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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황후와 오타아 줄리아
    韓流의 성공 한국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스포츠계에 김연아의 한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 이영애의 “대장금”이 아시아와 중동지역을 석권하였고 “소녀시대”등 한국의 걸 그룹이 아시아를 휩쓸고 유럽과 미국에 진출하고 있다. 최근 한국 여인들이 만들어 내는 한류의 성공을 보면서 과거 한반도 출신으로서 기구한 운명을 맞아 중국에서 황후로 일본에서 순교자로 생을 살면서 역사의 뒤안 길에 숨어 있는 두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700년 전 당시 세계의 으뜸제국인 元의 황후가 되었던 奇小姐의 조국 사랑은 대제국 元에 고려의 문화를 전달하여 오늘 날의 한류의 원조가 되고 있다. 1225년 몽고사신 저고여가 피살되는 사건을 이유로 몽고는 오고타이가 이끄는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한다. 이후 1231년 살리타의 침략 등 28년간 7차례 항쟁 끝에 1259년 고려는 몽고가 세운 元의 속국이 되어 元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 元에 부족한 여인을 공물로 바치고 貢女제도가 있었다. 행주 대첩과 행주 奇씨 서울 근교의 고양시에 한강을 굽어 보고 있는 행주산성이 있다. 임진왜란 다음해 1593년 2월 서울 탈환을 위해 권율장군이 이끄는 3천명의 소수정예가 조선 침공 총사령관 우키다(宇喜多秀家)가 이끄는 3만의 일본군을 무찌른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행주의 여인들이 치마 폭에 돌을 싸서 투석전을 도운 것으로 돌을 싼 치마를 행주치마로 불러 주부들의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 행주는 奇씨들의 집성촌이었다. 奇씨는 중국의 殷(商)나라의 왕족으로 점령군 周의 통치를 거부하고 조선에 망명한 箕子의 후손으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의 48대손인 馬韓의 元王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백제 사람이 된 우성이 행주에서 奇씨를 창성하였고 나머지 두 아들은 각각 신라에 이주 청주 韓씨로, 고구려에 벼슬하여 태원(충청도) 鮮于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奇-韓-鮮于 3씨는 한집안으로 결혼도 잘 안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퇴계 李滉선생의 문하생이면서 성리학의 이론을 가지고 스승 퇴계선생과 四端七情 논쟁을 한 고봉 奇大升같은 유학자도 행주 출신이다. 그 보다 수백년 앞서 고려 말 幸州의 세도가 奇子傲의 딸로써 공녀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 간 奇小姐가 오늘 날 한류의 원조인 “高麗樣”의 바람을 일으켰다. 황후가 된 고려처녀 奇소저가 간 곳은 元의 大都. 지금의 北京이다. 그녀는 미모에다 총명하여 고려 출신의 환관의 도움으로 황제의 차 시중을 드는 궁인이 되었다. 당시 원에는 고려의 공녀뿐만이 아니라 고려의 지식인이 환관이 되어 유학지식이 부족한 몽고의 관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원을 세운 쿠빌라이는 고려의 남자는 학문에 깊고 여인들은 미인에다 총명하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원의 황제(순제)는 고려에서 온 奇소저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황제 자신은 11세 때 황실간의 세력다툼에 희생이 되어 멀리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되어 1년 6개월을 고려에서 지낸 추억으로 고려 여인에 대한 특이한 향수가 있었다. 서해 5도의 하나인 황해도 앞바다의 대청도에는 지금도 원의 순제가 어린 시절 보냈던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제는 태자를 분만한 奇소저를 황후가 되도록 하였다. 몽고의 전통은 외국인이 황후가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奇소저는 황실의 여러 가문의 세력 다툼을 교묘히 이용하여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30여년간 우매한 순제를 제치고 원의 황실은 실세가 되었다. 한류의 원조 고려양 기황후가 우리 민족을 위해 해낸 것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은 황후로서 중신들이 고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省)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막아 냈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정 국가를 지도상에서 없애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오히려 원의 중신들을 회유하고 元의 황실에 고려의 아름다운 풍습을 전파시켰다. 고려는 세련되고 선진적인 문화의 나라임을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元에 유행한 고려의 유행을 高麗樣이라고 하였다. 奇황후는 元의 중흥을 위해 무능한 황제를 퇴위시키고 황태자를 통하여 개혁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황제의 비협조로 타이밍을 놓친다. 결국 元의 황실은 홍건군에서 시작한 明에 의해 大都를 빼앗기고 八達嶺을 넘어 몽고고원으로 쫓겨 가야 했다. 실의에 빠진 奇황후는 고려의 아름다운 靑山을 그리면서 삭막한 몽고초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살으리랐다. 살으리랐다. 靑山에 살으리랐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靑山에 살으리랐다”라는 청산별곡은 그 무렵 高麗樣을 가져다 준 奇황후가 즐겨 불렀던 고향의 노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줄리아 일본에는 “오타아 줄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일본인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여 聖人이 되었고 그의 유해는 서울 마포구 절두산 성지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1593년 1월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小西行長)가 조선을 지원하러 파병된 李如松의 明軍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면서 평양인근에서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를 발견하였다. 그 고아가 줄리아로 3세 때였다. 고니시는 평양을 빼앗기고 서울로 후퇴 권율장군의 조선군과 행주산성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 보다 1년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의 침공을 명령했다. 일본군 20만명이 부산에 상륙한 때는 1592년 4월 12일로 조선 건국 200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 침공의 직접 목적은 엉뚱하게도 그가 애지중지하던 아들 鶴松이 조선의 使臣과 함께 온 이름 모를 조선 귀신에 씌여 죽었다고 믿고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두사람이 선봉장이 되었다. 가토는 불교신자였지만 고니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동양 최초의 이상한 “십자군” 유럽에서는 16세기 초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16세기 중반에는 적극적 해외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예수회가 창설된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짜비에르가 인도 고아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다. 일본의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효과가 있었는지 16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천주교(切支丹) 신도가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천주교 다이묘(大名) 영주들이 늘어나고 그 중에서 고니시 家門도 포함되었다. “아우그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고니시의 조선 침공 제1군은 주로 천주교 신도들로 이루어졌으며 붉은 비단장막에 흰 십자가가 그의 군기였다고 한다. 동양 최초의 “십자군”이었지만 무고한 조선을 침공 인민을 살육하는 그들의 행동은 전혀 그리스도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고니시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종군사제를 요청, “세세페데스”신부가 종군하였다. 고니시의 “십자군”은 부산상륙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고 개전 2개월 만인 6월 13일 평양성도 수중에 넣었으나 이듬해 李如松軍에 패퇴한 것이다. 줄리아는 고니시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져 고니시의 수양딸로 성장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부모를 잃고 일본군에 사로잡혀 일본에 보내지거나 제3국에 노예로 팔려 나간 조선인이 3-4만명이 넘는다. 이태리 화란 등 유럽의 무역상인들이 많았던 지방에서는 일본에서 팔려 간 조선인 노예의 후손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토요토미의 죽음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의 7년전쟁은 끝났다. 순천에 왜성을 쌓고 명령을 기다리던 고니시군은 토요토미가 죽었다는 통보와 함께 귀국명령을 받고 귀환 도중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과 중국 수군제 독진린(陈之粦)장군의 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일본에 돌아간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승리였지만 이순신장군이 순직한 해전이다. 聖人이 된 전쟁고아 일본에 돌아 온 고니시를 기다리는 것은 7년 전쟁중에 세력을 키운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하는 東軍과 토요토미 사후 그를 대리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西軍과 내전이었다. 서군편인 고니시는 1600년 “세끼가하라”전투에서 東軍에 패배하였다. 고니시는 이시다와 함께 형장의 이슬이 된다. 양부모를 잃은 소녀 줄리아는 미모와 총명함으로 도꾸가와의 시녀가 되나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절조있는 생활은 도꾸가와를 분노케 하여 오시마(大島)로 유배된다. 불교 신자인 도꾸가와는 천주교의 금교령을 내리고 천주교신자를 고문으로 개종케 하였다. 도꾸가와 막부에서는 당시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잔인한 “후미에(踏繪)” 방법을 고안했다. 성모 마리아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펴 놓고 신도들이 진흙 발로 얼굴을 밟고 지나가게 한다. 자연스럽게 밟고 지나가면 통과되나 초상화를 밟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멈칫하면 곧바로 체포 모진 고문을 하고 처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천주교 박해 속에 줄리아는 오시마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니지마(新島) 그리고 고쓰시마(神津島)로 유배된다. 유배되는 곳마다 지방관리와 현지인에게 천주교를 전도하여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줄리아는 평생 독신으로 독실한 신앙을 쌓아 그가 죽은 수백년이 된 지금에도 오시마 및 고쓰시마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 받고 있다. 400여년전 천주교에 귀의한 조선의 전쟁고아의 종교 한류가 일본 현지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글_ 유주열(전 주중대한민국 대사) 이 글의 저작권은 제휴사 <좋은아침>에 있습니다 ,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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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中, 청다오세계원예박람회 정식 개막
    2014 청다오세계원예박람회가 4월 25일 정식으로 개막했다. 미국, 영국, 한국, 브라질 등 35개 나라에서 이번 박람회에 참가했다. 태국, 뉴질랜드, 스리랑카, 인도, 미얀마, 싱가폴, 파키스탄, 네팔 등 동남아시아 국가는 이번 박람회에서 각자의 역사, 건축, 인문, 경관, 음식 등 다원화 문화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그중 동남아 국가의 많은 전시관들에서는 부동한 방식으로 불교문화를 구현했다. 태국은 2천여년의 불교역사를 자랑하는 문명고국으로 이번 전시에 필요한 제작은 모두 태국 본토에서 완성했다. 사찰, 신감, 불탑, 코끼리 등은 모두 태국의 민족특색을 보여주는 경관으로 이들은 태국의 유구한 문화와 종교 전통을 보여주었고 "천불지국"의 매력을 한껏 과시했다. "금색불교의 나라"로 불려지는 미얀마는 전통적인 불교의 나라입니다. 미얀마관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장엄하고 엄숙한 불교사찰의 풍격과 방대한 불교문화를 구현했는데 관광객들은 짙은 불교이미지의 미얀마 경관원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코끼리 조각상과 정자 등 경관은 짙은 불교역사문화와 남아시아 이국경치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외에도 싱가폴관의 명쾌한 곡선 역시 현대적인 미감으로 싱가폴의 자연, 낭만, 현대, 에너지, 환경보호 등 현대적 원림의 이념을 보여주었다. 뉴질랜드관의 교목과 관목의 교차, 오색찬란한 들꽃은 뉴질랜드 대지의 "일광욕"의 특점을 충분히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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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중국 전쟁 드라마의 촬영지 운남 등충
    (사진설명: 아름다운 등충)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촬영지 8중 첫번째인 등충(騰沖)은 항일전쟁때 이 땅에서 피흘리며 싸운 원정군의 스토리를 보여주는 <나의 연대장과 나의 연대(我的團長我的團)>라는 드라마의 촬영지이다. 인기리에 방송된 이 드라마를 통해 중국 서남부의 고도가 세인들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울린 원정군(遠征軍)의 비장한 역사가 밝혀져 세인의 눈물을 자아낸다. (사진설명: 드라마 포스터) 드라마 <나의 연대장과 나의 연대>의 스토리는 노강(努江)기슭의 선달(禪達)이라고 하는 소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전쟁에서 패하여 흩어진 군사들이 선달에 모여 다시 연대를 형성하고 혈로를 뚫고 전장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일본군에 강점된 곳에서 사람을 구하고 공사를 하며 일본군의 지휘소를 습격한다. 싸움의 여가에 그들은 정을 나누고 사랑을 한다. 이 드라마의 선달이 바로 등충의 화순(和順)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사진설명: 연꽃과 고도시 화순)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연꽃밭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고도 화순에 들어선다. 이 곳에는 중국 최대의 시골 도서관과 항일전쟁 기념관을 비롯해 많은 명청(明淸)시기 건물이 옛스럽다. 날아갈듯 건듯 드린 처마를 바라보고 좁은 청석길을 걸으면 사당건물인 이씨종사(李氏宗祠)가 보인다. 이 건물이 바로 드라마에서 원정군 사단의 군 지휘소로 사용되었다. (사진설명: 화순의 항일박물관) 청색의 벽돌에 푸른 기와를 얹은 사당건물 장씨(張氏)종사는 드라마 주인공들이 머물었던 수용소이다. 이씨종사에서 작전회의를 하는 등 군사적인 이야기가 펼쳐졌다면 장씨종사에서는 보다 생활적인 장면들이 펼쳐졌다. 운남과 미얀마 항일의 의미로 이름한 전면(滇緬) 항일전쟁 기념관은 사실상 원정군이 등충공격을 위해 세웠던 군 지휘소의 터이다. 이 곳에서도 드라마의 많은 장면이 촬영되었다. (사진설명: 고요한 화순의 거리) 한낮이 되면 화순의 거리는 인적 하나 없이 고즈넉하다. 있다면 길가에서 쌀국수를 파는 가게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 뿐이다. 고요한 화순의 거리를 거닐면 드라마에서 보았던 익숙한 장소들이 적지 않다. 주인공들이 잠간 나와 식사를 하던 구멍가게와 주인공의 여친이 머무르던옛스러운 가옥 사마제(司馬第), 그리고 소박한 정원 등 드라마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사진설명: 옛스러운 등충의 거리) 풍부한 문화적 함의를 갖춘 등충에는 그밖에도 명에 신축된 공묘(孔廟)와 태극정(太極亭), 새롭게 보수한 문창각(文昌閣), 고대의 극장 등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옛날 등충은 든든한 성곽의 도시였고 주민들은 가문대대로 전해내려오는 가업을 이어오면서 충족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다가 1942년의 초여름에 일본군에 강점되어 하루밤사이에 지옥으로 떨어졌다. (사진설명: 등충의 공묘) 피와 눈물의 2개월이 흐른 뒤 원정군이 등충을 다시 빼앗기 위한 전투를 시작했다. 등충의 골목과 건물마다에서 45일간 생사박투를 거쳐 등충을 끝내 되찾았지만 그 전쟁에서 등충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때 당시 등충의 가옥과 공서, 절, 성문이 모두 무너지고 유일하게 남은 건물은 공묘뿐이었다. 등충의 국립묘지에는 바로 등충을 되찾기 위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항일사병이 묻혀 있다. (사진설명: 벚꽃의 계곡)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지면 기분전환을 위해 벚꼿의 계곡을 가보라. 등충에서 20km 떨어진 벚꽃의 계곡은 숲이 무성한 원시림이다. 푸른 숲이 하늘을 가리는 이 곳 역시 <나의 연대장과 나의 연대> 드라마의 촬영지로 선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등충은 도시 자체가 드라마 촬영지이고 그보다도 어젯날 역사의 형성지라고 할 수 있다. (사진설명: 등충의 폭포) 설명: 등충에는 <나의 연대장과 나의 연대> 드라마의 촬영지로 선택된 장소가 아주 많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옛 도시 화순과 화산공원, 벚꽃의 계곡이다. 드라마 촬영지외에 등충에서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폭포와 화산이 폭발하고나서 만들어진 기이한 바위 주상절리도 볼 수 있다. 전투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물 공묘에서는 아직도 남아 있는 탄알구멍을 볼 수도 있다. (사진설명: 등충의 화산공원) 위치: 운남(雲南, Yunnan)성 보산(保山, Baoshan)시 교통: 운남 소재지 곤명(昆明, Kunming)에서 고속철도를 이용해 등충에 이르고 등충에서 각 명소까지는 버스나 택시를 사용한다. 계절: 5,6,7,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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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사고대책본부 “기상 나빠져도 수색·구조활동 총력”
    [동포투데이 화영기자] 범정부 사고대책본부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사고 발생 11일째인 26일 잠수요원 104명을 수중에 투입해 3층과 4층 중앙부분 집중 수색에 나선다. 아울러 함정 207척, 항공기 36대를 동원해 해상 수색활동을 실시할 예정이다. 고명석 범정부 사고대책본부 대변인은 이날 오전 상황브리핑을 통해 “오후부터 기상이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나 정부는 변함없이 수색구조에 총력을 다하겠다”며 이 같이 말했다. 고 대변인은 “다이빙벨을 실은 바지선이 어제 오후 현장에 도착했으나 바지선 고정작업이 원활치 않아 다이빙벨을 이용한 수색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다이빙벨을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만큼 언제든지 수색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연일 계속되는 수중수색에 민관군 합동구조팀 2명이 잠수병 증상을 호소해 치료 및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25일 수색작업에는 어선 24척을 포함해 함정 208척, 항공기 45대가 참여하고 77명의 잠수요원이 입수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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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中 선양 조선족동포들 "세월호" 조난자 애도
    [동포투데이] <세월호> 침몰사고 조난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데 조선족동포들도 한마음으로 나섰다. 지난 4월 25일 오전, 요녕성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회장 장현환),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집행회장 표성룡), 요녕성조선족애심기금회(회장 박성관), 요 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 박해천)에서 합동으로 주심양한국총영사관을 찾아가 세월호수난자들에 대한 조선족들의 조문과 수난자 가족들에 대해 위문을 표하였다고 현지 언론 요녕조선문보가 보도했다. 새로 부임한 주심양한국총영사관 신봉섭총영사, 채진원부총영사, 최종석동포담당영사가 조선족단체장 일행을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장현환 회장은 "재중동포들이 비록 몸은 중국에 있지만, 한국에서 벌어진 이번 참사에 한결같이 비통해하고 있다"면서 "사고를 수습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데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기 위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앞다퉈 모금에 동참했다"고 말했다. 신봉섭총영사는 여러 현지 동포단체장들이 고국동포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자는 취지로 당관을 찾아준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자신은 처음으로 심양에 부임했지만 다년간 북경에서 근무하며 심양을 자주 찾아 이곳 동포들의 사정을 잘 안다며 여러 동포단체들에서 다년간 한-중 양국간의 경제교류와 문화교류 및 인문교류확대를 위해 교량역할을 충실하게 해온데 대해 높이 평가하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주심양한국총영사관 방문을 마친후 조선족단체장들은 재심양한인회사무소에 마련된 합동분양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으며 성금으로 한화 1천만원을 전달하였다. 재심양한인회관계자에 따르면 선양 한국상회가 지난 23일 설치한 현지 분향소에는 우리 교민과 유학생, 기업 관계자들 이외에도 재중동포 학생과 단체 회원들의 자발적인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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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외동포
    2014-04-26
  • 中 수영스타 쑨양, 처벌서 전면 해탈... 훈련에 투신
    [동포투데이] 중국 관영 언론 런민(人民)망에 따르면 지난 4월 24일, 중국 절강 체육직업기술학원은 정식으로 수영선수 쑨양에 대한 “세가지 정지”처벌을 해제했다. 그날로부터 쑨양은 정식으로 훈련에 투신, 원 코치였던 주지근이 국가수영팀에서 사직하였기에 저장성 체육직업기술학원 부원장 장아동이 쑨양의 일상훈련을 책임지게 되었다. 쑨양은 제30회 런던올림픽 남자수영 중국 국가대표이며 제9회 아시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획득, 같은해 중국 스포츠스타시상식 남자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6살 연상인 항공사 승무원 여친과 열애중이던 쑨양은 훈련 불참, 코치진과의 마찰, 숙소 미복귀 등 규정위반,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저장성 체육직업기술학원으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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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함께 죽자” 임신 녀친과 동반 자살 시도
    [동포투데이] 중국 펑황(凤凰)넷에 따르면 지난 24일 오전 중국 광둥성 후이주우시 후이청구의 한 거리에서 남성이 임신 6개월 되는 여성과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하였다. 휘발유통과 작은 액화가스통을 같이 묶은 채로 승용차에서 자살시도를 하였다. 승용차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의 신고로 재빨리 화재진압에 성공하였다. 승용차는 폭발하지 않았지만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여성은 경상을, 남성은 중상을 입었다. 두 남녀는 연인관계로 남성은 리모는 36살이고 여성은 쉬모(徐某)는 21살이며 승용차 차주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정분규로 벌어진 사건으로 정확한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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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2014 세계한민족축전, 10월 15일부터 개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국민생활체육회는 전 세계 33개국에서 300명의 동포가 참가하는 2014 세계한민족축전이 10월 15일부터 10월 21일까지 서울 및 대구에서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세계한민족축전은,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고 그 성과를 확산하기 위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89년 창설한 이래 올해 24회째를 맞는 행사. 지금까지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에서 1만5,000여 명의 재외동포가 모국을 방문하였다. 그동안 세계한민족축전은, 세계 각국의 재외동포들에게 생활체육 참여 기회를 제공해 주고, 생활체육 활동 교류를 통해 한민족의 자긍심 고양과 해외 동포사회의 결속력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가자들은 10월 15일 등록 완료한 후, 16일 서울 경복궁 탐방을 시작으로 공식 일정에 들어간다. 저녁에는 정부관계자, 생활체육 임원, 체육유관단체장 등 내‧외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연(올림픽파크텔, 오후 7시) 행사를 갖는다. 동포들은 17일, 호국간성의 요람 육군3사관학교(경북 영천) 방문 후 대구로 이동한다. 18일에는 낙동강길 걷기, 세계 최첨단기업 ‘대구텍’ 견학, 섬유유통의 메카 ‘서문시장’탐방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소화하게 된다. 19일 열리는 한민족토론회에서는 동포들의 생활체육 활성화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눌 예정이다. 오후에는 체육행사도 열린다. 계명대학교에서 한민족 전통무예인 태권도를 배우며, 학교시절 운동회의 기억을 되살리는 세계한민족명랑운동회가 펼쳐진다. 공식적인 행사의 마지막 날인 20일에는 팔공산 동화사 방짜유기박물관 방문, 대구 ‘근대골목’ 탐방 후 환송연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 할 예정이다. 한편, 국민생활체육회는 5월 28일부터 세계한민족축전 참가자 접수를 시작한다. 참가를 희망하는 재외동포와 동반 현지인은 6월 29일까지 국민생활체육회 웹사이트(www.wkf.or.kr)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참가비는 한화 3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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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1)
    ■ 허길성 연길시라지오방송국 방송중계소에서 근무하면서부터 나는 점차 나의 가치에 대하여 스스로 다시 평가해보기 시작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세우면서 나는 방송중계소의 설계로부터 설비구입 그리고 건물구축과 기계가설에 이르기까지 몽땅 참여해야만 했고 나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만큼 당시 이 방면으로 전공한 인재는 너무나도 적었다. 그렇게 일하면서 볼라니 내가 연변뻐스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한 인생이 아깝고도 허무하기만 했다. 이는 이내 인생의 랑비일뿐만 아니라 전반 사회적인 손실이기도 했다. 이는 결코 용접공이나 기타 공장로동자들의 직종을 무시하는것은 아니였다. 그저 비뚤어진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소유해가지고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또 자기가 하고 싶은 직종을 선택하지 못하고 용접공으로 썩은 몇년간의 인생이 억울해서였다. 한편 자신이 하고 싶고 또 잘할수 있는 직종이 차례졌다고 해서 고생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특히 고생스러운것은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잦은 출장이였고 그 다음에는 일군을 많았지만 인재는 너무나도 적어 거의 모든 시스템에 대해 모두 내가 신경써야 하는 바로 그것이였다. 그중 출장을 자주 하다 보면 외출하는 본인이 고생스러운건 물론 남아있는 가정성원들의 고생도 여간치 않았다. 당시는 아파트가 많지 못하고 많은 가정들이 단층집에서 살다 보니 필경 남정들이 할일이 따로 있었다. 례하면 석탄을 사드리고 그것을 헛간에 퍼들이고 부엌에 불을 지피고 석탄재를 파내고 … 그외 온돌을 고치고 문풍질을 하고 하는 등으로 여하튼 녀성들이 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으며 자식들이 성장중인 우리 가정을 놓고 볼 때 더욱 그랬다. 그뿐이 아니였다. 매번 나의 출장때마다 자녀 둘의 뒤바라지는 안해 혼자서 전담당했다. 그리고 출장때마다 출장비와 실제로 쓴 돈이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며 모자란 부분은로임을 발급할 때 재무과에서 잘라내다보니 로임봉투가 항상 가벼워져 안해한테 내놓기가 송구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찮아도 결혼뒤 얼마 안되여 군복을 벗기우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안해를 싫컷 고생시켰는데 명예를 회복한 뒤에도 여전히 안해를 계속 고생시키다니 나같은 사람은 진짜 가정생활에서는 빵점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했다. 한편 나는 단위의 일만은 열심히 했다. 사람이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노라면 그만큼 적극성이 커지는 모양이였다. 당년에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는 하루가 지루하고도 고달프게만 느껴지던것이 연길시라지오방송국 방송중계소에 출근하면서부터는 온몸에 새힘이 솟구치면서 늘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48시간으로 되지 않는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만큼 보람있고도 원하는 일을 하노라니 세월은 빨리도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가정도 자녀 2명이 모두 성장하면서 가정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하였으며 나 자신도 어느덧 귀밑머리가 적지 않게 희여가는 중로년이 됐다. 이렇게 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또한 단위에도 기술분야의 일군들이 많이 보강되였기에 나는 스스로 은퇴준비를 하게 되였다. …… 그러던 1995년초의 어느날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그때는 우리 단위가 이미 연길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으로 됐음) 국장으로부터 자기의 사무실로 왔다가라는 호출이 왔다. 내가 국장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상상외로 반가워하며 악수까지 청하더니 쏘파를 가르키며 앉으라고 해다. 뭔가 눈가에 웃음부터 짓는 품이 례사롭지를 아니했다. 그는 한참 본 화제와는 달리 나의 개인생활과 관련해 이것저것 묻더니 드디여 기침을 깇으며 본화제로 넘어갔다. “허서기를 오라고 한것은 다름 아니라 전번에 허서기가 퇴직신청을 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퇴직신청이 수락되지 않았습니다. 딱히 퇴직년령이 되지 않아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단위에서 허서기는 아직도 가치가 큰 일군입니다. 내놓기 아깝다 이 말입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기실 우리 국에서 올해에 유선TV부문을 새로 내오게 되는데 아마도 적합한 책임자가 없어 또 허서기가 그 부문을 책임지고 수고해야 할것 같습니다. 어떻게 젊은 기술일군들을 거느리고 몇년간만 더 일해주십시오.” 국장의 제의를 거절할수가 없었다. 이전처럼 그냥 출근하라는것도 아니고 새로운 일거리를 맡아달라는것을 거절한다는것은 어딘가 비겁한 노릇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가치가 크다는 말은 나를 인정하는것으로 들렸으며 사실 그때까지 나 역시 얼마든지 일할수 있는 년령대인것만은 분명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국장의 제의를 받아들이였다. 4 유선TV부문을 새롭게 세우는것 또한 라지오방송중계소를 세우는것처럼 출장이 잦을수밖에 없었다. 그중 그래도 제일 잦게 다닌 도시는 북경이였다. 북경은 우리 나라 수도이기도 했지만 유선TV보급이 가장 잘된 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도시들의 유선TV보급망을 종합분석해본 결과 북경시를 모델로 삼고 학습하면서그 경험을 연길시에도 적용시키기로 했다. 한편 북경출장이 있을 때마다 나는 외교부에서 관원으로 근무하던 동창생친구ㅡ 량희원이를 머리에 떠올리군 했다. 그만큼 좋은 친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한테로 더는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더는 그한테 페를 끼칠수가 없었던것이다. 하긴 내가 그한테로 이곳의 특산물같은것을 선물로 가져갈수도 있었지만 내가 그만큼 주면 그는 그 몇배로 나한테 안겨줄 그런 후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한테로 찾아가 페를 끼치는 사람이 나 한명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찾아갈수가 없었다. 그외 그가 그때까지도 외교부에서 근무하겠는가 하는것도 미지수였다. 연길시의 유선TV보급망 구축공사는 두개의 구역으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그것은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안에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유선TV방송은 유료서비스 시스템이였기에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도 추진하는것이였으며 우리는 자체의 욕심만 부릴수가 없어 주에 부분적 지역을 양도해야 했다. 그것을 협상할 초기 량측은 약간의 분규가 있은것도 사실이였다. 서로 지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량측이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각측의 실제적 경제리득과 직접 관계되는 사항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끝에 결국 연길시에서 한발 더 양보하기로했다.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은 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의 상급부문이자 모두 서로 익숙한 얼굴들이라 어느 정도 협상이 잘 풀린 모양이였다. 결국 연길시의 애단로 북측의 지역은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 맡게 되고 애단로 남측의 모든 지역을 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 맡게 되는것으로 아퀴를 지었다. 연길시에 유선TV보급망설치공사가 시작되자 계획과는 달리 진척이 늦어졌다. 하긴 당시 국에서는 두개 팀으로 조직되여 이 공사를 시작했지만 도합 20여명의 일군중에서 이 시설공사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전문일군은 한명도 없었다. 당시 내가 총지휘와 총기술감독을 맡았지만 나 역시 이 시설에 대해 계통적으로 배우지 못했으며 외지견학을 통해 좀 상식적으로 알고있을뿐이였다. 모든것은 공사를 진행하는 한편 배우고 익히고 해야 했다. 당시 우리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에서 맡은 유선TV보급망 설치범위는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연길시 애단로 이남으로 도합 5만여세대가 되는 가정주택들이 있였는데 하루에 많이 설치해야 40-50세대 정도였다. 왜냐하면 사람이 빈몸으로 층계를 오르내리는것도 아니였고 또한 어떤 가정은 집에 사람이 없어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집 건너뛰여 그 다음의 집에 설치할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파트 한개 동이면 서로 련결이 돼야 했기 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집과 집 사이 그리고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신호가 합격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신호를 확장하는 부분품을 가설해야 하기에 무작정 밀고 나가는 공사도 아니였다. 한편 상급에서는 이를 일종 거대한 문화공정으로 간주하고 틀어쥐였으며 몇년간의 시일을 정하고는 기한내에 반드시 완수하여 연길시민들의 문화생활을 보다 풍부히 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조하였다. 우리는 기한내에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휴식일이란 별로 없이 공사를 다그쳤으며 때로는 밤대거리를 할 때도 있었다. 나중에 우리는 룡정시라지오TV방송국 시공대와 화룡시라지오TV방송국 시공대의 협조에 의해 약 3년간의 악전고투끝에 1998년 연길시안의 유선TV보급망의 가설임무를 성과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때로부터 연길시민들은 바깥 안테나가 없이 집안에 앉아 수십개 채널의 국내TV프로를 시청할수 있게 되였다. 이는 연길라지오TV방송사상의 일대 변혁사로 하나의 리정비로 되기도 했다. 한편 연길시유선TV보급망의 서비스시스템이 가동되고 한동안의 시운행을 거쳐 정상화가 되자 나는 재차 단위 인사과에 퇴직신청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것이 수락되리라 믿어마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때는 이미 나의 나이도 61세라 정기퇴직년령이 다된 셈이였다. 그리고 아무리 올리 훓고 내리훓고 해도 더는 내가 책임지고 할만한 일은 있을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국장은 이전에 나의 첫 퇴직신청을 수락하지 않던 때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나는 맞아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단위 종업원가족 아파트를 짓게 되는데 한번만 더 일해달라고 설득하는것이였다. 국장 역시 자기 개인을 위한것이 아니고 전반 국의 리익을 위해 나한테 재청을 드는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마음이 약한 나는 더 이상 국장과 따지지 못하고 그저 “이번만입니다”라고 력점을 찍고 말았다. 단위의 종업원가족 아파트를 짓는 동안 나는 현장의 지휘자로 일하면서 모든 질관리도 책임졌다. 왜냐하면 종업원가족 아파트였기에 질관리를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례하면 구입해들여오는 벽돌의 질이라든가 또는 모래와 세멘트를 섞는 비례 그리고 건물에 들어가는 철근의 비례 등에 대해 철저히 감독해야 했다. 약 2년뒤 종업원가족 아파트가 완공되자 국에서 더는 나란 사람에 대한 리용가치가 없어서일가 아니면 새로운 건설항목이 없어서일가 여하튼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종업원가족 아파트건설을 마지막으로 나는 비로소 퇴직하게 됐으며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것이 바로 2000년 8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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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한류 드라마 활용 ‘저작권 보호’ 캠페인
    [동포투데이 연예] 문화체육관광부는 26일 한국과 중국 온라인을 통해 양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한류 드라마 10편의 명장면을 모아 제작한 ‘저작권은 사랑입니다 - 著作權是愛情’ 홍보영상물을 동시에 공개한다. 이번 캠페인은 문체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유엔 산하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지정한 제14회 ‘세계지식재산권의 날’(4월 26일)을 맞아 저작권 보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마련했다 . 문체부, 한국저작권위원회, 방송 3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저작권은 사랑입니다’라는 제목의 홍보영상물은 총 4편으로 오는 4월 26일 첫 번째 편 ‘고마워요, 저작권’(80초)이 먼저 공개된다. 1편에는 KBS ‘성균관스캔들’, MBC ‘해를 품은 달’, SBS ‘별에서 온 그대’ 등 방송 3사에서 방영한 인기 드라마 10편의 하이라이트 영상과 촬영현장 영상 등을 담았다. 이어 6월 초에 공개될 나머지 3편의 홍보 영상물은 방송 3사별 대표 드라마 1편씩을 주제로 제작될 예정이다. 이 영상물은 중국어로도 번역돼 중국의 주요 온라인 사이트인 ‘바이두’, ‘투도우’, ‘요우쿠’, ‘러스왕’ 등에서도 동시에 서비스된다. 중국 최대 포털인 ‘바이두’는 동 홍보영상물을 4월 25일, 26일 이틀간 동영상 페이지(http://v.baidu.com)의 메인 동영상으로 소개한다. 이외에도 이 영상물은 북경 문화예술특구 내의 옥외 광고판에도 송출할 예정이다. 문체부는 이번 캠페인을 토대로 올 하반기에는 한중 공동 저작권 캠페인을 추진할 계획이다. 문체부는 이를 위해 오는 7월 부산에서 개최하는 ‘한중 저작권 포럼’ 기간 중에 중국 국가판권국과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번 홍보 영상은 문체부 홈페이지(www.mcst.g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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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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