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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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보라 속에서 변경을 지키는 중국 천지초소 군인들
    ▲눈보라속에서 순찰하고 있는 전사들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초봄에 들어서면서 내륙의 날씨는 따듯해지건만 중국 장백산 산정의 “천지 제일의 초소”―유동초소는 아직도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유동초소는 해발 2530미터로 사방 수십리에 인적이 없으며 해마다 빙설기가 8개월에 달해 한여름이라 해도 여름옷을 며칠 입지 못한다. 밤에 초소에서 보초를 설 때면 가죽털외투를 입지 않으면 안된다. 유동초소는 편벽한 곳에 위치해 있어 장병들의 생활이 매우 간고하다. 음용수로 여름에는 내가에 가 물을 길어오고 겨울이면 눈이거나 얼음을 녹여 사용한다. 특히 겨울이 되면 큰 눈으로 산이 막혀 초소는 림해설원의 “고독한 섬”이 된다. 이렇듯 악렬한 환경에서도 전사들은 1년 열두달 이곳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이 장백산 산정에서 천지와 빙설엄한을 동무하며 열정과 충성을 바쳐 조국의 변강을 수호하고 인민들의 안녕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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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6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1) 끈끈한 추구 후회없는 인생
    ●김철균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이 무패기록으로 조별경기에서 출선돼 16강에 들자 당시 중국 CCTV의 이른바 “축구평논가”들은 한국팀이 “안방”이란 우세로 심판의 덕을 보아 16강에 들었다고 비하하기 시작, 특히 한국축구대표팀이 8강을 거쳐 4강신화를 이룩하자 중국 CCTV의 “한국폄하” 론평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러자 중국 연변의 조선족 축구노장었던 이광수옹은 장거리 전화로 중국 CCTV방송국의 축구프로리포터 유건홍(刘健弘)과 설전을 벌였다. “나는 조선족이지만 중국인이고 또 중국축구를 사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들이 무턱대고 한국축구대표팀을 비하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당신들이 무슨 근거로 한국이 심판의 덕을 보고 있다고 하는 건가?!” “중국축구가 아시아와 세계에서 꼴기 없이 무너지는 우리 중국축구의 자체 문제이다. 반드시 우리가 반성해 봐야 한다. 남을 폄하하기보다 우선 자신한테서 문제점을 찾는 것이 중국축구인들의 자세이다.” 유건홍씨와 전화로 싱갱질을 벌이던 중 화가 난 이광수옹는 갑자기 전화수화기를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지나친 흥분으로 뇌출혈이 발생했던 것이었다. 1930년 이광수옹이 태어난 곳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의 물리거우(지금의 조양천진 덕신촌)라는 산골이었다. 때는 한창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키기 전해라 용정과 연길을 포함한 간도 각지에서 반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었다. 한편 당시 진보사상을 갖고 있는 간도의 조선인들은 서방의 선진사물을 대량적으로 흡수하기도 했다. 그속에는 축구, 야구와 핑퐁(탁구)을 비롯한 체육종목도 망라돼 있었다. 목적은 선진적인 체육활동으로 민족의 신체소질을 증장시키는 한편 약소민족한테 계몽사상을 취입시키자는데 있었다. 바로 이런 급변기에 태여난 이광수였기에 어릴적부터 새로운 사물에 대한 흡수능력을 키웠던 것이다. 특히 이광수의 모친 안일심 여사는 인근에 소문난 그네뛰기, 널뛰기 및 달리기 능수라 어린 이광수는 모친의 영향을 각별히 많이 받기도 했다. 그 뒤 1937년 허진네 형제라고 부르는 두 선생이 물리거우에 와서 서당을 차리자 8살에 나는 이광수는 제일 선참으로 서당에 다니게 됐다. 그때 서당에 다니는 학도들로는 대부분 12살, 15살씩 되는 이들이고 8살짜리는 이광수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일 영리하고 약삭 빠른 소년이었다. 또한 그 때인즉 조선청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1년 뒤라 그 소식이 한동안 전반 동만을 휩쓸었으며 어린 이광수의 가슴에도 어느덧 꼭 이름난 체육인이 되리라는 불씨가 심어지게 됐다. 그때로부터 이광수는 체육에 대한 그 어떤 이념같은 것을 갖고 거기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하긴 그때까지도 그는 자기가 스포츠의 어느 종목을 전공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없었고 또 손잡고 이끌어주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용정이나 조양천에 가서 운동대회 구경을 하고는 제법 그대로 하느라 흉내를 내군 했는데 거기에는 축구뿐아니라 핑퐁, 스케이트, 야구, 테니스 등 별의별 종목이 다 있었다. 하긴 당시 모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지만 그는 곧잘 머리를 쓰군 했다. 그 사례로 축구공이 없으면 헝겊공을 만들어 차기도 했고 장소가 없으면 감자를 파낸 밭이나 강변의 백사장을 택하군 했으며 일본인들이 쓰던 밥주걱으로 탁구채를 대신해 “핑퐁게임”을 할 때도 많았다. 1945년 1월, 가정에서는 연길로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이광수의 요구대로 연길로 이주했고 그는 연길에 잇는 간도국민고등학교(연길시 2중 전신)에 입학하게 됐다. 그뒤 얼마 안되여 드디어 “8.15” 광복이 됐다. 이는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방황하던 수많은 조선인청년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 줬다.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맘껏 우리 글도 배우고 지겨운 군사훈련 대신 체육기량도 닦을 수 있게 됐다. 광복은 이광수한테도 무궁무진한 희망을 주었다. 이광수는 욕심이 크기도 했다. 그는 글공부에서뿐만 아니라 체육운동인 축구, 스케이트, 농구와 야구 등 종목에서도 남다른 장끼를 보여줬다. 헌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반급의 반장과 체육위원까지 겸직하고 교정내에서 두각을 나타낼 무렵인 1947년 중국국내의 내전이 터졌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동북에 진주하더니 오래지 않아 길림성의 교하현까지 점령했고 미구하여 하발령을 넘어 연변으로 쳐들어 온다고까지 했다. 연변의 청년들은 고향지키기에 나섰다. 거기에는 어린 이광수도 포함됐다. 하발령저격전 당시 이광수는 기타 청년들과 함께 포탄을 나르고 부상병을 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적탄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고 포연자욱이 얼굴을 스치던 그 나날 이광수는 민주연군전사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피를 흘렸고 마지막 목숨까지 바치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았고 따라서 자기 자신도 고향을 지키는 성스러운 싸움에 뛰여들고 싶다는 충동도 몇번이고 받았다. 국민당군대의 진격은 영용한 민주연군에 의해 한차례, 또 한차례 격퇴됐고 나중엔 전선의 상황도 점차 호전을 가져왔다. 그러자 상급에서는 전선원호에 투입됐던 나어린 학생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 학업을 계속 하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광수는 당시 연변의 소학교들에 교원이 적은 상황에 의해 조직의 배치대로 연길시 하남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헌데 그때까지만도 그는 교원사업이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자기의 지식수준이 짧음을 감안한 그는 재차 떼를 써서는 연변고중에 입학하여 학업에 달라붙었다. 헌데 운명은 청년 이광수한테서 배움의 권리마저 앗아갔다. 당시 반도남북의 정세가 긴장해 남북간의 “38선충돌”이 잦더니 드디여 1950년 6월 26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졌다. 전쟁초기 전선은 조선인민군한테 유리했다. 인민군은 전쟁개시 3일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고 수원남측의 오산에서는 미군 스미스대위가 이끄는 부대와 첫 접전, 미군부대를 가볍게 격파하고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7월말경에 이르러 한국의 90% 이상의 땅과 인구를 해방시켰다. 그러다가 9월에 이르러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정세는 조선북측에 몹시 불리하게 급변했다. 유엔군은 10월 19일 조선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뒤이어 압록강변까지 들이닥쳤다. 정세는 건국 1년밖에 안되는 중국땅에도 위협이 큰 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지원군이 파병됐고 이광수가 다니는 연변고중에도 전시동원령이 내렸다. “지금 미제에 의해 조선이 불바다로 되고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 조선청년들, 조국이 지금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불속에 잠긴 조국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 해야 한다…” 학생들은 분분히 참군에 탄원했다. 그러자 학교 청년단총지 위원이며 중점당원 양성대상자인데다 신체까지 건강한 이광수는 대뜸 선발되어 지원군 모사의 통역원으로 배치받게 됐다. 이광수가 소속된 부대는 원 중국인민해방군 왕패부대인 38군이었다. 그 부대는 그해 10월 19일 압록강을 도강한 후 며칠뒤인 10월 25일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에 첫 총포를 쏜 부대었다. 그것을 계기로 부대는 청천강에서 대동강으로, 대동강에서 다시 38선까지 진격하며 많은 큰 전역을 치를 때마다 항상 전선의 선두부대로 참전했다. 이렇게 부대를 따라 남진하면서 이광수는 부대에서 맡겨준 통역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을뿐만 아니라 풍부한 전투경험도 쌓았으며 오매에도 갈망하던 중국공산당 당원의 일원으로 비준받기도 했다. 1953년 5월, 정전을 얼마 앞두고 지원군 총정치부에서는 이광수한테 전근령을 내렸다. 그가 전근통지서를 갖고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이가 바로 그제날 그의 축구지도였던 임근원 선생이었다. “광수야, 이 3 - 4년간 어디서 뭘했어? 난 널 죽도록 찾아다녔지 뭐겠어. 지원군 축구팀이 금방 섰는데 잔말 말고 이제부턴 뽈이나 열심히 차라.” 이광수는 실로 오래간만에 축구장에 다시 나서게 됐다. 이전에 스포츠로 잔뼈를 굳힌데다 전쟁의 세례까지 받은터라 이광수는 대뜸 축구팀의 주력으로 뛰게 됐다. 당시 지원군축구팀은 국내의 여러 경기뿐 아니라 조선인민군 축구팀과도 자주 친선경기를 치르군 했다. 경기에서 이광수의 째임새가 강한 공방조직, 정확한 패스와 출중한 드리블기술 등은 늘 상대방 축구감독의 호기심을 자아내군 했다. 후에 조선인민군 축구팀에서는 리광수가 조선족임을 알자 공개적으로 끄당기기 시작했다. “광수동무가 우리 팀으로 오고 싶다고만 하면 조직적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소. 그러니 아무 때건 생각나면 우리를 찾소.” 조선족으로서 조선을 대표하여 뽈을 찬다는 것 역시 보람있고 영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광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저는 중공당원입니다. 당기앞에서 한 맹세를 저벌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더는 이런 권고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듯 이광수는 입장이 견정했고 자신이 설 자리를 잘 아는 청년이었다. 1954년 지원군축구팀이 해산됐다. 그러자 이광수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대우가 좋다는 해방군 8.1축구팀에서 초청하는 것도 마다하고 공부를 더 할 일념을 안고 연변으로 달려왔다. 헌데 이럴 변이라고야. 그가 연변3중에 붙어 얼마 안되어 원 만주국축구팀 선수였으며 당시 길림성 축구팀의 감독이던 박노석 선생이 어떻게나 지청구를 들이대는지 이광수 역시 거절끝에 어쩔 수 없이 길림성축구팀 전포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로부터 길림성 축구팀에는 이광수란 새로운 미드필더진 선수가 나타나 경기장을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특히 그가 지청용, 손중천 등 선수들과 발을 맞춰 진공을 조직한다 치면 상대방은 늘 진영이 흐트러지고 갈팡질팡하기가 일쑤였다. 길림성 축구팀은 창립된 1957년부터 1960년 사이 전국갑급리그에서 두번 4등 하고 두번 5등 하는 전과를 올리었으며 이광수는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었던 화룡원수로부터 “길림성축구팀의 중형탱크”란 별호까지 얻게 됐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길림성 축구팀은 신노교체를 한데다 다른 여러가지 원인으로 우려곡절을 많이 겪었으며 특히 1963년에는 을급리그로 강급하는 불운까지 지녔다. 그때 이광수는 이미 나이가 많아 선수복을 벗은 뒤었다. 하지만 길림성팀의 불행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이광수는 재차 경기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한편 당시 팀 감독이었던 박만복 선생을 협조하여 훈련 및 경기 방안을 짜는 등 여러 가지 알심을 들이군 했다. 그런 보람이라고 할가? 1964년 을급리그 2위로 갑급에 진격한 길림성 축구팀은 1965년 전국축구 갑급리그에서 우승보좌에 앉는 빛나는 한페이지를 엮게 됐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터지자 이광수 역시 “파쑈감독”, “외국간첩”이란 모자를 쓰고 투쟁받다가 훈춘현 영안향의 한 농촌으로 쫓겨가게 됐다. 이렇게 쫓겨가 감독과 제재를 받는 몸이었지만 당시 농민들은 축구건장인 이광수를 아주 높게 우러러 보면서 운동대회 때마다 그를 선두에 내세우군 했다. 당시 그들 부부(부인 최혜숙 여사는 유명한 배구선수로서 중국에서 제일 첫진으로 배구건장칭호를 수여 받았음)가 경기장에 나서기만 하면 전반 경기장이 떠나 가도록 소문을 놓군 했다. 그러던 이광수 선생이 다시 중용을 받아 연변대학에 발을 붙힌 것은 1975년, 당시 비록 대학학력을 갖고 있지 못한 이광수 선생이었건만 다년간의 탐구와 실천경험은 그이로 하여금 맡은 바 대학교수 과제를 넘쳐 수행하게 했다. 또한 1975년부터 1992년 정령퇴직할 때까지 연변대학 체육학부 부주임, 주임직을 역임하면서 양성해낸 제자들로는 허준호, 방인권, 이호은, 주청렬, 김민영, 최영숙, 김복순, 박경희 등 1000여명, 그들 모두가 연변대학, 연변축구팀 및 각 분야에서 한 몫을 크게 담당하고 있다. 에필로그 사람은 누구나 과거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거의 과거가 없을 지경으로 과거에 대해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은 그 과거가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광수옹은 나라의 수요 때문에 대학공부마저 포기한 인간이다. 후에 그는 직함평의 때 그 학력 때문에 많은 저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광수옹은 과거에 대해 할 얘기와 자랑거리가 많다. 도시락을 싸들고 사흘동안 들어도 다 듣지 못할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담, 거기에는 사람의 자세를 바로 잡아줄만한 철리가 그렇게도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광수옹의 인생담을 들을 수가 없다. 이광수옹이 이 세상과 작별한지도 어언간 12년이 된다. 이 글을 쓰는 순간,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감출 수가 없다. 중국 조선족축구계의 큰 별이었던 이광수옹 ㅡ 부디 하늘 나라에서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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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6
  • 중국 조선족 박성 국가팀 발탁은 시간문제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얼마 전에 있은 2014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제2차 경기 베이징 - 서울전에서 “최우수 선수상(MVP)”을 받은 중국 베이징 궈안 팀의 조선족 선수 박성에 대해 요즘 중국 축구계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저명한 축구평논가인 바오야위(博亚雨- 박아우)는 “이대로라면 박성의 국가팀 발탁은 시간문제”고 극찬했다. 북경스포츠 중계방송 해설자는 한국국가팀 선수들이 운집한 서울과의 중원싸움에서 여유있게 공방을 조절하는 박성과 하대성의 현란한 배합을 수차 찬사, 박성을 국가팀에 추천했다. 경기 후 서울감독 최룡수도 북경팀의 가장 인상깊은 선수로 장시저(张希铁- 장희철)과 박성(39번)을 꼽았다. 국내의 스포츠전문지 “체단주보(体坛周报)”는 박성과 하대성이 중원에서 치륜 돌아가듯 손발이 맞았다며 국안의 중원 쌍벽은 이날 경기의 제일 볼거리었다고 평했다. 현재 베이징 궈안에서는 박성과 한국용병 하대성의 조합을 “성성(成成)조합”이라 하면서 높이 평가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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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6
  • 울고 웃는 마작판
    ■ 이진숙 나는 “마작귀신”은 아니지만 마작노름은 무척 즐긴다. 마작놀이가 비록 두뇌운동과 노인들의 치매예방에 좋다지만 하루 4시간 이상 초과하면 건강에 해롭다고 한다. 마작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니깐. 지금 우리 나라 노인인구는 2억으로서 전체 인구의 15%에 달한다는데 조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중국 노인들의 행복지수가 제일 높다고 한다. 하긴 중국 노인들의 생활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공원에 가면 노인들은 춤추고 노래부르고 태극권을 하고 또 노인무도장, 노래교실, 노인대학 등에 다니면서 각 자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첫 째로 손 꼽히는 것은 아마 마작노름일 것이다. 각 계층, 각 행업, 집집마다 사람마다 즐겨노는 지력체육운동이 마작이 아닌가? 마작은 웃기를 즐긴다. 마작은 줄국에서 기원되었고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황실과 귀족들이 놀던 궁중유희로부터 민간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발전했으며 청나라 중기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136장의 마작쪽이 됐다 한다. 국수(國粹)라 불리우는 마작은 명나라 때 만병초(萬秉迢)란 사람이 “수호전”의 양산박 호걸들을 기념하려고 알심들여 설계해 만든 오락공구란다. 108명 양산박 호걸들을 뜻하는 마작꽃(108장)은 제가끔이라 9소는 “9문용시진”을 나타낸다는 등등이란다. 동서남북중(20장)은 양산박 호걸들이 사방에서 모여왔다는 방향을 뜻하고 “白”과 “發(8장)”은 호걸중에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있다 해서란다. 알고 보면 전통오락문화인 마작쪽에는 수자로부터 도면에 이르기까지 정말 흥미진진한 뜻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마작의 내용처럼 그 재미도 특별한 맛을 돋구는 것이다. 20여년간 나의 마작노름역사를 회고해보면 노름을 노는 그속에서도 느끼고 깨우친 바가 퍼그나 된다. 마작은 울 줄도 웃을 줄도 안다. 맨 처음 놀 때엔 보이는 건 죄다 “츠, 차”하면서 패가 다 됐다 생각되면 돼지의 돌진성미처럼 막무가내로 마작쪽을 친다. 그 다음엔 꽝이다. 돈이 줄줄 나간다. 짜증도 막 난다. 노름이 줄거울 대신 걱정을 안고 논다. 내 세포가 좋아할까? 이럴 때면 내눈에 보이는 마작쪽들이 울고 있다. 그럭저럭 노름력사가 길어지다보니 지금은 어물쩍하게 노는것 같다. 헌데 마작이라는게 너무도 이상하다. 운이 좋을 때면 눈감고 놀아도 마작쪽이 춤추며 내 손에 들어 오지만 안될 땐 살얼음 딛고 조심조심 걷듯이 무진 애를 써도 연거퍼 꽝, 꽝이다. 고추가루 팔러 가니 바람불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격이다 과연 운수라는 게 있나부다. 그러길래 마작군들이 하는 말 “3은 기술이요, 7은 운수다” 그래서 마작은 기술에 울고 운이 좋아 웃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짜증도 원망도 사그러지게 된다. 손자병법에도 실패가 거듭될 땐 시기를 기다리라 했다. 슬렁슬렁 배경이 되어 놀면서 말이다. 노름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급하여 조바심을 내여 짜증낸들 손해보는 것은 본인이다. 눈이 있고 귀가 있다는 마작을 울게 말고 웃게 하라. 격앙된 감정은 치명적인 독소를 방출한다 했다. 성 나고 분노한 사람의 혈액을 추출해 실험용 생쥐한데 주입했을 때 쥐들은 2분도 안돼 죽었다 한다. 내가 울면 마작이 운다. 무슨 일에서나 조급성을 삼가하라 했다. 머리를 쓰면서 상황파악도 하고 즐겁게 논다면 시간을 사고 건강을 사고 치매를 예방하고 꿩먹고 알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일거삼득이 이닌가. . 늙어서는 돈을 팔아 시간과 건강을 사라고 했다. 우는 마작은 독이고 웃는 마작은 약이다. 내가 웃어야 마작도 웃는다. 2014년 2월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4-03-16
  • 이장수 칭다오서 중국 갑급리그 관전
    [동포투데이 연변 리포터 김철균] 15일, 한국의 “마귀감독” 이장수가 칭다오에서 중국 갑급리그 개막전인 칭다오 해우팀과 청두텐청팀(成都天诚)의 경기를 관람, 경기장 분위기를 돋구었다. 한국 축구계의 “중국통(中国通)”으로 불리우는 이장수 감독의 청도행, 그가 칭다오 해우팀의 사령탑을 잡게 될가? 10여년 전에도 칭다오 이중팀의 감독직을 맡아 중국 슈퍼리그우승을 이끌었던 그가 칭다오 해우팀의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 스포츠
    2014-03-16
  • 중국 2억 8000만명 주민 불안전음용수 사용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국가환경보호부는 14일 첫 전국적인 대규모 연구결과를 발표, 중국에서 2억 5000만명 주민의 주택구가 중점 오염기업과 교통간선도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2억 8000만명의 주민들이 불안전음용수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시나닷컴이 15일 전했다. 연구결과 중국인들은 목전의 스모그 등 현대형의 환경오염에 노출돼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형의 환경오염에도 여전히 노출돼 있었다. 계획과 산업 분포의 원인으로 중국은 여전히 1억 1000만명 주민의 주택 주변 1킬로미터 이내에 석유화학, 점결탄, 화력발전소 등 중점 오염배출기업이 있으며 1억 4000만명 주민들의 주택 주변 50미터 범위내에 교통간선도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편 중국에서 5억 9000만명 주민들이 실내에서 직접 고체연료로 밥을 짓고 있으며 4억 7000만명 주민들이 실내에서 직접 고체연료로 난방을 해결하고 있으며 2억 8000만명 주민들이 불안전한 음용수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 국가환경보호부는 보고서에서 생활용에너지 청결화와 우질화를 가속화하고 음용수의 안전개조를 다그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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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아시아
    2014-03-16
  • 말레이시아 총리 “실종 항공기 통신장비, 인위적으로 중단”
    (사진설명: 나집 말레시아 총리 기자회견 현장)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나집 말레이시아 총리는 15일 수도 쿠알라룸푸르 인근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말레이시아 실종기의 통신장비의 작동이 인위적으로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나집 총리는 실종 여객기 통신장비 작동이 인위적으로 중단되고 여객기의 항로도 인위적으로 이탈되었으나 현재 여객기의 최종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고 소개했다. 실종된 비행기는 8일 쿠알라룸푸르에서 베이징을 향하던 도중에 연락이 두절돼 일본을 포함한 각 국이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수색을 계속하고 있지만 기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실종기가 납치되었다는 언론 보도에 나집 총리는 말레이시아는 지금 여객기 납치를 망라한 모든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은 말레이시아 당국자 등 복수의 소식통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인용해 “수색 당국은 범죄행위가 있었다는 의혹을 굳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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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14-03-15
  • 김수현 2014 아시아“남신”순위 선두를 달려
    최근 2014년 아시아주 10대 “남신”에 관한 화제가 연속 이어지고 있다. 김수현, 이민호를 비롯한 한국 롱다리 남자 연예인들과 EXO 멤버들이 선거표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대로 일본 남자 연예인은 순위표에서 찾아볼수가 없었다.
    • 연예·방송
    2014-03-15
  • 김우빈 팬미팅 차 대만에 도착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김우빈은 드라마 “상속자들”이 아시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신세대 한류천왕 반열에 올랐다고 중국 시나닷컴이 평가했다. 보도는 김우빈이 아시아 팬미팅 투어를 위해 14일, 대만에 도착했으며 공항에서 검은색 스프링코트에 선글라스를 낀 멋진 모습으로 팬들을 향해 친절하게 손을 저어 인사하고는 바람같이 떠나갔다고 전했다. 이번 팬미팅은 지난달 홍콩을 시작으로 15일 대만, 29일 상해, 4월 5일 태국에서 이뤄진다. 앞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중국 북경 등지에서도 팬미팅 투어가 열릴 예정이다. 소속사인 IHQ는 “지난달 홍콩 팬미팅에 1700명이 몰린데 이어, 이번 대만 팬미팅 행사에도 티켓 판매 5분만에 1500석이 매진되는 등 현지에서의 관심이 뜨겁다”고 전했다.
    • 연예·방송
    2014-03-15
  • 일본 오끼나와 유람기
    ■ 이진숙 4년전, 60년 만에 한 번 씩이라는 “호랑이 해” ㅡ 2010년 여름에 우리 양주는 북경에 있는 둘째 딸네와 함께 일본 오끼나와여행을 갔다. 오끼나와는 입본열도 남단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태평양과 남해가 있었고 옛날부터 “유구왕국(流球王國)”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해상기후라 사시장철 봄처럼 따뜻하고 숲을 이룬 종려나무며 갖가지 아열대 식물과 그 열매들이 함께 어울려 그야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아열대지구의 풍경화를 방불케 한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정결한 백사장, 두눈이 모자라 더 볼 수 없는 넓고 푸른 바다, 가슴이 탁 틔고 감탄사가 연속 터져 나온다. 아! 오!ㅡ 미풍이 살랑살랑 불 때마다. 여인의 치마주름 같은 잔잔한 파도가 조용히 밀려오다가도 때론 바위에 부딪쳐 새하얀 물갈기를 날리다가 대뜸 물보라로 흩날린다. 멀리서 보느라면 해빛에 반사된 물방울들은 마치도 수만개의 은구술인양 반짝이며 사처로 흩어진다. 절승경개가 따로 없다. 일본은 세계3위 경제강국이고 1위 장수국으로 오끼나와는 또 일본의 장수고장이라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여서 현재 오끼나와는 총면적의 3분의 1을 미군이 차지하고 있다. 오끼나와에서 우리는 해변가의 한 5성급 호텔에 들었다. 시설이 구전하고 티없이 깨끗한 방이었으며 특히 화장실은 중국에선 그때까지 보급되지 못한 신비한 시설이었다. 더구나 손님들을 보면 한결같이 미소를 보내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접대원 할머니들을 볼 때면 너무나 송구스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항상 목에 기운을 주며 꼿꼿이 머리를 쳐들고 걸으면서 고개 숙여 인사에 습관되지 않은 중국인들도 예절바른 일본인들에게 탄복하면서도 나처럼 무척 불편을 느꼈으리라. 한번은 저녁식사 후 바다가에 나갔다가 호텔로 돌아오는데 웬 승용차 한대가 달려왔다. 횡단선도, 지시등도 없는 좁은 길이라 우리 걸음을 뚝 멈췄다. 헌데 웬걸, 승용차기사는 우리가 “촌닭”인걸 눈치챘는지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어 “먼저 가라”는 시늉을 했다. 감동을 먹었다. 연길 같으면 어림도 없지, 횡단선이 있어도 차들은 행인보다 먼저 지나겠다고 사정이 없다 태평양과 남해가 이어진 곳, 사면이 바다였지만 오끼나와에서 비린내란 전혀 없었고 그 어디를 보아도 쓰레기 하나 널린 곳 없었다. 환경보호의식이 세계에서 으뜸인 일본은 많은 투자를 하여 냄새를 풍기는 해초를 수시로 제거하고 또 특수한 설비로 바다물을 정제하여 직접 음료수를 만든다고 했다. 마셔보니 그 맛이 광천수보다도 훨씬 낫았다. 하얼빈에서 왔다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허위광고가 없고 뭐든지 거짓과 가짜의 정체가 들어나면 TV에 나와 반성하고 국민의 직책읋 받아 영원히 매몰된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식당에서 어머어마한 분들이 식사하고 갔는데 사장이 남은 음식들을 딴 손님들한데 올렸다가 공교롭게도 그 일이 들통나서 사장은 TV앞에서 전 국민에게 사죄하고 3년 영업중지를 당했단다. (발달한 나라의 국민의식이란 곧 이런거였구나.) 정말 신비하게 들렸다. 그런데 참 우리는 불안과 공포에 떨며 살고 있다. 먹는 것부터 쓰는 것까지 하나부터 열, 안심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가짜식품, 가짜약, 허위광고 권력부패…몸부림쳐도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하기야 우리 중국도 멀지 않아 세계 최대의 발전국으로 도약할 거고 국민의식도 놀랍게 제고될 때가 올 것이다. 오끼나와에 가서 크게 눈에 띄인 것이 또 하나 있다. 가는 곳마다 길가에 띄염띄염 음료수 자동판매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왜 하필이면 밖일가? 가이드가 말했다. 일본은 민주이식이 특별히 강한 나라라고 한다. 그 작은 땅에 인구가 1억이 넘기에, 전쟁이나 지진에 대비하여 사면바다에 포위되어 일본인이 멸종될가 우려되여 만든 하나의 조치었다. 재난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도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게 말이다. 밥은 40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물은 일주일만 못 마시면 죽는다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생육을 제창하고 아이가 셋 이상이면 나라에서 보조하여그들의 의료비, 교육비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한다. 나중에 우리는 동아시아에서는 제일 크다는 지하미술관 “옥천동”을 구경했다. 옥천동의 전체 길이는 약 5킬로미터로 95만개의 갖가지 모양새를 가진 종유석 (鐘乳石)이 있었다. 안에 발을 척 들여 놓는 순간 우리 모두는 환성을 올렸다. 조물주가 만든 대자연이의 걸작이라 할까? 과연 동양제일의 천태만상의 정경이 펼쳐진 것이다. 한두사람이나 겨우 지날갈 수 있는 다리를 따라 가노라면 양켠에는 굵다란 얼음고드름 같은 것이 주렁주렁 드리웠는데 어떤 것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지나면서도 당금이라도 머리우에 떨어질가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다리밑으로는 물까지 졸졸 흘렀다. 난 그저 와, 와 연신 찬탄을 내뿜었다. 손자놈은 좋다면서 맨 앞장에서 달려가다가는 뒤돌아보면서 막 소리지르기도 했다. “옥천동”에서 나와 시계를 보니 근 1시간이 걸렸다. 대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위대한 걸작 ㅡ “옥천동” 지하미술관이여 더많은 관광객들을 불러주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맘껏 누리게 하라! 3박 4일에 거친 일본 오끼나와여행, 다른 어떤 여행지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즐거움과 그 느낌이야말로 얼마나 감미롭던가. 오끼나와 해변가의 정자에서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지구상에서 제일 낮은 곳은 바다, 그 겸손함에 크고 작은 강물들이 끊임없이 바다로 향해 흘러간다. 바다는 또 한없이 넓은 품으로 크고 작은, 깨끗하고 어지러운 모든 강물들을 반겨 안아 준다. 바다같은 흉금, 참 음미해 볼만하다. 오끼나와의 푸른 하늘아래 펼쳐진 한폭의 아름다운 아열대 풍경화를 감상하면서 느꼈다. 세계 장수고장이 결코 명불허전이 아니구나. 호텔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상점에서 길가에서 일본인들과 순간순간 만나면서 발달한 나라의 국민도덕의식이란 곧 이런 거구나를 마음에 새겨보았다. 잘 있거라, 오끼나와여, 잘 있거라 아름다운 고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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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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