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생각] 이주자의 예의
■ 전춘화
나는 중국에서는 조선족, 한국에서는 중국동포다. 몇 년 전 까지만도 이러한 나의 정체성이 참 불편했다.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한국에서는 재외동포, 센터가 아닌 변두리라는 소외감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 이였을까.
내 부모님은 나라가 돌아가는 일, 이른바 '정치'와 ‘사회’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것은 나라님들이 신경을 쓸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을 갖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한국에 와있는 동포 중에 많은 분들이 내 부모님처럼 그들 나름 생계를 꾸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중국에서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인들로부터 '돈밖에 모른다'는 비난을 받았다.'동포가 아니라 그냥 중국인'이라는 가슴 아픈 말을 듣는다. 게다가 동포가 저지른 범죄사건 때문에 동포전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뭐가 문제였을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인에 대한 편견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내게 도움을 줬던 한국인 '몇 분' 때문이다.
중학교 때 해마다 우리 집에 찾아와 산타할아버지처럼 한국 교회에서 후원했다는 학비와 따뜻한 목도리를 전해준 삼촌도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의 유학생활 내내 등록금을 모을 수 있도록 회사에서 일하게 해준 사장님도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일상가운데 마주치는 한국인의 불친절과 불쾌한 언행에도 "사람 나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동포들에게는 '사람 나름'이 적용되지 않을까?
오랫동안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끄고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삶의 예의인줄 알았던 우리를 한국인들은 '이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주위 사람 눈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았더니 집단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은 싫어한다. 세상일에 관심을 끄고 나만 열심히 일하면서 간간히 눈에 보이는 친인척과 이웃에게 베풀면서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다수의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예의였는데 그것이 뭔가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같은 피, 같은 역사를 나눈 동포이고 한국은 내 조상님의 땅이 맞지만 어쨌든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딘 순간 한국사회와 한국인은 낯설다. 나는 그들에게 엄연히 이주자라는 증거다. 물론 동포라는 신분은 바뀌지 않겠지만.
이런 예를 들어보자. 오랫동안 떨어져있었던 여동생이 어느 날 우리 집에 와서 두 달을 묵기로 했다. 그런데 여동생은 식사 뒤 설거지를 잘 안하나 하면 나의 삶의 방식에 관심이 없다. 여동생은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행하면서 내가 이해해주길 바랬고 어차피 두 달 뒤에 다시 떠날지도 모르니 잠시 머무는 나그네처럼 마음을 나누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내게 자매라 한다. 그리고 이 집은 예전에 부모님의 재산이었기에 당연히 와서 머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자매라지만 밤에 갑자기 동생의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바닥에 떨어진 동생의 머리카락을 내가 직접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때는 낯선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인은 왜 저렇게 반응할까'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지 않고 느낀 바를 오구작작 모여 울분을 토하듯 풀어버리고 다시 나만의 생활패턴에 묻히는 우리가 어쩌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얄미운 여동생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만 해도 음식가게의 사장님인 한국인 아줌마와 그 가게에서 일하는 동포 아줌마 사이의 갈등은 동포들의 사적인 모임에서 흔하게 거론되는 부분이었다. 그 모임에서 "우리 음식가게 사장님의 이런 부분들이 섭섭하다'고 토로하는 것과 "한국인들은 이렇더라"고 판단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거기에 두어 명이 끼어 공감을 하고 살을 붙이면 한국인은 그러한 이미지가 된다. 우리가 편견을 갖는 한국인에 안타까움을 호소하듯이 우리도 아무렇지 않게 '음식가게 한국인 사장님'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어버린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중국의 해방을 위해 참전했고 동북3성의 불모지를 개간하는 등 조상들이 대가지불한 부분들이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많은 동포들이 3D 업종에 종사하며 한국경제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타이틀이 벗겨지기에는 약하다. 솔직히 처음부터 한국경제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온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살려고 한 일이 한국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된 것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전철역 계단에서 침을 뱉고, 소리 높게 통화하고 "우린 중국에서 그렇게 하지 않슴돠"라는 말로 한국인들의 옳은 방식까지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주민의 예의가 아니다.
한국사회가 지금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려고 했고 인정하고 있을까. 그런 발전이 있었기에 지금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단 한 번도 한국인에게 제대로 알린 적이 없다.
조금만 더 그들이 살아온 방식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애써 구축해놓은 옳은 질서와 맞는 가치관에 동참하면서 인정한다면, 중국에서도 이주자였지만 대가지불로 인정을 받은 조상들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환영받는 이주자가 되지 않을까.
물론 한국사회에도 문제점이 많다. 중국동포들도 입을 열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외부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면 동포사회는 성장할 수 없다. 나는 한국인에게 환영받을만한 이주자였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고, 권리를 누리려면 그에 따른 의무가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소수민족, 동포로 살 수밖에 없는 정체성이 문제가 아니다. 또 어디론가 이주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미래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 환영받는 이주자로 선주민을 인정하고 동참하는 자세가 되어있느냐의 문제다.
계속 이중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려면 최소한 중국과 한국 모두에 그에 따른 예의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것이 버겁다면 차라리 한쪽 끈을 놓자. 최악의 선택은 '기회주의자'로 사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글의 마무리에 「민들레 씨앗」을 이야기하고 싶다.
바람에 날려 씨앗들은 어디론가 날려간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든 뿌리를 박는다. 그 씨앗이 성장하면 또 수많은 민들레 씨앗들이 어딘가로 날려갈 것이다. 이미 모체가 날려 온 생명임을 익히 알기에 '노하우'정도는 터득하고 길을 떠날 것이다.
내 조상이 이주자였고 나 또한 이주자라는 것은 역사적 시각에서 동포들에게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 그 이주를 통해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했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문화와 가치관을 확산하는 이주자로 살았느냐’에 초점이 잘 맞춰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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