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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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훈춘구간 붕괴된 고속철터널에 영양공급관 관통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지난 2일 새벽 2시경, 길림성 훈춘시 경내의 고속철도 소판령 1호 터널 건설현장에서 터널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해 12명이 갇혔으며 사고 발생 당시, 시공현장에서는 시멘트 주입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고 발생 후 36시간의 긴장한 구조잡업을 통해 3일 14시 40분경, 음시물 수송관이 관통했으며 갇힌 일군이 영양수송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이중관을 설치고 영양을 공급하게 된다고 중국 텅쉰망이 4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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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한국에서 운전면허 따는 중국인 증가추세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중국인 대부분이 노무나 관광으로 한국에 오지만 최근들어 중국인들이 한국에 입국하는 목적이 따로 생겼다. 바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려면 그 비용이 한국의 2배에 달하며 거기에 또 1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적은 비용으로 짧은 시간내에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한국의 운전학원에서 운전을 배우고 운전면허증을 취득한후 중국에 가서 다시 중국의 면허증으로 바꾸면 된다. 한국은 운전면허증 발급 관련규정을 느슨하게 하기때문에 훈련시간을 13시간으로 단축하였고 그 가운데 6시간의 운전실기시간이 포함되여있다. 통계에 의하면 지난 3년동안 7만여명의 중국인이 한국운전면허증을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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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中 연길시법원, 악덕 부동산업주 최학송에 징역 14년 선고
    [동포투데이 연변] 중국 길림성 연길시법원은 악덕 부동산사기죄를 범한 피고 연변북송부동산개발유한공사 및 법인 최학송에 대한 1심판결을 내렸다. 최학송에 유기도형 14년 3개월을 언도 및 벌칙금 20만 위안을 안겼다. 법원은 심리에서 연변북송부동산개발유한공사 및 피고인 법인대표 최학송은 비법적인 점유를 목적으로 허위 재산권증명을 담보로 차관, 상환능력이 없는 정황에서 진상을 숨기고 중복다매, 중복 담보차관의 방식으로 타인의 특별 거액금을 사취한 사실이 증실되였으며 소행은 계약사기죄, 채무도피죄를 구성했음을 인정했다. 법원은 1심판결에서 연변북송부동산개발유한공사에는 계약사기죄로 벌칙금 100만 위안, 채무도피죄로 벌칙금 20만 위안을 안기며 병행 처벌집행으로 벌칙금 120만 위안을 안긴다고 판결했다. 피고인 최학송에 대해서는 계약사기죄로 14년 징역에 벌칙금 10만 위안, 채무도피죄로 징역 6개월에 벌칙금 10만 위안을 안기며 병행 처벌집행으로 최종 유기징역 14년 3개월에 벌칙금 20만원을 안겼다. 공개 심리에 따르면 피고 연변북송부동산개발유한공사 및 법인 최학송은 도합 445채 아빠트를 621차 팔고 담보하는 등 수단으로 1000여명한테서 2159만 위안을을 사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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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중국 흑룡강성 , 러시아와 서비스무역 협력강화
    [동포투데이 국제]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 북동쪽에 위치한 헤이룽장성은 러시아와 2018년도까지 상당한 이윤 창출이 전망되는 서비스 무역량 개발 프로젝트를 채택했다고 3일 인터팍스 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2018년도까지 서비스 무역량 15억 달러 달성과 그 이후 2023년까지 30억 달러 달성이 이번 프로젝트의 주요 과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 향후 협력 강화 분야로 관광, 경제, 전자상거래, 중국 약재 및 문화를 대표적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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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 (7) “골키퍼는 절반 축구팀”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1.82미터 되는 훤칠한 키, 일찍 복싱에 유능하였다는 투박하고 큰 손과 허리보다 더 긴 두 다리…이는 1965년 길림성축구팀이 전국축구 1부리그인 갑급축구무대에서 우승보좌에 오를 당시 골키퍼로 소문났던 박장수 건장의 생전모습이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골키퍼가 절반 축구팀이란 말은 여전하다. 그만큼 골키퍼 위치가 중요했다는 얘기다. 골키퍼로 되자면 우선 고생스러운 것과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장시기의 목표를 내걸고 자신심을 키워야 한다.” 여느 축구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박장수 원로 역시 어릴 적부터 운동을 즐겼었다. 그는 축구, 롱구, 배구, 핸드볼, 복싱 등 운동을 닥치는대로 했다. 그중 그래도 가장 장끼가 있는 종목이라면 복싱과 핸드볼이었다. 1959년 그가 연길에 와서 어느 한 핸드볼경기에 참가했을 때 그걸 지켜보던 길림성축구팀의 박상복 감독이 그가 보기 드문 골키퍼감이라고 점찍었다. 그 때는 조직의 배치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때였다. 하여 그 때까지만도 꼴키퍼에 대해 그닥 흥미가 없었던 박장수였건만 조직의 배치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점 즉 영으로부터 축구 골키퍼의 생애를 시작했지만 열심히 훈련했다. 그의 말마따나 앞의 선수들은 경기 때 힘들고 골키퍼는 훈련이 힘들다는 말이 맞는듯 싶었다. 달빛아래에서의 개별훈련과 유명한 국가팀 골키퍼인 장진수밑에서의 고강도훈련, 워낙 운동을 즐겼었고 또한 핸드볼선수였던지라 그의 꼴키퍼 재능은 재빨리 제고되었다. 박장수는 무서움을 모르는 선수였다. 1962년에 있은 한차례의 경기 때 그는 상대방 선수와의 충돌에서 머리에 타박상을 입고 40여분간이나 쇼크상태에서 헤맸었다. 당시 많은 축구팬들은 그의 건강과 길림성팀의 수비선 때문에 몹시 걱정을 했다. 하지만 상한지 6일만에 경기장에 재출전, 독종이란 별명까지 붙게 됐다. 이렇듯 이악스럽게 달라붙은 결과 길림성팀은 오래동안 공격선이 강하고 수비선이 약하던 국면을 돌려세우게 됐다. 특히 1965년 을급팀에서 갓 올라온 길림성팀이 전국축구갑급리그에 참가했을 때 박장수는 비범한 실력을 과시, 그가 4 – 5미터씩 날아 오르며 공에 덮친다 하면 호랑이를 방불케 했고 아무리 출중한 상대방의 스트라이커라 해도 하도 기세가 당당한 길림성팀의 골키퍼앞에서 주눅이 들어 슈팅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다. 길림성팀이 우승하던 그해에 박장수는 실점골 8개밖에 허락하지 않아 전국축구계가 놀라게 했으며 동경춘, 정지승, 당봉상, 정종섭 등과 함께 건장칭호를 수여받게 됐다. 그 뒤 문화혁명 등 사연으로 골키퍼 생애를 마쳤고 후비력양성도 별반 하지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기층에 뿌리박고 많은 사업을 하면서 연변축구 특히는 지난 세기 90연대의 원 오동팀축구에 관심을 보이군 했다. 당시 원 오동팀에서 자체 골키퍼를 제대로 양성해 내지 못한 원인에 대해 박장수 원로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50연대와 1960연대에 비해 애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때의 길림성팀은 전국 4강중의 하나였지만 이 몇년래의 오동팀은 한해 건너 갑A보존 때문에 전전긍긍한 팀이라 시름놓고 자체의 골키퍼를 단련시킬 겨를이 없다. 골키퍼 양성이란 힘든 노릇이다. 합격된 골키퍼로 되자면 판단, 반응, 의식 등이 빨라야 할뿐더러 항상 타박상을 입을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또한 경기시간의 수십배에 해당되는 훈련이 타선수들에 비해 곱절 힘들며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5-6년의 세월을 잡아먹기에 골키퍼를 원하는 선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골키퍼 양성에 있어서의 박장수 원로의 주장 역시 명확했다. “우선 소학교부터 목적성 있게 골키퍼양성에 모를 박고 알심들여 훈련시키는 한편 각종 경기에 자주 참전시켜 경기경험을 쌓게 해야 하며 조급성으로 나타나는 단기행위를 극복해야 한다. 골키퍼를 원하는 선수는 훈련시 지도의 훈련방법이 100%가 정확할 수는 없기에 부단히 자아 특점에 맞는 훈련방법과 훈련기술을 개발하기에 노력해야 하며 경기시에는 강한 기질을 보이는 것으로 상대방한테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그외에도 경기장에서의 골키퍼의 임전지휘 능력, 경우에 따르는 출격 또는 문전고수, 페널티킥을 당했을 때 상대방에서 슈팅하는 선수에 대한 심리파악 등은 모두 그 개성과 참고적 가치가 있었다. 평소에 박장수 원로는 후에 죽은 뒤에도 연변축구가 전국우승을 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박원로는 몇해전 지병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하다면 저 멀리 하늘 나라에서 박장수 원로가 현재의 연변팀 축구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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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中 훈춘 은발 자원봉사자들 위생청결에 궐기
    [동포투데이 연변] 4월 7일의 “세계위생일”을 맞으며 지난 3일, 훈춘시 신안가 노년협회의 은발 자원봉사자100여명은 가두위생청결에 동원되었다. 이날 가두 지도자들과 사회구역8개협회의 은발 자원봉사자들은 “은발 자원봉사자”라고 쓴 기발을 들고 물류업에서 관계하지 않는 사회구역 내 화단에 널려져 있는 종이며 비닐주머니와 나무가지 등 어지러운 쓰레기를 주어내면서 화단을 깨끗이 청리하였다. 정창선/채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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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中 연길 “뢰봉반” 노인들 아동복리원 위문
    [동포투데이 연변] 1일, 연길시 북산가두 왕효평주임, 단령사회구역 당총지서기 우광발 등은 북산가두 “뢰봉반” 로인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연변아동복리원을 위문하였다. 이날 왕효평, 우광발 등과 북산가두 단령사회구역, 부승사회구역, 단령사과원, 단진사회구역의 “뢰봉반” 노인자원봉사자들은 현금, 식품과 옷견지들을 복리원에 가져다주면서 동시에 그 곳에서 생활하 고있는 장애어린이들에게 따라로움도 보내 주었다. 복리원의 관련일군에 따르면 복리원의 50여명 장애 어린이들은 정부, 사회와 복리원 일군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조건이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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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中 용정 5중 안전교육 계열활동 가동
    [동포투데이 연변] 일전 용정시 제5중학교에서 교통, 캠퍼스내 그리고 식품 등 면에서의 안전을 골자로 한 안전교육 계열활동을 가동하였다. 그날 이 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교통질서를 지키고 학교내에서의 지진 등 기타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상식을 장악하며 절대 불량식품을 사먹지 않겠다고 표하면서 저마다 안전교육계열활동가동식 프랑카드에 싸인하였다. 마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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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수필] 두 누나 시집가던 그해의 봄
    ■ 김철균 꽃이 핍니다. 봄이 왔습니다. 연길시 거리마다에는 연분홍 살구꽃이 만발해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오늘은 일요일, 연길시 인민공원과 청년공원 등 유원지에서는 10여살 푼한 어린이들이 흩날리는 꽃보라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이 봄을 즐기고 있습니다. 봄, 세상만물이 소생하는 봄 – 얼마나 좋은 계절입니까. 하지만 봄이라고 해서 해마다 낭만적이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동년시절 나의 두 누나가 시집가던 그 해의 봄만 해도 괴롭고 울적하고 슬픈 봄이었습니다. 1 지금으로부터 40여 년전, 그러니까 1971년의 봄이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따르던 누나 둘이 한꺼번에 시집을 갔던 것입니다. 결혼이란 싱글로 살던 시절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에 들어선다는 것으로,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당시 우리 가정의 상황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는 19살, 하나는 18살 연연생으로 된 누나 둘이 너무나도 일찍 시집가게 된 것은 일종 생활의 핍박에 의해서였기도 했습니다. 1967년에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매맞아 사망됐고, 그 이듬해인 1968년 여름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반란파들한테 끌려 다니다 못해 서슬 푸른 훈춘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던 그 시절,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살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집에 있는 식구라고는 15살인 셋째누나와 14살인 넷째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셋뿐이었는데 숨이 붙어 있었으니 살았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고행이였습니다. 덮쳐드는 생활고도 그러했고 정치적으로 받는 정신적 타격도 그랬으며 거기에 여자인 두 누나의 인신보장도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친척들도 남의 감시가 무서워 우리 집으로 다니기를 꺼려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독재대상”의 자녀라고 기시를 받고 집에 들어오면 서럽고 적막하기만 하던 그 세월, 그래도 나의 6촌인 김정일형이 담이 크게도 우리 밤마다 우리 집에 와서는 지켜주군 했습니다. 그만큼 특등영예군인의 아들이였던 6촌형님은 가정토대의 덕분에 그래도 마음대로 우리 집으로 드나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중학교 홍위병들이 셋째누나를 붙잡아 가려고 했습니다. 말로는 어머니의 “죄장”을 고발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누나를 끌고가서 어떤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6촌형님이 나섰습니다. “이놈들아,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라. 열다섯살밖에 되지 않은 애가 알면 뭘 안다고 그러냐!” 6촌형님의 호령에 홍위병들은 물러갔지만 그 뒤일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간혹 6촌형님이 일이 있어 오지 않는 날 밤이면 우리 세남매는 무서운 나머지 집안 한구석에 몰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번개가 치며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 저녁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령이 창밖에서 맴도는 것 같아 그러한 공포는 더하군 했습니다. 2 한편 정치적 박해와 더불어 힘든 생활난도 련속 들이닥쳤습니다. 생산대에서 “독재대상집”이라고 식량을 적게 주어 배를 곯는데다 겨울마다 화목을 해결하지 못해 집이 춥기를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시골인 우리 동네는 대부분 땔나무를 해다가 밥을 하고 집도 덥히군 했는데 남성일군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산에 흔해버린 그 나무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밥을 하는 땔거리란 누나 둘이서 들에 나가 마른 풀을 베오거나 밭에 가끔씩 서있는 옥수수대 등을 갖다가는 하루하루를 겨우 이어갔는데 당시 저의 어린 생각에도 그 것은 장구지책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누나들 몰래 도끼와 낫을 가지고는 나무하러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헌데 당시 12살이었던 나는 여느 남정들처럼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임업정책이란 것도 몰랐기에 산기슭에 이르자 마자 어른들 팔뚝만큼씩 굵은 가둑나무들을 찍어댔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찍어 넘겼을가? 겨우 한수레가량 되게 나무를 찍으니 가뜩이나 짧은 겨울해는 어느덧 서산기슭에서 넘어가려 했고 어린 나도 기진맥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좀 높은 곳의 나무를 끌어내릴 때 끝내 나무를 끌어 안은채로 경사진 곳에서 굴러 낭떨어지로 내려왔습니다. 팔과 얼굴이 긁히고 여기 저기가 아파났습니다. 헌데 아픈고 아린 것보다 너무나도 기진맥진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누워 자고만 싶었습니다. “엄마야, 엄마 왜 날 두고 저 세상에 갔어?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해?…”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철균아, 너 어디 있어? 철균아!” 셋째 누나였습니다. 누나가 끝내 수소문하다가 산까지 찾아왔던 것입니다. 나를 발견하는 순간 누나는 나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러고는 울었습니다. “너 이 나이에 어떻게 나무를 한다고 그래?! 이 불쌍한것아…” 누나는 내가 불쌍해 울고 나 또한 우는 누나가 가여워서 울었습니다. 난리가 날 일은 그 뒤에 있었습니다. 내가 한 그 나무가 또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6촌형님의 손을 빌어 나무를 수레에 싣고 집에다 부리웠더니 대대의 임업위원이 찾아와 임업정책을 어기고 굵은 나무를 찍었으며 이 역시 사회주의 담벽을 허무는 행동으로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 대신 누나가 생산대대에 불리워가 비판을 받고 자아검토서까지 쓰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나무 한수레 또한 한가치도 아궁이에 넣어보지 못하고 생산대 우사로 싣겨갔고 말입니다. 3 험악한 세상, 각박해진 인심 - 우리 세 남매는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몇년이 지나 셋째 누나가 19살이 되자 현 성에서 사업하는 형님이 대책을 댔습니다. 그 대책이란 것이 뭐겠습니까? 바로 여동생들이 어린대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은 연길에 사는 큰 매형과 토의해서는 고향사람들 몰래 두 누나를 연길의 총각들한테 마주세웠던 것입니다. 고향의 반란파들이 알고 연길로 찾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날이면 겨우내 만들어낸 혼사가 파탄될 수도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해 우리 세 오누이는 현 성에 있는 형님네 집에 얹혀사는걸로 가장하고는 고향을 떠나 우선 형님네 집에서 얼마간 있다가는 그 해의 5월 1일은 셋째 누나의 결혼날로, 5월 2일은 넷째누나의 결혼날로 정했습니다. 1971년 5월 1일, 셋째 누나가 시집가던 날은 가뜩이나 흐리터분한 날에 궂은비가 구질구질 내렸습니다. 비가 오면 신부가 울면서 산다는데 셋째 누나의 결혼운명이 어떻게 될런지? 당시 그 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연길시 교외농촌의 4대가정이 사는 대가정으로 동생을 시집보내며 한숨을 쉬는 형님의 얼굴에서 어린 나도 다소 얼마간이라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넷째 누나가 시집을 갔는데 역시 연길시 교외의 그 농촌마을은 한공에 10여전밖에 되지 않는다는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진탕속을 빠져나와 다시 먼지구덩이로 들어간다고나 할가? 여하튼 시집이라고 갔지만 나의 두 누나는 몇년간 많은 고생을 한 걸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살림살이를 야무지게 잘하고 어른들은 잘 모셔 칭찬도 자주 받는다는 소문도 들었고요.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핍박에 못이겨 양산에 오르는 격으로 부랴부랴 시집간 우리 두 누나의 신세, 그것이 그닥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나의 두 누나는 모두 자녀들을 출세시키고 아주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같은 연길 시가지에서 살면서 서로 오가며 즐겁고 기쁜 사연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와 누나들은 어쨌든 이젠 한집식구가 아닌 서로 다른 가정을 꾸리고사는 현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같이 살던 형제가 왜 갈라져 다른 가정을 만들고 살아야 하는지? 아니 그 것도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로 헤여져야 했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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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인천에 '러시아 특화거리' 생긴다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2014년 한·러 비자면제 협정 체결에 따라 인천국제공항 및 인천항을 통해 유입되는 러시아 관광객 유치를 위한 신규관광자원 개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인천시는 중구 우현로 35번길 일원에 상징광장 및 게이트 조성, 보행환경 개선 등 국제타운 러시아 특화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특히, 연안부두 바랴크함 추모비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 추모비에 헌화를 할 정도로 의미있는 장소인 만큼 러시아 예술제 개최 등 관광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이와 관련해 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2014년 관광특구 활성화사업 공모 결과 러시아 특화거리 조성사업이 선정돼 국비 8억원을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시는 국비외에 지방비 8억원을 추가로 확보해 총 16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이번 사업이 완료되면 이 곳을 한·러 양국간 우호교류의 장(場)으로 활용할 계획”이라며, “신포국제시장 현대화 사업과 연계돼 신포동 인근지역 경제활성화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월미관광특구내에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원도심 관광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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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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