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처음 한국와서 사 년 동안은 돈이 아까워서 과일 한알 맘대로 사먹지 못했고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별의별 궁상을 다 떨었던 나였다.

오죽하면 리발비도 아까워서 사년간을 저절로 머리를 깎았으랴! 중도 제 머리 저절로 못 깎는다지만 난 그러고 보면 대단한 재주를 갖고 있었던건가? 아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차피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일만 하니까 구태여 머리모양을 뽐내며 자랑하러 다닐 일도 없거니와 혹시 외출 할 일이 있더라도 모자만 꾹 눌러 쓰면 되니까. 게다가 그깟 제일 간단한 스포츠머리 리발비가 만원(그 때 환률로 인민페 칠팔십원정도)씩이나 하는터에 아깝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얼마나 힘들게 버는 돈인데?!

매일 매시각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상상할 수도 없으리만치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주위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또 지친 제몸을 혹사해 가면서 힘들게 버는 실로 피같은 돈이 아닌가. 헌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정도의 머리 스타일은 나 스스로도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였다. 사실 나한테는 우리 집에서 치매로 앓으시다가 세상 뜨신 어머니의 머리를 삼년 동안이나 잘라 드린 경험이 있었다. 자기 머리도 그렇게 깎으면 되리라. 그래서 난 겁도 없이 자작 리발을 시작했었다.모텔 청소아줌마로 일하는 나이고 모텔에 널린게 일회용 면도칼이므로 리발기구도 따로 마련할 필요없었다.

잘 드는 면도칼을 오른 손에 들고 왼손으로 머리 두께를 골고루 가늠하면서 화장실 거울을 마주하고 자기 머리카락을 이리 저리 두께가 비슷하도록 쓱—싹!쓱—싹! 추려내고 나중에 날선 가위로 손거울을 이용하여 큰 거울 속의 자신의 뒤덜미를 들여다 보면서 목덜미 부분의 머리를 가쯘하게 마무리 하고 샤워로 머리꺼끄러미까지 싹다 처리 하면 그깟 미용사의 솜씨나 내 솜씨나 거기서 거기였다. 아니 오히려 돈을 팔지 않았다는 자부심 때문이였던지 내 솜씨가 더 훌륭하다 여겨질 때도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머리 깎는 사람을 난생 처음 봤다면서 주인언니께서도 손재주가 있다고 늘 칭찬하셨으니까 이건 절대로 스스로의 자찬만이 아닐 것이라고 자만감에 들뜨기까지 했었다.

그외 먹고 자고 쓰는 모든 것은 일하는 곳에서 해결하고 집에서 가지고 온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실로 돈 쓸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월급은 차곡차곡 모여 졌고 또 한 달에 두번씩의 휴식일도 쉬지 않고 일하면 십만 원(그때의 환율로 약 인민페 팔백원 좌우)더 모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옹근 사년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쓰지도 않고 이악스레 모은 돈이 어느 정도 되였을 때 큰 아들이 집 사겠다고 꿔 달라고 기별이 왔다. 솔직히 아무리 목숨같은 제 자식이지만 선뜻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또 돈이 있는 줄을 뻔히 알고서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꿔 달라는 데 못 주겠다고 뻗댈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실로 부모된 죄가 그리도 클줄을 전에는 모르고 살았다. 자식으로 생겨서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였다면 될수록 부모한테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말고 제 살 도리는 저절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가난한 부모가 자식을 어렵게 대학 공부까지 시켰으면 그걸로 된 것인데 내가 만약에 한국행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어쩔 것인가 말이다. 어이하다 한국와서 돈벌게 된건 다행이지만 그 돈 벌어서 자신의 로 후대책을 연구하고 어째 보기도 전에 빌려 달라고 하다니? 이래서 자식 둔 부모는 남의 자식을 흉보면 안 된다고 했던가?

몇 년 전 큰 언니네 아들이 모 해변 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한다고 로부부가 많지 않은 월급으로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평생을 힘들게 모은 적금 전부를 협박에 가까운 언행으로 빼앗아 갔다는 말을 듣고서 격분한 나머지 우리 자매들은 한결 같이 입을 모아서 욕했었다.

“망할 놈! 아예 제 부모 껍대기를 벗겨내고 말지! 에익 후레 자식 같으니….”

아마도 남의 자식 흉본 벌을 받은 건가? 이건 집에서 편안히 월급을 모은 것도 아니고 이국 타향 남의 땅에서 힘들게 벌어서 이 악물고 모은 돈을…….

몇 년 후 갚아 준다고는 하지만 허망한 그말이 믿어지겠는가. 차라리 호랑이한테 강아지 꿔주고 말지. 허지만 주고 싶지 않아도 주게 되는 게 자식이렷다. 함께 일하던 정씨 아줌마의 말이 인상 깊다.

“자식이란게 말이요. 이름이 좋아 자식이지 실은 몽둥이를 들지 않은 강도라우!” 그녀도 몇 년을 이악스레 모은 돈을 자식한테 그것도 집 사는데가 아니라 남을 두들겨 패서 감옥에 가게 된 자식의 뒷처리에 몽땅 처 넣었다는 것이다.

아! 슬플시고! 이런게 부모된 락인가? 그래도 난 아들이 남처럼 싸움으로가 아니고 집 마련하는 데 돈 넣어주니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더구나 수도 북경의 다들 알아주는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예쁜 색시감까지 생겨서 알콩달콩 연애하고 있으니 성공한 자식의 뒷바라지라 실로 비교가 되는 영광이 아닐까? 결국 그렇게 내 사년간의 고혈은 아들한테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 갔다.

비록 영광이라 여긴 투자지만 주머니의 허전함은 영광으로 쉽게 메워지는게 아니였다. 일 하는데 힘이 빠지고 그래서 생전에 쉬지 않던 나도 한 달에 한두번쯤은 쉬면서 일하게 되였고 얼마쯤 더 지나니 조금 더 적응이 되여서 그럭저럭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시 삼 개월의 월급이 모여지자 또 아들이 결혼식을 하겠다고 커플반지 살 돈이 어쩌고 저쩌고 한다. 맘이 약해진 난 이번엔 그래도 큰맘 먹고 반반한 옷이나 사 입으려고 오십만 원(그때 환율로 인민페 약 사천원 좌우)을 남기고 아들한테 다 보내 주었다. 사 년간 옷 한 벌 사지 않고 살아 온 나의 몰골은 얼마나 흉했던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불법체류냄새가 풀풀 심하게 풍기고 있는것 같았다. 실로 바보같이 살았던 나의 한국생활 사 년이였다. 하긴 바보같은 그 사년때문에 난 인생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꾸게 되였으니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 잘못된 것만은 아닐 것이라 여겨지지만도……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고 말지 어쩌다 큰 맘먹고 자기 몸에 투자하려던 그 오십만 원마저……

이천팔년 삼월 칠일—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그날 오전 열한시, 나한테 오촌 조카뻘이 되는 군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날 보러 오겠다고….

한국온지 사 년 만에 처음으로 되는 일이다. 타향에선 고향의 까마귀도 반갑다는데 나한테는 어찌하여 고향의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한국 나와서 일하는 친척들은 조금 있지만도 서로가 돈 버느라 바빠서 도저히 만나지지를 않으니까 말이다. 헌데 모처럼 날 보러 찾아 오는 이가 있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어스름이 깃들 무렵 군이는 내가 일하는 가게로 용케 찾아 왔고 일 끝나기를 기다려 갖고 고깃집에 가서 맛있는 불고기를 사 주었다.

그때까지도 난 그것이 잡아 먹을 강아지 머리 쓰다듬어 주기인 줄을 전혀 모르고 그저 고맙고 감격스레 여겨져서 써비스로 나오는 밥에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맛있게 다 먹었다. 헌데 고기는 물론 밥도 시큰둥해서 잘 먹지 않고 애꿎은 담배만 태우면서 맛있게 먹는 나를 지켜보던 (실은 속셈이 따로 있어서 잔머리 굴리고 있은 건데 난 눈치없이 나더러 더 많이 먹으라고 그러는구나 고맙게 생각했었다.) 군이는 내가 수저를 내려 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 문을 연다.

“고모한테 사정할 일이 생겨서 …..”

“그게 무슨 말인지?”

마냥 들뜬 기분에 감격해 있던 난 갑자기 커다란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어정쩡해서 되물었다.

“사실은 급하게 돈 쓸 일이 좀 있어서 고모님께서 이삼백만 원 돌려 주신다면 이달 말에 꼭 갚아 드릴 겁니다.” 난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얼굴 근육이 다 뻣뻣해지는 느낌이다.

이래서 남의 걸 먹으면 입이 짧아진다고 했으렷다! 그럴 줄 알았더면 먹지나 말았어야 하는건데 눈치도 없이。 이미 먹은 걸 어쩔 수는 없고 그냥 돌려 보내려니 민망하고 나한테 남은 돈이란 딸랑 오십만 원이 전부인데…….

“빈이가 집 산다고 다 보내고 요새 옷이나 사 입으려고 남긴 돈이 좀….”

그렇게 난 군이한테 오십만 원을 은행 기계에서 다 빼주면서 통장까지 보여 주었다.

“보다싶이 내 전 재산이니까 말일에 약속대로 꼭 갚아야 한다!?”

“네!” 군이는 그렇게 시원스레 대답을 하면서 돈 봉투를 받았으나 난 어쩐지 요강뚜껑으로 물 떠 먹은듯 찜찜하다. 제발 고기만두로 개 친(육포자타구유거무회肉包子打狗,有去无回)격으로만 되지 말았으면….

내 예감은 그렇게 틀림이 없이 맞아 떨어졌다. 그 돈을 갖고 튄 군이는 돈을 갚겠다던 그 달 말이 지나고 새달초가 다 가도록 전화 한 통이 없다.

공교롭게도 내가 일하는 가게의 장사마저 덜 되여서 월급도 밀리다보니 난실로 돈 한푼 없이 억지로 버티는 판이였다. 돈을 두고도 아까워서 쓰지 않는 것하고 돈을 꼭 써야 하는데 없어서 못쓰는 것하고의 차이가 그렇게 클 줄을 난 참말로 몰랐었다. 환절기에 옷 사려고 애타게 기다리던 나는 사월 중순까지 참다가 할 수 없이 군이한테 전화 했더니 돈이 마련되지 않아서 다시 그 달 말에 준단다. 은행계좌번호까지 전화로 찍어 달라면서. 물론 문자 메세지로 은행계좌번호는 즉석에서 찍어 보냈지만 군이는 그후부터 아예 전화련락이 두절이다.

전화가 오지도 않거니와 내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

애초에 사기치러 맘먹은 것이지 돈을 꾼다는 건 빨간 거짓말이였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한국 온 지 십년이나 되는 피끓는 청년이 가정도 없는터에 그새 번돈은 다 어쩌고(후에야 안일이지만 실은 놀음으로 돈 다 날렸었다)이제 겨우 사 년 된 나한테 그것도 자식의 집 마련에 돈 다 보내고 없는 줄을 번연히 알면서 양심도 없이 손 벌리겠는가? 그 생각을 못하고 돈부터 덥썩 안겨 준 내가 잘못이지. 아! 피 같은 내 돈이여……

더더구나 분하고 원통한 것은 내가 입지도 먹지도 않고 머리모양마저 돈을 아껴서 부스스하게 털 뜯긴 부엉이 상을 하고 있으니까 아예 바보천치로 알고 쉽고 만만하게 여겨져서 맘먹고 달려 든 거라 생각되는 그 점이였다. 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돈보다 멍청하게 흘러 보낸 지난 세월이 아깝고 후회스러워서 더더구나 미칠 것만 같았다.

누구를 탓할까? 내가 바보였던 것을!!!

그 몇 달을 난 그렇게 자책속에서 지냈고 후회로 가슴을 치면서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었다. 나중에 문뜩 스스로도 위안 받을 수 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서 난 그런대로 고통에서 쉽게 헤여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때 나한테 오십만 원의 돈이 전 재산이였던 그 사실이였다. 실로 불행중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아니라면 삼백만 원을 사기당할 뻔 했으니까 내 손실은 그런대로 많이 줄어든 셈이 아닌가 말이다.

살다 보면 유실필유득有失必有得이라는 말이 참말로 일리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한 것은 조금 잃는 과정을 통해서 더 큰 것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 오십만 원을 수업료로 난 실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돈을 벌어서 앞날을 대비해 모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자신을 위해서 조금씩 쓰는 것도 앞날을 위한 대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랑비를 제창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모으던 돈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면 충족하다. 그렇게 하는 대비가 돈만 꼬박꼬박 모으기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전에는 잘 모르고 살아왔다.

돈으로는 지난 세월을 살 수가 없고 후회를 미봉할 수도 없으며 또 돈으론 건강과 즐거운 마음을 살수가 없다. 허지만 그때 그때 조금씩 제 몸에 하는 투자가 건강을 지키고 후회를 막음으로써 앞날을 위해 한결 씩씩한 자신을 남길 수가 있으니 그게 그새 조금 써 버린 돈에 비하면 더 크게 남기는 장사가 아닐까? 만약에 내가 미리 이런 도리를 알고 자기 몸에 최저한도의 투자라도 하면서 살았더라면 오십만 원의 아프고 쓰린 여운이 그토록 오래고심하진 않았으리라! 멍청스레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다가 사기당하니 그 돈이 더구나 아깝고 꾸미지 않은 거칠은 모습은 제가 만들어 사기꾼한테 빌미를 준 것이니 더더구나 미칠듯이 분하고 그래서 수 개월간 속 썩이고 후회하고 잠도 못자고 했으니 정신 건강에 몸 건강에 오십만 원이 아니라 오백만 원 아니 그보다 더 큰 손해를 본 셈이다.

그렇게 난 사기꾼한테 한번 당하고서 지금은 많이 똑똑해졌다.

휴식을 제때에 취하면서 다이어트로 몸 관리를 철저히 함과 동시에 옷도 철따라 예쁘게 사입고 화장품도 적당하니 알맞는 걸 사서 쓰고 머리모양도 부스스 털 뜯긴 부엉 이상을 버리고 탐스럽게 개변시켰다. 과일도 냉장고에 종류를 자주 바꿔서 넣어두고 먹고 있으며 우유와 칼슘제를 비롯한 건강보양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게 지나가는 세월에 억울하지 않고 돌아오는 세월에 미안하지 않도록이 착실하게 살고 있는 나는 옛날의 바보가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를 갈며 저주했던 사기꾼--날 도둑 같은 군이 한테도 욕만이 아닌 고마운 생각까지 들리만치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그런 나 자신이 미욱하게 살았던 예전의 나 보다 훨씬 더 현명한 것 같아서 기분이다!
/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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