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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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관광객 말레이시아 관광 거부
    말레이시아 항공 MH370 실종 여객기 사건이 미치는 영향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지난 26일 중국청년여행사, 국제여행사 본사, 첩달(捷達)국제여행사 등 많은 중국 여행사에서 전한 소식에 따르면 현재 말레이시아 관광 시장이 바닥을 치고 있으며 문의 고객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예약된 고객들의 환불 요구가 빗발친다고 베이징 청년신문 기자가 보도했다. 또한 중국청년여행사는 26일 말레이시아 항공사 항공편을 잠정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말레이시아 관광단 환불요구 빗발친다 국제여행사 본사의 관련 책임자는 "말레이시아 항공 사건은 말레이시아 관광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신청 관광객이 극히 적다"고 말하면서 말레이시아 항공 사건이 발생한 후 지금까지 말레이시아로 향발한 관광단이 한팀도 없고 기타 관광지를 선택한 관광객들도 말레이시아 항공사는 피해달라는 요구를 제기한다고 밝혔다. 중국청년여행사 시장부 책임자 갈뢰(葛磊)는 이번 사건은 말레이시아 관광시장에 큰 충격을 줬고 사건이 발생한 후 거의 말레이시아 관광팀을 조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서 "말레이시아 관광 시장은 역사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말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관광 시장은 중국 해외 관광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기 때문에 중국의 전반 해외관광 시장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동남아 업무를 관리하고 있는 첩달국제여행사 양유일(楊維一) 매니저는 "지난해 3월 말레이시아를 찾은 중국 관광객은 약 8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올해는 현재까지 1000명에 불과하다. 말레이시아 관광은 돌이킬수 없는 곤경에 빠졌다."고 소개했다. 기타 관광 시장에도 피해주다 첩달국제여행사 양유일 매니저는 "말레이시아 항공 사건은 동남아 시장 뿐만 아니라 전반 관광업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고 말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항공 사건이 발생한 후 관광객들은 정서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하면서 첫주에는 관광객들이 말레이시아 항공기 탑승을 거부했지만 그후로는 단순한 항공사 선택 문제가 아니라 말레이시아 관광 자체를 배척하는 태도 변화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항공 사건은 말레이시아 관광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아니라 주변 나라의 기타 관광 상품에도 피해를 주고 있다. 양유일 매니저는 "관광객들의 불안 정서는 항공기 자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전하면서 한국, 태국 등 인기 관광 상품도 일부 거부당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현재 관광객들의 정서가 점차 안정되면서 기타 관광시장에 대한 영향이 점차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전한데 의하면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동남아 국가는 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해외 관광지였다. 메릴린치의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말레이시아를 찾는 관광객 중 중국 관광객이 10%를 넘어 말레이시아 관광 수입의 6%를 차지하며 이것은 GDP의 0.4%에 상당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 이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4년 관광 시장에 큰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올해 "말레이시아 관광의 해" 주요 목표도 중국 관광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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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9
  • 박근혜 대통령, 대북 3대 제안 발표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독일을 국빈 방문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독일 통일의 상징도시인 드레스덴에서 평화통일의 기반을 만들기 위한 대북 3대 제안을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옛 동독지역의 대표적 종합대학이자 독일의 명문 공대인 드레스덴 공대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행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 우선 해결 ▲남북 공동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구축 ▲남북 주민간 동질성 회복 등 3가지 구상을 북측에 제안했다. 박 대통령은 “통일된 나라에서 같이 살아갈 남북한 주민이 서로를 이해하고 한데 어울릴 수 있어야 한반도가 진정 새로운 하나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며 “이제 남북한은 교류협력을 확대해가야 하며 일회성이나 이벤트 식 교류가 아니라 남북한 주민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교류협력이 필요하다”고 3대 제안의 배경을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드레스덴은 구 동독 지역 가운데 가장 빠르게 발전한 지역으로 분단의 극복과 통합의 상징이다”고 지적하며 남북이 통일하면 북한 지역도 급속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통일이 역사적 필연이었듯 한국과 북한의 통일도 역사적 필연이다”고도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25일~28일의 일정으로 독일을 방문 중이며 26일에는 메르켈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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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9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 (5) “출중한 선수 먼저 훌륭한 인간이 돼야”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지금 축구경기를 재미있게 보다가도 가끔씩 선수들이 심판들한테 트집을 잡는 행위를 보노라면 기분이 잡칠 때가 많다. 아무리 경기장에서 기술이 출중한 선수라 해도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수 없다. 특히 국가를 대표한 선수들라면 이러한 행위는 결국 나라의 망신이다. 돌이켜 보노라면 옛날 우리가 볼을 찰 때에는 절대 안 그랬다. 그때는 대우가 형편없고 몹시 고생스러웠지만 선수들 거개가 자아형상을 몹시 중요시했기에 그들의 우수함은 오직 경기에서만 볼 수 있었다.” 이는 대졸생출신 축구원로 허명용 선생이 늘 하는 얘기이다. 일찍 1932년 도문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해마다 열리는 만선(만주국 ㅡ 조선)축구경기대회를 통해 축구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어린 허명용이었다. 했건만 허명용이 모교인 백봉소학교에 붙자마자 간악한 일제는 학교의 모든 체육과를 군사과로 대체했기에 허명용을 비롯한 축구조무라기들은 하학 후나 쉬는 날마다 끼리끼리 두만강변에 모여 공차기유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의 조건이래야 축구화는 고사하고 고무신도 없어 늘 맨발로 볼을 차다보니 발톱이 빠지거나 발가락이 상하는 일은 예상사었지만 하도 축구를 좋아하는 애들인지라 학교와 가정의 뒤받침이 없어도 힘들고 짜증나는 줄 몰랐다. 그러던 어린 허명용한테 “8.15”광복은 배움의 길이 활짝 열린 동시에 축구를 체계적으로 전공할 터전도 마련됐다. 그 때로부터 어린 허명용은 초중과 고중 그리고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후에 연변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면서도 언제나 소속 학교팀의 중견선수로 활약했으며 1955년 길림성축구팀이 세워지자 이광수, 지청용, 최철봉, 김동하, 박광순 등 원로들과 함께 길림성팀의 제1대 선수로 됐다. 허명용 원로의 회억에 따르면 그 때 길림성팀의 선수들은 모두가 빈고농가정의 출신이었기에 겉은 순하나 속이 강한 것이 특점이었으며 또한 모두 부모가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었기에 공부에 대한 집념도 몹시 강했는바 공부에 열심했거나와 공부를 잘한 것도 사실이었다 한다. 그리고 규율을 잘 준수하기로 전국에 이름이 있었는바 보통 1년에 반년 이상은 외지생활을 했지만 불평을 부리는 선수는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허명용 원로한테는 다음과 같은 애통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1960년, 그가 외지에서 한창 경기에 투신하고 있을 때 가정으로부터 애가 몹시 앓는다는 전보가 왔다. 헌데 당시 코치가 경기에 영향을 줄가봐 허명용한테 알리지 않고 있다가 경기가 끝난 뒤에야 전보문을 내놓았다. 그러자 단숨에 기차역에 달려온 허명용은 기차에 오른 뒤에 옷을 바꿔입으면서 연길까지 왔으나 그 때는 애가 이미 숨을 거둔 뒤었다. 이렇듯 기막힌 사연이었건만 허명용은 애를 산에 묻자 바람으로 다시 떠나야 했다. 하다면 집에서 애를 키우면서 가정중임을 떠메는 부인들의 고생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이렇게 고생을 초개처럼 여기는 선수들이었기에 당시 길림성팀은 완강하기로 전국에서도 이름이 있었으며 국가 체육운동 위원회에서는 외국의 축구대표단이 올 적마다 늘 길림성팀을 중국대표팀으로 출전시키군 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국축구인들은 중국의 기타 축구팀의 풍격을 두고 “무대예술표현”이라고 하면서 그들과 경기치르기를 꺼려했으며 그래도 길림성팀과 맞붙어 봐야 축구를 하는 맛이 난다고들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 때의 선수들 또한 축구를 잘하는 동시에 정치면에서의 발전도 몹시 중시, 김승태, 손중천, 지운봉, 이창민 등 많은 선수들이 그 때에 입당을 쟁취했으며 전국에서 축구팀에 당지부가 있은 팀은 유독 길림성팀 뿐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중국축구에 대해 허명용원로는 축구의 기전술이 많이 발전하고 장끼있는 선수들이 많이 나왔으며 받는 로임도 천문수자건만 빈곤호를 돕거나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선수가 적은 것이 몹시 유감스러우며 진정 가치가 있는 선수가 되자면 출중한 선수 먼저 훌륭한 인간이 돼야 한다고 힘주어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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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9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3 )
    ■ 허길성 (전번기 계속)1950년대말 대만으로 쫓겨갔던 장개석의 국민당군대가 대륙의 복건과 광동 지구에서 자주 도발을 감행하면서 “대륙수복”을 떠들어대기도 하고 한국의 비행장을 리용하여 대륙의 동북지구에도 비행기를 파견하여 간첩을 락하시키는가 하면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전단지도 살포하군 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비해 인민해방군에서도 대륙의 전략적요충지마다 주요 병력들을 배치했는데 우리 부대 역시 중앙군위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였던것이다. 교하에서 집합한 우리 부대는 고사포장비들을 인계받은 뒤 인차 진지를 구축하고는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종목은 여러가지였다. 경보소리와 함께 진지에 진입하기, 정해진 시간내에 전투태세를 갖추기와 목표의 고도와 속도에 따라 그 목표를 조준하기 등으로 그중 일단 어느 한 종목의 훈련을 시작하면 눈을 감고도 척척 해낼수 있을 정도로 숙련될 때까지 10차례고 20차례고 반복하군 했다. 당시 교하에는 우리 136사단의 본부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별의별 병종부대가 다 있었다. 례하면 포병부대, 고사포병부대, 땅크병부대, 자동차운수병부대 등이였다. 그 몇가지 병종부대중 나는 자동차운수병부대가 제일 부러웠다. 왜냐하면 다른 병종의 기술을 배워서는 제대후 써먹을수 없겠으나 자동차운수병부대만은 제대후에도 계속 자동차를 몰수 있겠으니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사람의 일이란 묘할 때가 많다. 어떤 일은 아무리 기회를 노리며 노력해도 헛수고일 때가 많지만 어떤 일은 크게 품을 들이지 않아도 척척 풀릴 때가 많은법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당시 대포와 고사포 등 부대는 포를 끌고다니기 위해서도 부대에 자동차가 있어야 했던만큼 이런 부대의 사병들은 반드시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워야 했으니 이는 나를 놓고볼 때 큰 행운일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를 배운다고 하니 기쁜중 근심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나같은 시골뜨내기가 이전에 자동차를 구경은 했어도 언제 운전대 한번 잡아본적도 없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우리 고사포병부대 장병들을 둘러보니 그 거개가 나같은 농촌출신이였고 도시출신은 별반 없었다. 그리고 자동차운전면허가 있는 사병 또한 그 무슨 큰 학교를 나왔거나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였다. 순간 나는 려순앞바다 소평도에서 한어글을 배우던 나날들이 떠올랐고 열심히 하면 꼭 배워낼수 있다는 자신심이 생겼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달라붙자 시작이 절반이라고 난제가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우리는 자동차리론교재를 외우는 한편 진짜 자동차가 아닌 모형자동차에 올라 조작훈련을 했는데 훈련초반에는 모두가 자동차운전기술을 익히는것이 엇비슷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내가 다른 사병들보다 앞서는것이 알리기 시작했고 그 차이 또한 날이 갈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알고보니 내가 그 무슨 남보다 뛰여나게 총명해서가 아니였고 훈련시간을 더 잡아먹어서도 아니였다. 그것인즉 내가 평소에 글공부에 중시했기에 남들보다 교재내용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터득할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나는 자동차운전면허시험끝에 함께 시험을 친 사병들중 제일 첫진으로 합격되여 자동차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였는데 나의 리론시험성적은 전 사적으로도 앞자리를 차지했다. 1959년 부대에는 또 새로운 명령이 중앙군위로부터 떨어졌다. 우리 46군에서 자동차운수련을 새로 내오는데 각 사단으로부터 가장 우수한 운전사 2명씩 선발하게 된다는것이였다. 중앙군위의 명령에 따르면 그해 중국인민해방군이 서장으로 진군하면서 후근운수가 아주 간고하기에 각 군구에서 운수부대를 조직해 서장진군부대의 후근을 책임진다는것이였다. 당시 우리 전반 심양군구에서는 몇개 련대가 조직되였는지는 잘 알수 없었으나 우리 46군에서는 한개 련대가 조직됐으며 우리 사단에서 선발된 2명의 운전사중 바로 내가 있었다. 그해봄 우리는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 집결됐다. 당시 운수련대는 도합 45대의 자동차에 매 차량마다 전사 6명씩 배치되였다. 당시 우리가 몰게 된 자동차는 구쏘련제 가스차였는데 차가 낡아 자주 고장이 생기는데다 힘도 휴발유차에 비해 많이 못했으며 거기에 그때는 청장도로가 닦이지 않아 길이 엉망이여서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서 서장 동료장족자치주까지 다녀오자면 한달이란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것이였다. 1959년 4월초, 우리는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서 출발, 매인당 20일씩 먹을 식량(주로 빵이나 과자 등)을 준비했다. 당시 매차량마다 운전사가 2명씩이였고 자동차우에는 기관총 1정을 걸어놓고 4명의 전사가 비상사태에 대처할 준비를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당시 서장으로 가는 곳에는 토비들이 득실댔는데 토비들은 자동차같은것이 지나가는것을 보면 곧잘 기습하군 하였기 때문이였다. 우리는 자동차가 산굽이를 돌 때와 부락으로 들어갈 때면 흔히 기관총 20여발씩 쏘군 했다. 그리고 우리의 자동차 45대가 기본상 동시에 움직이였다. 산사태같은것이 발생하여 길이 막히거나 자동차가 물웅덩이같은 곳에 빠질 때면 공동히 힘을 합쳐 돌사태를 제거하거나 물웅덩이에서 차를 구조하군 하였다. 또한 우리의 차 45대가 거대한 행렬을 지어 움직이면 토비들도 감히 달려들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우리의 자동차행렬은 될수록 부락에 들어가지 않고 허허벌판에서 식사를 할 때가 많았다. 그것이 그래도 안전하였고 백성들한테 신세를 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을 놓고보면 서장의 부락들에서 가족만 마을에 있고 남정이 산에 들어가 토비노릇을 하는 가정이 많았다. 그리고 그 당시 서장의 백성들은 공산당 및 중앙정부와 인민해방군의 민족정책이나 “3대규률 8항주의” 등에 대해 거의 100% 정도로 모르다보니 우리에 대해 항상 경계하는 모습이였다. 아마 그들은 우리를 당지의 무장토비나 기타 다른 군벌로 여기는 모양이였다. 때문에 장정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돌멩이같은것을 들고 달려들 태세를 보였고 부녀자나 기타 로약자들은 우리를 보면 도망가거나 숨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한편 그들은 우리가 해방군이라는것을 쉽게 식별할수 있었으나 우리는 마을백성들중 누가 토비이고 누가 선량한 평민인가 하는것을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서장으로 들어가는 첫진의 운수차대중 서장의 장족부락에서 토비들의 기습을 당한 사례가 자주 있었으며 전사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 운수부대는 이미 먼저 간 차대의 교훈을 들은지라 그 대비책을 면밀히 하였다. 그 대비책인즉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될수록 마을에 들어가 숙영하지 않았고 차가 굽인돌이를 돌 경우에는 백배의 경계심으로 그 어떤 사태에도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기관총소사를 하는것으로 우리의 힘을 과시하군 하였다. 때문에 몇차례에 거쳐 청해 고려에서 서장의 동료로 오가면서 단 한차례도 토비들한테서 기습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돌사태와 질병 등으로 우리 운수차대의 270명 장병들중 6명이나 이러저러한 사고로 희생되였다. 그도그럴것이 청해에서 떠날 때는 모두 신체검사를 하고 각종 예방주사같은것을 맞았으나 15일 이상씩 목욕 한번 못하고 더운물 한번 마시지 못하면서 불철주야로 달리다보니 아무리 억대우같은 사나이도 견디기가 힘들었던것이다. 이렇게 1년간 우리는 청해와 서장 사이를 5차례 오가면서 중앙군위에서 맡겨준 운수임무를 원만하게 완수했는데 한번씩 갔다가 올 때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1년간의 시일이 지나 원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하지만 부대생활이란 항상 변수가 생기는법, 언제 또 어떤 일이 발생하고 또 어떤 명령이 떨어지고 하는것은 그 누구도 알수 없었으며 경우에 따라 생명도 바칠수 있을 각오가 있어야 부대생활을 할수 있었던것이다. 만약 이런 각오가 없다면 그런 군인은 군인자격이 없으며 군인생활을 잘할수 없을것이 분명했다. 임무를 마치고 교하의 사단본부로 돌아오니 나의 체중은 10킬로그람이나 줄었다. 서장에서 교하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표창대회를 열고 서장으로 갔던 동료와 나를 크게 표창했고 우리 2명에게 한달간의 휴가를 주면서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당시 나의 신체는 진짜 휴식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곧 음력설이 닥쳐오는 때인지라 집생각이 간절한것도 사실이였다. 헌데 세상일이란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인것 같았다. 바로 내가 교하 – 조양천행 렬차표를 사놓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갑자기 부대에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사단내의 모든 장병들은 일률로 부대를 떠날수 없으며 이미 휴가로 집에 갔던 장병들도 몽땅 부대에 복귀해야 한다는 명령이였다. 또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였다. 아니나다를가 바로 음력설날 저녁 우리 부대에는 이동명령이 하달, 무작정 기차에 고사포 등 중장비를 싣고 이동한다는것이였다. 역시 어디로 가는지 뭘하러 가는지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때인즉 음력설기간이라 산악지구인 교하의 날씨는 몹시 맵짰고 바람도 세찼다. 하지만 부대의 움직임은 명령과 더불어 매우 신속하였다. 자정이 지나 새벽 1시가 좀 넘었을 무렵 우리는 교하역에서 모든 장비를 상역한 후 화물차에 올랐다. 우리가 화물차에 오르자 미구하여 기차는 기적을 길게 뽑으며 출발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차바람에 더욱 추워났다. 하지만 전사들의 관심사는 추운날씨가 아니였다. 바로 어디에 가며 그곳에 어떤 사태가 발생했는가 하는것이였다. 공교롭게도 기차가 달리는 방향은 동쪽인것 같았다. 그러자 전우들이 나름대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가는걸 보니 틀림없이 조선쪽이야.” “그래 아무래도 이상한걸 조선에서 또 전쟁이 터진게 아니야?” “그 가능성이 크다구. 어쩐지 기차에 오를 때부터 예감이 이상하다 했는데…” …… 헌데 이튿날 날이 밝을 무렵 기차가 조양천역에서 멈춰서더니 모두가 내리게 하는것이였고 이어서 함께 싣고왔던 고사포와 같은 중장비까지 하역하는것이였다. 조선으로 나가자면 도문쪽으로 계속 가야 할텐데 조양천에서 내리게 하는걸 봐서는 조선으로 가는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의 생각에도 나는 조선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전쟁이란것만은 분명히 알고있었다. 조양천에서 하차한 부대는 각 련대별로 그 일대에 고사포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개 련대는 삼봉동에 구축하고 한개 련대는 광석촌에 구축했으며 우리 련대는 인평촌에 있는 논에 고사포진지를 만들었다. 우리가 진지를 구축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얼마전 한국을 거쳐 날아온 국민당군 비행기 한대가 우리 나라 상공에 날아들었다. 당시 해방군 레이다부대에서는 이를 발견하고 즉시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에 전달했으며 사단본부에서는 각 고사포부대들에 즉시 전쟁상태에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국민당군 비행기는 연길쪽 상공으로 날아왔고 마침 연길 공원뒤산에 우리 군 고사포부대가 있었다. 헌데 고사포를 군용트럭뒤에 달고 이동하자고 하니 차고에 있던 트럭마다 기름이 얼어 시동을 걸수가 없었다. 당시 고사포부대 장병들은 그저 하늘로 날아지나는 적기를 바라볼뿐 속수무책이였다고 한다. 하기에 그 교훈을 살려 이번에 사단본부에서는 연변의 곳곳에 고사포부대를 증가시킨 한편 직접 진지를 구축하여 대기시키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진지를 다 구축하자 련장인 허국선은 전 련대의 사병들을 집합시킨 뒤 부대가 조양천에 오게 된 목적에 대해 알려주는것이였다. “지금 미제국주의와 대만의 장개석군대는 우리 동북변경지구에 수차 비행기를 파견하여 삐라를 뿌리기도 하고 간첩도 투하시키군 하고있다. 얼마전에도 국민당 비행기 한대가 개산툰지구에 날아와 삐라를 뿌리고갔고 조양천과 연길의 상공에도 나타났었다. 우리 부대의 임무는 이제 적기가 나타나는족족 그것들을 격추시키는것이다. 알았는가?” “알았습니다.” 임무는 분명해졌다. 이제 국민당 비행기가 나타나면 우리는 그 적기를 향해 일제히 고사포로 대공사격을 할것이고 적기 또한 우리한테 폭탄을 투하하거나 기관총소사를 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면 사상자가 날수도 있는것이다. 이는 전쟁이였다. 틀림없는 전쟁이였다. 준비가 빈틈없어야 하고 장병 모두가 희생될 각오도 돼있어야 했다. 이렇게 전시준비단계에 들어가자 부대의 규률은 더욱 엄격해졌다. 우리는 밤과 낮이 따로 없이 교대별로 진지를 지키면서 하늘을 응시했고 잠을 자도 옷을 입은채로 자야 했으며 통신병은 교대별로 무전기옆을 지키면서 레이다부대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기록하군 했다. 일단 적정이 나타나면 즉시 전투에 돌입할 태세가 다 되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집이 있는 룡정이 멀지 않았지만 좀처럼 갈수가 없었다. 또한 내가 근무하던 태양향도 마찬가지로 놀러갈수가 없었다. 헌데 우리의 고사포병부대가 조양천지구에 포진하자 적기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우리가 오기전에는 그놈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했었는데 왜 우리 고사포부대가 오자 깜쪽같이 “꼬리”를 사리는것일가? 당시 나를 놓고 보면 전쟁이란것이 어딘가 무서운건 사실이였다. 솔직하게 말해 세상에 누가 전쟁이 무섭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누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한편 한번 통쾌하게 전쟁에 투신해보고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남자라면 특히 군에 입대했다면 싸움 한번 해보는것이야말로 진정한 군인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그럼에도 적기가 나타나지 않다니? 이는 당시 모순된 나의 심정이기도 했다. 후에 들은 소문에 따르면 우리가 포진한 뒤 대만의 국민당군 비행기는 조양천지구를 피해 훈춘쪽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럼 적들이 어떻게 조양천에 해방군 고사포병부대가 포진하고있다는것을 알아냈단 말인가?! 틀림없이 적기가 투하한 첩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자기들 본부에 무전을 날린것이 분명했다. 다른 한편 그렇듯 전시준비단계에 있으면서도 나는 한어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나는 책을 모를 글자가 있으면 곧잘 기타 한족전우들한테 물었고 글자를 익히는 동시에 군복안속의 흰천에 새로 배운 그 글자를 적어두군 했다. 당시 우리는 조선에서 지원군들이 입던 군복을 물려받아 입었는데 군복의 안속은 흰천으로 박은것이였기에 거기에 글을 쓰기가 알맞춤했다. 왜냐하면 당시 종이도 귀했지만 종이에 적으면 쉽게 찢어지거나 잃어버릴수가 있었기에 그래도 쉽고도 오래동안 보관하려면 군복의 안속이 최고였다. 또한 아무 때건 글자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인차 군복을 벗어 다시 볼수도 있어 좋았다. 이렇게 오래동안 매일 몇글자씩 적은것이 얼마 안되여 군복안속은 한문글자로 수백자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내가 어떻게 열정스레 군복 안속에 한어글을 적었던지 많은 전우들은 나를 리해하지 못했다. 지어 어떤 전사들은 나를 “정신환자”라고 놀려주기도 했으며 나중에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정신환자”란 이 말은 허국선련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였다. 어느날 련장이 나를 불렀다. “허길성, 너 옷 한번 벗어봐라.” 내가 옷을 벗어 넘겨주자 련장은 옷속을 한참동안이나 까근히 뜯어보더니 다시 나한테 물었다. “너 왜 옷속에 글자를 써놓는거냐?” “옛 련장동지, 전 지금 한어글자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제가 조선족이기에 한어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야 기타 전우들의 문화수준을 따라갈수 있을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자 련장은 너털웃음을 웃더니 다시 정색해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길성, 너 정신환자인것이 아니라 아주 훌륭한 전사로구나. 너희들 조선족들한테 정말 탄복한다. 정말 끌질기고도 결심이 크단 말이다. 나도 이곳 조선족지구에 와서 조선말을 좀 배우고싶었으나 좀처럼 되지 않는구나.” 그것을 계기로 련장은 나에 대한 시선을 달리했다. 기실 련장은 지원군 고사포병부대에서 근무한적이 있는 로병으로서 일자무식인 문맹이였지만 지식을 아주 중하게 여기고 지식인을 존중하는 군인이였다. 거기에 거기에 허국선련장은 성격도 활달하고 시원시원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허국선련장은 늘 몰래 나를 지켜보기도 하고 자주 말도 걸어오면서 나를 무척 아끼고 관심하는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고사포진지를 구축한지도 몇개월이 잘되였다. 하지만 적기는 여전히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땅이 녹으면서 농민들이 논갈이를 할 계절이 다가오자 우리는 논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을 하지 않고 철수하게 되니 일단 안심되였다. 그도그럴것이 전쟁터에서 아무리 용맹을 떨치던 군인도 결코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진지에서 철수한 뒤 삼봉동과 광석에 포진했던 련대는 다시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로 돌아가고 우리 련대는 화룡의 청산으로 가게 됐다. 우리 련대에 다른 임무가 떨어졌던것이다. 청산으로 갈 때 나는 이미 부패장으로 진급했었다. (연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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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9
  • 중국군 유해 심양 도착, 성대한 영접의식 거행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3월 28일 점심, 437구의 6.25 참전 중국군 유해가 한국으로부터 중국 심양에 도착, 이국 타향에서 60여년간 깊이 잠들었다가 충혼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중국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오전 11시 30분, 장중한 영접의식이 심양 도선공항에서 거행됐다. 중국인민해방군 육군 제39집단군의 545명 장병들이 현장에서 유해들을 호위했다. 이 부대는 60여년 전, 한반도에 건너가 전쟁에 참가했던 역사가 있는 부대라고 언론은 소개했다. 한국 박근혜대통령이 지난해 6월 베이징을 방문했을때 선의의 표시로 유해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자료에 의하면 6.25 전쟁시기에 18만~40만명의 중국군 장병들이 전사했다. 1996년에 각이한 지역들에서 수집된 유해들이 파주공동묘지에 안치되였다. 유해확인사업은 지난해 12월에 시작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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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8
  • 日, 北 제재조치 ‘단계적 해제’ 언급
    [동포투데이 국제] 일본의 후루야 게이지(古屋圭司) 납치문제담당대신은 28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대한 일본의 독자적 제재조치에 관해 “북한이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성의를 가지고 긍정적인 대응을 한다면 독자적 조치의 단계적 해제는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을 밝혔다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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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8
  • 미국인의 절반, 미―러 새로운 “냉전”에 진입했다고 인정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최근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는 우크라이나 문제로 지속 긴장상태에 처해있다. 미국 여론조사기구 갤럽의 조사에서 미국인의 절반이 미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냉전”에 진입했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중국신문망이 미국언론을 인용해 28일 보도했다. 조사에서 50%의 미국인들이 또 한차례 “냉전”이 곧 닥치게 될 것이라고 인정했고 43%의 미국인들은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편 현지시간으로 26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벨기에서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으로 하여 새로운 “냉전”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며 목전의 상황을 “냉전” 시기의 배경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91년, 즉 냉전이 결속된 그해에 비슷한 여론조사를 했었다. 당시의 조사결과 25%의 미국인만이 미국과 러시아가 또다시 “냉전”에 진입할 것이라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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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8
  • 두 번째 단독 라이브 콘서트 ‘빅쇼 언플러그드’(BIC SHOW – Unplugged)!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뛰어난 가창력과 빼어난 음악성을 자랑하는 실력파 남성 듀오 투빅(2BiC, 지환·준형)이 오는 4월 26일, 27일 백암아트홀에서 2집 미니앨범 발매 기념 두 번째 단독 라이브 콘서트 ‘빅쇼 언플러그드’(BIC SHOW – Unplugged)를 개최한다. 투빅은 4월 10일 두 번째 미니앨범 ‘SOUL MATE(소울메이트)’ 발매를 앞두고 3월 24일 수록곡 ‘Your Love’를 선공개 했다. ‘Your Love’는 네오소울 장르에 감각적인 팝리듬이 돋보이는 곡으로, 이 곡이 선공개 되자 팬들은 “역시 투빅이다”, “누가 들어도 설레는 노래”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집 발매 후 약 1년 만에 2집을 발매하는 투빅은 올 1월 영화 ‘겨울왕국’의 OST <렛 잇 고(Let it go)> 커버에 동참, 유튜브를 통해 소울 충만한 R&B 버전을 공개하여 단기간에 약 30만 건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오로지 가창력과 음악성만을 꿋꿋이 고집해온 투빅은 이번 ‘빅쇼 언플러그드’에서 미니앨범 2집을 준비하며 더욱 성숙해진 음악으로 성원을 보내준 팬들에게 보답하겠다는 각오다. 4월 26일, 27일 양일간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진행되는 ‘빅쇼 언플러그드’에서 투빅은 봄을 맞이하여 로맨틱하고 감미로운 매력과 발랄함을 오가는 즐거운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첫 번째 단독 콘서트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투빅 특유의 유머와 화기애애한 무대는 물론 따듯한 봄날에 어울리는 부드럽고 달콤한 무대까지 한층 업그레이드된 공연을 기대해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빅쇼 언플러그드’는 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투빅만의 다양하고 풍성한 레퍼토리로 채워질 예정이며 봄날 소풍을 떠나는 듯한 어쿠스틱한 사운드로 관객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2012년 3월에 데뷔한 투빅은 데뷔곡 <또 한 여잘 울렸어>를 시작으로 <나이기를> <다 잊었니> 등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시키며 꾸준히 인기몰이 중이다. <불후의 명곡>을 비롯, 방송사들의 각종 인기 음악프로에서 독보적인 가창력을 앞세우며 팬들은 물론 관계자들까지도 주저 없이 환호갈채와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는 ‘리얼’아티스트로 떠올랐다. 투빅의 두 번째 단독콘서트는 4월 26일 오후 7시, 27일 오후 6시 서울 강남 백암아트홀에서 열린다. 예매는 3월 31일부터 인터파크와 예스24 사이트에서 진행되며, 티켓가는 66,000원, 55,000원이다. (공연문의. 02-749-9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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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8
  • 한중, 중국군 유해 송환식 인천공항에서
    3월 28일 아침 7시 30분 정부는 인천국제공항에서 한국에 묻혀있던 437구 중국군 유해를 중국측에 송환했다. 중국측 대표단 단장인 중국 민정부 무휼안치국 추명(邹铭) 국장과 한국측 대표인 한국 국방부 장비통제 차장인 문상균 준장이 송환 문서에 서명했다. 한국 주재 중국대사관 구국홍(邱国洪) 대사가 중국군 유해에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를 덮어주었다. 간단한 추모식이 있은 후 중국군 유해는 전용기에 실렸다. 3월 28일 중국측에 송환된 437구 유해는 6.25전쟁기간 사망된 중국군 유해로서 한반도 군사분계선 남측에 매장되어 있었다. 최근년간 한국측은 발굴과 감별을 거쳐 지원군 유해를 경기도 파주 묘지에 안장했다. 한중 양국이 2013년 체결한중국군 유해 송환협의에 따라 한국측은 지난해 12월부터 파주 묘지에 묻힌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 유해 발굴이 끝난후 올해 3월 17일부터 유해 건조, 등록을 시작했다. 송환식에서 중국 대표단 추명 단장은 중한 양국은 인도주의로부터 출발해 성의, 친선, 실무협력의 정신에 입각해 공동으로 중국군 유해 송환사업을 추진해왔다고 하면서 한국측 해당 부문과 관련 일군들의 협력과 노력에 대한 중국측의 감사를 전했다. 그는 한중 양국은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협력기제를 구축해 향후 발굴되는 중국군 유해가 해마다 청명절전에 송환되게 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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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8
  • 청주(한국) - 연길(중국) 전세기 항로 복항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연길공항에 따르면 연길―(한국)청주행 전제기 항로가 4월 4일부터 통항을 회복하며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비행, 항공권 가격은 1680위안이라고 중국 시나닷컴이 28일 보도했다. 연길공항 관계자는 이 항공편은 한국 이스타항공사가 집행하는 것으로 전세기형식으로 운영하며 승객들은 한국 청주공항에 도착한 후 공항 측에서 제공하는 무료버스로 한국 서울시내에 도착한다고 소개했다. 구체적인 비행시간은 다음과 같다. 연길―청주: 한국 이스타항공 ZE7322편으로 점심 12시 40분에 이륙해 오후 16시(한국시간)에 도착.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비행한다. 청주―연길: 한국 이스타항공 ZE7321편으로 오전 10시 15분(한국 시간)에 이륙해 점심 11시 45분에 도착,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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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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