사이에 돈을 털다가 잡혔다는등 기사들이 늘 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의 정신세계를 부식시키는 매음업도 질책받을바지만 여인들의인간성, 즉 우리 조선족 여인들의 자질과 수양같은 것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태국의 아가씨들은 선박에 오르자부터 비자루로 바닥을 쓸고 물걸레로 닦고 하였으며 선원들의빨래에까지 신경써 주면서 몸팔기 먼저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그 때 내가 일하는 주방에도 아가씨 2명이 전문 일손을 거들어 주었는데 비록 살길을 찾아 몸을 파는 비천한 아가씨들이었지만 그로해서 나는 더욱 그녀들을짓밟을 수 없었으며 그녀들이 나를 꼬시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그녀들한테 용돈이나 비누, 휴지 같은 것을주고 싶었다. 하다면 이런 아가씨들의 거동을 어떻게 평가해 줘야 할는지? 하지만 아프리카라는 깜둥이 동네에서는 그럴만한 기대를 한다는건 그야말로 처녀불알을 찾는격이었다. 글쎄 갑판장 김복야씨의 방을 턴 년들이 그 이튿날에도 뻔뻔스럽게본선에 올랐는가 하면 전날 밤의 일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뚝 떼며 아닌 보살을 할 수가 있었으니 이가 글쎄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아프리카 “연탄동네”의 정조관념에 대하여 의문되는점이 많았다. 짐승도 암컷 하나를 두고 수컷들이 서로 싸운다고들 하는데 반대로 그 놈의 동네에서는 거의모두가 자기 와이프한테 매음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때 본선에는 “넘버쓰리”라는 제3기관조리수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술집에서 여자 한명을 사귀게 되였는데그러던 그가 그녀가 하도 졸라대는 통에 술과 안주를 사들고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 것은 그 다음의 일, 헌데정작 그 년의 집문턱을 넘어서니 웬걸 그년은 아가씨기는커녕 진작 아이 셋씩이나 있는 한물 간 갈보였으며 거기에 곰같이 생긴 남편까지 있는 년이었다. 이에 너무도 놀라 넘버쓰리 박씨가 뛰는 심장을 붙안고 급기야 36계를놓으려 하자 글쎄 남편이란 녀석이 막아서며 무릎을 꿇더라는 것이었다. 내일 당장 쫍쫍(먹을것)할 것이 없으니 제발 자기 와이프와 하룻밤만 자달라고 말이었다. 그렇듯 무시무시한 분위기속에서 웬간한 사내들 같으면 다 혼비백산해서 아무런 일도 성사할 수 없으련만 그래도그 넘버쓰리 박씨만은 그 일에 미립이 튼지라 그래도 그 갈보년과 함께 침대에 올랐던 것이다. 그 뒤몇차례의 폭풍이 지나갈듯한 힘찬 섹스공세를 마치고 새벽녁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문득 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은채로 눈을 떠보니 아이구 맙소사, 글쎄 그 남편이란녀석이 우는 아이를 달래며 역시 벌거벗은채로 넘버쓰리한테 감겨들어서 자고 있는 와이프를 깨우는 것이 아니겠는가.참, 어처구니가 없기로 삶은 소대가리마저 웃을 지경이었다. 다음, 또 하나의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라면 아비쟝이라는 그 “연탄동네”에도 필리핀클럽이라는 술집 겸 디스코바로 쓰이는 장소가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새까만 인종들과만 상대하여 오던 본선의 오입쟁이들의 두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한 것은 두말이면잔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가 그 필리핀클럽에 들어서니 과연 동양계 아가씨들이 10여명이 바걸(녀접대원)로일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필리핀 국적을 갖고 있는 중국인 아가씨도 한명 있었는데 흰만두처럼 새하얀살결에 인물 또한 핥아주고 싶을 정도로 절색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몸값은 필리핀 아가씨들에 비해 배이상으로될 것이 뻔했고 돈깨나 있다는 한국선원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몸을 가로탔다가 떨어지군 했다. 그 순서를배열하니 냉동사가 1호였고 그 뒤로 3항사와 2타수였으며 선장은 여섯번째로 됐다. 그네들의 말에 따르면 이는 모두“구멍동서”에 속했는바 선장 앞서 냉동사가 제일 맏형이 돼서 술 한잔 사는 놀음까지 벌렸다. 헌데 그녀와성관계를 가졌던 선원 10여명이 아비쟝항을 떠나 얼마 안되어 남근의 파이프가 질질 새며 임질에 걸려사타구니를 붙안고 시달릴줄이야. 아프리카에 들어가기 전부터 본선에서는 성병을 조심하라고 강조했고 또한매 항구마다에 입항해서부터는 선원들의 건강을 책임진 3항사가 외출시마다 선원들한테 “자 여러분, 장화요 장화” 하며 콤돔 한곽(24개) 씩 나누어 줬건만 선장과 3항사부터 성병에 걸렸으니 문제가 좀 심각하지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놈”은 상놈이라는걸까?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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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5
  • 中, 살인범 법 무서워 고층건물서 자살 시도
    [동포투데이] 텅쉰넷에 따르면 지난 18일 새벽 0시 20분 경, 중국 상하이시 왠썽구 공안분국 110 구조센터에서는 한통의 신고전화를 접수했다.왠썽구 우이싱로 부근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경찰들은 신속히 사건현장으로 출동해 사건수사에 나섰고 조사를 거쳐 호남적 남자 우무충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음을 밝혀냈다. 4월 23일 오후, 경찰들은 우무충이 석룡장 10자로 부근의 아파트에 돌아왔다는 정보를 입수, 경력을 동원해 아빠트를 포위했다. 도주할 길이 없음을 직감한 우무충은 층집에서 뛰어 내려 자살하려 했지만 경찰들과 소방대원들이 미리 깔아둔 에어매트에 떨어지면서 결국 경찰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우무충의 살인동기는 현재 조사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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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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