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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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변장백산구단 치어리더선발경기 펼쳐
    [동포투데이 연변] 연변장백산천양천구단에서는 연변체육관에서 올시즌 연변장백산천양천팀 응원에 나설 치어리더(足球宝贝)선발경기를 펼쳤다. 연변일보에 따르면 이번 치어리더선발경기는 주체육국의 주최하에 엄격하게 진행되였는바 도합 70여명 선수들이 참석 소문을 듣고 2명의 로씨야적 선수도 달려와 출전욕망을 내비쳤으나 언어장애로 그만 탈락하고말았다. 치어리더선발경기는 자기선택종목, 인상, 형태, 유산소운동과 기본보법, 접수능력, 표현력, 달리고 뛰기, 앞차기, 종횡다리벌리기 등을 비김 의 예선과 인상,습득력, 무용자세 등을 비김의 결선을 통해 20명 선수를 엄선했다. 이번에 선발된 20명 치어리더들은 향후 연변장백산천양천구단의 협찬측인 길림삼공집단산하 천양천음료제품유한회사에서 제공하는 실습과 취직의 기회를 가지게 되며 올 갑급시즌 연변천양천팀의 전부의 홈장은 물론 중요한 원정경기에서도 연변의 이색적인 축구응원문화를 선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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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4
  • 경찰, 6.4 지방선거 대비 24시간 단속체제 가동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경찰청(청장 이성한)은 6.4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옴(D-72日)에 따라 전국적으로 24시간 선거사범 수사상황실을 설치하고 수사전담반을 확대하는 등 본격 단속체제에 돌입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각 정당별로 본격적인 선거체제에 들어가고, 모든 선거의 예비후보자 등록이 개시되는 등 열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어 자칫 발생할 수 있는 무질서.혼탁선거를 방지하고 불법행위에 철저히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금일 10시 전국 경찰관서에서 동시에 ‘선거상황실 현판식’을 개최하고,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이성한 경찰청장은 금일 개최된 현판식에서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야말로 민주주의의 초석인 만큼, 이번 선거가 그 어떤 선거보다 깨끗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①금품살포 등 ‘돈 선거’ ②허위사실 유포 등 ‘거짓말 선거’ ③공무원 선거개입 등 ‘관권선거’를 3대 선거범죄로 규정하고 이러한 불법행위들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정당.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철저한 단속과 수사를 당부하였으며 “경찰 스스로도 철저한 정치적 중립 자세를 견지할 수 있도록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 등 공무원들의 줄서기나 선거개입 등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엄정 사법처리할 방침”이라고 밝히는 등 ‘공명선거’를 위한 경찰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경찰에서는 이번 조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지난 2월 3일부터 운영중인 ‘선거사범 수사전담반’을 기존 2,006명에서 3,123명으로 증원하였고 경찰관의 첩보수집 활동을 한층 강화하여 철저한 단속과 사법처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계획이며 허위사실 유포 등 인터넷 선거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사이버 수사요원(1,083명) 등을 적극 활용, 사이버 순찰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다. 또한 지역별 선관위 등 유관기관과 Hot-Line 구축 등 공조체제를 강화하고, 기관간 수시회의 개최 등 긴밀히 협력해 나가는 한편 적극적인 대국민 홍보를 통한 공명선거 분위기 조성에도 주력해 나갈 계획이다. 현재까지 경찰에서는 선거 관련 불법행위 사범 총 216건, 337명을 수사, 이중 65명을 불구속 입건하였고, 245명을 수사중에 있으며, 현재까지 적발된 유형은, 금품.향응 제공 122명(36%), 사전 선거운동 82명(24%), 후보자 비방 등 48명(14%) 기타(현수막훼손 등) 40명(12%)順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앞으로도 경찰에서는 전 경찰역량을 결집하여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대비해 나가는 한편 선거범죄 신고.제보자에게는 최고 5억원까지 신고보상금을 지급하고, 신고자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하여 국민들의 신고도 적극 유도해 나갈 계획이다. 아울러 공명선거 구현을 위해서는 경찰의 강력한 단속뿐 아니라 국민들의 적극적인 신고와 제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불법 선거운동 등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 112나 가까운 경찰관서로 적극적으로 신고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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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4
  • 전지현 , 일찍 中 스타 리밍과 함께 광고 촬영
    [동포투데이 연예] 홍콩 매체 보도에 따르면 전지현 한국 스타가 이름나기 전 이미 리밍 홍콩 배우와 합작했으며 근일 이 두 스타의 19년전 합작 단락이 공개됐다. 전지현은 당시 매우 어려 보였으며 용모가 조금도 변함이 없고 리밍은 많이 뚱뚱해진 모습이다. 홍콩에서 영어로 레온(Leon)이라고 부르는 리밍은 가수, 상인 겸 자선가이며 홍콩 4대 천왕(四大天王) 스타의 한명이다. 그가 19년전 촬영한 전신업 광고작품들에는 광고마다. 여자 한 명씩 출현했는데 전지현이 그 중 한명으로서 당시 광고 촬영에 종사한 동시에 주제곡 “만일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如果可以再见你)”을 불렀다.두 사람은 협곡에서 고함을 치기도 한 정경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고 그들이 말한다. 근일 32세의 전지현이 연기한 천송이가 아시아지역을 휩쓸고 있다. 천송이란 한극 “별에서 온 그대”의 여 주인공이다. 전지현은 또 많은 시청자들의 여신으로 됐다. 그러나 현실중의 전지현은 일찍 2012년 4월 금융가 최준혁에게 시집갔다. 남편이 연예권 밖의 인물이므로 전지현의 사생활은 낮은 자태이며 공개 장면에 매우 적게 출석한다. 최준혁과 전지현은 동갑으며 재능, 재산과 튼튼한 신체를 가지고 있어 명실이 부합되는 “멋진 남자”이다. 그는 미국 은행 금융업무 고위층 직원이며 자산이 400억 원 한화(약 2억 위안 인민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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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4
  • 조너선 리 "일본은 軍 위안부 사과·배상하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정치가 아닌 정의의 편에서 일본군 위안부 해결에 나서 달라.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을 지지한다.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2차대전 전범 위패를 빼라." 환경·평화운동가인 한국계 미국인 조너선 리(16·한국명 이승민) 군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배상과 해결을 촉구하는 1인 시위에 나섰다. 세계청소년환경연대 대표인 리 군은 지난 21일 임진각에서 제3회 세계 어린이 평화의 날 행사를 주관하며 'DMZ(비무장지대) 평화공원' 조성을 남북한 당국에 촉구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진행 중인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가 끝나는 25일까지 오전에 3시간씩 1인 시위를 펼치며 군 위안부 소녀상에 헌화한다. 26일에는 1천119번째로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도 참석해 일본의 반성과 조속한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을 예정이다. 리 군은 1인 시위 첫날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지난 7년간 평화와 환경을 주제로 활동하다가 위안부 문제를 접했다"며 "일본의 비인도적인 전후 처리 문제로 고통받는 피해 할머니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시위에 나섰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인 대부분은 양식이 있지만 소수 우익세력과 정치인의 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전 세계 누구든 당연히 이분들의 편에 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강한 어조로 반문했다. 리 군은 일제의 만행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왔고 용기를 내 역사의 증인으로 나선 일본군 위안부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로 강제로 이주당했던 증조부의 사연과 2차대전 당시 미군으로 파푸아뉴기니 전투에 참여해 전쟁의 참변을 목격했던 외증조부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 침략과 전쟁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10세 때 인터넷에 'Go greenman'이라는 환경만화를 그려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는 세계유소년환경연대(ICEY, International Cooperation of Environmental Youth)를 창설하고 '세계 어린이 1명당 매년 1그루 나무 심기 운동'을 추진하는 등 환경보호에 앞장서왔다. 2009년 인천세계환경포럼, 2011년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총회, 울릉도 독도 녹색섬 등 환경·평화행사 홍보대사를 맡았다. /연합뉴스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회원사 공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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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4
  • 연변천양천 원정서 0 : 2로 완패
    ■동포투데이 연변리포터 김철균 원정 첫 승을 바라는 연변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이 제2륜에 들어서도 승전과는 인연이 없었다. 23일 갑급리그 제2륜 석가정 원정에서 연변팀은 상대방의 외적용병 쵸로와 카룽한테 각각 한 꼴씩 허락하며 완패의 쓴 맛을 보았다. 경기 초반 석가장영창팀은 홈장 및 외적용병의 우세를 빌어 재빨리 경기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연변팀 문전을 향해 밀물식 공격을 가해왔다. 수세에 몰린 연변팀은 상대방 2명의 외적용병의 대인마크(盯人防守)에 진땀을 빼면서 별반 공격다운 공격을 조직하지 못했다. 경기 22분경 영창팀은 코너킥기회를 획득, 공이 날아오자 문전혼란중 연변팀 선수의 반칙으로 상대방은 페널티킥기회가 주어졌으며 외적용병 쵸로가 손쉽게 선제골에 성공했다. 이어 29분 연변팀은 외적용병 김기수가 부상으로 고만국과 교체되면서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됐다. 후반들어 연변팀은 리성림 대신 박만철을 교체출전시키면서 공격력을 강화, 후반 2분에 고만국이 상대방 문전 30메터밖에서 강슈팅을 날렸으나 골키퍼의 선방에 맞았고 이어 고만국이 꼴키퍼와 1 : 1 대치상태에 섰으나 득점에 실패했다. 후반 16분, 연변팀은 상대방에 추가골을 내줬다. 연변팀 골키퍼 지문일이 손에서 놓친 공을 상대방 외적용병 카룽이 잽싸게 잡아 슈팅해 득점으로 이어졌다. 그 뒤 후반 38분 16번 오영춘이 엘로카드(黄牌) 루적으로 경기장에서 축출되면서 연변팀한테는 설상가상이 됐다. 연변팀은 1꼴이라도 만회하려고 마지막 사력을 다했으나 전력상, 시간상 모두 턱부족으로 결국 0 : 2란 결과를 씹어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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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3
  • 한·중(韓․中) 국경검역 협력 MOU 체결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농림축산검역본부는 3월 24일 외교부에서 중국 국가질량감독검험검역총국 부국장 메이커바우(梅克保) 부국장과 한·중간 가축전염병․식물병해충 유입 방지를 위한 여행객 수하물 및 우편물 검역 협력 강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양해각서 체결은 최근 국내에 발생해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조류인플루엔자 및 소나무재선충 외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는 구제역 등 국가재난형 동물·식물 질병의 재발 방지 및 근절 대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양국은 동물·식물 질병 발생정보 교류 확대 등을 위한 인적 네트워크 구축과 국경에서의 불법 동물·식물 검역대상물을 신속·정확하게 탐지하는 기술 등을 상호 공유하기로 하였다. 특히 이미 효율성이 검증된 검역탐지견 제도의 상호 발전을 위해 탐지견 육성 및 훈련·평가기법 교류, 탐지 경진 대회 개최 및 우수탐지견 유전자 교환 등 세부 사업을 추진키로 하였다. 중국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구제역 등 주요 동물․식물 질병이 상시 발생하고 있고 우리나라와 인적․물적 교류가 많아 질병 유입 가능성이 높으며 특히 최근에는 신종 질병인 H7N9형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어 우리나라 검역 대상국 중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앞으로 실무협의회 등을 통해 양국간 궁극적 목표인 재난형 질병 근절을 위한 세부사업을 지속적으로 발굴․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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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3
  • 최시원 홍수아, 중국드라마 “억만상속자” 촬영중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한국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의 멤버 가수이고 탤런트인 최시원과 배우 홍수아가 중국 리소홍 감독과 한국 오상원 감독의 합작 중국드라마 “억만상속자”에 주연으로 캐스팅돼 현재 중국의 광서 북해에서 촬영중에 있다고 중국 현지언론들이 최근 전했다. 일전 홍수아가 웨이보를 통해 “드라마속 나의 첫사랑과 함께”라는 글과 함께 촬영현장의 키스신 장면을 게재했고 잇따라 최신원이 촬영장에서 기타를 치는 사진을 웨이보에 올려 중국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억만상속자”가 한국의 “상속자들” 중국판이 아니냐는 비시를 두고 일전 최시원은 웨이보를 통해 “적지 않은 이들이 우리의 드라마를 ‘상속자들’의 복제품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우리의 드라마는 완전 다른 내용이며 여러 분들이 관심있게 지켜봐 주기를 바랍니다”고 썼다. 중국 리소홍 감독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억만상속자’는 2년 전부터 기획하기 시작했고 그 내용이 한국의 ‘상속자’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다”고 밝혔다. “억만상속자” 주연으로 한국배우 최시원, 홍수아 외 중국배우로 우소동과 감청자가 출연한다. 중국드라마 “억만상속자”는 갑작스레 대기업 회장의 숨겨둔 손자로 밝혀지며 치렬한 상속자 경쟁에 뛰어드는 남자의 이야기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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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3
  • 中 상인 , 마오쩌둥 전용기 800만 위안에 판매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홍콩 문회보(文匯報)는 광둥성 주하이시(廣東省珠海市)의 한 기업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전용기였던 제트기를 800만 위안에 내놨다고 보도했다. 제트기는 중국이 1969년 파키스탄에서 수입해 마오쩌둥 전용기로 사용했지만 1986년 퇴역. 그 후 이 기업이 구입했다. 이 기업은 2008년에도 내놨었지만 구입자가 나서지 않았다. 이번에도 구입자가 없으면 해체해 창고에 보관할 것도 검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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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2014-03-23
  • “대장금2” 에 中기업 2억 6천만 홍콩달러 투입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중국 홍콩 언론에 따르면 한국스타 이영애가 주연으로 출연한 한국 경전 고전드라마 “대장금”이 2005년 무선으로 방송되며 최고 50% 시청률을 기록, 당년 한국드라마 열조를 일으켰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적지 않은 제작인들이 이영애를 초청하여 속편을 찍으려 했지만 이영애는 가정을 중히 여기며 동하지 않았었다. 최근 한국 MBC방송국에서 “대장금2”를 제작하기로 하고 현재 준비중에 있으며 7월부터 촬영에 들어가 10월에 방송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애가 주연으로 출연하는가는 질문에 이영애 변호사는 “비록 정식 계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년초에 이미 극본을 받아 긍정적으로 고려중에 있다”고 답했다. 알아본데 따르면 “대장금2”를 제작한다는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즉시 강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바 중국 기업에서 2억 6000만 홍콩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더욱이 이영애의 당년 “대장금” 출연료는 매 회에 약 6만 홍콩달러로 54회에 도합 310만 홍콩달러였는데 현재 이영애의 출연료는 몇배로 뛰어올라 36회에 1000만 홍콩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영애로 하여금 “대장금2” 출연을 긍정적으로 고려하게 하는 것은 줄거리가 장금이가 어머니와 선생님으로 된 후의 이야기로 그는 모성애의 주제에 감동된 것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장금이 딸을 찾으러 중국으로 가 자기의 높은 요리기술과 의술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게 된다. 7월에 촬영을 시작하는데 중국을 배경으로, 한중일 전통요리와 약선을 융합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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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3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1 )
    ■ 허길성 나의 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갑산동이다. 그러니 나는 조선에서 태여난 셈이고 우리 가정은 조선에서 건너온 월강이주민으로 된 가정이라고 할수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올 당시 우리 가정을 놓고 말하면 조상으로는 할아버지 허윤갑, 할머니 김금심, 아버지 허창준 그리고 어머니 김순녀 등 분들이 계셨고 형제들로는 큰형 허길봉, 둘째형 허길룡, 셋째형 허응산이 있었으며 누님들로는 큰누님 허월금, 둘째누님 허월순 등이 있었다. 우리 가정은 양천허씨였고 나는 양천허씨네 19대 후손이였다. 후에 내가 아버지한테서 들어서 알게 된 일이지만 형제중 막내인 나는 세살적에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넜으며 만주로 이주해온 뒤 우리 가정은 당시 연길현 화전자(지금의 룡정시 석정향 중성촌)에 정착해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10여명 식구들의 호구를 했다고 한다. 화전자에서의 정착생활, 그것을 첫 스타트로 70여성상의 이내 인생은 시작됐다. 바로 그 화전자로부터 잔뼈를 굵게 만들면서 나는 중국대륙의 방방곡곡에 발자욱을 남기였으며 파란만장한 세월과 더불어 오늘 이때까지 인생의 희로애락도 겪어오게 되였다고 할수 있다. 부모형제와 어린 시절의 나 내가 어릴 때 부모님한테서 들어서 알게 되였지만 양천허씨인 우리의 조상들은 성격이 곧고도 뼈대가 있는 어른들이라고 했다. 조선이 “량반”이요, “상놈”이요 하며 사람의 신분을 분별할 때도 나의 조상들은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늘 “량반”이란 신분으로 살아 왔으며 또 그만큼 품위를 지키며 살아온 나의 조상들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증조부시대만 하더라도 땅마지기나 좀 있었고 할아버지 허윤갑옹 역시 서당같은 곳에 다니면서 천자문 따위를 외우기도 하는 어딘가 지체 높은 량반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난구제는 나라도 할수 없다”고 했건만 할아버지 허윤갑옹이 성인으로 되면서 자주 가난한 백성들한테 쌀도 퍼주고 하다보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다가 어느덧 가정이 아주 째지게 가난한 정도에 이르게 됐고 나중에는 두만강을 건너는 이주민대렬에까지 합류하게 되였다고 한다.우리 가정이 이렇게 가난에 못이겨 두만강을 건너 만주땅에 정착하게 되였는데 그때가 내가 바로 세살적인 1942년이였다. 두만강을 건너 지난 20세기초 강도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된 뒤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이더욱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만주로 건너온 가정들치고 사연이 없는 가정은 없었을것이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한테 쫓기게 되자 하루밤새에 만주로 도망쳐온 가정이 있는가 하면 지리한 가난을 못이겨 살길을 찾아 이 땅으로 건너온 가정들도 많았으니 우리 가정은 그 후자에 속한다고 할수 있었다. 특히 당시 우리 가정은 아버지의 앞세대로 웃어른들이 계시고 거기에 자식들이 많았으며 집안로력이 적다 보니 이른바 가난하다는 많은 가정들중에서도 제일 가난한 가정에 속했다. (만주는 기름진 땅이 사처에 널려있다. 하다 못해 산언덕에 뙈기밭을 일구고 화전농사를 하면서 부지런히 일만 하면 삶은 감자라도 하루 세끼 먹을수 있어 크게 배고픈 고생은 없을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만주로 건너오는 대부분 이민족들이 품고 있는 한가닥 삶의 희망이였다. 이렇듯 실날같은 한가닥 희망이 있었기에 당시 우리 가정은 조선에서 일본학교를 다닌적이 있는 큰형 허길봉씨가 계획하고 주도하에 두만강을 건너게 되였다고 한다. 나의 부친 허창준로인은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면서 땅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그런 부지런하고 착하고도 순직한 농부였다. 부친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조선에서 건너온 뒤 우리 가정에서는 친척인 허운걸가정의 땅을 소작맡기도 하고 또한 어느 한 산기슭의 땅을 개간하기도 하면서 농사를 지었었다. 그때 부친은 낮에는 밭에 나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고 저녁에는 밀린 집안일을 하면서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군 했다. 즉 계절에 따라 봄에는 농기구를 수리하고 여름이면 모기불을 피워놓고 삼대를 발랐으며 가을이면 산에서 따거나 캐온 산열매와 버섯 및 약재 등을 말리우는 일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겨울이면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 일에 허리펼 사이가 없이 보내군 했다. 한 가정의 대들보를 떠멘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서는 일감이 떠날 사이가 없었다. 또한 생각하는것도 일에 관한것이였다.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한테는 아버지의 모습이 퍼그나 측은해보였다. 어찌보면 아버지의 인새은 일만을 위하여 사는 인생을 방불케 했다. 당시 아버지는 나이가 어린 셋째형과 나를 제외하고는 맏형과 룡정고중에 다니는 둘째형을 자주 일터에 내몰기도 했다. “맏이야, 둘째야 어서 일어들 나거라. 식전에 나가 소꼴을 베와야 할것이 아니냐?” …… “해가 하늘공중에 걸렸다. 땅을 파먹을 팔자들이 잠이 이렇게 많고서야 뭘 해먹는다더냐.”아버지가 이렇게 호통칠 때마다 맏형은 그래도 잠기가 가득한 두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군 했지만 둘째형은 늘 아버지의 호통을 마이동풍으로 여기면서 계속 꿈나라에 빠져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아버지가 둘째형이 뒤집어쓴 이불을 와락 벗기면서 재차 호통치군 했다. “이눔자식, 싸리긁에서 싸리가 난다구 땅 파먹는 농부의 자식이 과거급제라도 한다더냐?!” 이러면 둘째형은 투덜거리면서도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따라하군 했다. 사실 둘째형이 잠이 많은건 아니였다. 자정이 넘도록 등잔불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다 보니 잠이 모자랄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맏형은 아버지의 말씀에 잘 따라주군 하는데 왜 둘째형은 그러지 못하는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뒤에서 자주 투덜대군 하는 둘째형이 어딘가 아니꼽게 생각되기도 했다. 썩 후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야 나는 이전에 둘째형한테는 다른 꿈이 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고 맏형은 왜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하고 잘 들었는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터득이 갔다. 기실 맏형한테 꿈이 없는건 아니였다. 조선에 있을 때 일본인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맏형한테 왜 꿈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맏형이라는 리유때문에 그 꿈을 키울수가 없었고 가정에 억매이게 됐던것이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중임을 떠멜 의무가 있었던 모양이였다. 큰형으로 말하면 일본인소학교를 다녔기에 어느 정도의 지식수양을 갖고 있었고 또한 손재간이 있어 목수일에도 출중했다. 그래서 늘 동네집 집짓기의 “기술일군”으로 불리워다녔으며 어느 해엔가 화룡의 아동저수지를 건설할 때에는 기술골간으로 요청받아 갔다가 정식로동자로 편제를 가지기도 했다. 그 당시 큰형님의 로임은 50여원, 적은 로임은 아니였으나 큰형님은 그 로임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 못하고 가정 전반을 돌보아야 했다. 결국 큰 형님은 가정의 맏이라는 중임때문에 로동자로 된것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이는 큰형님으로 놓고 볼 때 자신의 손해는 물론 두고 두고 자식들한테도 빚진 마음으로 살게 됐다.……그러던 우리 가정에 경사가 난건 그 몇년후였다. 오래동안 아버지의 말씀을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자주 투덜거리기도 하던 둘째형이 글쎄 룡정고중을 졸업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했다가 다시 나라의 수요로 연길에 있는 연변일보사 기자로 배치받게 됐던것이다. 실로 “개천에서 룡이 난셈”이였다. 이에 따라 우리 가정은 1952년 화전자로부터 룡정 시가지로 이주하게 되였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며 농사만 고집하던 아버지의 성격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변화를 가져온것일가? 아니면 둘째아들이 출세함에 따라 막내인 나에 대해서도 그 어떤 기대감이 생겼던것일가?… 2 룡정에 온 뒤 나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만 점차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해서만이 아니였다. 도시주민들의 생활과 농촌주민들 사이의 생활차이 및 보이지 않는장벽ㅡ 그것은 나의 어린 정신세계에도 사고거리가 생기게 하였으며 “나는 왜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게 부유한 가정이 아닌 빈곤한 농부의 아들로 태여 났는가”고 가끔씩 불평을 부릴줄도 알게 하였다. 거기에 고중을 졸업하고 연변일보사에 출근하는 둘째형은 자주 세상얘기같은것을 들려주며 사람은 결국 머리속에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일깨워주군 했기에 나의 모든 의식이 빨리 튼것도 사실이였다. 한편 룡정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신문기자로 근무하는 둘째형한테 가정일부담이 덜어진 동시에 막내인 내가 이전에 둘째형이 맡아하던 일거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여름이면 논김을 매고 소꼴을 베오고 또한 겨울이 되면 가마니를 짜고하면서 1년 사시절 일단 집에만 돌아오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팽이처럼 바삐 맴돌아치기가 일쑤였다. 일을 함에 있어서 나와 둘째형이 다른 점이 있다면 둘째형은 늘 투덜거리는가 하면 일을 해도 늘쩡늘쩡 했고 또한 일을 한 뒤끝이 깨끗하지 못한 반면 나는 일손이 잽싸고도 뒤끝이 깨끗했으며 둘째형처럼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가마니를 짜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당시 나는 하루에 가마니 20개 이상씩 짰다. 그 당시 가마니 하나에 50전씩 했으니까 내가 하루에 10원씩 번 셈이였다. 지난 세기 50년대초기로 말하면 일당 10원이란 수입은 도시주민들조차 바라볼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물론 겨울철에만 있는 부업이였고 그 가마니들을 팔아버리는것도 골치거리였지만)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일만 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늘 칭찬을 받군 했다. 특히 아버지는 자주 “아들 넷중에서 날 닮은 아들은 그래도 막내인것 같다”면서 푸념을 늘여놓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늘 칭찬을 받는 나였건만 집에 돌아와 일에 시달리는것이 그닥 좋은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그 칭찬이 별로 반갑지도 않았다. 그건 결코 힘들어만이 아니였다. 다른 도시주민가정의 자식들과 비교가 돼서였다. 매번 도시가정의 자식과 만나고나면 나는 늘 어깨가 처지기 마련이였다. 그리고 창피를 당하는 일도 가끔씩 생기군 했다. 한번은 소꼴을 베여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데 같은 반에 다니는 남학생 한명이 자전거를 타고 휙하고 나의 곁을 지나가더니 휘파람을 쌕쌕 불어댔다. 나에 대한 말없는 무시였다. 그애를 놓고 말하면 웃학급에서 다니다가 늘 락제를 하여 아래 학급으로 내려앉아 나와 한반에 다니는 학생이였다. 하지만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부모덕에 좋은 옷 입고 자전거까지 타고 다니며 우쭐대는 그런 애였다. 그애는 자전거를 타고 저 멀리까지 가버렸으나 그애가 남긴 휘파람소리는 계속 나의 귀전에서 울리는것만 같았고 그애가 계속 나를 비웃고 무시하는것만 같았다. 순간 나는 너무나도 분통이 터진 나머지 메였던 꼴단을 길에 내동댕이쳤다. 꼴단은 땅에 떨어지면서 대뜸 터져버렸고 이러저리 되는대로 흩어졌다. 한편 다시 나의 모양새를 내려다보는 순간 스스로도 나 자신이 비참했고 억이 막히지 않을수 없었다. 무릎까지 걷어올린 바지와 다리에 흙범벅이였고 검정고무신은 구멍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툭 튀여나오기도 한 나의 옷매무새는 말그대로 그제날 지주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는 “마당쇠”나 다름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왼손에 쥐였던 낫을 저만치 던져버리면서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운명을 한탄하는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이런 나를 진정으로 동정하는 애들도 있었다. 특히 녀자애들이 그랬다. 동정심은 녀자애들의 “전매특허”라고나 할가? 그시기 공부라 하면 반급에서 늘 3등안에 드는 한 녀자애가 있었는데 그애는 자주 나한테 먹을것을 주기도 하고 학용품도 사주기도 했다.“길성아, 참 너 공부할라, 집에서 부모를 도와 일을 할랴 몹시 힘들겠구나.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그애의 말과 하는 행실이 고맙긴 했지만 이는 사내애인 나로 놓고볼 때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였고 지어는 비참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던지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애가 내밀어주는 사탕이나 얼음과자 등을 받지도 않고 휑하니 돌아져 버려 그애를 울린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리고 당시 그애가 왜 나한테 집요하게 접근했었는지에 대해 나한테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진정 나의 처지가 불쌍해 동정한것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슨 목적이 있었던지?…다른 한편 그때로부터 나는 둘째형인 허길룡에 대해 어딘가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둘째형은 꼭 무슨 사상이란것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또한 그로서의 인생이 따로 있는것 같기도 했다. 룡정에 온 뒤 길룡형은 나한테 늘 아버지를 존중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지만 자기의 앞길은 자기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진 부지런하고 고지식하고 좋은분이셔. 그리고 불쌍하기도 해.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만 한다면 평생 아버지와 같은 농부로 될수밖에 없단다.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해서 꼭 아버지와 같은 인생이 되라는 법은 없는거야. 나 그래서 가끔씩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기도 했단다.”둘째형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일리가 있었다. 나는 점차 고생은 나의 세대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때로부터 둘째형은 점차 나의 우상으로 되기 시작했다. 3 나는 1956년에 초중을 졸업했다. 당시 내 나이는 17살이였다. 나는 고중진학을 스스로 포기했다. 가정에서도 내가 고중에 진학하는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문에 “수재” 한명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가문에서 나까지 고중에 가면 뒤바라지를 하기 힘든것도 사실이였다. 또한 당시 셋째형은 해방군에 입대한 상황이여서 생산로동에 참가하는 자식은 유독 맏형뿐이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내가 초중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가 농사일에 종사할것을 원했다. “얘 막내야, 네가 고중진학을 포기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람은 팔자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둘째형은 일하기 싫어하고 공부를 좋아했으니까 신문기자로 됐지만 넌 달라. 넌 고중진학을 포기했고 농사일에도 어딘가 미립이 있으니 이 애비를 따라 농사일이나 열심히 했으면 좋겠구나.”하지만 나는 죽어도 농사일만은 싫었다. 나는 노루꼬리만한 월급을 타더라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둘째형처럼 깨끗한 옷을 입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직장으로 출근하고 싶었던것이다. 내가 한사코 우기자 아버지도 딱히 막지는 않았다. “중학교를 겨우 나온 눔이 출세를 어떻게 한다고 저러는건지?…” 아버지는 “후-”하고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건말건 나는 월급쟁이로 되려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월급쟁이 일자리는 절로 굴러오는것이 아니였다. 가문의 팔촌내에 나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자사업에 종사하는 둘째형이 있었지만 그 역시 성격이 곧은 사람이라 누구한테 “뒤문거래”로 청들줄 몰랐으며 거기에 둘째형은 시종 내가 고중진학을 포기한것을 반대하고 있던터였다. 별수 없이 나는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직업을 찾는수밖에 없었다. 인맥을 리용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같은 농부의 아들한테 인맥이 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였다. 그러던중 누군가 현로동국에 가서 “앉아버티기”를 하면 직업을 찾을수 있다고 귀뜸했다. “통나무에 낫걸기”처럼 모험적인 일이였지만 일루의 희망을 품고 그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결국 나는 이 소문을 들은 이튿날부터 현로동국 마당에서 “앉아버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첫날은 많은 사람들이 로동국대문을 수없이 드나들면서도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아마 나를 관내에서 나온 구걸군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하다 못해 누구라도 말을 걸어오기만 해도 그 사람의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떼질써 보련만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야 어쩔수 없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사람들이 부랴부랴 출근했다가는 점심때가 되면 몇명씩 나와 퇴근했고 오후에는 다시 출근했다가 해질녘이면 또 점심때처럼 퇴근했다. 한편 “앉아버티기”를 하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삼복염천에 물 한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여기저기를 뛰여 다니지도 못하면서 꼼짝 않고 앉아있자고 하니 그것도 고된 노릇이였다. 때로는 졸음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눈앞이 새까맣게 되면서 현훈증도 일군 했다. 내가 혹시 잘못 선택하지나 않았는가. 어느 정도 후회되기도 했다. 3일째 되던 날 그날도 가끔씩 나를 얼핏 내려다 보군 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여전히 나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오늘까지만 견지하다가 여전히 가망이 없으면 다음날부터는 포기하리라 작심했다. 그러던 오전 퇴근시간이 되자 낡은 군복을 입은 한 40대 남성이 문으로 나오더니 나를 보면서 곧바로 대문을 나서려다가 다시 나한테로 다가오는것이였다. “얘, 어디에서 온 애인데 매일 여기에서 앉아있는냐? 밥 빌어먹으러 다니는 애는 아닌것 같구…” “맞아요 아저씨, 전 비렁뱅이가 아니예요. 전 일자리를 얻으려고 찾아왔어요.” “뭐 일자리? 너 죄꼬만 놈이 무슨 일을 할수 있겠다고 이러는거냐?” “죄꼬맣다니요?! 전 지금 17살인데요. 얼마든지 일할수 있어요. 집에서도 매일 김매고 소꼴 베고 또 가마니도 짜군 했는데요.” “17살?! 아직 성인도 안되는 놈이 일자리 찾겠다니 안된다. 만 18살 이하한테는 국가에서 일자리를 배치해 주지 않는단다. 그러니 집에 돌아가 김도 매고 가마니도 짜면서 몇년 더 기다려야겠구나.” “싫어요. 이젠 농촌일엔 신물이 나요. 진짜 이젠 농촌일이라면 지긋지긋해나요.”나의 말에 그 남성분의 얼굴은 어딘가 심각해지는 모습이였다.“농촌이 지긋지긋해? 너 정치적으로 아주 락후한 애로구나. 죄꼬만 놈이 농촌을 꺼리다니…”순간 나는 하마트면 “아차”하고 소리를 지를번 했다. 높은 간부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3일간의 노력이 그 한마디로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고 한탄했다. 어린 생각에도 나의 실수를 알아챘기 때문이였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 남성분은 “나를 따라 들어오너라”라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나의 가정과 나 본인의 래력에 대해 물으면서 서류를 작성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도 알려주었다. “너 착하고 총명한 애 같은데 앞으로 농촌이 나쁘단 말을 하면 못쓴단다. 조심하거라.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2일후에 다시 와서 나를 찾으려므나.” 보아하니 그 남성분은 매우 좋은 사람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나는 그분한테 90도로 경례하고는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나오면서 돌아보니 그 남성분은 창문을 통해 내가 로동국 대문을 나가는것을 지켜 보는것 같았다.그날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돌아온 뒤 부모님한테 일절 함구무언했다. 어떻게 결정이 내려질지 몰라서였다. 2일후 내가 다시 로동국으로 찾아가자 그 남성분은 “너 정말 운이 좋은 애로구나”라고 하더니 나한테 쪽지를 적어주며 연길현 태양향공소합작사로 찾아가라고 했다.나는 기뻐라 하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서는 어머니한테 래일 돈벌러가니 이불짐을 싸달라고 했다. “어머니, 제가 직업을 찾았습니다. 공소합작사의 판매원이 됐어요.”내가 소리치며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더니 한동안이 지나서야 나의 얼굴을 다시 빤히 쳐다보며 “우리 막내 다 자랐구나. 어느새 키도 이 에미보다 많이 컸구말이다…”라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는것이였다. 어머니는 너무 기특해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던지 나의 이불짐을 싸주며 자꾸 눈물을 훔치였다. “에그에그, 네가 다 돈벌러가다니. 집을 떠나면 다 고생이네라. 부디 몸 조심하거라.” 그 이튿날 나는 룡정에서 기차를 타고 조양천에 도착했다. 조양천까지는 기차로 왔기에 힘들지 않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조양천으로부터는 이불짐을 메고 30리길을 걸어 태양향까지 가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첫직업을 찾게 되였다고 생각되니 힘든줄 몰랐다. 아니, 흥겨운 나머지 저도 몰래 휘파람까지 불었다. (장차 꼭 출세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리라. 그리고 이전에 으쓱하며 나를 깔보던 애들한테 내가 잘된 모습을 보여주리라.) (연재 1) (주: 본 작품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음으로 무단전재 재배포를 금합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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