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편집자의 말 : 최승희를 놓고 말하면 그녀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성을 두고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일찍 지난 세기 30-40년대 최승희가 침략확장에 광분하는 일본군을 위문하려고 중국대륙과 동남아 여러 나라에 다니며 공연한 것을 두고 역사학가들은 그녀를 친일파라고 지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녀가 장시기 동안 이북에서 활동한 것을 미루어 적색분자로 점찍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최승희 그녀의 무용예술만 언급하면서 우리 한민족 무용 발전을 위해 각고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만 나열하려고 한다. 이 글의 많은 내용은 구소련 간행물 <소련여성> 1948년 제3호에 실린 글임을 밝히는 바이다.
 
124185367.jpg▲ 사진출처 : 인터넷
 
1911년 11월 24일, 최승희는 조선 경성(지금의 서울)의 한 의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살이 되던 해 최승희는 경성에 있는 <숙명여자고등학교> 보통 반을 나왔고 그 뒤 1926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일본현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가 세운 무용학교에서 공부했으며 3년 뒤 이 학교의 1번 무용수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안 있어 이 무용학교의 <수석 대리교사>로 선발되기도 했다.
 
1929년 조선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18세 나이에 조선의 첫 현대무용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그해에 무용연구소를 세우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1930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 번에 거쳐 전문 공연회를 개최, 대표작으로는 현대 조선민족 무용을 상징하는 <영산무(灵山舞)> 등이 있었다.
 
최승희의 무용에서 계발을 받고 후일 성공한 사람도 많았다. 대만의 유명한 무용가 임명덕(林明德)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1936년 그는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보고 일본에 가서 무용을 전공, 22세었던 1936년부터 8년이란 품을 들여 도쿄대학 예술학부와 이시이 바쿠의 무용학교를 오가면서 독일풍의 현대무용을 배웠고 1943년에 도쿄에서 개인 공연회를 가지었으며 그 뒤 대만으로 돌아가서는 무용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와 <수사몽가(水社梦歌)> 등 미학정서가 짙은 무용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대만의 무용예술의 발전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했다.
 
한편 서방의 무용기교와 조선 전통무용의 정신주체를 결합시켜 조선 무용계에서 돌풍을 일으킨 최승희는 1937년 당시 세계적인 무용대가로 등극한 미국인 솔로몬 왜루크의 알선으로 미국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주의 여러 나라와 유럽 등지를 방문하면서 100여차 공연, 공연은 1939년까지 지속되면서 무용논평원들과 당지 관중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심지어 부분적 간행물들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였지만 최승희만은 정복하지 못하였다”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1939년 말, 조선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일제가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것과 민족무용을 갖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시키자 단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 북경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중국무용을 연마하고 탐구하였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최승희는 중국의 만주와 상해, 남경 등지를 돌며 이른바 황군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는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탄압하는 일제가 싫어 조선을 떠난 최승희와는 다른 친일행위를 한 최승희로서 모순되는 면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최승희의 무용을 두고 일제마저 고도로 인정했다는 것만은 의심할바가 없는 것 같다.
 
b_vip_DD8D06C5554A6ACED5F0BBC3FF1880A7.jpg▲ 사진출처 : 인터넷
 
1946년 해방이 되자 최승희는 그 해 5월 귀국선으로 인천으로 돌아왔으나 한국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7월에 문예평논가로 활약하고 있는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으며 평양에서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웠다. 이 후 최승희는 조선무용동맹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공훈배우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등을 받았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최승희는 북경으로 가서 중국의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 무용반을 설치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 새 중국의 제1대 무용예술인들은 그 거개가 최승희가 양성해낸 인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66년 최승희는 그녀의 마지막 무용작품인<고구려 무희>를 창작하여 무대에 올린 뒤 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최승희는 그 자신의 친일행위 및 평양에서의 사망 등으로 많은 미스테리를 낳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정사 및 자녀의 행적 등도 아직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또한 그녀가 행운아인가 아니면 비운의 인물인가 하는 것도 판정하기 어렵다고 보아진다.
 
하지만 반도가 낳은 세계적인 무희- 최승희의 무용예술은 말 그대로 세계가 공인하고 있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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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무용의 영원한 전설-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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