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동포투데이] 지난 9월 연변팀이 중경역범과 원정경기를 치르던 시기 중경에서 한 연변 조선족 사나이와 중경 토배기출신 주란란 여성이 가정을 뭇고 생활하면서 현지에서 유명한 “한성불고기집(한성관-汉城馆)”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경기장에서 만난 이들 부부, 알고 보니 남편인 이국룡씨는 길림신문사에서 퇴직한 이선근 선배님의 조카벌 되는 사람이어서 취재는 더욱 쉬워졌다.

조한 두 민족이 한가정을 이루고 거기에 중경에서도 유명한 “한성불고기집”을 운영하여 중경라드오방송국 생방송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까지 됐다는 이들 부부의 스토리를 듣노라니 감동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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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북경의 어느 한 한국회사에서 근무하던 이국룡씨가 중경의 지회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2002년이었다. 당시 중경에서 출근하던 이국룡씨는 문득 중경도 지난 세기 80연대의 심수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아창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정리한 뒤 자체로 당지에서  “길림신문” 부간인 “동북저널”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족과 한국인이 적은 그 곳에서 “동북저널”을 발행하자고 보니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음식마저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가 버티어낼 수 있었던 것은 친절하고 예의가 바른 중경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국룡씨는 중경토배기출신의 처녀 주란란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한 청사의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 얼핏 눈길이 마주쳤으며 둘 다 “저 사람이야말로 나 이상속의 반려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뒤 그들 남녀는 서로 인터넷 채팅도 하고 전화연락도 자주 하면서 사랑을 무르익히다 결국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 그들의 신혼생활 역시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족 가정에서 가무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이국룡씨가 집안일에 등한하여 아내 난란의 불평을 자주 샀다. 난란은 남편인 국룡씨한테 주로 남정들이 집안일을 하는 한족문화를 주입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 설득은 국룡씨한테 있어서 “소귀에 해금켜기”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언제인가 연길에 있는 시집에 와보고는 난란씨 역시 그 마음을 접었다 한다. 시어머니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팽이처럼 돌아치면서 집안일에 열중하지만 시아버지는 늘 쏘파에 앉아 안경 걸고 신문이나 보는 전통적인 조선족 가정문화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남편을 가무일에 붙잡아 매놓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란 밖에 나가 큰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임신7개월이 되자 난란은 남산만한 배때문에 더 이상 엎드려 장판을 닦는 일만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 국룡씨한테 장판만이라도 닦아 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더니 국룡씨는 밖에 나가 서서 장판을 닦을 수 있는 밀걸레를 사왔단다. “어쩔 수 없는 남자로구나!” 난란씨는 그냥 도리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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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이들 부부는 중경에서 한식을 위주로 하는 “천리향”이란 작으마한 음식점을 차렸다. 한국인이 차린 대형음식점에서 경리로 일하며 잘 나가던 이국룡씨가 회사를 정리하고 개인창업에 나섰던 것이다.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음식점은 이들 부부 둘이서만 운영했다. 어린애는 난란의 친정어머니가 봐주었다.

그러던 중 그 어느 해엔가 중경에서 동양 4개국 축구경기대회가 있었다. 그러자 당시 내지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기자 송청운씨가 한국기자 23명을 데리고 “천리향”으로 식사하러 왔고 그 때로부터 50평방미터도 되나마나한 이 음식점은 대뜸 소문을 놓게 되어 한국손님, 조선손님 및 중경에서 근무하는 조선족 사업가들과 유학생들이 즐겨찾는 가게로 발돋음했다. 이들 부부는 열심히 일하면서 매일마다 짭짤한 수입을 올리군 하였다.

그러나 창업의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난란씨의 오빠가 결혼하여 어린애가 생기자 친청어머니는 계속 그들의 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가게의 영업 때문에 어린 것을 머나먼 연변의 시부모한테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헌데 가게의 영업도 중요했지만 어린 것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어린 것이 보고 싶다못해 난란씨는 밤에 자다가도 꿈을 꾸면서 어린 것을 부르며 운적도 수없이 되었고 우울증 증세로 앓기까지 했다. 결국 이들 부부는 2년만에 “천리향” 음식점을 처분하고 아이가 있는 연변으로 나와 버렸다.

하지만 연변에서 이들이 할 일은 없었다. 이국룡씨가 시장조사를 한바퀴 했지만 파악있는 영업항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재차 중경으로 들어갔다. 다르다면 이번에는 어린 것을 데리고 들어간 것이었다.

중경에 들어간 뒤 보다 통이 크게 음식업을 벌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는 “한성불고기집”이였다. 이들은 원래 “천리향”음식점을 할 때의 경험을 살린 한식불고기집이었지만 중경 현지인들의 입에 맞게 음식을 개발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당지인들은 한국식불고기라 하니 그냥 체험식으로 먹어보다가는 입에 맞는다며 모두들 기뻐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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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룡씨는 축구운동을 몹시 즐긴다. 중경에 발을 어느 정도 붙이게 되자 2005년 중경에 있는 조선족 축구애호가들로 축구동아리를 무었다. 이름은 “장백호랑이 축구동아리”었다. 초기에는 몇명 안되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장백호랑이 축구동아리”는 점점 구성원이 늘어나 현재는 28명이 된다. 이들은 주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중훈련 혹은 친선경기를 치르며 중경에서 펼쳐지는 갑급리그의 경기관람도 단체로 다닌다. 그리고 지난 9월 연변팀의 중경원정경기시엔 축구단 감독진과 선수 30여명을 “한성불고기집”에 초대하는 것으로 고향축구팀에 대한 사랑을 전달하기도 했다.

한편 축구동아리에서의 경비는 이국룡씨가 협찬할 때가 많다. 유니폼 역시 그의 협찬으로 사온다. 유니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국룡씨가 운영하는 “한성불고기집”의 직원 모두 축구유니폼을 착용한채 근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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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축구를 혹애하고 축구동아리까지 무은데 대해 아내인 난란이가 전적으로 지지하는건 아니다. 어떤 날에는 아침에 나갔다 한밤중에야 돌아오군 하기에 영업에 지장이 크다. 우선 남편이 없으니 가게일이 그만큼 밀리고 또 열심히 모은 돈도 자리가 나게 축나기도 했다. 또한 그것보다 더욱 걱정되는건 남편이 축구하러 가면 번마다 술에 거의 절어서 돌아온다. 남편의 건강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난란이다.

하지만 난란은 남편을 이해한다. 남편한테도 취미가 있고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을 그저 돈만 버는 “일벌레”나 “일중독자”로는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걸까? 지청구를 들이대고 바가지도 긁고 하지만 결국은 남편한테 숙어들고 남편을 지극히 아끼는 난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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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는 끝났다. 연변에 있으면 그냥 수수한 인생을 보낼 수도 있는 조선족남자 이국룡 ㅡ 하지만 중경이란 낯선땅에 가서 그 곳의 토배기 처녀를 만나 고생도 많았지만 이젠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멋진 삶을 수놓아가는 부러움이 큰 사나이가 됐다. 난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조선족 리국룡씨를 만나 당당한 지금은 음식점 녀보스가 되고 말이다.

조선족 이국룡과 중경의 토배기 한족 주란란의 만남은 그들의 운명이었고 100% 만점의 결합이라 할까?

취재는 끝났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스토리는 계속된다.

<필자는 중국 길림신문 스포츠 전문기자 김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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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차이 극복한 조한 두 민족의 둥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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